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부흥회와 세미나 강론

“웨슬리의 성령체험과 속회”(서울연회 부흥단 2007년)

우순(愚巡) 2022. 3. 11. 02:31

 

웨슬리의 성령체험과 속회

 

서철 목사(상동교회)

 

들어가는 말

 

*감리교회는 웨슬리안의 종가집이고, 웨슬리안은 존 웨슬리의 성령체험을 중시한다

*존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감리교회의 모체인 속회를 부흥시킨다

* 교회는 희망이고, 예배는 축복이며, 속회는 영성이다

 

1. 속회의 회복 : (Doing)보다 됨(Being)을 추구하라

 

1) 함과 됨의 오해

*: 교회는 많은 일을 하려고 하고, 성도는 일의 중독에 빠져 있다

*: 일하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라

*오해: 믿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다는 오해로 행함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실제는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않기에 행하지 않는 것이다.

2) 함과 됨의 정도

* 함보다 됨이 중요하니 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라

* 진정한 됨은 진정한 함을 창출한다

* 진정한 됨은 진정한 성령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2. 웨슬리의 성령체험: 됨의 전환

1) 1738524 ()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 나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의 서문을 읽 고 있었다. 오후 9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 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나 같은 죄 인의 죄까지도 가져가 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 신을 얻게 되었다.

그 후에 나는 나를 악의에 차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 를(5:44) 위하여 온 갓 정성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이 얻은 내심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증거 했 다. 집에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유혹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소리를 치니 까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유혹들은 찾아오고 또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다 본즉 하나님은 그의 성소로부터 도움을 보내주셨다. 여 기서 나는 나의 현재상태와 나의 과거 상태가 서로 다름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은혜 아래 있고, 또한 율법에게 속하였으므로 비록 전력을 다해 싸웠는데도 패 한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항상 승리하는 자다.

 

2)173911()

웨스트리 홀 목사(웨슬리의 매부), 챨즈 킨친 목사, 인감 목사, 조지 휫필드 목사, 허칭 즈 목사, 내 동생 찰즈 목사가 60여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페터 래인에서 갖게 된 애찬 식에 참석했다. 세벽 3시 경이었다. 우리가 계속 갈급하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위에 매우 강하게 임재하셨다. 그 권능아래 많은 사람들은 넘쳐흐르는 기쁨으 로 울부짖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의 현존 앞에서 그 위엄과 놀라움에서 약간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한 목소리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를 불렀다.”

 

3)1739615 ()

저녁에 나는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으로 왑핑(Wapping) 집회에 갔다. 로마서 3:19에 관해 말씀 선포를 하려 했으나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를 몰랐다. 우리는 계속 찬송을 불 렀다. 나의 마음은 어딘지는 모르나 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많은 귀절 들로 가득 차 있었 다. 나는 하나님께 직접 지시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을 열었더니 히브리서 10:19-2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 체니라....”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을 통해서 가장 거룩한 성소'에 들어오라고 열심히 죄인들을 초청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큰 소리 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푹 쓰러져서 그 자리에서 몸에 힘이 빠진 상 태로 누워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몹시 떨고 진동을 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비탄에 젖 은 나머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일종의 격동적인 동작을 보였으므로 4-5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했다. 나는 많은 히스테리 환자와 간질병 환자들의 발작 증세를 보아 왔 으나,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증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즉시 하나님께 믿음이 약 한 자들이 마음에 상처받지 않도록 기도했다.

 

4)17391023()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부득이 킹스우드(Kingswood)에 있는 한 젊은 부인 (Sally Jones란 여인임)에게 다시 가야만 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테니 각자가 판단하 시기 바람) 그녀는 19-20세 정도 였으나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 워 있었는데, 2-3명이 그녀를 잡고 있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과 공포와 고뇌가 그녀의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온몸이 수천번 비틀어지는 것으로 보아 지옥의 개들이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을 나타내었다. 견딜수 없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돌처럼 굳어버린 두 눈은 울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단 말이예요, 저주를. 영원히 파멸되었어요. 엿세 전에만 왔어도 나를 도울 수 있었을텐데. 이젠 늦었어요. 이제 나는 마귀 의 자식이예요. 나를 마귀에게 주어 버렸어요. 나는 마귀의 것이니 마귀를 섬겨야해요. 마귀 와 함께 지옥에 가야해요. 나는 마귀의 것이고, 그를 섬겨야 해요. 그와 함께 지옥에 갈거예 요. 나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지도 않을 거예요. 나는 저주받아야만하고 받을거 예요. 그리고서 그녀는 악마에게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는 주님의 군사여, 일어나라, 일어나라”(챨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라는 찬송을 불 렀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잠자듯이 푹 쓰러졌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자 마자, 말할 수 없이 격렬하게 다시 소란을 피웠다. “돌 심장이여, 터져버려라....” 그리고 그녀는 두 눈을 천정 의 구석을 향해 고정시키고는, “, 그가 저기 있어요. 좋은 악마여, 와서 나를 데리고 가렴. 네놈이 나의 골통을 부셔버리겠다고 했잖아. 와서, 빨리 하란 말이야. 난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이 될것이란 말이야. 나를 데리고 가다오.”

우리는 다시 그녀에게로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녀는 전처럼 또 한번 푹 쓰러졌 다. 그런데 또 다른 여인(Betty Somers로 판명됨)이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9시 경 내동생 찰스가 왔다. 우리는 함께 11시까지 계속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첫번째 여인과 두번째 여인의 영혼속에 한순간 평화의 말씀을 주시니, 그들 두 여인은 원수 와 복수자(44:16)를 잠잠케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였다.

 

3. 웨슬리의 성령신학

 

1) 웨슬리의 전환점 : 1729년과 1738년의 변증법적 승화

*1729년의 신성클럽은 함의 거룩함

*1738년의 성령체험은 됨의 거룩함

*1729년은 시작으로서의 의미, 1738년은 완성으로의 의미

*1738년의 성령체험이 1729년의 경건을 완성했다

2) 교회사적 전환점 :

* 루터: 믿음의 대상인 예수의 십자가 강조(성자신학)

* 칼빈: 믿음의 주체인 하나님의 예정 강조(성부신학)

* 웨슬리: 믿음의 확증인 성령의 체험 강조(성령신학)

3) 웨슬리의 성령신학

* 성령체험 : 구원의 확증 -칭의의 은총

* 성령세례 : 구원의 표적 -사역의 축복

* 성령충만 : 구원의 완성 -성화의 성취

 

4. 성령과 성경의 증언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증언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됩니다. 창조신앙의 성령사역과 신앙고백의 성령사역 그리고 묵시사상의 성령사역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는 현장목회자로서 복음을 전도할 때 이 세 가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성경입니다. 또한 우리 개신교 신학의 출발점은 Sola Fide! Sola Gratia! Soli Deo Gloria!와 함께 Sola Scriptura!를 내세움으로 철저하게 성경중심위에 세워졌습니다.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루터와 깔뱅과 함께 성경중심의 교회를 펼쳐 나갔습니다. 제 소견에는 루터는 성경을 발견했고 깔뱅은 성경을 해석했으며 웨슬리는 성경을 실천함으로 삼겹 줄처럼 개신교신학의 틀거리를 완성했다고 봅니다.

 

 

1) .창조의 영

 

창조신앙의 성령사역은 말 그대로 성령께서 창조역사의 성취자시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영입니다. 성경의 현관에 들어가는 문은 모세 오경이며, 그 문을 여는 마스터 키는 창조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은 기독교를 여는 마스터 키입니다. 창조이야기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서 창조 신화나 창조설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저는 소박하게 창조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허구의 신화가 아니고 의미의 설화도 아닌 사실과 섭리의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전 믿어집니다. 목사의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처럼 하나님은 높은데 계신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절대타자이신 그 분 앞에서 말씀을 통한 계시를 통해서만 그 분을 알 수 있기에. 신학의 제일 큰 주제는 삼위일체 신앙고백입니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출발점입니다. 그 창조신앙의 첫 머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ex nihilio) ‘BARA(창조)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중의 한 분이신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덮고 있던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과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과의 오묘한 관계를 만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늘 같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라는 뜻으로 "Tohu wa bohu"(히브리어의 영어식 음역)라고 합니다. "Tohu(혼돈)+wa(그리고)+bohu(공허)"는 늘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혼돈은 구약성경에서 광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광야의 개념을 가지고 있고 광야 자체입니다. 신명기 32:10절과 시편 10740절에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32:1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107:40)"

 

혼돈은 이처럼 광야나 황야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어짐으로 출애굽의 광야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혼돈의 땅은 출애굽의 광야의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살 길을 잃어버린 채 신음하는 도시의 그늘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혼돈의 땅은 그래서 방황의 땅입니다. 혼돈은 떠나온 애굽에 대한 후회와 찾아갈 가나안에 대한 불안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땅입니다. 이 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무너지고 쓰러지게 됩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향하여 불편하게 되며 다시 우상숭배에로 도망갑니다.

 

혹자는 이 말씀에서 나오는 혼돈과 공허를 바벨론 신화에서 찾기도 합니다. 혼돈을 뜻하는 tohu에서 유래한 혼돈의 바다 곧 원시바다를 뜻하는 tehom을 바벨론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용 tiamat와 연결시키고, 공허인 bohu를 페니키아의 모신 baau에 연결시켜 신화적인 동질성을 찾아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논리적 연결이 부족하고 너무 인본주의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혼돈의 땅은 태초의 무정형의 땅을 표현하는 적확(的確)한 말이고, 광야의 실상과 도시의 방황을 설명해주는 적절한 단어입니다.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를 설명하는 히브리어 "bara"는 혼돈의 무정형 속에 하나님의 정형(定形)을 세우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말은 또한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세워가는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말속에서 생존조건을 상실하고 죽음의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삶의 아픈 상황을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낀다.

 

혼돈은 삶의 위협입니다. 혼돈은 방황입니다. 살 길의 상실입니다. 창조는 무와 유의 대립이기도 하지만 혼돈과 우주의 대립이며, 광야와 약속의 땅의 대립입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는 혼돈에 맞서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우주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선물하시고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하십니다. 도시의 방황자들에게 삶터와 일터를 선물하시고 쉼터를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이기셨습니다(4) 또한 빈들에서 방황하는 무리를 민망히 보시고 52어와 72어의 표적을 나타내시어 5000명과 4000명을 먹이셨습니다.(마가복음6장과 8). 예수님은 귀신들려 광야로 내 몰리던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8: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님은 광야의 치유자였습니다. 한마디로 혼돈의 땅은 광야요 귀신들린 사람들의 거처였습니다. 거기에는 방황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혼돈의 땅에 에덴동산을 세우셨고, 예수님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며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혼돈의 땅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혼돈의 땅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태초의 혼돈과 같이 형태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광야와 같이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얻지 못한 채 마라의 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의 경쟁 속에서 패하고 밀려나 생존의 조건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되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전도란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사건이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내일을 열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복음전도는 철저하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지나면서 방황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성령님의 운행을 겸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운행은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하나님의 신 성령님이 운행하셨고, 예수님은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운행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 3211절에 나오는 독수리의 습관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32:11)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들을 훈련시켜 날게 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만든 후, 그 위에 너풀거리며 새끼들을 받아서 날개 위에 업습니다. 운행이라는 메라헤페트는 독수리가 새끼를 날게 하려는 사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독수리의 날개 짓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명기32:9-12)

 

우리는 신명기에서 독수리의 날개 짓에 비유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야곱의 자식들을 독수리가 새끼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듯이 황무지인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 창조신앙의 핵심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운행하신 성령님은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혼돈과 공허와 흑임의 땅을 껴안고 계십니다. 물리적으로 물질은 자기보다 큰 물체 안에서는 오직 한 곳에만 존재하지만 자기보다 작은 물체 안에서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보다 크신 분이시기에 모든 세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시며 사랑의 눈으로 껴안고 계십니다. 전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껴안고 창조를 일으키려는 깊은 애정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창조신앙의 성령이해는 에스겔서 47장의 성전의 생수와 요한복음 4장의 해갈의 은혜를 거쳐 요한복음 7장과 사도행전 2장의 하나님의 선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하게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에덴동산의 삶을 회복시키는 창조사건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2) 고백의 영

 

신앙고백의 성령사역은 구원론의 완성입니다. 성령님은 고백의 영이십니다. 전도란 영혼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영혼구원은 신앙고백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두고 교리적인 뉘앙스가 다릅니다. 예정론자들은 예정된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믿음론자들은 믿는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카톨릭의 행함론자들은 행하는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또는 고백한자가 행동한다가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진부한 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아주 소박하게 저의 작은 소견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개신교의 삼대 지류인 루터파와 깔뱅파와 우리 웨슬리파의 구원론은 가각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행득의의 구원론이 비성경적이라는 판단아래 루터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구원론을 제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깔뱅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미리 정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고백함으로 얻는 구원이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내 것이 됨을 강조하였습니다. 루터는 고백을 인간의 믿음에 의한 것으로 보았지만, 깔뱅은 고백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고백을 성령체험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로마서 816절과 고린도 전서 123절을 즐겨 인용했습니다.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확신을 심어 주시며, 우리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주로 고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웨슬리 자신도 성령체험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진 복음적 회심을 하고나서야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복음전도의 사역자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비겁했던 제자들, 부인하고 도망가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는 강력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술에 취한 베드로의 설교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2:38>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년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구원론은 성자구원론이라면, 깔뱅의 구원론은 성부 구원론이고, 웨슬리의 구원론은 성령구원론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예에서 고백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성서비평학적 측면에서 마태공동체의 신학을 한편으로 접어두고 목회자의 작은 묵상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구원을 위한 고백은 마태복음 16장의 사건일까요? 그리고 그 고백은 이미 예정된 자였기에 고백한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예수를 믿은 고백이었을까요? 만약 16장이 고백이었다면 베드로의 배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성령체험 후에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오순절 사건은 단순한 구원의 확증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었을까요? 많은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제 소견에는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구원을 얻는 다고 확신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님은 은사론이나 성화론의 입장에서만 다루어질 것이 아니라 구원론의 본질파악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결단의 영

 

묵시사상의 성령사역은 종말론적 결단입니다. 성령님은 결단의 영입니다. 묵시사상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희망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듯이 희망은 삼위일체론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입니다. 신앙이란 희망의 사건입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이며, 인생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의 성소이고, 인생의 역전극을 펼쳐주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희망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희망을 넘어 소망을 선포합니다. 단순한 바램의 희망보다 더 강력한 용어가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바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실상이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단순한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 믿음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사랑과 함께 소망은 영원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종말론적인 결정을 합니다.

 

묵시문학의 배경이 되는 소아시아의 박해상황에서도 출애굽 때처럼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또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는 배교와 배신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밀고자도 나왔습니다.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매일 가라사대로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돌 판에 새겨 와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고 표적을 행하셔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죽으면서 외쳐도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알아듣게 됩니다. 종말론적 상황아래에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단할 수 있습니다. 듣는 자가 깨닫고 깨닫는 자가 결단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듣게 하고 깨닫게 하고 결단하게 합니다.

 

 

4. 성령충만한 속회 운영안

 

1) 약속을 기다리라(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

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 기도에 힘쓰라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12)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1-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4:31)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8:15)

 

 

3) 회개하라(2:38)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 안수를 받으라

 

"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8:17)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19:6)

 

5) 말씀을 청종하라

"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10:44)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1:15)

 

6) 금식하라(13:2)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7) 믿음을 가지라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2)

 

 

 

나오는 말

 

속회의 부흥은 성령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속회는 감리교회의 자산이고, 웨슬리안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속회는 지극히 웨슬리신학적인 특징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 이는 단순히 뿌리 찾기 노력이 아니라 시대상의 흐름과도 맞는 영성회복의 지름길이다. 많은 선교단체나 지역교회들이 웨슬리의 속회를 여러 가지 다양한 언어로 차용하거나 수정해서 사용하지만 그 본질은 웨슬리 신학의 핵심에 대한 자기화의 언어일 뿐이다. 즉 순, 목장, 다락방, 구역예배, 소그룹, , G12등 모든 작은 공동체들은 예외 없이 그 신앙적 뿌리를 웨슬리에게 둔다. 왜냐하면 모든 작은 공동체들은 웨슬리의 속회를 변형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속회의 부흥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체험이 강하게 일어나는 초대교회의 사도행전적인 교회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현대는 감성문화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말들로 현대를 정의합니다. 많은 세대를 구분하는 말들도 나왔습니다. 많은 유행어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현대를 감성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데 동의합니다. 지능지수보다 감성지수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흘러갑니다.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만 이런 현상이 시대의 흐름이고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거룩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그런 현상을 전도의 귀중한 삶의 자리로 고려해야 합니다. 훌러리안들의 성장학은 통계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통계학은 철저한 전도대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감성문화의 현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존 나이스비트는 메가트랜드라는 책에서 21세기의 특징가운데 한 가지가 감성문화의 종교적 현상인 천년왕국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천년왕국 운동은 순기능적으로는 기독교의 부흥을 역기능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다시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피터 드러커도 ‘The next society’라는 책에서 감성문화와 함께 기독교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을 애기합니다. 실제로 미국이나 호주 등에서 성령운동은 찬양사역과 함께 기독교 부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하비 콕스도 “Fire from the Heaven(1995. 번역제목 영성, 여성, 음악’)"에서 1965년도의 세속도시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성령의 불로 교회에 살아계신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후퇴를 이야기 했던 하비 콕스의 다음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나는 성령운동의 세계로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30~40년 전에 풍미했던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죽음의 이나 사회학자들이 주장한 종교의 쇠락과는 달리, 오히려 무언가 아주 다른 종요적 현상이 이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당시 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에 의해 교회와 종교에 관한 냉소적인 학문적 진단이 한창일 무렵, 나는 그것들에 쉽사리 영향을 받는 비교적 젊은 학자였다. 나는 너무 빨리 그것들을 수용했고, 그에 따른 신학적 결과들이 무엇일까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볼 때, 교회와 종교의 부정적 미래에 대한 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그 같은 예언들은 분명 잘 못이었다.........<중략>.........우리는 일부 낙천적인 종교 관측가들의 주장처럼 새로운 성령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새롭게 갱신된 종교적 활력의 시대, 온 세계적으로 밀려오는 또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각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 하비 콕스, ‘영성, 음악, 여성유지황 역, 19-20>

 

사람들은 18세기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서 시작한 인본주의적 사고가 19세기의 이성과 20세기의 과학을 거치면서 전쟁과 환경파괴를 통하여 인간에게 깊은 절망과 불안과 공포를 준 데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젠 이성적인 논리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하게 감성적인 초월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 시대 사람들을 향한 전도는 성령체험을 통한 복음전도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