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레의 신학
제5장. 의인의 신생
1. 구원론의 특징과 구원의 순서
웨슬리는 흔히 이 구원을 현재의 구원에 국한시켜 의인과 성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에 그의 강조점을 두어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웨슬레는 구원을 위한 은혜의 역사를 시간상에서 볼 때에 이는 선행적 은혜에서, 깨우치는 은혜로 그리고 의롭게 하는 은혜로 또 성결케 하는 은혜 그 다음에는 영화롭게 하는 은혜로 연속되면서 역사한다고 보았다.
구원의 단계를 죄문제와 연결시켜 이해할 때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행적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선행적 은총 아래 있는 실존적인 인간은 원죄의 부패성만을 지니고 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이 실존적 인간은 자범죄를 짓게 된다. 2)여기에 자범죄로 인간 죄책은 의인에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3)그리고 누적된 죄의 부패성은 성화의 과정에서 씻김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웨슬레는 성화가 신생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부분적인 씻음) 온전한 성화(온전히 씻음)로 그 성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영화로 완결된다고 보았다. 4)이 영화의 사건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에서도 해방을 받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은 현재의 구원에 있었다.
2. 의인
의인은 곧 죄책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죄인이 실제로 의로와지는 일로 신생과는 구분된다. 의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은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 또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율법적인 회개요, 두 번째는 복음적인 회개이다. 전자는 그저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요, 후자는 깨달은 나머지 모든 죄에서 거룩한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웨슬레가 올더스케이트 체험을 하기 전에 이해했던 믿음이요, 또 하나는 그 이후에 이해한 믿음이다. 웨슬레는 이 믿음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한 신뢰와 신임에 두었다. 지적 동의로 보았던 믿음의 그 본질이 신뢰로 변한 것은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신생과 그의 동시사건
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는 사건으로 웨슬레는 신생과 양자를 말한다. 순서가 있다면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 의인이 신생에 앞설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의롭게 하시며, 동시에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면 신생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외적 관계에서 지금까지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올바른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생은 우리 인간의 속 사람이 변하여 죄인이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의인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이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신생을 때로는 중생이라고 부른다. 또 이 신생은 성화의 과정에서 볼 때는 성화의 시작이다. 위의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때 양자가 되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곧 사람이 죄에서 용서함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았으니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자녀의 사귐으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 것이다. 또 이를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 ‘화목’이라고 부를 수 있다.
4. 신생의 표적
신생의 표적으로서 웨슬레는 그의 설교 “신생의 표적”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들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믿는 교리들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확신이다. 이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는 힘과 평안이다. 이 힘은 죄를 이기는 힘, 곧 범죄치 않게 하는 힘이다. 평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타나심으로 오는 평안이다. 소망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확신이다. 이 소망에서 솟아나는 열매, 곧 결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믿음의 확신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그리고 장래에 대한 영광의 소망이다. 신생의 표적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생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준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성도는 이 사랑으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준수하게 된다.
제6장.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1. 성화관의 일반적 특징
첫째로, 그 당시의 모라비안파의 극단적인 것을 지양하는 개념 곧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이다. 그 당시 모라비안 교도는 사람은 거듭나는 순간에 아주 완전히 성화되어 더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웨슬레는 이에 반대하여 우리의 신앙은 사람이 출생 후 성장하는 것과 같이 거듭난 후에도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선악에서나 믿음에서나 또는 성결에 있어서 모두 단계가 있다고 보았고,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적인 죄가 남아 있다고 보는 데 기인한다. 둘째는,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은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있다. 셋째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순간에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여 결코 인간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사람과 더불어 역사하신다는 복음적협동설과 일치한다.
2. 성화의 단계
①초기의 성화: 사람이 거듭날 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웨슬레의 견해인데 이를 흔히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②온전한 성화: 웨슬레는 점진적인 성화에 순간적인 단계의 성화를 밀착시키는 데는 두 개의 순간적인 체험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초기의 성화요, 다른 하나는 그 후에 오는 또 하나의 순간적인 체험 곧 온전한 성화이다. 전자를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은 순간적인 체험이라고 한다면, 후자 즉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다. 이 체험을 웨슬레는 “제2의 축복”, “두번째 변화”, “온전한 구원”, “기독교자 완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본질을 “온전한 사랑”, “혹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웨슬레에 의하면 이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성화의 체험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성도로써 승리할 때까지 계속 전진하여야 한다.
3. 기독자 완전
이처럼 신자의 생활이 보다 높은 정도에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 웨슬레는 말년에 이르러 성결의 은혜를 종종 “기독자 완전”이라고 표현했다.
①이것은 종교의 진수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의 설교의 관심이 신자로 하여금 성결의 은혜를 받도록 하려는 데 집약되어 있었다. 기독자 완전은 성별, 온전한 성화, 그리고 온전한 사랑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웨슬레는 이것을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완전이라고 주장했다.
②이것은 동기의 완전이지 절대적 완전이 아니다.
기독자 완전이라고 하여 인간이 그의 무지나 실수 등의 제약성을 탈피하여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것은 아니다. 제약성을 벗어나는 자유에 대하여는 영화의 순간으로 미룸으로써 그도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견해를 같이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이런 제약성을 죄악시한 것도 아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제약성은 완전의 상태에서 인간을 후퇴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완전 상태의 유지란 그것의 획득보다 더욱 어렵다고 웨슬레는 말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요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 사랑은 흠이 없는 순수성을 간직하나 동시에 성장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기독자 완전(성결)은 질에서 완전한 것이다. 또한 “사랑”이 그렇듯이 이 성결은 언제나 윤리적인 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너와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결의 은혜를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다이나믹한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결의 은혜에서 말하는 죄 문제의 해결이나 봉사의 능력이 증가되는 적극적인 결과도 분리하여 따로 생각하거나, 물건처럼 생각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된 한 인격의 삶의 입장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환언하여,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은 생활에서의 성결이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하여 주어지고 일어나는 사랑의 생활인 것이다.
③이것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웨슬레는 죄를 이중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와 알려진 것이나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간에 하나님의 법을 무의식 중에 범하는 죄를 구분하여 다루었다. 그런데 웨슬레에 의하면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지닌 연약성으로 인하여 살아가노라면 무의식적으로 실수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법을 범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연약성에서 기인된 죄는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죄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성결한 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순간 순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혈을 항상 의지하는 신자는 계속하여 그 죄를 씻음받고 있으며, 따라서 주 앞에서 정죄됨이 없이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주를 받드는 것이다.
4. 기독자 완전의 현대적 의의
웨슬레는 죄의 깊이를 보는 동시에 그보다는 더욱 깊은 구속의 은총을 투시함으로써 신자에게 소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바로 값비싼 은총을 재천명한 것이다. 더우기 그 은총의 역사를 미래에 남겨 놓고 체념하는 듯한 종교 개혁자들에 비하여 웨슬레는 보다 실존족인 관점에서 현재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봄으로 은총의 낙관론을 천명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성화론에 나타난 웨슬레의 신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인간의 무능성에서보다는 능력에서,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해하고 있으므로 은총의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웨슬레의 강조는 불안한 미래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 승리자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안과 공포로 비관에 잠긴 인간을 향한 복음인 것이다.
제7장. 성령의 증거와 우리 영의 증거 -확신의 교리-
로마 가톨릭은 이 교리를 성례전과 연결시킴으로써 희미하게 만들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확신의 객관성을 잃게 하였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이라는 교리에 예속시킴으로써 추상화하여 이 교리의 활력을 잃게 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이를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에서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설명함으로써 성서의 가르침을 재천명하였다고 본다. 곧 성령의 증거로써 이 교리를 전개하였다. 웨슬레는 성령의 증거의 역사를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 그리고 성령의 우리 영과의 공동증거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1. 성령의 직접 증거-내적 인상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강하게 주는 내적 느낌이다. 웨슬레는 이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성서의 진리로써 분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양심에 의해서도 자명한 것이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영이 초자연적으로 교통하시는 신적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증거는 사람이 중생할 때, 평생에 걸쳐 단 한 번 순간적으로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신자 안에 내재하는 한, 이는 지속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우리 신앙 생활의 성장과 병행한다. 이러한 성령의 직접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 곧 성령의 간접증거에 선행한다고 믿었다.
2. 성령의 간접증거-우리 영의 증거
웨슬레는 이를 때로는 우리의 영의 증거 또는 선한 양심의 증거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웨슬레가 말하는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 두 가지의 일치와 그에 대한 지각을 의미한다. 곧 성령의 직접증거에 호응하는 사람의 인지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레는 이 선한 양심의 증거를 성령의 간접증거와 동일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 선한 양심의 증거가 성령의 직접증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 하고 있다. 이 선한 양심의 증거는 성서가 묘사하는 신자의 표적에 기초하여 나도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3. 영의 분별 - 공동증거
웨슬레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증거와 우리 영의 공동적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곧 웨슬레에 의하면 신자가 의식하는 내적 인상, 곧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선한 양심의 증거에 의하여 일치를 보여야 한다. 누구든지 성령의 직접증거 없이 성령의 열매가 있다는 자기 자신의 추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것은 우리가 범죄할 때는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한 번 성령의 증거가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일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주 안에서 걸어가면 이 기쁨은 또다시 회복되며 증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그의 성숙기에 이르러 이 확신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구원은 이 확신이 없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제8장. 교회와 성례전
I. 교회의 본질과 표적
1. 하나님의 백성
웨슬레는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것과 같이 교회는 두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전체”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함께 연합된 회중”이다. 그러면 “영국교회”와 같은 교회는 무엇인가? 웨슬레에 의하면 이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 또는 지체이다. 이 우주적 교회의 더 작은 부분은 한 도시나 마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아주 좁은 의미에서는 연합하여 모인 두 셋의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이다. 웨슬레의 이런 견해는 사도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또한 당시의 영국 교회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2. 교회의 표적
웨슬레는 교회의 본질적인 표적 세 가지를 들었다. 윌리암스는 웨슬레가 말씀에 그 강조점을 크게 두었다고 보았다. 웨슬레는 교회의 구성 요소로서 “믿음”을 중요하게 들었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 믿음은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례전도 역시 말씀 선포와 연결이 되지 않는 때는 그 본래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대단히 중요하다. 웨슬레는 사도성의 계승을 수평선적인 인물의 연속, 곧 중단없이 이어진 감독의 계승에서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에서 찾았다. 다른 말로 표현해, 사도성은 계속을 교회 안에서의 사도적 증거의 계속에서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교회의 중요한 교리에 따라서 충실히 설교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선포하는 목사와 교사는 초대교회의 교사나 사도들과 계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II. 역사 속에서의 교회
1. 제도적 교회
웨슬레는 제도나 기구 같은 것을 교회 구성의 절대적인 요소로는 여기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웨슬레에 의하면 교회 제도는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이다. 성경에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경에 일정한 제도를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다양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라고 웨슬레는 믿었다. 웨슬레는 영국교회를 “잘 조직된 교회”라고 생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때에는 청교도들의 입장에 동감하거나, 또는 비국교도들의 예를 따를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영국 교회가 법과 제도 문제 등을 지나치게 중시할 때 거기에 반대하였으며,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가 본질적인 사명인 전도활동에 지장을 받게 될 때에는 그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 예로써, 웨슬레는 교회가 정한 교구의 구애를 받지 않고 전도하였다. 노천설교도 하였다. 즉흥기도도 하였다. 신도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감독의 안수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설교할 권한을 주었다. 평신도 설교자를 세웠다. 이런 것들이 당시의 영국 교회 제도와 법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나 웨슬레는 그대로 밀고 나가 영국 교회를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 타락한 교회와 ‘성결의 누룩’
웨슬레에 의하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는”모임에 있는 신자들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런 표적이 결여되어 있는 곳은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런 표적을 형식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기능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말씀 선포나 성례전의 집행이 좀 정당치 못하게 시행된다 하여도, 그곳에 순수한 성령의 임재가 있다면 여전히 교회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 있는 가시적 교회는 타락한 교회와 참 교회 사이에 긴장을 지니고 존재하고 있다. 모든 신자는 저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객관적인 성결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임재, 즉 그 객관적 성결이 신자들의 삶 속에서 호응되는 주관적 성결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교회는 진정으로 거룩한 교회가 아니다. 웨슬레는 이 사명이 바로 당시의 “메소디스트”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가 “메소디스트”를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메소디스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한 삶의 훈육 아래 큰 교회 안에서 성결의 누룩의 역할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자의로 모인 그룹인 것이다. 이 에크레시오레는 교회 안에서의 누룩으로서, 대내적으로는 교회를 부흥케 하고 대외적으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 생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III. 교직 제도와 성례전
1. 교직제도
웨슬레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조직이나 제도가 모두 복음을 가장 능률적으로 넓게 전파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슬레는 두 종류의 교직자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설교하거나 전도하는 책임이 있는 교직자이고 둘째는 교회를 다스리고 성례전과 안수를 집행하는 교직자이다. 이 메소디스트의 전도사는 특별한 직무로서 목사나 교사같은 정상적인 직무와는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성서에 보면 교회에서 필요한 때에는 즉흥적으로 예언자를 불러일으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레가 후년에 목사나 감독을 안수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첫째로, 성서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므로 자기도 안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는 불가피한 필요성에 응한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널리 자유롭게 전파하는 것을 최상의 사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 순종하는 뜻에서 이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역자의 서열에 있어서 웨슬레는 감독과 장로, 또는 사제와 집사이다. 베이커는 웨슬레가 이 셋을 그 본질에 있어서 두 서열로 이해했다고 믿었다. 즉 성례전과 안수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교역자(감독과 장로)와 그 아래 서열의 교역자(집사)이다. 웨슬레는 교회 안에 단지 한 서열이 있어 그로 하여금 설교도 하게 하고 성례전을 집행도 하게 하였다고는 믿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듯이 교직의 직분도 시대를 따라 다르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성만찬
웨슬레는 당시 모라비안파의 정숙주의를 경계하면서 은혜의 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웨슬레에 의하면, 은혜의 수단은 성만찬, 세례, 기도, 성서탐구, 그리고 금식, 애찬, 찬송, 예배 등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세례와 성만찬이 중요한 수단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받고자 하는 사람은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그 은혜를 기다릴 것을 권한다. 더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재림하실 때까지 이를 행하여 은혜를 기대할 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하여야 한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례전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표적과 인증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성례전을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믿음이나 행위의 표적으로 보려는 “기념설”의 입장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성만찬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적인 동시에, 은혜로 용서받은 인증으로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를 견고케 한다. 이 성만찬은 주님의 십자가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 찢겨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대속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며 주신 교훈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성만찬은 그의 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만찬은 그 뜻 곧 말씀을 가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곧 가시적 설교이며, 행위의 케리그마이다.
2) 현재 은혜의 표적과 인증
더 나아가, 웨슬레는 성만찬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적이면서 또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의미하는 모든 은혜를 이 성만찬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련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와 단절시켜 이해할 수없기 때문이다.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은 현재 구원에 대한 은혜의 역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표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지금”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이를 확증케 하는 인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웨슬레는 수찬자의 필요와 호응에 따라서 의롭게 하는 은혜 또는 성결케 하는 은혜가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다.
3)천국의 보증과 인증
웨슬레는 더 나아가 성만찬을 천국의 보증이라고 표현하였다. 웨슬레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믿었다. 즉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잔치를 기다리는 것이다.
4)성도의 교제의 인증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교제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의식을 가지고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게 된다.
3. 세례
1)세례의 정의와 의미
웨슬레는 예수께서 친히 실례를 보여주셨듯이, 세례란 모든 신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임하는 하나의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웨슬레에 의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대분부의 전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첫 번째 성례전으로서의 세례는 일반적 의미에서 “교회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말하자면 웨슬레는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그 공로와 은사가 세례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가 적용됨으로 원죄의 죄책에서 씻김을 받는다. 더 나아가 그는 말하기를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으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하며, 모든 생활이 성숙하게 자란다. 이런 혜택들은 세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2) 세례에 의한 중생이 뜻하는 것과 그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
웨슬레에게 있어 세례라는 것은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곧 세례는 세례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곧 중생과 세례받은 사람의 생애 전체 곧 성화의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산 관계를 통하여 성장하며 마침내는 완성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결국 웨슬레의 중심적인 관심과 강조는 세례가 갖는 이 발전적인 성격과 세례받은 사람이 그가 언제 세례를 받았든지간에 현재 여기에서의 책임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웨슬레는 성인의 세례에 관하여는 좀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유아세례는 “하나의 의롭게 하고 중새하게 하는 성례전”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세례받았다고 해서 모두 거듭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신생의 사건이 세례와 동시에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회개하고 믿어야만 한다. 웨슬레는 가톨릭적 요소(유아의 세례에 의한 중생)와 복음적 이해(성인의 복음적 회심을 위한 산 믿음의 강조)의 양자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유아세례: 믿음과 세례의 관계
유아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야 믿음이 가능한 것이다. 웨슬레에 있어서 수 세자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세례 이후의 믿음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받은 유아는 이런 의미에서 곧 수세 후에 따르는 믿음에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례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주로 세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세례받은 유아에게 요구되는 신앙이라는 전제 조건을 웨슬레는 그 어린이 대신 그 유아를 세례받게 함으로 바치는 부모에게서 찾았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이다. 비록 그 부모의 믿음이 유아를 대신한 대리적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부모의 믿음은 특수한 방법으로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의 일면은 할례와 세례의 균형관계에서부터 나왔다. 웨슬레는 세례를 할례 대신 주어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솔선하여 이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세례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규례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 유아 세례가 단순한 인간들에 의한 헌아식이라는 뜻만으로는 해석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4)웨슬레의 구원론적 구조에서 본 세례관
웨슬레에게 있어서 세례란 사건(중생을 낳게 하는) 이요, 또는 과정(새로운 삶의 성장이 강조된 -성화)으로 이해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이같이 세례는 기독자 생활 전체, 곧 의인, 중생, 성결을 망라한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관심은 후자, 곧 세례에 있어서 의 과정의 차원에 있었다. 웨슬레에 있어서 세례는 신자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그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례를 이해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성결에 대한 웨슬레의 주관 관심이 세례관에는 올바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 세례관을 “복음적 신인협동설”로 표현되는 그의 신학적 구조에 밀접하게 평형시키면서 전개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웨슬레 신학의 전체적인 체계에 가장 일관성 있는 것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연합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찾는 데 있다. 그의 “세례에 의한 중생”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변화”이다. 곧 유아(혹은 성인)들이 은혜의 왕국, 곧 교회 안으로 옮겨지는 관계의 변화를 말한다. 이것은 세례에 의한 거듭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세례로 말미암은 중생은, “그리스도 교회의 몸 안에 접붙여졌다. 곧 하나님의 양자 삼으심과 은혜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혜의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신자들의 몸으로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고교회적 교회관에서 볼 때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편입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례가 베풀어지는 바로 그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약속되어진 곳이요,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총)을 받으며 세례를 받은 신자가 성장하여 마침내는 영혼의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의미를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될 때, 세례란 교회가 중요하게 합동적으로 시행하는 행위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례는 교회가 어떤 사람을 구별하여 세례받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은혜의 왕국 안으로 편입시켜, 객관적으로 이미 주어진 바 된 구속의 복음(이미 주어진 선재은혜 그리고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의인의 은혜와 성결의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거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세례는 “행위의 케리그마” 또는 “복음의 성례전”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세례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은 세례(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만 세례에서 선포되고 약속된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받으며, 그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웨슬레 자신이 이해했던 것처럼 만약 세례받음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의미에서 거듭나 내적 변화와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낮은 의미에서 거듭나 겨우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세례받은 사람의 믿음의 정도에 상관되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록
6-1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의 형성과정과 주요 저술
1. 교리로 형성되기까지
웨슬레는 1728년과 1729년 사이에 기독자 완전의 교리 발전에 영향을 준 책으로 세 저자의 저서들을 들고 있다. 그것은 테일러의 [거룩하게 살고 거룩하게 죽는 규율과 훈련] 윌리암 로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로의 부름]이다. 또한 성서가 웨슬레의 생애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의 신앙체험이 이 교리 형성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 교리의 내용에 있어 1733년에 이미 기독자 완전이라는 이상이 정해졌다. 이 지적 회심에 뒤이어 1738년 5월 24일에 영적인 회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이야말로 그의 지적 회심을 확인하는 산 증거였다. 이 체험을 통하여 웨슬레는 처음으로 구원이 자기 억제나 선행의 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로써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에 웨슬레의 강조점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이러한 체험적인 깨달음이 마침내는 웨슬레의 기독자 완전의 교리 구성에, 특히 그 달성 방법에 있어 새로운 견해를 가져다 주었다. 웨슬레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마음에 뜨거운 체험을 하였다고 해서, 이것이 그가 기대해 왔었던 모든 것이 그때 다 이루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웨슬레에 있어서 기독자 완전이라는 목표는 아직도 저 앞에 있는 것이었다.
II. 기독자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주요한 저술
이 교리의 주요한 자료는 웨슬레가 여러 번 개정하여 출판한 바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이 밖의 자료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 있다. [찬송가와 성시 제2권의 서문] 이 서문에서 웨슬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우리 영혼의 구원은 마음의 형상을 새롭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서술하였으며, “구원이란 신자들의 마음이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로워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완전”, “완전에 대하여”이라는 설교]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지식에 있어서의 완전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무지나 과오로부터, 혹은 둔감한 이해와 같은 육체적 제한성으로부터의 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웨슬레는 명백히 피력하였다. 또한 “인간은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메소디스트의 특성]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완전히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였다. [회의 의사록] 1744년 제1회 회의에서 “성화란 의와 성결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수상] 완전한 자라 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그가 땅 위에 살고 있는 동안은 과오를 범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수상 제2편] “믿음의 법”이란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려고 율법의 마지막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라고 웨슬레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함을 한꺼번에 주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불결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1)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이 세상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완전이다. 죄가 없는 완전이 아니다. 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완전한 사랑”을 뜻하며, 은총 가운데서 전보다는 “더욱 빨리”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3)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순간적이며 또한 점진적이다. 이 완전에서 타락할 수도 있으니 타락되었다면 다시 회복될 수도 있다. 웨슬레는 완전의 본질을 요약하였다. 1)그것은 온전한 성별이다. 곧 의도의 순수성이요, 온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2)그것은 온전한 성화이다. 3)그것은 완전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단상]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점진적인 것이요 또한 순간적인 것이다. [성서적 구원의 길 이라는 설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처럼, 또한 믿음으로 성화된다.
부록 8-1. 웨슬레 신학과 선교
I.
웨슬레는 칼빈과 달리 선교의 현장에서 그 선교를 뒷받침하는 신학을 형성한 신학자였으며 동시에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II.
웨슬레의 독특한 은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너희 속에서 역사하심으로써 비로소 너희도 역사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죄중에 사는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성령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에 근거해서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웨슬레는 주장한다. 웨슬레의 이같은 사상은 사도의 고백과 일치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바울은 자기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또한 은혜와 더불어 역사하는 협동설을 말하고 있다.
III.
오늘의 선교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웨슬레의 은총론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선교, 특히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협력의 가능성과 책임의 여지를 인정한다. 둘째, 이같은 웨슬레의 사상은 기독교와 타계와의 대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타종교나 자연법 등은 중립적이 아니요, 은총의 보편적인 역사 가운데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웨슬레는 은총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선교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접근의 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과 세상과의 접촉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웨슬레의 이같은 사상은 교회선교에 대한 소망과 힘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세상도 성령의 역사 아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선교하는 데 큰 소망과 힘을 제공하고 된다. 이런 근거에서 웨슬레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비전을 가지고 전도에 헌신한 것을 볼 수 있다.
IV.
웨슬레는 이신득의를 강조한 개혁자들의 신학에다 그들이 등한히 다루었던 이신성화의 교리를 재발견하여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총이 값싼 은혜가 아니라, 실제로 생활을 변화시키는 값비싼 은혜를 천명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웨슬레는 또한 이 성화의 교리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죄 가운데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이 기독자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으로서 윤리적 결과가 아니다. 이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결합된 관계이다. 다른 말로 이는 동기애서의 완전 곧 의도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이런 연약성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완전도 어떤 고정적인 물체가 아니다. 순간 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성결상태는 계속 유지되며 성장된다. 완전한 크리스천도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실제로는 무의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히 성결한 신자라고 해도 그의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적인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매순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성화의 교리와 메시지는 기독교 윤리의 근간이 되는 동시에 선교적인 면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의 신학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본다.
웨슬리 당시 영국은 빈부의 격차로 혁명으로 치닫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피비린내나는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 웨슬레의 성화의 중심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하겠다. 이 사랑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따라서 웨슬레의 성화개념은 사회윤리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성화의 교리는 이같이 사회적인 개념과 아울러 사회갱신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구원론을 칭의에서 끝내지 않고 성화에까지 강조하므로 이같은 큰 변력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V
웨슬레의 신학과 선교는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한 올더스게이트 사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신학의 형성과 선교는 그에 앞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복음전도에는 열심히 있어야 한다. 이같은 전도는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생동적인 능력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부록A
웨슬레 신학과 성결교회-웨슬레의 신학적 유산-
1.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
그 신학배경을 웨슬레의 신학과 그의 전도 운동에서 찾고 있다. 웨슬레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결교회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음주의 신학과 호흡을 같이한다. 우리 성결교회는 넓게 말하면 개신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이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웨슬레 신학에 서 있는 것이다. 웨슬레 신학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원리를 18세기에 재천명하고, 그 원리를 신앙생활에 적응시켜 다시 해석 내지 시정한 신학인 것이다.
II. 성결교회의 신학과 사중복음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에 사중복음이 전도표제로서 성결교회 창립 당시부터 고조된 그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다. 심프손은 자유주적인 사회복음 운동에 반발하여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했다. 카우만과 길보른은 이 심프손의 부흥운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부흥사 심프손은 그의 부흥회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흥회 설교에서의 강조점이었던 것이지 그의 신학 체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1)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2)성화케 하는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3)치유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4)재림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사중복음은 기독교 교리 중에서 기독론적 구원론을 설교에서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은 기독교 교리를 전부 포괄하는 신학 체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도나 설교에서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전도표제”인 것이다.
III. 성결교회 신학의 특징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천명된 성서적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골자를 재강조하면서 그 교리를 당시 선교 상황과 신앙체험에 적응성을 지닌 산 신학으로 형성한 것이다. 웨슬레는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학파들이 강조해 온 여러 가지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웨슬레 신학은 아래의 여섯 가지 강조점으로 특징지울 수 있겠다. 1. 성서적인 기독교, 2. 만인을 위한 복음, 3. 은총만으로의 구원, 4. 모든 죄에서의 구원, 5. 체험을 강조하는 신학(성령의 증거) 6. 세계를 위한 교회. 이러한 강조점은 동시에 한국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특색이라 할 수 있다.
VI. 성서적 기독교(성서의 권위)
웨슬레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초대교회가 이해한 그대로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웨슬레는 신앙체험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성서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성서는 웨슬레 설교에 있어서 대법원의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웨슬레가 다른 서적들을 등한히 여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슬레는 성서는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오류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성서의 충족성을 믿었다. 더 나아가 성서는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복음선포에 있어서도 성서가 그 원천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서에 입각한 신학과 복음선포에 역점을 두어 온 것이 성결교회의 전통인 것이다.
V.만인을 위한 복음(이중예정론 반대)
실제문제에 대한 관심은 구원론을 중심으로 웨슬레의 신학을 형성케 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가 하여야 할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전도이었다. 웨슬레는 철저한 은혜의 신학자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강조하는 면으로는 웨슬레는 바울이나 칼빈 루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구속의 은혜가 어떻게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과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역사를 이중예정론과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신정에 따라 어떤 이는 구원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의 소재를 찾기 힘들다. 여기서 웨슬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은혜는 선행적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웨슬레는 만일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았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은혜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졌기에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다. 웨슬레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위안과 소망을 전했다. 따라서 그는 교회가 만인을 위한 복음을 전해야 할 특권과 아울러 책임을 가졌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특징과 강조가 바로 성결교회가 이어받은 유산이다.
VI. 은총만으로의 구원(중생)
웨슬레가 만인을 위한 복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만인이 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웨슬레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새로 태어나는 것, 곧 중생은 사람의 선행이나 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신념 때문에 웨슬레는 전도에 더욱 열정적이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전도를 강조하는 것은 웨슬레 운동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웨슬레에게 있어서의 교육이나 사회사업도 그 당시의 교회에 비하면 아주 열성적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전도”는 상대적인 강조이지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다.
VII. 모든 죄에서의 구원(성결)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로 타락한 인간을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주장하였다. 웨슬레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되 모든 죄에서부터 구원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님의 구속적 사랑의 깊이를 강좌였다. 이것은 성결 또는 성화에 대한 그의 신학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웨슬레는 중생을 성화의 시작이라고 한다. 중생에서 초기의 성화로서 시작된 성화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순간적인 체험을 하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온전한 성화이다. 성결교회에서는 이 체험을 흔히, 신자가 체험하는 성결의 은혜라 부른다. 웨슬레는 내재적 죄를 씻어주는 성결의 은혜는 온전한 성화(성결)의 단계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죄가 없다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온전히 요구하시는 수준이라고 보아, 그는 이를 그리스도의 완전이라고 불렀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온전한 성결을 오로지 죽음의 피안에서만 곧 영화에서만 기대되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구분하는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란 죄에서는 온전히 씻음을 받으나, 인간의 제한성과 연약성으로부터의 자유나 해방을 말하는 완전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이다. 교회의 전도사명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성결의 은혜로 이끈다는 웨슬레의 강조는 성결교회의 목회와 전도의 지침이 되고 있다. 성결교회는 성결을 성신의 세례로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 은혜를 받는 순간 봉사의 능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죄에서 정결하게 씻음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웨슬레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혁파 교회에서는 세례는 능력을 받는 체험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때 죄에서 정결함을 받는다는 소극적인 결과는 인지하지 않고 있다.
VIII. 체험을 강조하는 신학(성령의 증거)
웨슬레 운동과 신학은 성령의 증거를 강조하였다. 웨슬레는 로마서 8장 16절 말씀대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구속의 역사, 곧 신생, 성결의 역사를 하실 뿐 아니라 그에 대하여 확인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또한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웨슬레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가 선행됨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웨슬레는 이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 곧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성경말씀이나 우리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레는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와 직접적인 증거와의 공동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신비주의나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웨슬레는 신자에게 있어서 이 확신은 계속적인 것이라야 하나, 때로는 희미해지거나 중단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웨슬레의 “성령의 증거”의 교리는 성결교회에서 체험을 강조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IX. 세계 선교를 위한 교회
전도에 힘쓰며 전도를 교회의 주요한 표적이라고 보고 전도를 강조하는 웨슬레의 전통은 바로 성결교회가 그 창설시부터 강조해온 일이다. 웨슬레가 “메소디스트 단체”로 출발하였듯이 성결교회는 애당초 교회 설립을 의도하지 않고 단체로 전도를 시작했다. 교회의 조직과 제도는 선교를 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점차로 점차로 제정되어 마침내 하나의 교단이 된 것이다.
X. 요약 및 결론
1.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며 성서적 기독교를 주장한다. 2. 만인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강조한다. 3. 자유의지는 선행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타락한 자연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된다. 사람은 반드시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 4.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모든 죄에서 사람을 구원한다. 교인들을 성결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회와 전도의 대줄거리로 삼고 있다. 5. 성결교회는 구원의 신앙 체험을 강조한다. 웨슬레의 “성령의 증거”의 교리에 따라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또한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6. 교회는 전도하는 것이 교회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보편성과 신생, 확신 그리고 성결이 그 선교 사명의 중심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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