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칼빈과 웨슬리 비교
구원론 중심으로…
몇 달 전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선배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펼친 적이 있다. 과정사상에 근거를 둔 나의 의견과 칼빈의 예정론에 근거를 둔 선배의 의견은 서로의 합일점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었다. 나의 의견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고 악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배의 의견은 이 땅에서의 악과 고통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결국은 선한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가지의 예를 들면 200명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해서 전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 200명 중에는 불교 신자도 있을 것이며, 기독교 신자도 있을 것이고, 선하게 살기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악하게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왜 모두를 죽이셨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동시에 전지전능하시다면 선한 사람들을 살려주셔야 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선배는 인간이 공유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분이 바로 선과 악의 문제이며 인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논쟁의 결론은 맺지 못했다. 논쟁의 초반부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땅에서의 고통과 재앙의 문제가 핵심 과제였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구원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구원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지어진다는 주장과 인간의 행동의 의지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서로의 의견은 서로의 접근은 매우 어려웠다. 서로의 신학은 큰 차이가 있었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었다. 논쟁이 끝나고 4개월여가 지나고 지금 교회사 시간의 과제를 계기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슬리의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논쟁을 되 집어 보게 되었다. 칼빈과 웨슬리 두 사람의 신학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이며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정말 없는 것인가?
서론
기독교에서 구원은 제일 중요한 교리이다. 이제 이 구원에 있어서 신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 신학과 칼빈 신학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비교하고자 한다. 서로 대립되는 두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놓여 진 사망과 생명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웨슬리의 주장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론을 주장하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이다. 웨슬리 신학은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갖는다는 인본주의적 신학으로 오해를 하게 되고, 반면 칼빈의 예정론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버린 운명론을 따라야하는 것인지, 하나님은 불공평하시고, 만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구절들과는 모순이 되지는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과 웨슬리신학의 형성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고, 칼빈 신학과 웨슬리 신학의 중심이 되는 구원론을 비교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구원의 삶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칼빈의 구원론
칼빈은 고대 교부들 중 어거스틴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의지의 전적 부패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단지 악을 선택할 자유만 남아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창조적 행위로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의 자유로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물의 최고 또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 은총의 주권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손상되어 인간만의 노력으로는 완전한 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이를 깨닫도록 하나님께선 율법을 주셨다. 율법이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지가 무력함을 알게 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또 하나님의 은총은 선행적 은총이요, 불가항력적 은총이요, 예정적 은총이다. 이 같은 구원 사상은 칼빈에게 전승되어져서 칼빈의 신학사상에 주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칼빈의 구원론을 다루려면 칼빈의 5대 강령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이 5대 강령은 서로 밀접한 관계로 조화를 이룬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5대 강령의 첫째는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를 주장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으로만 가능하다는 신단독설을 주장한다. 두 번째는 무조건 선택 또는 절대 예정을 주장한다. 인간이 구원을 받고 멸망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멸망으로 선택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제한된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은 영생으로 선택 된 자들만의 구원을 예비하신 제한된 속죄를 주장한다. 네 번째 항거할 수 없는 은총을 믿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할 수 없는 것으로 믿는다. 다섯 번째 궁극적 구원 또는 무조건적 구원 보장을 믿는다.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고, 무조건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론
웨슬리의 사상가 신학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첫째로 손꼽을 것은 그의 가정에서의 영향이다. 그의 부모들은 원래 비 국교에서 영국 국교로 전향을 하였는데 웨슬리는 자연히 부모들로부터 그 신학사상을 흡수하였다. 특기할 것은 양친 모두가 칼빈의 예정론을 부정하였다.
웨슬리의 부모는 다 같이 만인구원설을 믿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속박하지 않는다고 믿었고, 웨슬리도 그의 신학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시절 그가 읽었던 세 권의 책이 그의 사상과 신앙, 인격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제레미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 중세기 수도사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또 하나는 윌리암 로우의 ‘그리스도의 완전론’이다. 두 번째로 중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웨슬리가 옥스퍼드로 가면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노드햄톤 대 부흥 운동사’를 읽게 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성령의 역사와 표적에 대하여 공감을 가지고 성공적인 부흥 운동의 요인을 삼았다고 볼 수 있으니 아우틀러 같은 이는 웨슬리가 이 책을 읽음으로 받은 충격은 올더스게잇의 체험에 못지않은 사건이었다라고까지 말한다.
웨슬리의 신학적 핵심은 구원론이다. 루터의 구원론이 의인화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웨슬리에게서는 의인화뿐 아니라. 성화의 구원론의 중심을,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성화가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의 과정을 구원의 질서 속에서 해석하였다. 그의 설교의 90% 이상이 구원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신학을 어느 정도 정리하자면 6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선재적 은총이다. 웨슬리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적 회복이 가능함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회개와 신앙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총 선재적 은총을 믿는다. 여기서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유의지는 자연적으로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에 의해 회복됨을 믿는다. 이를 가리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말한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의 제한적 속죄론을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하여 비판한다. 웨슬리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믿는다.
둘째로 회개이다. 웨슬리는 회개의 2가지 종류를 말한다.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이다. 전자가 율법의 교훈에 의해 죄에 대해 철저히 깨닫는 것이라면 후자는 깨달음의 결과로서 모든 죄에서 거룩한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기 전에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 번째로 믿음이다. 웨슬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올더스게잇 체험 이전에는 믿음을 지적 동의로 보았고 이성적 동의라고 생각했지만 올더스게잇 체험 이후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은총과 믿음으로 거듭나는 은총, 이 두 가지의 은총을 설명한다.
네 번째로 신자들의 범죄와 회개이다.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루터는 죽는 그 순간까지 완전 의인이 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웨슬리는 죽기 전에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완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죄가 신자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의 뿌리는 남아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고 근심시킨다. 웨슬리는 외적인 죄악은 안질 수 있지만 내적인 죄악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도 범한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로마서 7장을 주석하면서, 사도바울처럼 의로워진 신자도 육체와 영 사이에 갈등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칼빈이 성도들의 예정과 은총을 받아 절대로 타락하지 않는 견인 적 은혜가 있음을 강조하였지만 요한 웨슬리는 타락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요한 웨슬리는 정죄의식과 진노의식에서 회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내면적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날마다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죽어지는 것을 통해 성결과 은총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성화이다. 웨슬리는 의인화의 은총을 제 1의 축복이라 보았고, 성화는 또한 하나의 은총과 축복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의인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듯 성화도 믿음으로 출발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했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으로 되지만 마지막 구원, 혹은 온전한 구원과 풍성한 구원은 선행, 곧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해석한다. 루터의 의인화신학에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교도 영성운동은 순간적 성화, 곧 거듭나는 순간에 성화가 주어짐을 믿었으나 웨슬리는 순간적 성화가 성화의 출발점이지만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성화의 의미를 성령이 나의 실존 속에 충만히 임재 하여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시켜 주고, 내 속에 내주하여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을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적인 죄까지도 없는 상태를 향하여 전진하는 성결의 과정을 성화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성화를 기독자의 사랑의 행동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완전이다. 웨슬리는 완전을 온전한 인간성의 회복이요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죄의 뿌리까지 뽑히는 것뿐 아니라 내적인 죄까지도 근절된 상태라고 말한다. 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성화에까지 계속 성장하여 마침내 영화에로 연결된다. 여기서 영화란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신령한 몸의 모습이다.
칼빈과 알미니안주의 구원 비교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에서 웨슬리 자신이 그의 구원관을 알미니안적이라고 밝힌 일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와 칼빈을 직접 비교하기 전에 먼저 알미니우스와 칼빈의 5대 강령을 비교해본 후 직접비교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먼저 칼빈주의는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으로 가능하다고 보는데, 이것은 구원하실려니까 구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인간 자신의 의지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이 주신 선행적 은총을 활용하여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칼빈주의는 무조건 선택 또는 절대 예정으로 영생과 유기가 나눠져 유기되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 자신이 예지하신대로 믿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속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칼빈주의는 제한된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은 영생으로 선택된 자들만의 구원을 예비하신 제한된 속죄를 주장한다. 이것은 구원 받는 사람들만을 위해 제한된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 속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하신 것과 그를 믿는 자에게 누구든지 구원에 참여시켜 주신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로 칼빈주의는 항거할 수 없는 은총을 믿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 할 수 없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께서 항거 받을 수 있는 은총을 믿는다. 저항을 받고 끝내 거절될 수도 있다.
다섯 버째로 칼빈주의는 궁극적 구원 또는 무조건적 구원 보장을 믿는다.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고, 무조건 구원이 보장된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영원 구원 보장을 믿는다. 신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들이 직면하게 될 모든 시험과 유혹을 감당할 수 있는 풍성한 은총과 능력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은혜와 능력을 경솔히 함으로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에는 멸망 받을 수 있다.
칼빈과 웨슬리 공통점
웨슬리와 칼빈은 모두 루터의 신앙의인화를 받아들임을 알 수 있다. 양자는 모두 선행에 의한 의인화를 거부한다.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임에 의해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우리가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한다. 웨슬리와 칼빈의 칭의론은 모두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루터의 신앙의인화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 사상인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웨슬리 의 성화의 출발점은 루터의 의인화 사상이다. 그리고 웨슬리의 구원론의 중심은 성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성화의 조건도 믿음임을 강조한다. 성화는 거듭난 영혼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하여 성화하는 은총이다. 즉, 성화는 의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칼빈도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을 말하고, 이것은 성도들의 성화의 차원에서 율법의 역할을 주장한다. 웨슬리와 칼빈은 산상수훈 등에 나타난 율법을 성도들의 성화 생활의 좋은 교훈과 채찍질로서 생각함을 알 수 있다. 구원론의 중심이 성화론임을 알 수 있다.
칼빈과 웨슬리의 차이
웨슬리는 칼빈의 무조건적 예정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믿는가 혹은 안 믿는가라는 믿음의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웨슬리는 예정된 성도는 하나님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칼빈의 견인의 은총을 비판하면서, 성라할 지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선행적 은총이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것 전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선행적 은총에 의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만인 구원론이다.
루터와 칼빈은 죽기 전에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웨슬리는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또한 루터나 칼빈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본성으로 바꾸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웨슬리에게 완전은 이 세상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상에서 절대적인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 완전은 상대적이다. 죽음 이전의 완전한 성화의 개념은 사랑과 선행을 온전히 실천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종말론은 내세를 강조하지만, 내세보다는 현세의 천국을 더욱 강조한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과 웨슬리의 사상을 알아보며 이 두 사람의 신학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가 예정되었다고 하는 칼빈의 예정론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된 것이 아니며 모든 만민은 다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웨슬리의 만인구원론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느냐라는 결론을 맺어야 한다면 웨슬리의 만인 구원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여기에서 인류가 전부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어서 혹자는 영생을 얻기로 작정되었고, 혹자는 멸망되기로 작정되었으며 이렇게 그 목적으로 창조된 것으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생명 아니면 사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멸망시키고, 사망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말하는 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그 결정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하나님의 불공평한 역사를 설명하기는 어렵게 된다.
나가는 말
이런 말이 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 시련 그리고 역경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아름다운 그림의 한 폭이 되기에는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으로 만들어진 그림 따위는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며 위로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와 함께 웃으시는 분이십니다.” 칼빈의 하나님은 악하신 하나님 이지만 웨슬리의 하나님은 우리는 지극히 사랑하셔 자유의지라는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최고의 선물을 주신 멋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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