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축복하라!(롬12:14-21)주일(2009-08-02)

우순(愚巡) 2009. 8. 2. 08:47

<축복하라!>

 

  (로마서12:14-2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축복하라!

   오늘 나눌 말씀은 '축복하라'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기독교의 힘은 사랑의 축복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축복하는 삶을 통하여 기독교의 힘! 사랑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두 개의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속의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축복입니다. 대속의 믿음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음이고, 사랑의 축복은 예수님을 우리의 스승으로 삼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축복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대속자이시며 스승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1930년도판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적선언 제 2조는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대속자이시며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두 가지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두 날개입니다. 예수님을 대속자로 고백하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의 핵심입니다. 사랑의 축복은 예수님의 믿음을 따르는 행함의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힘>

 

  기독교의 힘, 기독교 신앙의 힘은 신앙의 두 날개가 퍼득이는 것입니다. 대속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개를 퍼득이는 것이고, 사랑의 축복으로 사람을 향하여 날개를 퍼득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성경은 균형잡힌 신앙을 말합니다. (롬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과 사람과의 평화를 동시에 말합니다. 이게 균형잡힌 신앙입니다. 대속의 믿음과 사랑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독교의 힘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대속의 믿음과 사랑의 축복에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 둘 중에 하나만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속의 믿음만 취하고 사랑의 축복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신비주의에 흐릅니다. 반대로 대속의 믿음은 저버리고 사랑의 축복만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인본주의에 흐릅니다. 두 가지를 다 버린 경우에는 무신론자이면서 인간애도 없는 최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이기주의에 빠져 고립되고 고독해집니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를 다 배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라는 신앙고백은, 대속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과 사랑의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축복은 박해하는 자를 정복한다>

 

   사랑의 축복은 박해하는 자를 정복합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기독교의 능력입니다. 기독교의 가치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랑의 축복은 박해하는 자들을 감동시켰고, 설복시켰으며, 정복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로마의 기독교화입니다. 로마는 콘스탄틴 황제의 밀란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습니다. 세계 최강의 로마 국가를 정복한 것은 이민족도  강대국도 아니었습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했던 기독교였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로마교회는 오래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주후 54년-68년)를 기점으로 삼으면 주후 60년 경에서 콘스탄틴의 밀란칙령이 있던 주후 313년까지 박해를 받은 셈입니다. 약 250여년동안 박해를 받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도 카따꼼베(Catacombe) 가 성행하던 주후 3세기 경 로마 시내에 있던 약 5만여명의 신도들에게는 더욱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말씀을 실천했고 위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가 밀란칙령이었고, 로마의 기독교화였습니다.

 

<사랑의 축복은 목마름을 해갈시킵니다>

 

  사랑의 축복은 목마른 사람을 해갈시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 모습과 달리 상처투성이입니다. 너무 고독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들어합니다. 아름답게 화장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외출을 하지만, 홀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오면, 아무도 모르는 눈물을 흘릴 때가 많습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처럼 먹어도 먹어도 목이 마르는 갈증에 목이 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참조 요한복음 4장)아산시의 온양온천에 내려 오는 전설 가운데 하나는 '학 이야기'입니다. 농부가 논에 나갔는데 학 한 마리가 날개를 다친 채 논바닥에 쓰러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와 보니 학이 날개짓을 하며 다시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것을 보고, 학이 있던 자리를 가보니 따뜻한 물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이 따뜻한 물로 상처를 치료하다가 온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논바닥에 쓰러진 학 같은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아름답고 고고한 학은 군계일학이라는 말처럼 그 하얀 고고함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이 부시지만, 상처를 입어 날개가 꺽이면 논바닥에 처박혀 추한 모습이 됩니다. 사람들도 또 같습니다. 기품있고 아름답고 고고하여 학 같지만, 상처를 입어 날개가 꺽여지면 논바닥에 처박힌 학 신세입니다. 이 학을 누가 날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축복이 날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이며,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경주장이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의 성소임을 믿습니다. 날개가 꺽인 학들이, 논바닥에 처박혀 신음하는 학들이, 다시 날아 오를 수 있도록 온천물 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축복을 베푸는 공동체가 교회임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롬12:17) 원수를 갚지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롬12:19).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이 모든 말씀은 결국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명령입니다. 사랑의 축복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요,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고도 원수를 갚는 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날개 꺽인 학이 다시 날아 오르듯이 상처입은 사람들을 다시 날아 오르게 하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갈시킵니다. 사람들의 날개를 치유하여 다시 하늘로 날아 오르게 합니다.

 

<사랑의 축복은 희망을 줍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식물학자의 완두콩 실험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완두콩을 심은 다음에. 하나는 매일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고 축복하였더니, 결과가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비난과 저주를 받은 완두콩은 말라 비틀어지고, 사랑하고 축복한 완두콩은 쑥쑥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줍니다. 사랑을 풍성히 받으면 받을수록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풍성히 줍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랑의 축복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에수님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에게, 그리고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과 귀신들렸던 마리아 같은 여인들에게도, 사랑의 축복을 통하여 삶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시골에 가면 커다란 황소를 끌고 가는 어린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워낭소리라는 영화는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의 농촌생활을 아름답게 연출했습니다. 큰 황소를 끌고 가는 어린아이나 촌노처럼, 인생이라는 큰 황소는 희망의 줄에 이끌려 길을 갑니다. 행복한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축복은 희망을 줍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을 세웁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을 세웁니다. 에수님의 이야기를 묵상할 때 느끼는 가장 큰 감동은 예수님이 12명의 사도들을 세우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는 배신자도 있고 도망자도 있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배신할 자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또한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자를 다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힘듭니까? 더구나 자기를 의심하는 자에게 자기의 진실을 알리는 것은 얼마나 힘듭니까?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셨고 사명을 맡기셨으며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사람 세우기였습니다. 건물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세워 나갔습니다. 몰려 드는 무리들이 돌변하여 자신을 죽이라고 외칠 때에도 예수님은 사람을 아끼시고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12 제자를 세웠을 뿐만 아니고, 70명의 방계 제자도 세우셨습니다. (눅10:1). 이들과 여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체험하고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행2:1-4)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대위임도 사람 세우기입니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람 세우기! 기독교의 역사는 사람을 세워간 역사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웠습니다.(행13:1-3).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와 집사를 세우라고 부탁합니다. (딤전3장; 디도서1:5).


   사랑의 축복은 사람을 세웁니다. 저는 바울의 글 중에 복음의 아비라는 말을 깊은 감동으로 묵상했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복음으로 낳는 일은 정말 사랑의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고, 격려는 수족관의 물개도 묘기를 부리게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근본적인 마음 중에 하나는 인정감입니다. 사람들은 인정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랑의 축복은 사람들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베풀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자녀로 세워 갑니다.

 

<축복하는 자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하는 자가 되십시오!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축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 들어 가든지 평안을 축복하시고, 누구를 만나던지 사랑으로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시고 축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기독교의 길이며, 그 힘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고 그렇게 사는 삶이 우리가 복을 받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