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의인은 은혜를 베푼다(시37:23~26) 2012-0715 주일

우순(愚巡) 2012. 7. 14. 21:47

 

의인은 은혜를 베푼다

 

    <시편37:23~26>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할렐루야!

한 주 잘 지내셨는지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예배하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며 예배합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가 희망이고 예배가 축복입니다.

 

1.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배가 축복입니다. 성도는 예배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성도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배하러 교회에 오실 때마다 은혜로운 인사를 나누셔야 합니다. 가장 좋은 인사말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입니다. 제가 전에 초대교회의 인사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축복을 하며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고 박해를 이길 믿음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지 않으면 험한 세상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평생 잊지 맙시다.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던 초기의 교회는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은혜를 축복했습니다. 긍휼을 축복했습니다. 평강을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위로를 받아야 하고 격려를 받아야 하고 쉼을 얻아야 합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의 밀란 칙령 이후에 교회는 권력을 잡게 되고,  또 근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맞물려서 부를 얻게 되면서, 서로를 격려하기 보다는 서로 경쟁하고 서로 기득권을 가지려고 하는 계급주의가 교회에 만연해졌습니다. 거룩한 교회는 권력지향적인 교회가 되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직분은 교회조직의 계급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소중한 초대교회 인사말이 사라졌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가 사라졌습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되는데 서로 경쟁하고 서로 서열을 정해야 되는 모순이 생긴 거지요. 왜 교회를 오나요? 예배하러 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려고 오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다시 초대교회의 인사말을 찾아야 합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오늘날 문명이 발달하고, 기독교가 세상의 힘을 가진 집단으로 다수가 되고 <실질적으로는 다수도 아니면서 다수인 척 착각하는 것이지만> 부를 축적했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한 명씩 들여다보면 우리 중에 위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착오가 어디 있냐하면 ‘나는 굉장히 힘든데 저 사람은 괜찮을 거야?,  나는 불행한데 저 사람은 행복할 거야?, 나만 고독하고 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잘 살고 있짆아? 착각들입니다. 이게 심해지면 질투도 생기고, 이게 심해지면 우울증도 생기고, 열등감도 생깁니다.  자기패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런 사람에 대표적인 모델이었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공급하시사 하나님의 산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초대교회의 인사말을 다시 한 번 해보실까요. 우리 적어도 좌우앞뒤로 네 분에게 축복을 한 번 해보십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한 번 서로 인사를 해보십시다. “있을지어다!”는 교만한 말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선포형의 인사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이한테 “있을지어다!” 그러면 건방지다고 하니까 그건 좀 지혜롭게 하시고요. 아시는 분들은 만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인사를 하십시오. 너무 길면 ‘은혜가 있을지어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완전한 인사말을 하시려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인사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2. 예배로 한 주를 시작하라!

 

   여러분! 주일은 주말입니까? 주초입니까?  미국연합감리교회서 영성을 가르치고 있는 마조리 톰슨(Marjorie J. Thomson) 목사님이 계십니다. 여자 목사님인데 아주 간단한 이 질문으로 자신의 영성의 출발을 삼을 수 있습니다. 주일은 주말입니까? 주초입니까? 우리는 일을 하고 쉬는 것입니까? 쉬고 일하는 것입니까? 방송국에서는 주말 프로그램을 편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달력을 보면 주초입니다.

 

   마조리 톰슨(Marjorie J. Thomson)의 영성 연구의 출발점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쉼이 있고 일이 있고 쉬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사람들이 말하는 주말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주초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주를 살다가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함으로 한 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배로 시작하십시오! 예배로 한 주를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시작하십시오!  태초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있기 전에, 내가 일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그 처음 태초의 시간을 매 주일마다 회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면서 매주일 마다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에배합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의 축제를 생각하면서 오늘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난주를 마감하기 위해서 예배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일본말로 시마이(しまい) 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새로운 한 주를 열기위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나의 한 주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나의 한 주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겠습니다. 나의 한 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겠습니다. 나의 한 주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로 믿고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테이니 이 한 주를 나와 동행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서 한 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7월 셋째 주에 새로운 한 주가 오늘 예배와 함께 시작됨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한 주를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 집중하는 예배자의 마음

 

  예배는 마음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려면 마음을 모두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려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라고 선포합니다.

 

    <롬12:1)“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인 예배가 뭡니까?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정말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서 이 한 주에 새 힘을 얻기 원하십니까? 정말 이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죽여서 바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철저히 죽여서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바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말에 시마이(しまい) 예배가 아니고 주초에 새로운 삶을 여는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시작될 것입니다. 예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꼐 집중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이신 성령께 이끌리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려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앞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이 내게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 성령과 예수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영과 진리로는 성령의 손에 이끌려서, 진리가 되시는 예수의 손에 이끌려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서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보형의 공로를 힘입어 예배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예배자의 마음이 있습니다. "주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주의 풍성한 사람을 힘입어서 예배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할 때에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예배하였습니다.

 

〈시편 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다윗은 장군이요 군왕이요 능력자였습니다. 여론에 최고 인기자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왜 죽였습니까? 인기에 밀렸거든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29:5)라는 예루살렘 성 안에 여인들의 노랫소리 때문에 그 안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질투가 일어났고 집착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인기에 연연한 하는 사람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감당을 못합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마약중독에 빠지는 이유도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며 살기 때문에(7:34) 그 인기가 사라지고 자기들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마음속에서 방황이 된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아주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예배할 때에 주의 풍성한 사랑에 힘입어서 들어간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전에 예배하러 오실 때에 어떻게 예배하러 오셨습니까? 제가 오늘 인사를 하자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겉보기와 다르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아픕니다. 가족이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곤궁이 찾아왔습니다. 보증을 잘못서서 낭패를 당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다고 미국에 가신 김영자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민을 가서 첫 번째 겪는 아픔은 고독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많은 아픔들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격려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우리 자신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공로도 부족하고, 어려움에 직면해서 허덕거리면서 주 앞에 나왔습니다. 주의 풍성한 사람을 힘입어 예배하시면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시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배하러 오셨을 때에 제일 먼저 하셔야 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세속의 직업이나 지위를 내려놓고 우리가 교회에서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내 봉사의 업적,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헌신했는지, 내가 헌금을 얼마나 드렸는지를 다 내려놓고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감격스럽게 체험하고 돌아가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4. 복있는 자는 의인의 길로 가고 의인의 모임에 참여한다.

 

  예배하고 시작하는 한 주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복있는 자의 삶입니다.   시편의 시작은 복있는 자의 삶을 의인의 길을 가는 삶이며 의인의 모임에 드는 삶이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1:5~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또 시편 37편 23절로 24절은 그런 사람의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며,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넘어지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37:23~24〉 “하나님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들어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삶을 사는 사람, 하나님이 정하신 걸음을 걸어가는 사람은 넘어지기는 하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한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여러분의 삶이 혹시 넘어지셨습니까?  오늘 주말의 예배가 아니고 주초에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이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패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넘어졌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가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굴에서 그를 쉬게 하시고 여호와의 앞, 산에 서게 하심으로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그를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우리가 넘어졌을지라도 우리를 다시 붙들어주시고 일으켜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예배는 살아있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가 희망이고 예배가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일에, “아 또 일주일이야 내가 예배를 가야되는데, 순서가 있는데, 하기 싫은데” 그런 마음이 드시면 그건 예배할 수 없는 시절을 알지 못하는 사치스러운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만약에 이 예배가 얼마나 감격적이고, 이 예배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고, 이 예배를 드리는 자체가 내 삶에 축복인 것을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사치스럽고 호사스러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예배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이들과 대화할 때에 계속해서 느껴지는 갈등 중에 하나는 세대차이입니다. “아들아 우리는 먹을 게 없어서 풀 뜯어먹고 삐리 뜯어먹고 강에서 고기 잡아먹고 메뚜기 잡아먹으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았단다. 그리고 잡곡밥, 보리밥 먹고 정말 이 밥(쌀밥)이 그리워서...” 여러분, 애들이 “아이고 아버지 굉장히 고생하셨네요.” 그럽디까? 안 그래요 애들은. “아이고 아버지 그거 아주 자연산이네. 요즈음은 당뇨 치료하느라 일부러라도 잡곡을 먹는데, 그건 완전히 농약도 안치고 제철 채소에 제철 과일을 드신 거 아니에요” 대화가 안되지요.  요즈음 대학생들은 공산주의 실체를 몰라서 갈등을 빚고 있지요. 그들은 겪어보지 않은 거지요.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살아계심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은 이 예배를 통하여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여러분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시편 37:23~24“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 한 주를 하나님이 여러분의 길을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시면서 여러분이 넘어지는 상황이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복 있는 자는 의인의 길을 가다가 의인의 모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의인의 자손들도 복을 받습니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결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왕이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결식함을 보지 못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의인에 대한 찬양이 우러나왔습니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려고 꾸어 주며 그의 자신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어 그의 자손이 복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의를 얻고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성경을 꿰뚫고 있는 중심 단어가 있습니다. 많은 분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의(義)와 의인(義人)입니다. 성경은 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의로움을 이야기 하고 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첫 번째 의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의인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6장 9절에 먼저 나옵니다.

 

〈창세기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런데 이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를 설명하는 의인이라고 하는 말 앞에 은혜가 붙어 있습니다.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흔히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의 책이고 신약은 복음의 책이라고 얘기합니다. 맞기도 틀립니다. 맞기는 확실히 구약은 율법적 색채가 가하지요. 그러나 틀린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는 율법의 완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서 율법의 부족한 점을 채우셨고 그리고 그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결국은 율법이든지 복음이든지 우리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뭐라고 기록되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해주신 것은 그가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이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하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가 완전한 자이기도 하지마는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다. 성경은 의는 믿음과 의인은 은혜와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상반대는 역설적인 표현을 합니다. 수많은 곳에서 의와 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도서와 로마서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없다고 하는 의인의 부재를 또 선언합니다.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전도서와 함께 로마서에 이 의인 부재성은, 이것은 우리에게 인간이 누구냐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고 사람은 의롭다함을 칭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나 된 것, 여러분 철학자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냐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나됨,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는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그럴 때에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의 세상의 학력도, 경력도, 지위도, 명예도, 업적도 다 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기본적이고 본래적인 나의 나 됨을 물어볼 때에 바울은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설명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나의 공로와 업적이 아니고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방패처럼 자기를 호위한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다윗은 전쟁에 나갔던 사람입니다. 갑옷과 방패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에는 물맷돌을 쥐고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하면서 늘 물맷돌을 갖고 전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세속에 무기를 막는 창과 칼을 막는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호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로 여겨졌고 노아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라고 불렀고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호위하시기 때문에 방패와 같이 자기를 지켜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8.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은 은혜를 베푼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오늘 읽었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시편 37:23~26〉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의인은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합니다. 이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데 이 한 주를 살면서 우리가 해야 될 의인의 삶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늘 받은 은혜를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며 사는 것이고, 나를 붙드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을 보여주며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의 풍성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플러스해서 각자가 여러분의 가족이나 여러분의 직장 동료나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될 은혜들을 베푸며 사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처지에 따라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며 삽니다. 의인은 자기의 의로움을 남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의롭다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베풀며 삽니다.

 

주말이 아닌 주초인 주일에 예배함으로 한 주를 시작합니다. 이 한 주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미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은혜를 베푸는 삶입니다. 은혜 아래에서 은혜 가운데 은혜를 받은 은혜의 사람으로서 은혜를 베풀면서 한 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베풀수록 커집니다. 은혜는 베풀수록 깨달아집니다. 아이를 길러보면 어머니의 사랑을 알지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만 낳으면 모든 게 행복할 줄 알지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면 시험관 아기라도 얻어보려고 병원에도 다녀보지요. 그럴 때는 아이만 생기면 뭐든지 잘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아서 길러 보세요. 잠이 바뀌면 감당이 안됩니다. 아이가 울거나 보채면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울기도 합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속을 썩이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할 땐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뉘시며 길러주지요. 그럴 떄 어머니는 비로서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신 친정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아만 본 사람은 은혜의 소중함을, 은혜의 위대함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어 보면 은혜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은혜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의인(義人-의로운 사람)은 없지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義認-의롭다고 인정함)은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의인(義人-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의인(義認-의롭다고 인정함)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시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시면서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은혜를 베풀어 보십시오. 그러면 내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깨달아 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과 나누며 간증해 보십시오. 나를 주의 풍성한 사랑으로 인도하여서 예배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과 함께 고백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은혜가 더 커질 것입니다.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풉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 체험의 은혜는 물론이고, 우리의 사랑과 용서도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은혜입니다. 어쩜 우리가 상대하기도 싫은 사람, 우리가 손을 잡아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도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 은혜를 베풀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