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속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김 재 진 (계명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1797 년 바우어 (G. L. Bauer) 가 "구약신학" 이란 책을 처음 내 놓음으로 因하여, 舊約과 新約은 사실상 서로 구별된 별개의 책으로 취급 되어져왔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Kontinuit t) 내지는 통일성 (Einheit) 에 관한 주제도 결과적으로 성서신학 내부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직 신학자 에벨링이 (G. Ebeling), "성서에 있는 다양한 증거들의 내적 통일성을 탐구하는 것이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신-구약의 연속성에 관한 연구는 성서신학의 범주를 넘어서 조직 신학적 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비록 신약성서의 몇 군데에서 구약성서의 증언과 형식상으로 (formal) 대립된 증언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진술 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구약성서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언 하는데 있어서 언제고 다시금 구약성서를 그 使信의 증빙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의 구약 인용은 新-舊約의 연관성 내지는 통일성이 기독론적으로 설명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구약 성서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공리 (Mittelaxiom)로 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 내지 통일성을 기독론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내포 되어있다. 첫째: 구약과 신약을 곧바로 일치시키는 입장을 취할 경우 , 신-구약의 독특성이 상실되는 문제점이 생긴다. 둘째: 신-구약의 연속성을 약속과 성취 혹은 언약과 성취의 "유형론적"으로 설명 할 경우, 구약과 신약을 유형론적 (typologisch) 으로 대립시키거나, 아니면 유비적으로 (analogisch) 비교하여 상대화시키는 문제점이 생긴다. 어쨋든 구약과 신약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대립시키든지 혹은 상대화 할 경우, 성서는 "한 분 하나님"의 통일된 말씀이 아니라, 질적 혹은 형식적 차이가 있는 두가지 말씀이 된다. 그러나 基督敎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은, 신-구약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지 (딤후 3,16), 질적 혹은 형식적 차이가 있는 두 말씀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다. 끝으로 신-구약의 연속성을 판넨베르크 (W. Pannenberg) 처럼 "보편사적 해석"을 시도 할 경우,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看過하게 된다. 왜냐하면 판넨베르크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간접계시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구약 성서는 사실상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계시를 증언하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신-구약 연속성에 대한 해석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계약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이 있다. 칼. 바르트(K. Barth) 는 아래과 같이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 옛 계약에 이러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체결과 더불어 일어난 것은 ...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 옛 계약이 지양되어, 곧 위로 (empor), 참된 수준 (auf sein wahres Niveau) 으로 고양되어서, 자신의 고유한 형태를 갖게 되었고,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인하여 (계약이: 역자 추가) 파멸되는 것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되었고, 온전히 고양 되었고 (wohl aufgehoben) 그리고 확고해졌다는 (gesichert sein wird) 것이다." 김균진 교수도 "계약"이란 개념을 구약과 신약을 두루 지배하는 총체적인 개념으로 보고, "새 계약은 옛 계약의 지양 (Aufhebung)인 동시에 成就 (Erf llung)" 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새 계약이 옛 계약의 성취를 뜻한다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서로 連續性 (Kontinuit t)을 가진다. 새 계약은 옛 계약의 폐기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이요, 성취이다. 옛 계약 없이 새 계약은 이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옛 계약은 새 계약의 前提" 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구약의 관계 내지는 연속성에 대한 이러한 "계약신학"적 전망은 보다 더 자세한 성서 신학적 論證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새 계약을 옛 계약의 "지양 (Aufhebung)"인 동시에 "성취 (Erf llung)"로 볼 경우, 그 근본에 있어서 구약은 신약의 內容上 혹은 역사적 前提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구약이 단순히 신약의 전제론적 의미만 갖고 있는가? 그리고 새 계약을 옛 계약의 "지양 (Aufhebung)"인 동시에 "성취 (Erf llung)"로 볼 경우, 구약을 신약에 비하여 질적으로 보다 낮은 혹은 무엇인가 결핍된 것으로 잘 못 오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옛 계약과 새 계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아 31,31-34 은 분명 옛 계약의 "지양 (Aufhebung)" 뿐만 아니라, 계약 내용의 불변성 내지는 영원성 (Endg ltigkeit) 도 언급하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예 31,31-32a) 뿐만아니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1,33)도 언급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후자의 계약 형식문이 (Bundesformel)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공통성 (Einheit), 즉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Kontinuit t), 나타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 계약 형식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는 (예 31,33) "한 분 하나님"께서 ( < > ) 이스라엘과 맺으신 옛 계약의 내용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와 맺으신 새 계약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약형식문은 구약과 신약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 < > ) 자기계시형식 (Selbstoffenbarungsformel)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 본인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관한 성서적 진술을 土臺로하여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이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형식을 분석함으로서, 신-구약의 관계 및 연속성에 관한 신학적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제 1 장 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 > 가 어떠한 분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제 2 장에서는 이 < > 의 <<자기계시형식>>이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끝으로 제 3 장에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 속에 나타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상대적으로 대칭시켜 놓고, 구약을 신약의 전제로 해석 함으로서 야기된 양자 사이의 실제적인 질적 차이를 - 언제든지 구약 보다는 신약에 優位를 제공하는 해석 방법을 -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신약을 구약의 성취 내지는 결과로 해석 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歷史를 因果論的 (Karma-theoretisch) 으로 해석하는 - 구약과 신약 혹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을 "약속과 성취"의 구조 속에서 해석 방식을 - 聖書的 歷史 (Biblische Geschichte) 해석 방법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에 집착하여 있는 기독교적 優位사상을 벗어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함께 고백하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이 연구가 교회연합운동 ( kumenische Bewegung)을 위한 하나의 신학적 근거설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I. 구약과 신약의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 ( < > )".
1986 년 독일의 구약 신학자 야노브스키 (Bernd Janowski)와 조직신학자 벨커는 (Michael Welker) 동인지 <<Jahrbuch f r Biblische Theologie>> 를 내어 놓았다. 이 동인지의 제 1 판은 "성서적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 (Einheit und Vielfalt Biblischer Theologie)" 이란 이름 아래 편집되었다. 이 책에서 울리히 마우서는 (Ulrich Mauser) " und in Biblischer Theologie" 란 논문을 게재 하였다. 이 논문에서 마우서는 자신의 연구를 아래와 같이 한 마디로 결론 짓는다: "한 분 하나님에 ( < > ) 대한 신앙고백은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질문이 제기 된다: 구약과 신약 어디서 " < > "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가? 이 " < > " 와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삼위일체 되신 "한 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마우서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 유대-기독교적 신앙고백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타난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문장들을 분석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I,1 한 분 하나님 ( < > ) 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
구약성서는 唯一하시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구약신학의 연구 결과이다. 이 신앙고백은 우선 먼저 신명기 6,4 에서 쉽게 발견 되어진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 뿐이시다." 이러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무엇 보다도 먼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내지는 <<금지>>로서 이루어졌다.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시내산 곧 신명기 전승의 가장 중심적인 신학사상 가운데 하나로서 십계명의 제 1, 2 계명에서 역리적으로 확고하게 굳어졌다 (참. 출 20,2-4; 신 5,6-8). 다시 말하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역으로 "우상 숭배"와 "이방잡신 숭배" 금지 계명으로 변형되었다. 이렇게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계명으로 변형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제 2 이사야에서는 종말론적 의미와 결합된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이 44,6).
살아서 役事 하시는 유일 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마우서에 의하면, 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하여 확고한 형식을 갖춘 구체적인 문장으로는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방신에 대한 경배를 경계하거나 禁 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구약성서 내에서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방 잡신에 대한 "불관용성 (Intoleranz)" 이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잠시도 쇠퇴한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유일하신 한 분 야웨 하나님에 대한 고백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두루 충만해 있던 사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때로는 우상숭배 내지는 이방신 숭배에 대한 엄한 경고의 (Verboten) 형태로, 그리고 때로는 이스라엘 후손에게 대대로 주어질 계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참 신 4; 32). 마우서는 야웨의 이름을 망명되이 일컷는 것 (Die Usurpation des Namens Jahwe) 에 대한 <<금지계명>> 까지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역설적 (paradoxerweise) 증언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이 결론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나 경험은 아래와 같은 것으로 효력이 발생된다, 즉 그 자신 다르게 기초되어진 잡신경험 (G ttererfahrung) 으로 부터 본질적으로 구별 되어져야 할 뿐만아니라, 또한 아주 커다란 감행 속에서 주장해야 하는데, 그 것은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최종적인 경험이며 또한 유일하고 참된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서에 의하면, 신 6,4 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 뿐이시다." Lxx 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그런데 이러한 가장 기본적이고, 매일 매일 삶 속에서 반복된 신앙고백은 바로 초기 유대교 문서에서 뿐만아니라, 신약 성서에서 아주 드물게 직접 인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신앙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히려 아주 문자적으로 아주 폭 넓게 작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마우서는 말 한다. 그는 Strack-Billerbeck 의 도움을 빌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칠십인 역이 내포하고 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초대 회당 기도 (fr hsynagogale Gebete) 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진술은 특히 희랍-유대적 문서들 (hellenistisch-j dischen Schriften) 속에서는 보다 넓게 확장되었고, 그리고 형식사에 있어서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신약 성서에서도 그 서두 (Eingangssatz) 가 발견된다."
그런데 이 "한 분 하나님"에 ( ) 신앙고백은 거의 의미변화 (Sinn- nderung) 없이 유비적인 표현 를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이 표현은 숫자적으로는 보다 더 빈번히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유일성에 (Einzig- keit) 대한 이중의 표현은 Lxx 에 이미 나타나고 준비되었다고 마우서는 말한다. 여기서 살며시 질문이 제기 된다: 그렇다면 구약 성서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왜 그렇게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마우서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구약 성서의 여러 전승, 자세히 말하면 예언자 전승, 신명기 전승 그리고 심지어는 창조 전승에 이르기 까지 여러 전승의 들어가는 말 (Eingangssatz) 에 두루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구약 성서에서 성문된 형식 (Formel) 으로 나타나는 것은 적다고 하더라고, 그 근본 사상은 구약성서을 두루 관통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된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것 (Usurpation) 이라고 하여 꺼려 왔던 야웨 하나님의 이름에까지 이 "한 분" 이라는 수사 (Zahlwort) 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도 분명해 진다.
만일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불분명한 것은 지나쳐 버린다면, 구약 성서에서 하나 ('aehad) 라는 수사가 하나님의 이름 와 하나님의 개념 (Gottesbegriff) 과 결합된 것은 단지 3 번 (신 6,4; 스 14,9; 말 2,10)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 개의 구약성서 구절들은 구약의 여러 전승을 두루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마우서는 신 6, 4 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문장은 신명기 6,4 에서 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주 간단한 문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상황과 (mit dem Kontext) 더불어 주어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야웨는 이스라엘을 위한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로 유일하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야웨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 라는 수사와의 결합은 예언 전승의 종말론적 진술 속에서도 나타난다: "주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참. 스 14,1.4.6.8 절) 사람들은 오직 주 한 분만을 섬기고, 오직 그분의 이름 하나만으로 간구 할 것이다" (스 14,9). 이 스라갸 14,9 절은 마우서에 의하면 신명기 6,4 절을 "종말론적으로 그리고 우주론적으로 규정하는 해석" 이다. 이제 이 "한 분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말 2,10). 마우서는 말라기 2,10 은 신명기 6,4 절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구절이 Lxx 에서는 와 의 순서가 바뀌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서 가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근거 토대로하여 마우서는 유일 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구약성서 내에서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한다:
"확고해 졌고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혹은 는 구약 성서에서 단지 세 군데 있다: 즉 보다 후대의 구조로서 서문 (Eingangssatz) 속에 있고 그리고 그 서문에 종속된 예언자적 두개의 전통들에 있다. 즉 하나의 전통은 뒤로는 신명기적 기본계명 (Grundgebot) 으로 소급하여 이스라엘 창조의 시간으로 (in die Zeit der Sch pfung Israels) 그리고 앞으로는 야웨의 통치 속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포함하는 종말의 시간 (in die ... Endzeit) 으로 확장된다."
위에서 인용한 마우서의 말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최종적으로는 모든 백성을 자신의 통치를 받아야 할 존재로 규정한 분이시다. 그래서 이 유일 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구약 성서 내에서 아주 다양한 표현들과 서로 결합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방신들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대립되어 있는 "한 분 하나님" 이라는 표현은 출 22,19; 신 6,13; 10,20; 32,12; 삿 10,16 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표현 외에 아주 특별히 빈번하게 이스라엘 사람의 기도 속에서는 란 표현이 느 9,6; 왕상 8,39 등에서 발견된다. 또한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자주 축복언어 와도 결합된다 (에스라 8,25; 시 82,18; 85,10; 사 37,16.20; 단 3,45).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결론적으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구약성서 내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식으로는 (in einer beistimmten Formel) 단지 3 번 밖에 나타나지 않느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은 구약을 두루 지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 내용이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구약 성서 내에서 아주 다양하게 다른 형식, 즉 기도문 축복문 계명 등과, 결합된다. 결국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구약성서의 가장 중심적이 내용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구약 성서에 나타난 신앙고백 형식문: "야웨는 한 분이시다"의 빈번도 (H ufigkeit)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상의 폭 넓은 전개와 변형 - 창조론에서 종말론에 이르기 까지 - 그리고 다른 형식과의 다양한 결합에서 입증 된다고 하겠다.
I,2 한 분이신 주님은 ( )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이다. ( )
신약성서의 전통에서는, 마우서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전통에서는 과 차이가 두두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두개의 표현은 의미상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양자는 서로 바꾸어 쓰이기도 한다. 예를들면 한 분 하나님 ( ) 이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 할 수 없다는 진술이 나오는 마가 복음 2,7 의 표현이 누가 복음에서는 (눅 5,21) 로 표현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요한 복음에서는 " " (요 8,41) 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요한 복음 8,41 절의 표현이 하나님 인식에 대한 표현인 17,3 에서는 " " 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5,44 에서는 " ... " 로 바꾸어 쓰이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의미를 갖고 표현된 과 는 신약 성서 내에서도 역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문 속에 나타난다. 특히 서간문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영광송 (Doxologie) 속에서도 발견된다 (롬 16,27; 딤전 1,17; 6,15하; 유 25). 그리고 구체적인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암시하는 구절들은 신약 성서에 많이 나타난다 (마 4,10 = 눅 4,8; 막 2,7 = 눅 5,21; 막 10,18 = 눅 18,19; 마 19,17; 24,36 = 막 13,32; 야 4,12; 딤전 2,5: 두가지 요소; 마 23,8-10: 세 가지 요소)
방금 위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여러 다른 형식 속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유대-기독교의 전형적인 신앙고백이였다. 우선 그 증거를 우리는 우선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진술인 막 12,28-34 (비. 마 22,34-40; 눅 10.25-28) 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여기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하여 신명기 6,4 절에 나타난 유대교 전통적인 신앙고백으로 예수의 답변을 시작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주님이시다' ( )" (막 12,29).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교 율법학자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예수의 답변에 동의를 한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막 12,32). 이러한 율법학자의 동의에 대하여 다시금 예수님은 그의 이해가 정확하였음을 확증해 주신다: "예수께서 그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막 12,34)
이것으로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기독교의 초기 전승 속에는 여전히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 그대로 살아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막 12,28-34 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중 사랑 ((Doppelgebot) 에 전제 되어있다. 그리고 이 본문 속에 등장한 서기관이 희랍적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라면, 분명 유대-기독교도들의 신앙고백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였음이 분명하다.
이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신약성서 내에서 한계점을 갖으며 동시에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진다. 즉 사랑에 대한 이중의 계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참 기독교인의 삶을 규정하는 필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즉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만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한계점은 약 2,19; 요 8,41; 고전 8,1-6 에서 드러난다. 야고보서 기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만으로는 신앙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행위가 뒤 따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약 2,19) 결론적으로 야고보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창 15,6; 사 41,8; 대하 20,7)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약 2,22b)
행함이 없는 말만의 신앙고백은, 비록 그것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할찌라도, 요한 복음 8,39 이하에서는 악마의 자식들이 하는 신앙고백과 다를 바 없다고 예수님은 질책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아버지만 한 분 계십니다" (8,41) 라고 고백 할찌라도,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8,42a) - "한 분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세상에 와 있기 때문이다" (42하).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 (8,47) 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으로 분명해 진것은, 요한 복음에 있어서 예수에 대한 인식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갖고 있는 한계점은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에는 선재한 (Praeexistierte)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늘 그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I,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한 분 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연관성은 사도 바울의 서신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선 롬 3,30 (갈 3,20) 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칭의 (Rechtfertigung)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격차를 극복하고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을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동기이다. 그런데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사도 바울은 3,22 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3,22). 그러므로 예수는 바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는 것이다
(der ) (10,12).
이상 언급된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유대인 기독교인이나 이방인 기독교인이나 모두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갖고 있다. 이 점에서 "한 분 하나님 아버지"는 이방인의 아버지며, 동시에 유대인의 아버지이시다. 그러한 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 회당 공동체는 서로 통일성를 갖는다. 그러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도 바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이 바로 로마서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바울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고전 8,1-6 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전 8,1-6 의 主題는 의심 할 여지 없이 분명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다. 이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여기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상에 대한 정면적 대립으로 제시된다. 즉 우상 이란 존재 그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는 바울은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한 분 하나님"과 동등하게 "한 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이 그 분에게서 생겼고, 우리는 그 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한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고 그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고전 8,6 참. 4 절) 여기서 "한 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의미상의 평행이 발견한다:
( ) ( )
( ) ( )
위 본문에서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 전치사로 인한 변화를 제외하면 -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일치되고 있다. 여기에는 "한 분 하나님"이냐, 아니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냐 하는 택일 (Ambivalenz) 이 있을 수 없다. 즉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창조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아무런 주저 없이 일치시킨 것은,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동역 (Sch pfungsmittlerschaft des Christus)" 에 상응한다. 동시에 이러한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한 분 하나님"의 자기증언 내지는 자기계시 (Selbstoffenbarung) 을 암시한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증언 (Selbsterweis)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평행이 (Koordination) 딤전 2,5 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평행은 마 23,8-10 에서 보다 확장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본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나온다: "한 분 선생님" (8) = "한 분 아버지" (9) 이다. 그리고 "한 분 아버지" = "한 분 예수 그리스도" (10) 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 순서를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다: "한 분 선생님" (8) =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이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신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에 오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한 분 선생님"으로서 참된 "한 인간" (참. 고전 15,21; 롬 5,12-21) 이시다.
"한 분 하나님"의 유일성 (Einzigkeit) 은 엡 4,4-6 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과 "성령"의 유일성으로 바꾸어 쓰여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유일성에 근거하여 "한 희망", "한 몸", "하나의 믿음" 그리고 "하나의 세례"임을 확정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 이시고, 그 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기" (엡 4,6) 때문이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삼위일체적 "유일성"에 대한 진술은 구약과 신약을 "한 분 하나님"으로 묶는 꺽쇠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유일성"은 교회론적으로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 (una sancta katholica ecclesia)"을 형성하는 근거이다.
이제까지 분석한 구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고백과 신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1) 구약 성서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 형식상의 문구 (Text) 는 아주 희소하게 나타나지만,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여러 형태 속에서 변형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구약을 두루 지배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된 신앙 내용이다.
2) 구약 성서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부정적 측면에서 단순히 우상숭배나, 이방 잡신숭배 금지를 위한 대립적 신앙으로 제시된 것 뿐만아니라, 보다 긍정적으로 창조 신앙으로 부터 시작하여 종말사상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신앙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중심된 신앙 내용이였다.
3) 신약 성서 내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창조 말씀의 "화육"과 "창조동역" 사상과 더불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확장된다.
4) 특히 바울 서신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내지는 자기 증언 사상과 결합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일치된다.
5)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교회론적으로 확산되어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와 성례전과 믿음과 소망의 "유일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분석의 종합적 결론에 근거하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한 마디로 규정지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있다. 이러한 規定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질문을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위배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에서도 삼위가 "일체 (一體)" 이신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떻게 설명 되느냐에 따라서 이중고백 (doppelte Bekenntnis)의 진위가 판명 될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제 2 장에서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형식이 구약과 신약내에서 어떻게 변경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II. "한 분 하나님 ( )"의 自己啓示形式의 變形
구약성서에서 "한 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매우 여러 가지 형식으로 계시 하신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나는 야웨이다, 내지는 나는 ..이다" 형식 (Ichform), "이름형식", "파송 내지는 소명형식", "계약 형식문", "임마누엘 약속" 등으로 "한 분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그리고 신약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 " 형식으로 계시한다. 그런데 구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의 계시형식들 (Offenbarungsformeln) 사이에는 구약 성서내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나타난 "한 분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자기 계시 형식인 " " 에 이르기 까지 상호 밀접한 구조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의 계시형식이 갖는 연관성은 바로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설명해 주는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의 연속성이 증명된다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임이 자동적으로 증명 될 수 있기 때문이다.
II.1 "나, 야웨는, 스스로 있는 바로 나 이다"
구약 성서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은 자신을 매우 여러 가지 형식으로 계시 하신다. 그 중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계시 형식은 무엇보다도 야웨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시는 말씀: "나는 ... 이다" 라는 "나는 형식 (Ichform)" 이다. 즉 "나는 야웨이다 ( )" 라는 표현은 구약성서 속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에 대하여 짐머만은 (H. Zimmermann)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 성서 속에서 이 계시형식은 의외로 아주 자주 나타난다. 이는 ' ' (' ') 의 형태를 갖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적인 표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형식 (Offenbarungsformel)" 이라고 命名한다. 특히 스타우퍼는 (E. Stauffer) 이러한 "나는 .. 이다 형식"을 신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Selbstoffenbarung)", "자기소개 (Selbstvorstellung)" 그리고 "자기추천 (Selbstempfehlung)"이라고 특징 짖는다.
그런데 "나는 야웨이다" 형식, 즉 "Ichform" 형식은, 스타우퍼 (E. Stauffer)와 지켄드라하트 (K. Zickendraht)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계시 (Namensoffenbarung)"와 결합된다. 스타우퍼는 그 결합을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하나님의 이름 는 기념이 될 만한 형식으로 아래와 같이 바뀌어 쓰인다: '나는, 바로 나 이다' (Ich bin, der ich bin) <출 3,14>. 십계명은 바로 '나는 ( ) ... 이다'. 곧: `왜냐하면 나는 야훼, 너의 하나님으로, 질투하는 하나님 이다'로 (출 20.1이하: 역자 추가) 시작되어진다" (참. 신 32,39이하; 이 41,21이하; 43,25 그리고 다른 곳).
발터 짐멀리도 (W. Zimmerli) 이러한 형식적인 표현: " "을 십계명형식: " "의 축약된 型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축약된 형식: , 는 의심할 여지없이 계시의 主體 이다. 그리고 이는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 명사문장의 (Nomialsatzes) 술어를 (Pr dikat)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시형식이 갖고 있는 본래 온전한 형식은 바로 십계명 형식에 (Dekalogformel) 상응하는 보다 긴 형식: " 이다. 그리고 가끔 이 형식은 라는 단어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짐멀리는 여기에 아래와 같은 신학적 의미를 덧 붙인다: "아주 온전한 계시 형식: `나는 야웨, 너희들의 하나님'에 하나님의 자기 소개가 첨부 되어진다. 즉 야웨란 이름 아래에서 자기를 소개하신 분은 동시에 접미어로 표현된 인간의 무리들과 (이스라엘, 야웨의 백성)과 신적인 주님관계 속에 (in der g ttlichen Herrenbeziehung) 계신 분이시다."
이상의 분석에 근거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즉하나님의 계시 형식인: "나는 야웨이다" 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 계시 형식" 으로 확장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두 계시형식 사이에서 우리는 형식상의 발전 과도기적 흔적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면: 계시형식: "나는 야웨이다 ( )"와 이름계시: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 : 출 3,14)" 사이에는 하나의 과도기 단계가 있다. 이 과도기 단계를 뮬렌은 (H. M hlen)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나는 ... 이다 - 언급 (Ich-Reden) 속에서 야웨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자신을 보다 강조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가리키는 인칭 단어 (Person- Wort)로 나타내신다."
뮬렌은 계속해서 "나는 ... 이다" 형식에서 "이름계시" 형식으로 넘어가는 과정, 즉 "나는 바로 그이다"에서 "나는 야웨이다"란 계시형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사 43,10이하; 호 13,4; 신 32,39 을 근거로 하여 아래와 같이 자세히 논증한다: "이사야 43,10하.: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내가 바로 그임 ( )'을 깨달아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 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나, 곧 내가 야웨이다 ( )' 그리고 나 말고는 어떤 구원자도 없다. 호 13.4 에서도 아주 비슷하게 나타난다: `나는 야훼이다 ( )', ...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나님은 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알리라. 나,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다 <Ich, Ich Er bin> ( - ). 나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나는 ( ) 죽이기도하고, 나는 ( ) 낫게도 한다' (신 32,39)."
뮬렌은 이러한 계시형식의 변화를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모든 말씀 속에서 발견 되어지는 인격단어 (Person-Wort) `나 (Ich)'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을 위하여 사전 형식화 되어진 것으로 (praeformiert) 나타나다." 그는 계속해서 여기에 신학적 의미를 아래와 같이 보강한다: "어쨋든 이러한 계시 형식 속에 나타난 그는 ( ), 신 32,39; 사 41,4; 43,10.25; 52,6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결코 주객일체 형식으로 (Kopula) 파악 되어 질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 ( ) 대신에 야웨 ( ) 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계시 형식이 변형 되어지는 과도기적 단계와 연관하여 발터 짐머만은 (H. W. Zimmermann) 그 과도기적 단계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 는 때대로 대신에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으로서 설명 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야웨란 이름에서 그 ( ) 라는 것을 파악 해 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거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을 파악 할 수 있다. 즉 그 ( ) 는 이전에 언급한 야웨의 이름으로 소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두 사이를 잇는 하나의 다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서 히브리 본문에서 칠십인역 (Lxx) 을 넘어서 신약성서에 이르는 다리이다. 즉 칠십인 역은 (Lxx) 대신에 절대적 가 주어진다 (신 32,39; 사 41,4; 43,10.13.25; 46,4; 48,12; 51,12; 52,6)."
이상 분석한 것을 근거로하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잠정적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에 있는 "한 분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의 계시형식인 "나는 야훼이다 ( )" 는 하나님의 이름계시로: "나는, 스스로 있는 나이다 ( , 출 3,14)로 변형되어 진다. 왜냐하면 의 형식 속에서 인격을 나타내는 단어 는 혹은 하나님의 이름 로 바꾸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시 형식의 변형을 우리는 다시금 혹은 이 대신에, 그리고 대신에 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이름사용금지 (Usurpationsverboten) 계명 것을 감안 한다면 (참. 출 20,7; 레 19,12), 하나님의 이름 는 얼마든지 다른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II,2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인 나, 야웨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구약성서 내에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나는 야웨이다" 가 다른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야웨 하나님의 이름에 형용사나 혹은 소유격 어미가 첨가 될 수 있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 진다. 즉 라는 "이름계시" 형식은 소유격 어미나 형용사가 첨부되는 단계로 변경된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형식인 "나는 야웨이다" 는 "이름형식"을 넘어서 이제 여러 형태의 계시형식으로 계속해서 변형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성서 내에서는 하나님 본질의 총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세히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 ).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출 33,19). 이러한 하나님 이름 "야웨"가 갖고 있는 "속성"으로 인하여,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형식은 여러 형태의 계시형식으로 변형 되는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즉 "나는 야웨이다"는 "이름계시": "야웨,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 )" (호 13,4) 혹은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출 3,6) 으로 바뀌어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웨,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형식에서 "`야웨' 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격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 "야웨"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동격으로 표현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아주 자주 나타난다.
구약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식: "나는 야웨이다" 가 "이름계시" 형식으로 혹은 소유격 어미형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이미 스토이어나겔 (C. Steuernagel)은 분석하였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 혹은 "너희의 하나님"은, 비록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야웨" 가 누락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동격이라고 본다. 그는 "야웨, 우리의 하나님"을 "나는 야웨 너의 (너희의) 하나님"으로 보았다. 이러한 계시 형식의 변형은 구약성서 안에서 보다 더 폭 넓게 확장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 형식은 "계약형식문 (Bundesformel)"로 계속해서 변형된다.
"계약형식문"에 관하여 로핑크 (N. Lohfink) 는 커다란 공헌을 남겨 놓았다. 그는 ("야웨,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 17,7.8; 출 29,45; 레 11,45; 22,33; 25,38; 26,45; 민 15,41; 겔 34,24" 형식을 소위 "계약문 형식":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의 첫번째 문장 즉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로 간주한다. 한 걸음 더나아가 루돌프 스멘트 (R. Smend)는 아주 더 명백하게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야웨의 백성'은 더이상 야웨 하나님의 이름의 동격 (Apposition)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서술어 (Pr dikat) 이다" 스멘트는 신명기 26.16-19 절에 나오는 의 Hifilform (히필형), 즉 (17ab )와 (18a )을 "히브리 언어의 '학술 전문 용어 (terminus technicus)'"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참으로 아래와 같은 변형이 진지하게 숙고 되어져야 할 것이다. 즉 ( ) ( ) 형식이 아주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또한 계약 체결과 연관해서도 나타난다 특히 시편 50,7 (참 5 절) 같은 것이 아주 분명한 그 예증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성서 내에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나는 야웨이다" 라는 계시형식은 "나는, 스스로 있는 바로 나다"라는 하나님 "이름계시" 형식을 넘어서서 "나는 야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형식으로 변형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스멘트 (R. Smend) 와 로핑코 (N. Lohfink) 의 신명기 26,1-19 절에 대한 설명은 수용 한다면, 또 다시금 "계약형식문"으로 변형 되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로핑크의 설명에 의하면: " (17ab )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18a ) 은 "계약형식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의 근원 (Herkunft) 임이 분명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형식인 "나는 야웨 이다"가 "계약형식문"에 아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뒤따라 나타난다 (참. 출 6,6-7, 레 26,12-13; 레 24,7: "'나는 主이기 때문이다 < >.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II,3 "너와 함께 하겠다" 하신 "한 분 하나님"은 "우리로 함께 하시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성서 내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계약형식문"에 다시금 "함께 ( )"란 전치사가 첨부된다. 프로이스 (Horst D. Preuss)는 "나는 너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를 하나님의 "약속" 내지는 "확언 (Zusage)" 으로 해석한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에 있는 이러한 형식을 "동행형식 (Beisstandsformel)"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형식은 야웨 하나님께서 "어느 한 사람과 동행 혹은 함께 하심 '(Mit-Sein)' 에 대한 언급"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선택하신 어느 특정한 한 사람 (Einzelnen)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Mitsein) 이라는 독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동행형식"의 독특성은 예언자를 부르는 하나님의 소명약속 (Berufungsverheissung) 속에서 인식 되어진다. 이러한 형식이 한 분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파송 하실 때에 자신의 확언으로 계시되었다는 의미에서 예언자 "파송형식 (Sendungsformel)" 이라고도 한다.
프로이스 (Preuss)에 의하면 이러한 "동행형식"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와 같이 하나님에 의한 약속 내지는 확언"으로 나타난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강조한다: "아주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동행에 대한 진술들은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이름 야웨와 동시에 나타나든지 결합되어 나타난다 (참 사 6,12; 사가랴 10,5) 이때에 는 또한 야웨 하나님 자신의 이름, 그리고 때로는 이미 함께함 (Mitsein)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이름 자체나 함께 한 그 자체로 해석되어졌다." 동시에 그는 이사야 41,10 를 "자신의 종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 ) 야웨 하나님의 구원 확언으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아주 두드러진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야웨의 함께 하심은 바로 이스라엘의 도움이요, 강건함이다."
프로이스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은 둘째로: "약속, 확언, 기원 (바램) 혹은 인간에 의한 질문" 형식 등으로 나타난다. 그는 강조하여 말한다: "여기서 인용된 27 개의 성서 귀절들은 항상 전치사 을 사용한다 - 그러나 수 14,12 에서는 로 나타난다 - 그리고 이들 성구들은 한 개인 혹은 한 그룹을 지칭한다."
프로이스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동행형식" 내지는 "파송형식"의 확언적 (assertorisch) 활용은 이제 세번째로: "인간에 의한 확증 곧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혹은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바뀌어 쓰인다. 여기에 프로이스는 임마누엘 표식 (Immanuel- zeichen) (사 8,8.10 비. 7,14)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사야 8,8.10: `임마누-엘'은 백성들이 외침 내지는 부름으로 나타난다 (`오! 임마누엘이 아닌가?' `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가?'). 이사야 7,14 과의 연관 내지는 그에 대한 관련은 아마도 (비. 시 46,7.11; 역하 13,12) 이 것이 아닌가 한다. 이 8,10 에서는 신뢰동기 (Vertrauensmotiv) 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인용한 성구들에서 프로이스는 "동행형식"의 몇가지 구조상의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야웨는 ... 아주 자주 그리고 분명히 애급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다음 그들을 이끄신 곧 그들과 `함께' (출 3,12; 10,10; 민 23,21; 신 20,1.3.4; 31,6.8; 32, 12; 예 2,2.6) 하셨던 하나님으로 표현되어 진다." 그리고 "야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관한 형식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역사였음을 얘기 해 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는 바로 야웨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 (Weg mit Jahwe)" 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또 희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의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바로 미래적 구원의 기다림이 (Zukunftserwartung)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야웨 하나님 이름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이름의 소유자는 바로 곧 함께 하는 자로서 그 이름의 특성을 그 안에 소유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자로 진술되고 그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출 3,12; 비. 3,14.16하.)"
이상 언급한 "동행형식"의 신학적 의미를 고려해 볼 때에 "동행형식"의 특징적인 사상은 하나님 사상 (Gottesgedanken)과 - 야웨는 우리 가운데 계셔서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 결합 되어있다. 그래서 프로시스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 사상"과 "동행형식"의 결합을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동행하시는 그리고 우리를 동반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야웨는 또한 그의 양떼들의 목자이시다 (시 23,4),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해 주는 전형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사 7,14; 8.8.10; 시 46,8.12; 암 5,14) 그래서 이러한 사상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비판의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암 5,14; 호 12,3이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가 또한 다시금 종말론적 희망이 내용이 되었다." 하나님의 "동행형식"은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결정적으로 "임마누엘"의 메시아 사상과 결합됨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다. 즉 "동행 형식"은 다시금 "임마누엘" 표식으로 구체화 되어진다.
베터 (D. Vetter)은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을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이사야 7,14 에 나타나는 아이의 이름은 확신 있는 신앙고백으로 표현되어 있다: , 비. 이 8,8"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임마누엘 표식을 "명사 문장 이름" 과 "확신의 이름" 이라고 특징 짓는다. 여기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동행형식"은 한편 "구약성서의 그리스도 증언" 과 관련하여 볼 때 임마누엘 표식의 선행하는 형식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다른 한편 이스라엘 역사의 구체적인 인간 실존적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볼 때에, 계약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형식으로 간주 되어 질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 분 하나님"의 계시 형식, 곧 "계약형식문"이 "동행형식 내지는 파송형식"을 넘어서 "임마누엘" 약속문으로 변형되어지는 과정으로 다음과 같이 종합하여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행형식"은 말하자면 하나의 중간공리 (Mittelaxiom) 이다. 즉 "계약형식문"에서 "임마누엘 표식" (사 7,14; 8.8.10 비. 마 1,21하) 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식 ( bergangs- formel) 이다. 왜냐하면 이 "동행형식"에는 "계약형식"과 "임마누엘 표식"의 특징이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행형식"은 "임마누엘 표식"과 그 내용상 아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있다. 이를 도표로 간략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계시형식: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축약형: "너의 하나님, 나의 백성"
관 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은 "계약 파트너" 관계
2) 동행형식: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축약형: "너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
관 계: 하나님은 당신의 (이스라엘의) "동행자" 이다
3) 임마누엘 표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실 것이다)"
축약형: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관 계: "구원자 주 예수 그리시도 하나님"
지금까지 구약성서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형식 (Selbst- offenbarungsformel)"의 변형에 대하여 숙고하여 본 결과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이 이른다: "임마누엘 (Immanuel! Gott mit uns)"은 단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즉 "임마누엘" 약속문은 하나의 "계시형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나는 야웨이다" 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식"이 다양하게 변형된 결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임마누엘 표식"은 역으로 소급하여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계시형식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식은 "계약형식문 (Bundesformel)", "은총형식 (Huldformel)", "격려형식 (Ermutigungs- formel)" 그리고 "동행형식"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러기에 "임마누엘" 약속문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를 계시하는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임마누엘" 약속문은 하나님의 使役과 은총을 고백하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임마누엘"은 구약과 신약의 동일한 신앙고백 내용이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존재을 바로 함께 하시는 존재로, 역사하는 존재,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창출해 내는 존재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서, 예언서 그리고 시편들도 역시 바로 그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한 분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 속에서 아주 분명히 증거 되어진다. 왜냐하면 신약 성서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자기 계시 형식인: "나는 ...이다" ( )는 그의 근원을 "한 분 하나님"의 계시 형식인: 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III. 한 분 하나님 ( < > )의 자기계시 속에 있는 舊約과 新約의 連續性
III,1 신앙고백 대상의 단일성에 의한 연속성
앞에서 이미 숙고해 온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은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백한 바로 그 "한 분 야웨 하나님" (신 6,4) 이시다. 신약의 하나님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한 바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고전 8,16) 이시다. 그런데 신약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한 분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동시에 구약의 "한 분 하나님"은 신약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할 때에, 우리가 이미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그들은 구약의 "한 분 하나님"과 분리된 다른 하나님 개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한 신앙의 대상은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한 분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신약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유대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앙 대상의 일치성은 ("한 분 하나님" =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인간 이성에 의한 解釋 혹은 理解 여하를 불문하고 구약과 신약의 통일된 증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일차적으로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대상의 단일성>> 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연속의 띠이다.
그런데 "한 분 하나님 =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도식은, 구약과 신약의 증언에 의해서 뿐만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마음에 각인 혹은 계시 되어진 -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이나, 이방인 마음에 - 실제적인 공동의 신앙고백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잉태시킨 계시의 주체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信仰 안에서도 그 통일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계시 되어진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에 따라서 (제 II 장 참조) 다르게 인식 되어졌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항상 "한 분 하나님"이 계시자로 서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 형태를 진술하고 있는 구약과 신약 이라 할찌라도, "한 분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서로 통일성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구약과 신약의 주체는 "한 분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갖고 있는 구약과 신약의 또 하나의 연속적 국면이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계속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을 결코 간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인간을 도외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그 하나님은 바로 구세주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기에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내지는 연속성은 언어로 표현된 형식적 연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한 인간들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속에도 그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수툴마허가 (P. Stuhlmacher) "신약의 전승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는 구약을 향해 신약 신학은 개방 될 수 있으며, 개방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성서신학의 영역에서 안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의 영역안에서 -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속에서 - 연구되어야 함을 암시해 준것이라 하겠다.
III,2 "한 분 하나님"의 계시형식의 변형 속에 있는 연속성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구약 성서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나는 야웨 이다" 와 신약 성서에 나타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형식은: " " 는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한 분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계시 형식을 빌어 자신을 계시 하신다는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의 계시 형식들이 그 그 자체에 연관성을 갖고 있다면, 비록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방식이나 내용이 다르다 할찌라도, 구약과 신약에는 서로 긴밀한 연속성이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계시자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면, 구약과 신약이 다양한 계시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찌라고 양자는 계시의 내용적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대상이 "한 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계시 형식들 사이에는 서로 변형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구약과 신약은 "한 분 하나님"을 증언의 주체로 갖고 있다. 즉 구약과 신약의 증언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상응한다.
구약과 신약이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은 사도 신조의 고백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성령" 하나님 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마 28,19). 즉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전 8,6), 그리고 동시에 "우리와 함께" (요 14,16; 마 28,20) 하시는 "한 분 성령"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 성령" (고전 12,13) 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이 前提 될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구체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한 분하 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자기 계시의 연관성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으로 분명해 진다. 구약의 하나님은 우선 자기 계시 형식, 곧 " " 형식, "나는 ...이다" 형식 그리고 "이름 계시" 형식: " " (출 3,14), 속에서 자신을 " ", " " 그리고 " " 으로 계시하신 "한 분" 성부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 " 의 하나님의 이름인 대신에, 란 이름의 뜻 를 대신 놓으면 하나님은 ( )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 "와 " " 형식 사이에는 " " 라는 <<인격계시>> 형식, 곧 구체적인 인격을 가르치는 형식을, 중간 매개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스스로 계신 분은 바로 "그분" 이라는 신앙고백의 인격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형식인 " " 는 야웨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 " (나는 야웨이다) 곧 "나는 ... 이다" 와 아주 곧바로 일치 한다. 그러기에 고전 8,6 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은 곧 성자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 고백 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신는) 성자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 이시다. 왜냐하면 "계약문" 형식: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의 근본적인 개념은, 바르트에 의하면, 바로 " " 형식의 개념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웨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길 원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인 "계약문" 형식과 "임마누엘" 형식은 "동행 내지는 소명" 형식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에 함께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혹은 그를 의지하는 신앙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확신이며, 동시에 흔들이지 않는 신앙의 내용이였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야웨" 하나님의 확언 (Zusage) 이며, 확고한 계약의 내용이였다. 스스로 계시 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 내지는 한 개인과 함께 하시겠는가? 어떻게 그들과 동행하시겠는가? "한 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친히 임재하셧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정치적 상황의 어려움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다. 이러한 역사적 계시를 우리는 사사기에서 찿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어려운 사황에서 구출한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 하였다고 사사기는 기술한다 (삿 3,7이하; 3,9하: 6,34; 11,29.30이하; 13-16, 그 밖의 삼상 11,11; 이 11,1이하; 42,2하 등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도 (눅 4,18하 평행 이 61,1-2) 말씀하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고 확언 하신 "계약형식문"은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을 계시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 있는 "사가랴 송가" 특히 1,72하: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 " 을 고려 해 볼 때에, "계약형식문"은 구약과 신약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연결시켜 주는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규정 질 수 있는 전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독교 교리에 의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갈등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형식의 변형으로 해소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의 계시 형식의 변형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삼위일체적으로 연결 시켜 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 는 말
지금까지의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내지 통일성의 근거를 요약하여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 구약과 신약은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특히 유대-기독교 공동체) 신앙고백이다. 더 나아가 이 신앙고백은 바울 공동체의 신앙고백이기도 하였다. 비록 정형화된 형식으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문이 구야과 신약에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고, "한 분 하나님"의 신앙고백은 구약에서는 창조전승, 예언자 전승 그리고 종말론에 이르기 까지 구약의 전체를 두루 지배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 유일신 사상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도, 특히 서기관이나, 율법학자 들에게, 기정 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내지 공통성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동일한 대상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근거에서 "한 분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주체인 것이다.
2) "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식은 여러 단계의 형식적인 변화를 걸쳐서 예수의 자기계시 형식에 이르고 있음이 구약과 신약에서 발견 되어진다. 즉 "한 하나님"은 자기 계시의 대상인 이스라엘 혹은 인간에게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여러가지의 계시 형식을 빌어 자신을 하셨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한 분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계시 형식의 변형 속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 형식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 에 상응하게 분리 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끝으로 다음과 같은 계발적인 결론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구약 성서의 연속성 혹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연속성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형식의 변형 속에 있다고 하겠다.
1,2. 성서의 (구약과 신약) 일치성 및 연속성에 대한 문제제기
구약과 신약의 不一致 내지는 不連續은 일찍이 2 세기 마르키온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는 그런데 문제는 19 세기 소위 역사 비평학적 성서해석학 (die sog. historisch-kritische Hermeneutik)의 연구에 의해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내지는 불연속성이 현저하게 주장되게 되었다.
1,3. 구, 신약의 연관성에대한 새로운 관심과 그에 대한 연구의 필연성
"양자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입장"이 갖는 약점은 한 분 하나님의 계시며 말씀으로서의 성서란 점을 看過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신약성서에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주는 '하나의 사실(res) 성서의 본래적 내용'이다.
선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알트하우스도 말했다:`율법과 복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구원을 위해 행동하는 하느님의 선포 속에서 신약성서의 문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통일성을 가진다.'
그 내용적 권위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느님의 원초적 말씀, 하느님 자신의 말씀에 있다. 그분은 신학의 `실질적 규범'(틸리히),`본래적 규범'(E.브룬너),실질적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댝성서의 카논 중의 카논으로부터 신약성서는 평면적인 권위가 아닌 단계적 권위를 소류한다.형식원리와 실질원리는 합치된다.
엘러트에 의하면 구약성서로부터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지지않는다.' 구약성서의 권위는 신약선서의 권위에 `종속하는' 것이지, 드와 `동등하진' 않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권위는 오로지 신약성서의 권위로부터 `도출욀' 수 있기 때문이다. 폰 라트는 신,구약간의 연속성은 특히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해 강조했다.반면에 하르낙, 트뢸취 그리고 불트만과 같은 다른 신학자들은 두 성서 간의 불연속성을 강조했드.
만댝 그리스도가 로마서 10장 4절에 기록된 대로 felosnomou,즉 율법의 `마지막'이면서 동시에 유ㄹ법의 `완성' 이라면,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불연속성과 함께 연속성 속에 있는 것이다. 신약 성서는 한편으로는 항상 구약성서를 인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자유' 속에서 그것과 대립해 있다는 사실 속에서도 이러한 불연속성 속의 연속성이 표현되어있다.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연속성은 두 성서의 하느님의 동일성 속에서도 표현된다. 비록 구약성서 속의 하느님이 신댝성서 속에서와는 다르게 향동하지만, 두 성서 속에서 행동하는 분은 동일한 하느님이다. 세상을 창조한 분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세계를 지은 분은 동일한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킨 분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들을 뵈에서 해방시킨 분은 동일한 하느님이다. 구약성서에서 잠정적으로 말씀하신 분과 신약성서에서 자신의 유일한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서 단한번 최종적으로 말씀한 분은 동일한 하느님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므로, 우리는 구약성서를 단지 종교사학적으로 신약성서 앞에 놓을 수는 없고,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와 신약성서 간의 관계가 규정하는 규정(norma normans)과 규정된 규정(norma normata)간의 관계와 같듯이, 그리스도가 신약성서를 확증하듯이,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확증한다.`ego de legi umin(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구약성서를 신약성서에 병렬시키고, 그것과 동등한 서열에 놓으며, 두 성서 간의연속성만을 가조하는 주석가들은 구약성서 안에서까지 즐겨 그리스도를 읽어내기 때문에,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동어반복어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의 반복이 아니라 실로 새로운 것,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 되려고 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능가한다. 구약성서의 메시아 예언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능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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