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갱신과 성령운동의 방향
-웨슬리의 갱신운동의 조명-
I.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그동안 여러 면에서 성장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선교 2세기인 21세기에 접어드는 오늘에 있어 뜻 있는 분들은 한국 교회를 염려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물량적인 성장을 가져오긴 했지만 내적인 갱신이 없다는 것이다.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가 많이 생겼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한다. 역사가 교훈하듯이 갱신 없는 교회 성장은 부패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 한국 교회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듯이 믿음을 강조하고 성령을 강조하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 부흥을 가져 왔다.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기사 이적, 권능을 강조하나 그에 따르는 거룩한 생활이 없기에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는 듯 하다. 믿음과 생활의 이원화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이분화 현상은 선교에서 전도와 사회참여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보수 경향이 있는 교회에서는 교회의 사명은 전도에만 있는 듯 주장하는 가하면,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참여를 주된 교회 사명으로 주장하기에, 원치않는 양극화 현상이 일고 있다.
한국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한국의 사회는 여전히 부패해 가고 있다. 문란 해진 성윤리는 그 많은 10대의 매춘 행위를 낳게 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고아 아닌 고아가 속출하고 있다. 정계나 사회에 그 많은 신자가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러 면에서 타락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비난을 듣는다. 교회의 무기력함을 들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한국 교회 성장율이 감소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곧 한국교회의 성장이 60년대는 41.2%, 70년대는 12.5%, 80년대는 4.4%, 90년대는 3%미만으로 그 성장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1991년에는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8.6%을 차지했었는데 1994년에는 18.2%로 내려와 그 동안 0.4% 정도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그보다도 교회 자체가 타락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지 않는가? 교회정치에서의 부패상이 일반 사회 정치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교회 정치에 따라오는 교권주의는 교회 분열을 초래하고 서로 비방하기에 사회를 향하여 예언자적인 사명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한국의 신학 활동이 교회 생활과 격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신학이 선교사역과 격리된 하나의 학문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신학은 직접 목회와 선교와 신앙 생활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신학은 실제 신앙 생활과 전도와 선교에 연결되는 학문이라야 한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갱신의 사역 곧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요청되는데, 우리가 바라는 성령 운동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는가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18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웨슬리의 신학과 갱신 운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운동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 (Carl Henry)가 지적했듯이 근대 교회사에서 교회갱신의 본보기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나이더는 말하기를 웨슬리의 운동은 역사 속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가장 으뜸가는 본보기이다라고 지적하면서 그의 운동이야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하고 일상 생활에서 참 기독교 공동체의 힘을 알게 하는 대중 운동이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한편, 오늘의 한국의 사회상이 18세기 영국의 부패상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가 부패하였듯이 18세기의 영국 사회는 부패했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전반이 부패하고 있었다. 이웃나라 불란서도 그랬다. 그러기에 이웃나라 불란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그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면에서 새로워지는 색 다른 혁명이 있었다. 곧 웨슬리의 운동을 통한 갱신이었다. 웨슬리야말로 18세기의 영국의 부패했던 사회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부흥시킨 신학자요 지도자였다.
그래서, 필자는 웨슬리의 선교, 갱신운동의 특징을 고찰하고 한국 교회에 조명해 봄으로,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앞으로의 성령운동의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웨슬리의 선교 활동 곧 갱신 운동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II. 갱신의 모델로서의 웨슬리의 선교운동의 특징
2.1. 회개를 강조하는 전도
1738년 올더스게이트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앙체험을 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세계를 나의 교구로 여긴다고 하면서 교회당에서의 설교뿐 아니라 들과 광산으로 사람을 찾아가 설교를 하였다. 1738년 이후로부터 계산해 51년 동안 마상(馬上) 여행을 25만 마일이나 한 셈이며, 하루에 90마일씩 여행하며 두 세 번씩 설교하였다. 대략 4만2천 4백번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는 한 해에 800번의 설교를 한 셈이 된다. 웨슬리는 자신이 말한 대로 설교로 생을 보낸 전도자였다. 이런 웨슬리의 열정은 영국을 넘어 아일랜드와 미국 등 외국으로까지 펴져 나갔다.
웨슬리의 설교의 테마 (theme) 는 성서적 구원이었다. 그의 설교는 될 수 있는 대로 평이하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외침으로서 가난한 사람들, 절망에 빠져있는 민중에게 소망을 주며 구원의 비전을 주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당시의 명색뿐인 신자들(Nominal Christians), 곧 얼굴은 천국을 향해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형식주의자들에게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고 외쳤다. 이런 운동은 당시의 영국 교회가 이성주의와 자연신론에 물들어 있던 지적인 상황에 항거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천명하는 운동이었다.
웨슬리는 복음을 말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가 인간의 죄를 심각히 인지한 점에서 종교개혁자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했고 영적인 생명의 관계를 상실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과 순종은 자기사랑과 자기의지로 대치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진노의 자식'이란 원죄의 죄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곧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가 없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첫 근거(the first ground)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은혜를 받은 영안(grace healed eyes)에만 알려진 진리요, 이방인과 눈이 먼 자연인은 식별치 못하는 진리로서, 이방인들은 자기의 부패를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은총 만이요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이다. 일부에서 웨슬리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하여 그가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이니, 인본주의 신학자이니 하는 말은 웨슬리를 올바로 이해 못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그의 동역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죄를 강조하는 면에서는 칼빈주의의 끝에 (very edge of Calvinism) 이르렀다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how to operate)에서 머리칼 하나의 차이(a hair's breadth difference)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우리는 웨슬리가 개진한 은총관의 특징과 그 선교학적 공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신학을 설교의 광장에서 개진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신학은 선교와 직결되어 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the whole council of God)'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련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이런 출발점에서 웨슬리는 설교 도장에서 청중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또한 동시에 듣는 자의 호응(회개와 믿음)을 호소하였다.
이런 신학적 입장에서, 웨슬리는 청중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의 설교 본문 가운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16:15)는 말씀을 제일 많이 (무려 190회나) 사용했다. 그의 설교의 한 단면을 들어 보자.
진실로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당신들도 또한 거듭나야 합니다. 당신들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례에 의해서 거듭났다고 하는 상한 갈대로 만든 지팡이를 더 이상 의지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거듭나야 합니다.
사실 웨슬리는 1725년부터 시작한 그의 초기의 설교사역에서는 회개를 별로 강조하지 아니했다. 그 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이미 신자인 줄 알고 그들은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738년 이후의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가 주축 돌이 되어,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은 마른 덩굴 속의 불처럼 역사하여, 군중들은 모두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로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며, 명목상의 신자들이 새롭게 거듭남으로 진정한 교회 갱신은 시작되는 것이다.
2.2. 성결 곧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갱신운동.
2.2.1. 구원에 있어 성화를 더 강조하다.
웨슬리는 신자들이 거듭난 것으로 자족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여야 하며, 성장의 과정에서 성령 충만으로 큰 변화 곧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웨슬리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through love)이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구원 받은 자의 생활에서의 변화, 더 나아가 교회와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후년의 설교 메시지의 중심은 성서적 성결(Scriptural Holiness)이었다. 그는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메소디스트에 부여하신 거대한 기탁물 (the grand dipositum)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메소디스트를 일으키신 것이라고 믿으며 전국에 다니며 외쳤다.
웨슬리의 사역은 이렇게 함으로 무기력한 신자들에게 활력소를 불어 넣는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런 웨슬리의 성결운동은, 역사가들이 증명하는 대로, 18세기 영국 교회를 부흥케 하였으며 또한 갱신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다시 부흥과 세계선교의 불길을 일으켰다. 미국의 성결운동에서는 웨슬리의 성결의 은혜를 성령의 불세례 또는 성령 충만으로 표현하고, 신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웨슬리의 성결운동 (곧 성령 충만 운동)이 교회 갱신에 특별한 공헌을 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성결론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 가야 하겠다. 웨슬리는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거듭거듭 아주 쉽게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들이 무엇인가를 외쳤다. 바로. . . 이 교리들에 의하여 우리들은 이교도(heathens), 그리고 명목적인 신자(nominal Christians)와 구분된다. 이 교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교리를 포함한다. 이 주요 교리는 회개(Repentance), 믿음(faith), 성결(holiness)의 교리이다. 회개가 마치 종교의 현관과 같다면 믿음은 문과 같고, 성결을 종교자체 이다. . . 여기서 종교자체라는 것은 곧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종교개혁자들이 구원론에서 의인(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는 위대한 재발견이요 중요한 교리이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에서는 믿음만 강조하는 나머지 도덕 폐기론 (Antinomianism)에 이르는 경우가 있어, 신자들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위로에서 개인의 윤리 생활과 사회정화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믿음과 생활의 이원성을 초래하고, 교회의 부패를 가중시켰다. 이에 웨슬리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신자를 새롭게 하는 역사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후자 곧 성화(Sanctification)를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2.2.2. 성화의 과정
그러면 이 성화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화(성결)의 과정에 대하여, 웨슬리는 첫째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이는 사람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당시의 모라비안 파들은 신비주의자들로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에 아주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마치 어린이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거듭난 신자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이 거듭난 후에도 신자 안에 아직 내재적인 죄가 남아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는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의 밭에서 성화론을 개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성화는 목적론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이지만, 그 점진적인 성장과정에 순간적인 요소(instantaneous element)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웨슬리가 성화의 과정에는 신생과 같은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거듭난 신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무능(impotence)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에서 씻음을 받는 순간적인 역사 곧 온전한 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신자는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 보다 높은 은혜를 사모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웨슬리의 이런 주장은 신자가 되면 죄를 짓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회개가 필요치 않은 양 생각하던 자들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웨슬리는 신자가 온전한 성화(성령충만)의 단계에서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받을 뿐아니라 부르심에 종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를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서 웨슬리가 온전한 성화 또는 기독자의 완전을 말하는 것은 철학적인 개념에서의 절대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곧 성서가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도 절대적인 완전은 영화의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점에서 웨슬리는 개혁신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기에 웨슬리가 말하는 기독자 완전은 타락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 곧 무지,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받은 신자도 실수할 수 있으며, 무의적 죄(無意的 罪) (in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perfect law of God, known or unknown)를 범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여, 웨슬리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약성(infirmities) 자체를 죄로 보지 않지만, 신자가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은 그로 인하여 실수나 무의적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성결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완전한 신자도 순간 순간 회개와 믿음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완전한 성결은 계속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의 신자의 회개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여...당신의 죄를 그의 몸으로 친히 감당하신 예수를 계속하여 믿으시오! 그는 항상 효험있는 그 보혈로 인하여 당신을 모든 정죄 함에서 구원하십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됩니다. . .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 순간 당신의 죽으심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 순간 당신의 죽으심의 공로가 효험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 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며, 바로 이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간 순간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낍니다. . . .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웨슬리는 무의적으로 범죄하는 신자의 실상과 믿는 자에게 효험 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곧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헌신과 사랑의 삶인 것이다.
2.2.3. 온전한 성화의 본질 - 완전한 사랑
웨슬리는 성화를 신자의 하나님과 사이의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성결의 본질을 '순전한 사랑' 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사랑이란 순수하면서 동시에 무한이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가 말하는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죄적인 것을 모두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하여 일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화는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단 없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지속되며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은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웨슬리가 강조하는 온전 성화는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앉아 있는 삶이 아니라 사랑의 활동으로 살아 가는 사랑의 생활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미국의 성령운동이 부흥운동의 물결을 타면서 온전한 성화 곧 성령충만의 순간적 체험을 강조하는 나머지, 성화의 지속적인 과정의 중요성을 약화시킨 것은 잘못이다. 웨슬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성화의 지속적인 과정에 더 강조점이 있었던 것이다.
2.2.4. 성화는 홀리시틱한 선교의 동기와 근거
웨슬리가 성화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는 그의 강조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성령충만은 곧 권능이요, 신자들은 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양 생각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웨슬리는 신자들이 오로지 권능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신자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기독자의 완전의 본질을 사랑으로 이해할 때, 성령 운동은 신자의 윤리 생활, 사회 갱신운동으로 나타난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social religion)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결(mere holiness)은 없고 사회적 성결 (social holiness)이 있을 뿐이다.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는 바로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이다. . . . 사실에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선한 일'에 열심을 아니 낼 수가 없다. 그의 영혼에는 형제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함께 있어 주기를 열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주님이 그랬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의 행동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떠나서의 성결은 그 내용이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폭 넓은 사랑(comprehensive love)이다. 그러므로 메소디스트는 첫째로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며 또한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고 웨슬리는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리의 선교 사역은 사회 참여를 동반한다.
2.3. 사회참여를 통한 행동의 선교
성결 메시지에 근거한 웨슬리의 선교 활동은 처음부터 말로서의 전도와 행동으로의 사회참여를 병행하였다.
웨슬리는 당시의 목회 지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서 평신도들의 사역을 분담시켜 사회사업, 교육 사업, 고아 사업 등의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선교 활동은 힌슨이 지적한 대로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마크바르트가 지적한 대로, 웨슬리의 설교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 개인들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듭나며 성결케 되어 의미있는 사회 생활을 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활동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메서디스트가 행한 사회참여는 어떤 것들 이었는가?
2.3.1. 사회 구호, 민생 사업
웨슬리가 주도한 옥스포드에서의 신성 클럽의 활동은 회원 자신들의 경건 생활 뿐 아니라 자선사업을 꾸준히 시행했다. 그들은 일반 사회에 편만하고 있는 음주, 증수회(bribery)를 시정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다. 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밀수, 도박, 도둑 행위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 교회 내에서의 선거에 따르는 부패를 지적하고 시정에 나섰다.
메소디스트의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감옥을 찾아가 사역하였다. 그리고 1778년의 연회(Annual Conference)는 교역자들이 감옥 심방(Prison ministry)을 의무화하도록 결의까지 하였다. 그의 사회참여는 자선사업에 머문 것이 아니고, 민생 사업(development)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편물 공장, 빈민 학교, 의료원, 빈민 은행, 고아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2.3.2. 사회 정치 참여
웨슬리의 선교 활동은 정치적 면에도 관여하였다. 당시의 노예문제, 감옥의 상태 또는 산업에서 가진 자들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항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국가적인 선거에서의 부패를 지적하여 경고하며 공정한 선거를 호소하는 팜프렛을 발행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영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노예매매(the slave trade)가 1897년에 폐지될 때까지의 웨슬리의 공헌은 컸다. 사실 이 일에 웨슬리가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1774년에 웨슬리가 발행한 노예매매에 대하여(thoughts upon slavery)라는 책자는 유명하다. 웨슬리는 이 글에서 당시의 노예들의 상태와 노예 매매자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동시에, 노예매매를 정당화 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맹렬히 반박했다. 그리고 노예매매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채찍, 쇠사슬이나 강제성은 다 버리고 모든 사람을 인간답게 다루며, 친절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피 묻은 죄로부터 손을 씻으라고 호소했다. 이런 웨슬리의 주장은 소책자로, 편지로, 또는 설교로 전개되었다. 웨슬리는 이런 주장을 당시의 정치가들에도 호소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주장이 마침내 1789년에 미국 감리교회가 연회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건의하게 하였다.
위에서 간략하게 보았거니와 웨슬리의 선교운동은 홀리시틱한 (holistic) 것이었다. 특히 웨슬리는 전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라는 전통적인 방법을 우선적으로 하였지만, 결과는 최근 일각에서 사회 참여만을 고조하는 사람들의 사역보다 더 큰 효과를 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2.4. 표적이 따르는 능력 전도
웨슬리가 성서와 체험을 통하여 재발견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거듭나게 하며 성결케 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 증거하며 때로는 외적 표적으로 전하는 말씀을 확증하여 주는 것이었다.
2.41. 전도 사역에 기사 이적이 나타남
웨슬리의 일지를 보면은 그는 그의 사역에서 많은 기사 이적이 동반되는 것을 체험했다. 신유의 역사도 있었고,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 등, 여러 가지 표적이 따름을 체험했다. 그런 성령의 강한 역사는 때로는 야외에 2000명 이상의 증인들 앞에서도 나타났다. 명실 공히, 웨슬리의 사역은 초대교회에서 보듯이 말씀의 전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에 그의 복음 증거는 권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문제 때문에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때로는 그들로부터 열광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영국교회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나 성령의 기사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명한 정통주의 신학자요 부리스톨의 감독인 버틀러(Bishop Butler)는
웨슬리에게 당신이 집회에서 사람들이 발작을 하고, 그러면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들었는데 ... 성령의 기적적인(extraordinary)계시나 은사들이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무서운 일,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당신은 이 지역에서 설교하지 말고 떠나라"고 충고했다. 이런 반대자는 버틀러 감독뿐 만이 아니었다. 릿치필드의 감독은 출판물까지 발행하여 웨슬리의 주장은 열광주의자들의 교리며, 무용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며, 내적 증거를 한다고 주장한다던가, 또는 성령에 의하여 기도하고 설교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기적적인(비정상적인) 은사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런 사역은 사도 시대와 초대교회에만 속한 것이다. 따라서 말세(오늘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이는 열광주의자들의 교리이다.
타이어맨에 의하면, 이런 반대는 기브손 감독(Bishop Gibson), 와버튼 감독(Bishop Warburton) 등 여러 지도자들 그리고 불신하는 일반 신자들로부터도 있었다.
2.4.2. 기적을 부정하는 신학자들에 대한 충고
그런 논란 속에서 웨슬리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동료 교역자들과 상의도 하며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변호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의 입장을 말하였다.
지금도 복음이 권능으로 전파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살고 있다면, 성령은 극적인 은사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 곧 성서시대에 성행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사도시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그런 역사가 현재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교회가 콘스단틴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성도가 세속적인 교인이 되어 신앙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 이적들이 정지되고 있음은 교회가 평온과 안전 속에 있으면서 안위와 명예롭게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지 성령이 후퇴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비난과 공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Inspiration)과 증거(Witness)는 필요한 것이며 항상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성령의 증거는 웨슬리에 의하면 직접적이며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체험 되는 것이로되,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곧 신자에게 역사하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지만, 성령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역사하신다. 어떤 때에는 강한 능력으로, 또 어떤 때는 조용히,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이런 성령의 내적 역사는 때로는 기사 이적과 같은 기이한 현상도 동반한다.
웨슬리는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듯이, 복음이 능력으로 전파되며 진실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지금도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나타난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말한다. 성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시게 하시오. 성령은 당신보다 더 현명하시며, 그 분은 모든 일을 잘 행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19세기 미국에 있었단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활발하게 나타났고, 최근에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운동에서 메아리치고 있음을 본다. 로잔운동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의 선포에는 기사이적이 동반함을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며, 이는 사탄에게서의 해방, 곧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냄을 부분적으로나마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어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내적으로 이루어진 사역의 내용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냐 하는 문제라고 한다. 후자가 본질적인 것이라면, 전자는 우연적인 것(accidental)으로 그 표적이 다양하다. 본질적인 것이 없는 현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내용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은혜의 경험도 강조했지만, 그의 신학의 최고권위는 성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나의 근거는 성서이다. 그렇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서를 따른다 고 하였다. 여기에 웨슬리는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기에 이른다.
2.4.3. 열광주의 자들에 대한 경고
당시의 열광주의자들은 나타나는 현상과 표적에 치중하여, 은혜의 수단(교회출석,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 또한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일들)을 무시했다. 때로는 입신함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간주하며 정숙주의(Quietism)에 빠졌다. 이에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그릇됨을 지적하면서 시정하려고 했다. 웨슬리는 때로는 마귀의 역사도 흡사한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교인들의 형식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다른 한편 열광주의를 따라 악마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에 주관점을 두었기에, 성령적 설명을 피한 것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의 은사를 특별 은사(extraordinary gifts )와 일반적 열매(ordinary fruits)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성령의 일반적 열매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웨슬리에 의하면 특별 은사는 신유와 그 밖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영 분별의 능력, 여러 가지 방언을 하는 능력과 통역하는 능력 (고전12:9-10)등을 말하며, 이런 은사는 어떤 일부 사람에게 어떤 때에 주시는 것이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반적 열매는 윤리적 사역과 연관된 것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이는 보다 훌륭한 목적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함이요, 따라서 내적 변화의 결과로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를 하는 중에 그리스도가 행한 것 같이 행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웨슬리의 사역에서는 19세기 미국에서의 성령운동에서 보듯이 특별 은사를 위한 집회같은 것은 가지지 않았다.
2.5.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 (ecclesiolae) 운동으로 교회 갱신
2.51. 타락한 교회 안에서의 작은 교회의 사명
웨슬리는 기독교의 특색은 그 시작부터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다고 말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경에 나타난 성령이 충만한 교회와 신앙을 보면은 개인들이 다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고 거듭날 뿐 아니라, 영적 확신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한 것이다. 모든 사역자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였다. 그런데 그 어간에 가라지가 뿌려져서, 다시 말해 악의 신비(the mystery of iniquity)가 역사하여서 교회는 타락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해가 순수한 기독교에 영속적인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이요, 기독교의 법을 성취시키는 것 곧 겸손과 온유와 인내하는 사랑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큰 타격을 교회가 받게 되는데, 그것은 4세기 때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콘스탄틴 대황제에 의하여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직자들이 부귀와 영화와 세력을 누릴 때였다. . . . 그와 마찬가지로, 박해의 공포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부귀 영화를 누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으로 타락하고 갖가지 악으로 빠져 들어갔다.
웨슬리는 역사 속에 있는 교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타락한 교회라고 본 것이다. 18세기의 영국 교회도 타락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같이 타락한 교회라도 교회 그 본래의 표적, 곧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 성례전의 정당한 집행이 있고, 그 곳에 순수한 성령의 임재가 있다면 여전히 교회라고 보았다. 곧 형식적 의미에서는 영국 교회는 아직도 참된 교회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가 교회를 이원적으로 곧 변증법적 대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본다.
웨슬리에 의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가 거룩하시며, 또한 교회의 모든 제도가 성결을 촉진시키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 면에서는 여전히 거룩한 교회이다. 이것이 교회의 객관적인 거룩이다 (given holiness). 그러므로 비록 무가치한 교직자가 성례전을 집행했다 할지라도 그 성례(Gods ordinance)에 따르는 그 효과를 막는 것이 아니다. 전달자 (성례의 집행자) 자신은 은혜를 받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단절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그 개관적인 성결이 신자들의 삶 속에서 호응되는 주관적 성결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교회는 진정으로 거룩한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동역자로서 교회를 참으로 거룩한 교회 되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런 사명이 바로 당시의 메소디스트 그룹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그는 메소디스트를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라고 부른 것이다.
메소디스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한 삶의 훈육 아래 큰 교회 안에서 성결의 누룩( a leaven of holiness)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자의로 모인 그룹으로서, 대외적으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 생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대내적으로는 교회를 새롭게 하며 부흥케 하는 역할을 하였다. 스나이더는 메소디스트의 갱신운동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메소디즘은 영적인 갱신운동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하고 일상 생활에서 참 기독교 공동체의 힘을 알게 하는 대중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역사 속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가장 으뜸가는 본보기이다라고 하였다. 메소디스트가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신자들을 훈련했다.
2.5.2. 신자 훈련을 통한 조직적 사역
웨슬리는 메소디스트가 성결의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평신도를 훈련시켜 효율적으로 봉사하게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만인제사직이다. 그러나 실제 교회 생활과 전도사역에서 웨슬리만큼 이 원리를 활용한 지도자는 없었다. 웨슬리는 모든 신자를 조직적으로 훈련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조직적으로 전도와 봉사에 참여케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웨슬리는 신자들을 하나의 속회 (the class meeting)로 12-13명, 또 그 안에는 착실히 믿는 사람들을 조(Band)로 6명 정도, 그리고 특별 신도회 (the selected society)라고 해서 특별한 핵심 분자들을 모아 그룹별로 훈련을 받게 하였다. 여기 특별 신도회 회원은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서약과 함께 모든 사유재산까지도 다 맡기면서 신앙 훈련을 받고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수행하였다.
웨슬리는 평신도들을 그와 같이 동원할 뿐 아니라, 그들을 계속적으로 훈련하였다. 평신도 전도자들로 하여금 투철한 신앙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지식을 쌓게 하기 위하여 하루에 5시간식 독서를 시켰고, 1주일에 2회 이상 설교를 하게 하였다. 그래서 메소디스트가 10만 명일 때에 평신도 지도자로 내 세울 수 있는 일꾼이 1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이 평신도의 영성 훈련(spiritual formation)을 통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전도에 임하게 하는 운동이 결국은 교회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교회를 부훙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2.5.2. 카리스마적인 것과 제도적인 입장을 종합한 교회갱신
웨슬리가 메소디스트를 하나의 eccelesiolae로 주장한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웨슬리는 자기들은 큰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작은 모임(작은 교회)으로서, 메소디스트들은 자신들만을 위하여 사는 분리된 종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전체 교회를 강건하게 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존속한다고 믿었다. 다른 말로 표현해, 웨슬리는 당시의 퇴폐적이었던 큰 교회 안에서 그 교회를 진정한 기독교로 갱신하려는 운동으로, 여전히 영국교회에 예속된 그룹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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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웨슬리는 교회갱신의 패턴에 있어, 카리스마적이면서도 제도적인 견해를 지녔던 것이다. 웨슬리의 교회 갱신의 입장은 비유컨대 하나의 크고 오랜 나무가 새 싹을 내면서 계속 성장하여 나가는 모습, 곧 큰 나무는 부분적으로 죽었지만 새로운 싹을 내며 성장해 가는 고목과 같이, 교회는 부분적으로 타락했으나 그 안에서 새롭게 솟아 나오는 새 생명 곧 갱신운동이 있어, 교회는 교회로서 지속되는 것을 지향했던 것이다. 이런 갱신운동은 제도적인 교회와 갱신운동이 상호 의존적이요 또한 공존한다는 것이다.
2.6. 성령체험으로 가슴 뜨거워진 지도자의 경건 생활
2.6.1. 웨슬리의 가슴 뜨거워진 체험
역사가 렉키는 그의 저서, 18세기 영국사 에서 말하기를, 웨슬리가 16세기 이후 어느 누구보다도 실제 종교 생활에 광범위하게 건설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영국을 새롭게 하는 한 혁명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런 선교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물론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그의 복음적 메시지와 조직적인 선교사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놀라운 선교운동은 웨슬리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성령 체험과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에서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웨슬리의 생애를 상고해 보면, 웨슬리의 선교 활동에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성령체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자명하다. 웨슬리는 그때까지 지식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체험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은 그로 하여금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이런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참 믿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되었다. 스타키가 지적한 대로 이런 성령의 증거가 웨슬리의 신앙 생활에 능력과 목적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의 전도 사역은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에 힘입어서 힘차게 전개되어 나갔다. 곧 웨슬리의 복음 증거는 말과 행동(사회 참여) 그리고 능력으로 수행된 것이다.
2.6.2. 웨슬리의 경건 훈련
웨슬리의 그런 능력 있는 사역 뒤에는 철저한 경건생활이 있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 성실하게 주님과 교회가 제정한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불일 듯 일으켜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생각을 갖고 하루를 살았다. 아침 4:30부터 5시 까지 기도를 하였다. 50년간을 계속하였다. 그는 금식 기도를 주기적으로 행하였다. 초대교회의 실행을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경 한 책의 사람 (homo unis libri) 이었다. 이 말은 그가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는 많은 독서를 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최고의 권위인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고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가 자기의 신앙 문제를 점검할 때는 늘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주석을 저술하였다.
III.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하여 강조할 성령운동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갱신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직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럼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성령의 역사의 어떤 면을 강조하여야 하겠느냐를 논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웨슬리의 갱신 운동의 특징을 한국 교회에 조명하여 볼 때에 우리가 얻는 주요한 교훈은 어떤 것일까?
3.1. 회개의 역사를 강조하여야 한다.
첫째로, 교회의 강단은 복음적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웨슬리 운동에서 그랬듯이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전도 메시지가 분명하며,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하시는 첫째 사역이 바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일이다.
웨슬리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설교사역을 열심히 하였지만, 회개를 강조하지 않을 때는 전도의 열매가 없었고, 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 후에, 그의 메시지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회개를 강조할 때에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부흥과 갱신의 본보기로 지적되었던, 1907년의 부흥운동이 바로 회개를 강조한 전도가 아니었던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전도 메시지가 결여 되고, 메시지가 기복신앙에 근거하거나, 그저 도덕적인 훈화로 변할 때, 진정한 교회 부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강단의 메시지가 세속적인 축복을 말하며, 복음의 핵심이 빠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그렇다면 신자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신앙에 대한 열망은 자연히 감소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한편, 소위 2,3세 교인들은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오며 신자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구주를 믿는 신앙의 체험이 없다면, 그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일 뿐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근래에는 특별한 신앙적 확신 없이 교회에 나오며 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인이 되는 것이 사회에서 하나의 신용(credit)을 얻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에는 형식적인 교인 곧 명목상 교인 (Nominal Christian)의 숫자가 많아 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18세기의 영국교회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형식적인 교인들로 채워지며, 따라서 영적으로 무기력할 뿐 아니라, 부패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자연이 쇠퇴한다. 김승연 목사가 한국 교회가 1970, 80년대의 부흥 이후에 일어난 한국 교회의 침체 현상이 바로 여기서 왔다고 관찰한 것은 옳다고 사료된다.
웨슬리의 사역에서 그랬듯이, 회개를 강조하여야 한다는 것은 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곧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을 믿는 신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는 데는 진정한 전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는 세속화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하는 회개는 사람이 거듭나기 위하여서 뿐 아니라, 신자의 회개도 포함한다. 곧 신자가 된 후에도 부단히 회개하여야 함을 웨슬리는 주장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모든 단계에서 계속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여진 경주를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말한 그 회개와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은총 안에 계속 머무르며 성장하기 위해서도 회개와 믿음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곧 신자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고 해도 죄에 대해 책임이 있고 무력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여야 한다. 웨슬리는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 위하여서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그의 설교,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와 신자의 회개에서 역설했듯이, 거듭난 신자가 죄(죄책)에서 용서를 받았으나, 아직도 그 안에는 시기와 질투, 자만, 이기심,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같은 내재적 죄(inward sin)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자도 보다 성숙하여지기 위하여 이런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를 웨슬리는 신자의 회개라고 하여 거듭나기 위한 회개와 구분하였다.
한국 교회 일부에서 신자가 되면은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며 신자는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18세기의 도덕 패기론과 비슷하여, 교인들의 신앙과 윤리를 이원화하는 악 영향을 주고 있다고 염려한다. 웨슬리가 성결의 복음을 강조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런 도덕 폐기론적 입장을 취하는 교인을 향한 큰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하여 강조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미국에서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는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를 성령 충만으로 표현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교인이 성숙하여지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강조한다. 성령 충만으로 능력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성령충만은 적극적인 면에서는 능력을 받는 것이나, 동시에 소극적 면에서 내재적인 죄에서의 씻음의 역사가 있음을 말한다. 곧 성령충만은 권능(Power) 만이 아니라, 성결과 능력(holiness and power) 인 것이다. 사도들의 사역과 증언에 의하면 위의 두 가지가 다 있었다. 사도들이나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 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 하셨느니라 고 증언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신학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학파가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능력만 구할 때, 그 결과는 교만해지며 권위 주의로 빠지는 위험이 있다. 한국 교회 일각에서 지도자들의 부도덕한 행위가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생각하는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웨슬리가 강조하는 성결의 메시지가 주는 교훈이 크다고 본다.
3.2. 성결 곧 성령 충만의 생활을 강조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웨슬리가 주는 중요한 교훈은 성결 곧 성령 충만의 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거듭남으로 자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직도 신자 안에 있는 죄와 무능함을 깨달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을 뿐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어 주의 일에 봉사하도록 하여야 한다.
일부에서 가르치는 대로, 인간을 육을 가지고 있기에 죄인일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하거나, 또는 그러니까 신자는 죄를 지어도 (예정되었기에)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데는 참다운 갱신의 동기가 생기지않는다. 여기에, 웨슬리가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현재 여기에서 우리를 성령충만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실 수 있다고 기대하는 가운데, 회개와 믿음으로 그 은혜를 사모하며 나갈 때, 새로운 부흥과 갱신이 있게 될 것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역사는 바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전장 에서 언급하였듯이, 웨슬리는 성령충만 곧 그가 말하는 기독자 완전이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에서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한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의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허물(sins unintentionally committed) 때문에 완전한 자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늘 기도하여야 하며, 매 순간, 주여, 나에게는 당신의 죽음의 공로를 필요로 합니다 고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곧 순간 순간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와 씻음을 받음으로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결 곧 성령충만은 순간 순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헌신하는 생활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충만 곧 온전한 성화의 본질을 완전한 사랑으로 강조한 것을 위에서 설명했다. 곧 그가 말하는 기독자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한다. 이는 죄를 내 쫓는 사랑이며, 또한 영혼의 전체를 주관하고 온 마음을 채우는 사랑 으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들을 능력으로 행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함으로 성령의 운동은 홀리시틱한 전도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랑이 선교의 동기와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선교를 주장함에 있어, 한편에서는 전도 만이요,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참여를 강조함으로 양극화 현상을 이루는 경향을 언급한바 있다. 선교에 있어 전도냐, 사회참여냐 하고 둘을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 식으로) 대조적으로 인식하면, 반동의 원리(principle of reaction)에 따라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지난 날에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사회 참여에 새로운 관심과 강조를 두는 교회가 많은 것을 본다. 이는 격려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20세기 미국교회에서 그렇게 되었듯이 한국 교회가 사회 복음운동으로 변해, 마침내 선교의 다이나믹을 잃을 가 염려하는 바도 없이 않아 있다.
이 점에 있어, 웨슬리에서 보듯이 성령 운동을 완전한 사랑의 운동으로 강조할 때, 그런 이원화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폭 넓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교회 선교는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holistic) 것으로 전도와 사회참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선교운동은 역사적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3. 복음은 말과 행위 뿐 아니라 권능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웨슬리는 성령충만의 본질을 완전한 사랑으로 강조하였다 하여,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나타내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주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기사 이적도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전도에는 악의 주관자와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이 있으며, 진정한 회심에는 언제나 영적 힘의 대결이 있으며, 이 대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한 권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웨슬리가 주장했듯이 오늘도 사도시대에 나타났던 성령의 강한 역사 곧 기사 이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웨슬리의 전도 사역에 가끔 성령의 기사 이적이 동반했듯이, 현재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기사 이적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를 배격하며, 열심히 기도하여, 말씀과 성령의 영적 무기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그랬듯이 동반하는 성령의 기사 이적으로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확증되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완악한 세대요, 복음 전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에서는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여야 될 줄 안다.
웨슬리의 전도에서 그랬듯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이 말과 행실 그리고 능력으로 증거될 때, 우리의 복음 증거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보다 충실히 증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하여 우리의 힘으로 전도하려 했던 것과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을 회개하여야 한다. 앞으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복음을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전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곳에서 보듯이 무분별하게 기사 이적을 요구하거나, 그런 집회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가 그랬듯이 모든 크리스천에게 필수적인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열매를 보다 사모하여야 한다. 우리의 주요 관심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Lord and Savior)로 받아드리는 기회를 갖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선교에서 그랬듯이 우리는 전도와 말씀선포에 우위성(primacy)을 두어야 한다.
3.4. 평신도를 훈련하여 사역자로 봉사케 하여야 한다.
네 번째로는, 교회를 새롭게 그리고 활기있게 하기 위하여, 웨슬리가 했듯이, 평신도들을 훈련하여 봉사케 하여야 하겠다.
전도자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성령의 직임과 은사를 주시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 여기서 특권으로 받은 목사와 교사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 곧 평신도를 성숙한 일꾼으로 양육하고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인 것이다. 교역자들은 사역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하고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함으로 사역을 증폭시켜야 한다.
만인 제사장직 (믿는 자 모두의 제사장직)을 주장하는 우리는 과감히 평신도 모두가 사역자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선교 상황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로서, 오늘의 사회에는 직장과 상황에 따라 모두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교역자와의 만남, 또는 교회 출석이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들이 각층에 있다. 이들 모두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길은 그 계층에 있는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사역자가 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남녀 평신도들의 복음 증거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친교를 통해서도 이루어 질 것이다. 평신도를 통한 전도는 주로 그들의 직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또한 직장이 신자가 복음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커뮤니케이숀의 갭(gap)이다. 강단의 언어가 어떤 계층의 그룹 예를 들어서 오늘의 청소년 세대에게는 통 하지가 않는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그 계층의 평신도를 훈련시켜 그들이 사역자가 되게 하면 그들을 통하여 그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도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활동이 활발해 진 것은 사실이나, 보다 폭 넓은 그리고 철저한 훈련과 봉사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평신도를 훈련시킴에 있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남자와 여자들에게도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더욱이 과거의 역사를 보면은, 역사적인 교회가 부패하여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평신도의 그룹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신 때가 있음을 알기에 평신도의 신앙 운동의 중요성은 막중하다 할 것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성결의 누룩의 사역은 바로 평신도 운동에 기대하여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은 교역자나 교회가 그들의 운동을 인정하고 수용 하는 것이다. 곧 제도적 견해로 그들이 일으키는 새로운 운동을 질식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도적 교회관을 안 가졌다고 하면서도 교권주의로 흘러 그런 과오를 범하는 예가 적지않게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새로운 운동을 하는 그룹은 웨슬리가 지향했듯이 교회 안에 있는 에클레시올레 (eccelesiolae)로 교회에 속하며 교회를 갱신하는 그룹으로 머물러 그 사명을 다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5.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고 경건한 지도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다섯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웨슬리의 갱신 운동에서 보는 것은, 지도자 자신의 성령체험과 경건 생활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갱신을 위하여 사역자들의 신앙과 성실성, 더 나아가 증인으로서의 교인들의 생활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증인의 생활이 외치는 복음과 불일치 하는 것만큼 복음전파에 방해되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며 복음을 빛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증인들은 성실하여야 한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어려운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일 때, 교회가 외치는 화해의 메시지는 그들 속에서 역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 지도자들, 교역자들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가슴 뜨거운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역한 것을 보았다. 오늘의 한국 교회 전도자들에게도 이런 확신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헌신이 있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런 교역자를 양성해 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신학교육이 새로워져야 하겠다고 절실히 느낀다.
IV. 맺는 말
우리는 웨슬리의 갱신 운동을 조명하여 봄으로,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하여 우리가 강조하여야 할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연 한국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을까 하고 비관하는 소리가 마음 속에서 나올 때가 있다. 그는 오늘의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너무나 실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살펴 본 웨슬리의 갱신 운동의 역사적 본보기는 한국 교회에 희망과 기대를 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역사하시기에 갱신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당시의 상황에 절망하여 소망을 포기하려 할 때, 여호와께서 나(여호와)를 위하여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아니 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듯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를 두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거룩한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타락을 걱정하는 작은 교회와 성도가 있어 남은 자로써 성결의 누룩의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새로워 질 것이다. 역사 속에 있는 교회가 타락하고 있으나, 그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가졌던 믿음이요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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