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신학과 평신도
계명대 / 정중호
I. 제사장신학은 누구를 위한 신학인가?
현대의 목회자들이 장로와 권사를 포함한 평신도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 들이면서도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평신도를 위해 크게 배려하고 평신도를 위해 정성을 쏟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현대의 목회자들 못지 않게, 어쩌면 훨씬 더 진취적으로 평신도를 위한 목회를 구상한 사람들이었다.
제사장신학(Priestly Theology)이 담겨진 책을 들자면 먼저 레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는 구약에서 가장 읽혀지지 않은 책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그 책에 담겨진 제사의식이 구시대의 유물이며 현대의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복잡한 제사 규정은 일반 백성이 아닌 제사장들이 알아야 할 특수한 지식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를 펼쳐보면 레위기가 제사장 지침서이면서 동시에 평신도의 지침서이고 오히려 평신도가 반드시 알아야할 사항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레위기의 첫머리에는 야훼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자손" 즉 평신도에게 레 1:1-6:7의 내용을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리고 레 6:8에는 다시 모세를 부르셔서 "아론과 그 자손" 즉 제사장들에게 레 6:8-7:38의 내용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두 부분이 제사 규정을 완성시킨다고 볼 때 제사장을 위한 부분이 평신도를 위한 부분의 보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의 배열의 특이함만 보아도 평신도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특출함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사장이 잘못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내용까지 평신도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신학을 이처럼 평신도에게 개방하였다는 것은 그당시 타종교의 예와 비교해 볼 때 파격적인 개방이라 볼 수 있다.
제사장신학에서 평신도가 강조된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평신도와 가장 가까이 있으며 평신도와 자주 접촉하고 평신도를 여러 시대에 걸쳐 줄기차게 이끌어 온 종교지도자는 예언자라기 보다는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예언자가 제사에 관해 비판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이 제사와 제사장을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제사와 올바른 제사장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비판한 것이다. 죄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장의 기능과 대중을 줄기차게 이끌어가는 목회자적인 제사장의 역할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사장신학에서 평신도가 강조된 이유는 제사장의 존재 이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제사장은 그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평신도가 함께 이루는 공동체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임명된 것이다. 제사장과 평신도는 동일한 배에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이기에 제사장신학에서 평신도가 강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II. 제사의식과 평신도
제사의식은 제사장이 집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희생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과정과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불사르는 과정은 제사장이 담당하지만 제물을 가져오고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평신도가 담당한다. 즉 희생제물을 도살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과정과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는 과정은 평신도가 담당하며(레 1:7, 9) "제물의 소유권을 확인시켜 주는 안수"(레 1:4)의 과정도 평신도가 담당한다.
감사제사인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수시로 제사를 드리지만 이러한 제사를 출발시키는 사람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당사자인 평신도이다. 죄문제를 해결하는 제사는 속죄제(정화제사)와 속건제(배상제사)이며 이러한 제사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죄지은 당사자인 평신도의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한다. 물론 제사장도 이러한 제사를 자신을 위해 스스로 드릴 수 있지만 평신도의 예를 따르게 된다. 다만 일년에 단한번인 대속죄일에는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대제사장이 제사를 출발시키고 그 의식을 거행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보충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별한 경우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제사 종류 가운데 평신도가 가장 많이 참여하는 제사는 아마도 화목제일 것이다.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불살라 드리고 제물의 대부분을 제사장과 평신도가 함께 나누어 먹게 된다. 이 때 하루 혹은 이틀만에 모두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제물을 바치는 사람 뿐 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평신도들이 함께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를 열게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의 자리에 공동체의 구성원들인 제사장과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모습이 바로 제사의 모습임을 제사장신학은 강조한 것이다.
제사장신학에는 제사장의 처지와 상태를 고려하기 보다 평신도의 처지와 상태를 고려하는 면이 두드러져 나타난다. 우선 빈부의 차이에 따라 너무 힘에 겹지 않는 제물을 준비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야훼께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부유한 사람은 황소를 드릴 수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곡식 한웅큼 밖에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감사제사의 제물을 구별하였다. 번제의 경우에는 황소, 수염소/수양, 비둘기 등으로 차등을 지웠고 소제의 경우에는 값비싼 유향을 넣는 경우와 넣지 않는 경우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번제물로 드리는 가축의 경우에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컷(* 암컷은 젖과 새끼를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 정하였고, 소제물로 드리는 곡식의 경우 서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고 평상시에 먹는 형태인 "거친 가루"(* 개역에 "고운 가루"는 "거친 가루"로 정정함이 필요함)를 제물로 드리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곡식을 요리하여 드리는 소제물의 경우 흙으로 쉽게 만들 수 있고 서민들의 부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요리기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속죄제의 경우에는 재력이 약한 평신도들이 암염소와 암양을 드리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유한 사람들은 여러 마리의 암컷과 여러 마리의 수컷을 사육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씨받이를 위해 수컷은 한 마리만 기르고 젖을 내고 새끼를 낳는 암컷은 여러 마리를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의무제사인 속죄제를 수컷으로 드리라고 하면 하나 뿐인 씨받이를 바쳐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가난한 평신도의 속죄제물은 암컷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물의 종류를 규정할 때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제물의 가격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가정경제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성을 담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부유한 사람이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배려는 평신도의 상태를 고려한 것이고 평신도가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남녀로 구분하지 않고 성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의 여건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들의 배려는 실로 파격적이었다. 번제 규정에는 가축을 제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새를 번제로 드릴 때는 산비둘기도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속죄제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속죄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의 오염을 씻을 수 있는 "피"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곡식도 속죄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피"가 없는 속죄제물이 과연 가능한가? 굳이 그 가능성을 찾자면 번제와 소제가 고대의 제사로서 거기서 속죄제가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곡식으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피"가 속죄제의 핵심으로 등장한 시대에서 "피"가 없는 속죄제물을 허용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장신학은 예외적인 조치를 과감하게 시행한 것이다.
제사장신학에는 악령(demon)이 있을 곳이 없다.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영계의 존재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만이 하나님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점이 당시의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제사장신학의 독창성이다. 제사장신학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인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이 오염되어 하나님께서 불편하게 된다는 신학이 전개되어 있다. 즉 평신도 개인의 비고의적인 죄는 제단을 오염시키고, 평신도 집단과 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는 성소를 오염시키며, 회개하지 않는 죄는 제걸장의 죄거나 평신도의 죄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를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고의적인 죄"라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여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릴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죄의 무게를 측정할 때 제사장 개인의 죄는 평신도 집단의 죄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신분과 역할의 면들을 볼 때 평신도의 죄와 제사장의 죄는 차이가 나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의 경우에는 차등을 두지 않는다. 제사장은 평신도 집단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역할 때문에 차등을 둘 수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인 힘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는 설명을 해 볼 수 있다. 제사장이나 평신도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는 동일하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오염시키고 가장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III. 나실인과 평신도
나실인이라면 머리가 긴 삼손과 사무엘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사사이거나 예언자로서 특수한 사람들이었으며 평생 나실인으로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나실인"의 뜻은 "(야훼께) 바쳐진 자"라는 의미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고 머리털에 칼을 대지 않고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 대지 않는 특수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제사장 자료에 속하는 민수기 6장에는 특수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평신도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만 거룩한 나실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던 헌신의 길을 제사장들은 평신도에게도 그 길을 열어 주어 평신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며 경건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실인 제도를 대중화한 것이다.
평신도의 경건을 위한 나실인 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종래의 나실인 서원은 본인이 하지 않고 어머니가 출생 이전에 이미 서원하였거나(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삼상 1:11) 야훼의 사자가 출생 전에 이미 선언하고 부모가 받아들인 경우(삼손의 부모: 삿 13:5, 14)들이었다. 즉 태어날 때 부터 나실인으로서 결정된 경우였다. 그러나 제사장신학에서 발전시킨 평신도 나실인들은 본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서원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도록한 점이 특징이다.
(2) 평신도 나실인 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실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점이다. 가정을 떠나 가족과 결별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라는 규정도 없고 가족의 생계를 돌보는 생업을 중지하라는 규정도 없다. 이제까지 해오던 일상생활을 하면서 나실인의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심지어 성생활에 대한 금지나 월경에 대한 부정유무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일상적인 가정생활을 귀중히 여기면서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다만 나실인으로서의 금기사항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동의와 격려가 필요하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포도와 포도주를 손도 대지 못하게하는 금기 사항을 지키려면 가족들의 동의와 격려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별나게 머리를 길게 기르는 용모는 동네사람들의 눈에 금방 드러나는 특이한 용모이다. 주위의 이웃들도 이러한 경건생활을 조롱하지 않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있을 때 나실인의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 어려움을 크게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처럼 평신도의 경건 훈련을 공개적으로 시행하여 마을 전체가 경건을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를 육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가족 중의 한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하려 할 때 온 가족이 협조하고 이웃들이 그 경건의 귀중함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이러한 모습은 진정 나실인 제도의 핵심적인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것이다.
(3) 평신도가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정들은 참으로 엄격하여 대제사장에 비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가 상향조정 되어 있다. 제사장은 가끔 머리를 손질하도록 하고 있으나 나실인은 머리에 칼을 댈 수 조차 없다. 평신도 나실인은 대제사장과 동일하게 그 머리가 거룩함을 나타내고 있다. 나실인의 서원을 한 평신도가 가족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한 것은 제사장의 수준(레 21:1-4)을 넘어서서 대제사장에게 요구하는 수준(레 21:10-11)을 지키라는 것이다. 제사장이 시체를 가까이 했을 경우에는 일정기간 동안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지만(레 22:4) 나실인의 서원을 한 평신도가 시체를 만졌을 경우에는 나실인의 서원은 무효가 되고 다시 서원을 해야 한다. 포도주의 경우에도 대제사장 보다 더욱 엄격하다. 대제사장은 거룩한 경내에 있을 때에만 포도주를 금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레 10:9) 평신도 나실인은 서원을 한 기간 동안 줄곧 포도주를 금해야 한다(민 6:4). 나실인의 서원을 한 평신도는 포도주와 독주는 물론이고 건포도나 생포도나 심지어 포도의 씨나 껍질도 먹지 말아야 한다. 철저하게 맑은 정신 속에서 자유로운 결단으로 평신도가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4) 평신도가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그 서원을 이행할 때 그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제사장의 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나실인의 서원을 통해 평신도의 경건 수준을 높이면서도 너무 힘든 수준을 요구하지 않고, 또한 그들의 경건생활이 파행적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제사장은 나실인에게 필요한 제사의식을 집전함으로 특별한 평신도들을 지도하였다. 나실인의 삶을 중지할 수 있는 권한은 제사장에게 있으며 다시 시작하는 것도 제사장의 지도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평신도의 경건생활이 너무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5)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서원을 한 평신도를 위해서 이야기한 후 "제사장의 축도"가 나타난다.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유도한 후 제사장으로 하여금 평신도들을 축복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평신도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 평신도의 헌신을 장려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제사장도 이러한 하나님의 목회방침에 순응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IV. 거룩한 평신도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에 사용되는 단어이며 일반적으로 성전과 성전기물 그리고 제사장에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성결법전(Holiness Code)에서는 평신도도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 부분이 나타난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너희는 내게 거룩할 찌어다"(레 20:26). "거룩함"이 제사장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해당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제사장의 태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사장의 이러한 열린 태도는 공동체를 살리려는 제사장신학과 일맥상통한다. 평신도의 거룩성을 높여 공동체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가 어떻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레위기 19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정결을 유지하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생활 가운데서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더 없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 혼자의 삶 뿐 만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도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신도가 거룩할 수 있는 길은 개인적인 면과 공동체적인 면의 양면성을 갖고 있으며 종교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의 양면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 길이다. 이러한 길은 예언자들이 소리 높여 외친 길이었으며 제사장들이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수용하였거나 예언자들과 공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를 살리려는 제사장의 포용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민수기 15장에는 평신도가 거룩하게 되는 실제적인 방법 한가지가 소개되어 있다(37-40절). 즉 평신도의 옷 가장자리 귀퉁이에 "술"을 만들되 "청색 끈"을 덧붙인 "술"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 방법이다.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 )"라 부르는 장식물인데 청색 끈을 덧붙인 "술"은 제사장 옷을 본 따서 만든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는 제사장 옷 이외에도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술"을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특수한 모양의 수를 놓은 옷을 입기도 하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칠 때 요행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을 벤 적이 있다. 이 때 사울은 다윗에게 말하기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것을 알고..."(삼상 24:20)라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이 때 다윗이 베어낸 옷자락은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옷의 일부분으로 이것이 잘려 나갔다는 것은 왕의 신분이 잘려나간 것과 견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신도가 제사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장식품을 옷에 단다는 것은 평신도 신분의 획기적인 변화를 나타내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민 15:40)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장식품을 단다고 하여 갑자기 평신도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장식품을 눈으로 항상 봄으로써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장식품은 귀중한 것이다. 그 장식품은 평신도의 정체성(identity)과 방향을 일깨워 주는 시청각 교재였으며 "거룩한 평신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제사장들은 평신도와 엄연히 구별되고 평신도들을 이끌어야 하지만 할 수 만 있으면 평신도의 거룩한 수준을 제사장의 수준까지 이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하였다. 제사장들은 자신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옷과 비슷한 옷을 평신도에게 입힘으로 비록 제사장의 외면적 권위가 다소 손상을 입을지라도 평신도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참고 감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제사장 자신들이 세속화되고 타락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기도 하였다.
V. 제사장의 개혁 정신과 평신도
야훼종교를 역사적으로 조망해볼 때 제사장신학에는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고 체계화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시대의 상황에 부응하여 개혁을 단행한 종교개혁적인 정신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전에 있는 것은 모두 거룩하다는 신학은 제사장신학 이전에나 제사장신학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다만 차이나는 것은, 제사장신학 이전에는 성전의 거룩함이 평민에게도 전달된다는 신학이 있었다. 즉 거룩하지 않은 평민이 거룩한 것을 보거나 만지거나 우연히 접촉한다 할찌라도 치명적인 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법궤를 만져 죽은 웃사의 경우(삼하 6:6-7)와 법궤를 들여다보다 죽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경우(삼하 6:19)가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그러나 제사장신학에는 성전의 기물들이 치명적인 힘을 행사하는 범위가 좁혀져서 특수한 경우, 예를 들면 성막을 벗기고 해체하는 경우(민 4:15, 20) 외에는 평민들이 성전의 기물에 접한다 하여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신학체계화 되어 있다.
제사장신학에서 왜 이러한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요약하면 평신도들이 성전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성전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개혁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종교의 대중화의 길을 개척한 것이라 볼 수 있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신학을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들은 평신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평안하게 하는 힘이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함이 죽이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힘을 발휘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전에 가까이 할 경우 역시 치명적인 해를 당하게 됨으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는 방법 즉 제사방법에 대해 세밀한 설명을 평신도들에게 해준 것이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문턱을 낮추고 성전 문을 활짝 여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은 신학을 개혁적으로 수립하였던 것이다.
VI. 결론과 제언
제사장신학이 결코 제사장집단 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제사장과 평신도를 포함한 전체 공동체를 위한 신학임을 이제껏 살펴 보았다. 그중에서도 평신도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제사장신학의 면모를 살펴 보면서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당면하는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격변하는 시대 가운데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우리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회방침도 보다더 개혁적이고 탄력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면서 제사장신학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높은 수준으로 평신도들을 신앙교육 시켜야 한다. 레위기 서두에서 평신도를 교육시켜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다. 평신도들이 알것은 알고 모를 것은 몰라야한다는 "우민정책(愚民政策)"은 손으로 바닷물을 막으려는 어리석은 발상이며 하나님의 명령과도 위배되는 생각이다. 제사를 드릴 때 평신도가 제물을 준비하며 제사장과 함께 제사에 참여하듯이 예배를 드릴 때는 예배의 의미를 알고 함께 준비하고 함께 참여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이며 성서를 읽을 때는 최소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신도가 나실인 서원을 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며 최면에 걸린 상태가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2) 평신도가 거룩해야 한다. 평신도의 경건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 보다 낮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실인의 경건 수준이 대제사장을 능가하듯이 오늘날 평신도의 경건 수준이 목회자보다 상회할 수도 있어야하며 이를 목회자들이 장려하여야 한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제사장 옷의 일부를 평신도가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듯이 목회자는 평신도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과감하게 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사장이 평신도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모범이 되었을 때 제사장의 옷이 교육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목회자는 자신들의 신분에 걸맞는 삶을 평신도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고대의 나실인 전통을 평신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제도를 창의적으로 개선하여 평신도의 경건생활을 지도하였듯이 오늘날 목회자도 평신도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경건생활의 방법을 창안하고 지도하여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경건생활이 건강한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고 일상생활에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하며 경건생활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소홀히 되지 않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이다. 제사장은 평신도와 유리된 존재가 아니고 평신도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평신도의 경건 수준을 높이는 길이 공동체의 살 길이요 제사장들의 살 길임과 동시에 오늘날 목회자들의 살 길이다.
(3) 제사장신학은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적절하게 정성을 모두어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제물이 부담이 되어 가정경제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처지에 비해 제물이 너무 적어 인색하지 않도록 평신도를 지도하고 있다. 특히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를 위해서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예를 들면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되었거나 장거리 여행중이라 유월절을 정한 시기에 지키지 못했을 경우 제2의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융통성을 발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민 9:1-14). 제사장신학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와 탄력성을 보면서 오늘날의 목회자도 가난하고 연약하며 소외된 신도들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파격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경직된 목회자의 자세가 아니라 평신도들의 불가피한 상황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탄력이 필요한 것이다. 약한 자를 소외시키는 공동체는 이미 공동체의 건강을 잃어버리고 그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4) 성전의 문턱을 낮추고 성전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성전은 분명히 구별 되어야 하며 제사장들은 평신도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평신도들을 위한 봉사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며 하나님과 평신도들이 "회막(만남의 장막)"에서 만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코 제사장이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를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제사장의 이러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지도방향은 야훼종교를 강화시키고 성장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원하는 목회자라면 이러한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방침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대중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온 제사장신학의 개혁적이며 탄력있는 자세는 격변하는 시대에서 목회하는 오늘날의 목회자가 취할 태도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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