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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점식 교수 (이 글은 낮은 울타리2004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문화인류학적 견지에서는 문화를 일반적으로 세가지 동심원의 영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즉 문화의 가장 바깥자리는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이고, 그 바로 안쪽에 가치체계(value system)가 있고, 가장 심층부에 세계관(worldview)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 운동”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라면 문화 일반과 마찬가지로 세가지 층을 갖는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즉 세계관과, 가치체계, 행동양식이라는 관점에서 뉴에이지라는 문화현상을 바라볼 수 있고 이러한 세가지 차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뉴에이지는 세계관을 제공한다. 뉴에이지 세계관의 핵심적인 기둥은 역시 “만물은 하나이다”와 “인간은 신이다” 라고 요약할 수 있다. 뉴에이지 세계관은 고통의 문제에 궁극적 초점을 맞춘다. 만물의 하나됨과 인간의 궁극자됨을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고통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 혹은 해탈이라는 인식의 전환, 의식의 혁명이 없이는 계속된 환생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가치체계는 깨달음, 해탈, 의식의 혁명, 신인합일, 자연과의 조화, 신적 능력의 발현, 완전한 의식의 평화, 자기해방 등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뉴에이지의 행동양식은 이러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명상, 수행, 범신론적 환경운동, 고통이 없는 삶, “웰빙”, 변성의식, 점성술, 초능력, UFO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뉴에이지는 고등종교(high religion)와 관련된 고급문화든 대중문화든 어느 차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사실 뉴에이지는 혹자가 말한대로 올드에이지(Old Age)이며 더군다나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적 문화의 토양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올드에이지가 뉴에이지가 된 것은 서구에서의 기독교의 쇠퇴라는 후기기독교왕국(Post-Christendom)의 현상과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를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문화권에서 다룰 때에는 서구에서처럼 단순히 “뉴에이지냐 아니냐” 라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서구의 전형적인 이분법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반드시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좀 더 포괄적인 기준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문화에는 일반계시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문화에는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이 반영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문화에는 사단의 역사와 영향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화의 어떤 영역에 속한 어떤 작품도 이 세가지 관점에서 평가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007 영화에서 악당들끼리 대화를 하는데 “이 벌레같은 놈, 너는 전생에서도 벌레였을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전생”이라든지 “환생”이라든지 하는 용어가 나왔다고 해서 그 영화가 뉴에이지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007 영화는 항상 제임스 본드가 악당을 물리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권선징악이라는 영화의 결말은 일반은총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제임스 본드는 늘 악으로 악을 이기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는 본드 걸과 간음함으로써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의 발로이다. 이처럼 한편의 영화에도 문화의 세가지 요소가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뉴에이지 영화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영화의 핵심주제와 구성 자체가 뉴에이지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경우, 명상 음악처럼 의도적으로 긴장을 이완시켜서 알파파와 같은 낮은 뇌파를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변성의식(trance)으로 몰아가는 음조로 되어있거나, 강력하고 기계적인 비트가 반복됨으로써 변성의식으로 들어가게 할 수도 있다. 뉴에이지의 세계관이나 가치체계를 반영하는 가사로 되어 있는 음악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명상이나 마약의 복용을 통한 변성의식을 미화하는 가사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동양의 범신론적 사상들을 현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뉴에이지 세계관과 그에 파생하는 다양한 문화현상은 우리나라 안에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왔으며 한국문화의 토양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역수입되는 뉴에이지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 문화권에서 거부감 없이 더욱 신속히 수용되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뿌리깊은 올드에이지의 토양, 즉 개연성구조(plausibility structure)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한국문화의 토양 형성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해왔던 기독교가 “뉴에이지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한국의 문화적 현상을 판단하려고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해가 있다. 우선 동양의 전통문화를 모두 뉴에이지로 간주하면서 기독교가 전통과 전통문화를 반대하는 외래적 종교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지 못한 외래 종교로 간주될 때에는 “성경적-비성경적”의 구도라기 보다는 “전통적-외래적”의 구도로 오해되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문화 안에 있는 비성경적 세계관과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을 변혁시키는 문화변혁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든 올드에이지든 범신론적 사상을 거부하고 이에 수반되는 문화현상에 대해서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동양과 한국의 전통 사상이 모두 범신론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동양과 한국의 전통을 기독교와 접목시키고 동양과 한국의 문화의 토양에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상황화 혹은 토착화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화되고 토착화된 기독교의 문화 컨텐츠를 생산하는 것이 뉴에이지 문화현상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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