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직 특강”
-서철 목사의 목사직 성역에 대한 소명감과 목사관-
복지교회 담임목사 서철
<여는 말>
이 강의는 “목사직 특강”을 위한 “서철 목사의 목사직 성역에 대한 소명감과 목사관”에 관한 작은 이야기들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 30세 미만의 대학청년부를 상대로 강의하기 때문에 복잡하거나 전문적인 용어를 피하고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이란 말도 쉽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던 사람은 목사는 직업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잇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십시요. 목사직이란 목사의 일을 말합니다. 좀 더 신앙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하면 ‘목회사역 또는 목사사역’ 이라고 하고 직업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 작은 주제로 이 강의를 이끌어 가겠습니다.
첫째 살면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인생관)
둘째 서철 목사는 왜 목사가 되었는가? (소명감)
셋째 서철 목사는 목사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관)
넷째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부록) 질문과 응답
첫째 살면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인생관)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무엇인가를 합니다. 사람은 ‘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있기에 움직입니다. 움직이면서 무엇인가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데 그 무엇인가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기준을 갖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입니다. 첫째는 자발성이고 둘째는 가능성이며 셋째는 당위성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 세 가지가 다 맞아 떨어지면 행복은 아주 극치가 되고 반대로 하나나 둘이 되면 행복은 감소합니다. 그리고 하나도 맞지 않으면 불행의 극치가 됩니다. 즉 하고 싶지도 않고, 할수도 없으며, 하지 말아야 될 것이라면 그 일을을 하는 사람은 아주 불행합니다. 반대로 이 세 가지가 다 맞아 떨어져서 하고 싶은 일이면서 할 수도 잇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그 일이 하고 싶은 일인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인지 또 하나님이 하시라고 하신 일인지를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직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하고 싶지도 않은데 억지로 하고, 능력이 안 되어서 할 수도 없는 데 어쩔 수 없이 하며, 하라고도 안했는데 자기감정만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목사직이 하고 싶은 일이며 동시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일일 때 신명이 나고 행복합니다.
확인은 자기인식과 스승검증 그리고 기동응답을 통해 합니다. 자기인식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들여다 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스승검증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신앙지도를 받고 검증을 받는 것이며, 기도응답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아 소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 서철 목사는 왜 목사가 되었는가? (소명감)
저는 두 번째로 제가 왜 목사가 되었는 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저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슨 과정이 네 가지 단계나 되냐고 할는지 모르겟습니다. 네 단계나 되니 철저할 수도 있고 반드시 일회적인 순간이 없으므로 혹 극적인 소명감이 부족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서 나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처럼 ‘순간성과 점진성’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순간적인 체험은 점진적인 과정을 강화시키고, 점진적인 과정은 순간적인 체험을 유지시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동부 시절의 단계, 중고둥부 시절의 단계, 청년부 시절의 단계, 그리고 중년시절의 단계를 거치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이로 보면 10대 시절엔 목사직의 비전이 생겼고, 20대 시절엔 목사직의 체험이 있었으며, 30대 이후엔 목사직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는 아동부 시절에는 목사직을 막연하게 동경했습니다. (호기심)
동경이란 어린 시절에 우리들이 보통 느끼는 바라봄의 느낌입니다. 막연하게 그리워 하고 좋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 시절에 그렇게 목사직 뿐만이 아니라 교사직, 연예인직, 운동선수직등 다양한 직업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가수나 백댄서 같은 연예인들에 대한 동경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이 되볼까 하는 호기심을 가졌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그랬듯이 저에게도 그 시절에 다른 꿈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문학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 군인이 되고 싶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싶기도 햇고, 보통 아이들처럼 판사가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꿈들 중에 목사님이 되면 참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 중고등부 시절에는 가난과 씨름하면서 목사직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
이성의 발달과 함께 처음으로 이성적인 종교와 믿음의 합리성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다가 ‘가난한 에수’를 만났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잇는 목사상은 사막의 “야휘이즘과 가난한 예수”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제게 사막의 야훼이즘과 가난한 예수를 만나게 해주는 다리였습니다. 합리적인 기독교위 본질을 찾다가 가난한 마굿간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이 되었을 때 신앙의 회의가 왔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비합리성, 교회 지도자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저의 삶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비합리성은 성경에 나오는 “동정녀 탄생-부활-승천-재림” 같은 것과 초자연적인 기적 그리고 창조론등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교회 지도자들은 복종만 요구하고 학교 매일 엄마 말슴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면서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저를 억압만 했습니다. 더구나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님들의 위선과 장로님들의 교회내 파벌싸움등이 아주 싫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 자신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님은 장로님으로 게시다가 갑자기 시골교회 전도사님으로 가시면서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갑자기 닥쳐온 가난과 싸우느라 무척 힘들엇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이웃 교회 권사님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앗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면서 고뇌하던 중에 알버트 슈바이처에 관한 전기를 읽고는 ‘가난한 자의 친구’라는 컨셉으로 예수님과 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삶의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는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엇습니다. 박사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프리카의 빛이 되었던 슈바이처의 삶이 예수님의 진정한 삶이라고 느껴졌고 네가 가야할 길이라는 불빛을 보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목사직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목사가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늘 생각합니다. 제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감리교회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음 보았던 비전대로 꼭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청년부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 목사직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저는 이 시기에 목사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순례자의 길이며 죽음을 향한 구도자의 길임을 느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어린이 시절의 동경이나 중고등부시절의 가난한 자의 친구와는 또 다른 충격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극복하는 길임을 알앗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아니 실존주의 철학적인 고뇌와 결간의 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하지 않앗더라면 저는 운동권 학생이 되엇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저의 아버님은 국제방직 공장 파에서 목회를 하시며 노동조합을 지원하시기도 했으니 더욱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중고등부 시절의 고민과 갈등과 회의를 거쳐 신학교에 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고 무신론적인 운동권의 마르크시즘의 논리를 반대햇습니다. 물론 폭력 위주의 저항도 반대햇고요. 그래서 저는 민주화와 개혁은 좋아하지만 폭력과 공산주의는 반대합니다. 그리고 중고둥부 시절의 맹목적인 믿음 보다는 갈등과 회의 속에서 연단된 믿음이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77학번입니다. 1977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고 유신정권과 광주사태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과 민주화 투쟁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무척 고뇌하였고 갈등하면서 목사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 새로운 비전은 ‘가난한 자의 친구’라는 개념의 확대이며 심화입니다. 저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권’을 위한 목사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아 목사란 아무 죄없이 억압받는 민주화 인사들을 돕는 일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민족과 민중을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은 광주사태 때 신학교 4학년으로 민주화 대열에 합류하면서 어머님에게 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죽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앗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는 동학혁명에서부터 가까이는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을 거쳐 6. 25 한국전쟁까지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사람들의 숭고한 역사의식과 예수의 십자가가 제 삶 속에 깊은 빛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0대를 지나며 목회현장에서 저는 목사직의 영적 차원을 보았습니다.(사람이해)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동시에 사람을 만났습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독일어 경구가 있습니다. 저는 조금 바꾸어서 “신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다”라고 바꾸어 말합니다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학은 인간을 아는 것이고 인간을 아는 것은 곧 신을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속에 신이 있고 신속에 인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 역설적인 상호 내재적 이상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동시에 인간이 있어서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만나는 이 역설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길이 구원의 길인데 이는 성령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철저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절망하고 아파하고 패배한 채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저는 그 시기에 사람을 다시 알게 되엇습니다. 피상적으로 알았던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원죄의 본성 아래 지옥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인간의 죄성을 보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적이지 못하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다가도 개혁의 대상이 되는 어쩔 수 없는 변신의 임계점에는 인간의 원죄가 있습니다. 또 그 원죄로부터 발생한 자범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는 혼돈과 공하와 흑암의 길로 추락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국 인간은 내면 세게에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절망의 신음을 토로하게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목사는 “영혼구원과 생기충만”이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생기를 불어 넣는 교회”라는 타이틀을 내걸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목사란 사람을 정확하게 아는 직업입니다. 피상적인 겉모습과 심리적인 치원을 넘어 깊은 영혼의 세계까지 이해하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제 위에서 언제나 신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 곁에서 위로자가 되는 직업이며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결코 대교회 목사의 호의호식이나 화려한 대접을 목사의 이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목사들은 오히려 그런 모습들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참 목사는 절망한 사람들의 곁에 섭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들 곁에 서서 눈물을 닦아 주는 잡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보듬어 않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길을 참 힘들고 어려운 순레의 길이며 구도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가장 행복한 길이며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셋째 서철 목사는 목사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관)
그럼 이제 목사직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겟습니다. 세 가지 생각이 필요합니다. 정체성, 소명감, 그리고 비전입니다.
정체성은 자기 인식을 말합니다. 즉 목사는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가? 자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잇습니다.
소명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세상 직업은 그 일에 대한 사명감만 잇으면 됩니다. 그러나 목사직은 사명감이 아니라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사명감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하는 인간편만의 느낌이지만 소명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느낌입니다. 어렴풋한 으김이 아니라 확실한 느낌입니다. 성령체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전은 지금 여기의 역사로부터 그 때 거기의 내세까지 아우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은 인간의 꿈이 아닙니다. 인간의 꿈은 소유욕의 욕망에서 오는 야망의 꿈이기에 목표를 성공하는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인 비전은 소유욕이 아닌 존재성의 가치실현에서 오는 헌신의 꿈이기에 목표가 아닌 목적을 성취하는 꿈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개인의 영달이나 소유를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꿈을 꾸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1. 학력의 길
감리교회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신학 석사학위를 받아야 합니다. 감리교회가 직영하는 신학대학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서울),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대전),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수원) 세 곳이 있습니다. 또 그 외 감리교회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인정하는 신학대학원으로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사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직영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 졸업과 함께 목사 고시 후보가 되고, 협력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 졸업후 1년간 직영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와서 감리교회사와 감리교회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참고로 꼭 일반대학원을 먼저 가서 일반 대학생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선교 단체에서도 활동하시면 폭 넓은 사역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2. 안수의 길
1) 한길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목사 고시에 합격한 후 수련목회자로 입교인 200명 이상의 교회에서 3년간 섬긴 후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길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접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전도사가 된 후에 3년간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여러분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3. 학문의 길
학문의 길은 학력의 길과는 다릅니다. 학력의 길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학력을 이수하는 과정일 뿐이고 학문의 길은 학력의 길을 포함해서 스스로 목사의 성역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습득하는 자기연마의 길입니다. 다섯 가지 항목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언어, 논리, 철학, 문화사, 심리학입니다. 물론 이것은 최소한의 길이고 좀 더 깊은 설교를 하기 원하면 이외에도 과학이나 공학등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끊이없이 독서를 해야 합니다
언어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희랍어(신약), 히브리어(구약), 라틴어(교리), 독일어(개신교신학), 그리고 영어(선교)를 습득해야 합니다.
논리는 말 그대로 논리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합니다. 논리학 책을 보고 논리의 전개를 배우셔야 합니다.
철학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하늘에서 왓지만 인간들에게 설명하는 순간 철학의 옷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신학은 꽃을 피웁니다
문화사는 기독교의 역사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연관을 맺고 있기에 문화를 이해햐야 합니다
심리학은 인간 이해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익숙해야 사람을 잘 섬기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단순이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4. 체험의 길
목사는 영적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묵상과 기도생활과 성령체험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교단체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시민단체에서의 봉사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교회와 선교단체와 시민단체”에서의 삼각 편대식 교차 훈련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성령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체험이 있으면 목사로서 사회 봉사자가 되지만 성ㄹ형 체험이 없으면 단순한 자선사업가적인 사회봉사자가 되거나 미개인 계몽가가 될 뿐입니다. 성령체험으로 확실한 구원의 체험을 얻고 다른 것들을 체험할 때 가장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서철 목사의 목사직 성역에 대한 소명감과 목사관-
복지교회 담임목사 서철
<여는 말>
이 강의는 “목사직 특강”을 위한 “서철 목사의 목사직 성역에 대한 소명감과 목사관”에 관한 작은 이야기들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 30세 미만의 대학청년부를 상대로 강의하기 때문에 복잡하거나 전문적인 용어를 피하고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이란 말도 쉽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던 사람은 목사는 직업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잇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십시요. 목사직이란 목사의 일을 말합니다. 좀 더 신앙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하면 ‘목회사역 또는 목사사역’ 이라고 하고 직업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 작은 주제로 이 강의를 이끌어 가겠습니다.
첫째 살면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인생관)
둘째 서철 목사는 왜 목사가 되었는가? (소명감)
셋째 서철 목사는 목사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관)
넷째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부록) 질문과 응답
첫째 살면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인생관)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무엇인가를 합니다. 사람은 ‘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있기에 움직입니다. 움직이면서 무엇인가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데 그 무엇인가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기준을 갖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입니다. 첫째는 자발성이고 둘째는 가능성이며 셋째는 당위성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 세 가지가 다 맞아 떨어지면 행복은 아주 극치가 되고 반대로 하나나 둘이 되면 행복은 감소합니다. 그리고 하나도 맞지 않으면 불행의 극치가 됩니다. 즉 하고 싶지도 않고, 할수도 없으며, 하지 말아야 될 것이라면 그 일을을 하는 사람은 아주 불행합니다. 반대로 이 세 가지가 다 맞아 떨어져서 하고 싶은 일이면서 할 수도 잇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그 일이 하고 싶은 일인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인지 또 하나님이 하시라고 하신 일인지를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직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하고 싶지도 않은데 억지로 하고, 능력이 안 되어서 할 수도 없는 데 어쩔 수 없이 하며, 하라고도 안했는데 자기감정만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목사직이 하고 싶은 일이며 동시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일일 때 신명이 나고 행복합니다.
확인은 자기인식과 스승검증 그리고 기동응답을 통해 합니다. 자기인식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들여다 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스승검증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신앙지도를 받고 검증을 받는 것이며, 기도응답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아 소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 서철 목사는 왜 목사가 되었는가? (소명감)
저는 두 번째로 제가 왜 목사가 되었는 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저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슨 과정이 네 가지 단계나 되냐고 할는지 모르겟습니다. 네 단계나 되니 철저할 수도 있고 반드시 일회적인 순간이 없으므로 혹 극적인 소명감이 부족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서 나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처럼 ‘순간성과 점진성’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순간적인 체험은 점진적인 과정을 강화시키고, 점진적인 과정은 순간적인 체험을 유지시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동부 시절의 단계, 중고둥부 시절의 단계, 청년부 시절의 단계, 그리고 중년시절의 단계를 거치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이로 보면 10대 시절엔 목사직의 비전이 생겼고, 20대 시절엔 목사직의 체험이 있었으며, 30대 이후엔 목사직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는 아동부 시절에는 목사직을 막연하게 동경했습니다. (호기심)
동경이란 어린 시절에 우리들이 보통 느끼는 바라봄의 느낌입니다. 막연하게 그리워 하고 좋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 시절에 그렇게 목사직 뿐만이 아니라 교사직, 연예인직, 운동선수직등 다양한 직업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가수나 백댄서 같은 연예인들에 대한 동경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이 되볼까 하는 호기심을 가졌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그랬듯이 저에게도 그 시절에 다른 꿈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문학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 군인이 되고 싶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싶기도 햇고, 보통 아이들처럼 판사가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꿈들 중에 목사님이 되면 참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 중고등부 시절에는 가난과 씨름하면서 목사직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
이성의 발달과 함께 처음으로 이성적인 종교와 믿음의 합리성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다가 ‘가난한 에수’를 만났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잇는 목사상은 사막의 “야휘이즘과 가난한 예수”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제게 사막의 야훼이즘과 가난한 예수를 만나게 해주는 다리였습니다. 합리적인 기독교위 본질을 찾다가 가난한 마굿간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이 되었을 때 신앙의 회의가 왔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비합리성, 교회 지도자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저의 삶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비합리성은 성경에 나오는 “동정녀 탄생-부활-승천-재림” 같은 것과 초자연적인 기적 그리고 창조론등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교회 지도자들은 복종만 요구하고 학교 매일 엄마 말슴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면서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저를 억압만 했습니다. 더구나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님들의 위선과 장로님들의 교회내 파벌싸움등이 아주 싫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 자신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님은 장로님으로 게시다가 갑자기 시골교회 전도사님으로 가시면서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갑자기 닥쳐온 가난과 싸우느라 무척 힘들엇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이웃 교회 권사님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앗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면서 고뇌하던 중에 알버트 슈바이처에 관한 전기를 읽고는 ‘가난한 자의 친구’라는 컨셉으로 예수님과 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삶의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는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엇습니다. 박사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프리카의 빛이 되었던 슈바이처의 삶이 예수님의 진정한 삶이라고 느껴졌고 네가 가야할 길이라는 불빛을 보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목사직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목사가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늘 생각합니다. 제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감리교회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음 보았던 비전대로 꼭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청년부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 목사직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저는 이 시기에 목사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순례자의 길이며 죽음을 향한 구도자의 길임을 느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어린이 시절의 동경이나 중고등부시절의 가난한 자의 친구와는 또 다른 충격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극복하는 길임을 알앗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아니 실존주의 철학적인 고뇌와 결간의 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하지 않앗더라면 저는 운동권 학생이 되엇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저의 아버님은 국제방직 공장 파에서 목회를 하시며 노동조합을 지원하시기도 했으니 더욱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중고등부 시절의 고민과 갈등과 회의를 거쳐 신학교에 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고 무신론적인 운동권의 마르크시즘의 논리를 반대햇습니다. 물론 폭력 위주의 저항도 반대햇고요. 그래서 저는 민주화와 개혁은 좋아하지만 폭력과 공산주의는 반대합니다. 그리고 중고둥부 시절의 맹목적인 믿음 보다는 갈등과 회의 속에서 연단된 믿음이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77학번입니다. 1977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고 유신정권과 광주사태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과 민주화 투쟁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무척 고뇌하였고 갈등하면서 목사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 새로운 비전은 ‘가난한 자의 친구’라는 개념의 확대이며 심화입니다. 저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권’을 위한 목사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아 목사란 아무 죄없이 억압받는 민주화 인사들을 돕는 일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민족과 민중을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은 광주사태 때 신학교 4학년으로 민주화 대열에 합류하면서 어머님에게 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죽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앗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는 동학혁명에서부터 가까이는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을 거쳐 6. 25 한국전쟁까지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사람들의 숭고한 역사의식과 예수의 십자가가 제 삶 속에 깊은 빛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0대를 지나며 목회현장에서 저는 목사직의 영적 차원을 보았습니다.(사람이해)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동시에 사람을 만났습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독일어 경구가 있습니다. 저는 조금 바꾸어서 “신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다”라고 바꾸어 말합니다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학은 인간을 아는 것이고 인간을 아는 것은 곧 신을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속에 신이 있고 신속에 인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 역설적인 상호 내재적 이상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동시에 인간이 있어서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만나는 이 역설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길이 구원의 길인데 이는 성령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철저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절망하고 아파하고 패배한 채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저는 그 시기에 사람을 다시 알게 되엇습니다. 피상적으로 알았던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원죄의 본성 아래 지옥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인간의 죄성을 보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적이지 못하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다가도 개혁의 대상이 되는 어쩔 수 없는 변신의 임계점에는 인간의 원죄가 있습니다. 또 그 원죄로부터 발생한 자범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는 혼돈과 공하와 흑암의 길로 추락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국 인간은 내면 세게에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절망의 신음을 토로하게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목사는 “영혼구원과 생기충만”이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생기를 불어 넣는 교회”라는 타이틀을 내걸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목사란 사람을 정확하게 아는 직업입니다. 피상적인 겉모습과 심리적인 치원을 넘어 깊은 영혼의 세계까지 이해하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제 위에서 언제나 신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 곁에서 위로자가 되는 직업이며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결코 대교회 목사의 호의호식이나 화려한 대접을 목사의 이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목사들은 오히려 그런 모습들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참 목사는 절망한 사람들의 곁에 섭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들 곁에 서서 눈물을 닦아 주는 잡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보듬어 않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길을 참 힘들고 어려운 순레의 길이며 구도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가장 행복한 길이며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셋째 서철 목사는 목사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관)
그럼 이제 목사직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겟습니다. 세 가지 생각이 필요합니다. 정체성, 소명감, 그리고 비전입니다.
정체성은 자기 인식을 말합니다. 즉 목사는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가? 자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잇습니다.
소명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세상 직업은 그 일에 대한 사명감만 잇으면 됩니다. 그러나 목사직은 사명감이 아니라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사명감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하는 인간편만의 느낌이지만 소명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느낌입니다. 어렴풋한 으김이 아니라 확실한 느낌입니다. 성령체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전은 지금 여기의 역사로부터 그 때 거기의 내세까지 아우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은 인간의 꿈이 아닙니다. 인간의 꿈은 소유욕의 욕망에서 오는 야망의 꿈이기에 목표를 성공하는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인 비전은 소유욕이 아닌 존재성의 가치실현에서 오는 헌신의 꿈이기에 목표가 아닌 목적을 성취하는 꿈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개인의 영달이나 소유를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꿈을 꾸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1. 학력의 길
감리교회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신학 석사학위를 받아야 합니다. 감리교회가 직영하는 신학대학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서울),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대전),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수원) 세 곳이 있습니다. 또 그 외 감리교회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인정하는 신학대학원으로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사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직영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 졸업과 함께 목사 고시 후보가 되고, 협력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 졸업후 1년간 직영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와서 감리교회사와 감리교회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참고로 꼭 일반대학원을 먼저 가서 일반 대학생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선교 단체에서도 활동하시면 폭 넓은 사역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2. 안수의 길
1) 한길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목사 고시에 합격한 후 수련목회자로 입교인 200명 이상의 교회에서 3년간 섬긴 후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길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접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전도사가 된 후에 3년간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여러분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3. 학문의 길
학문의 길은 학력의 길과는 다릅니다. 학력의 길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학력을 이수하는 과정일 뿐이고 학문의 길은 학력의 길을 포함해서 스스로 목사의 성역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습득하는 자기연마의 길입니다. 다섯 가지 항목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언어, 논리, 철학, 문화사, 심리학입니다. 물론 이것은 최소한의 길이고 좀 더 깊은 설교를 하기 원하면 이외에도 과학이나 공학등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끊이없이 독서를 해야 합니다
언어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희랍어(신약), 히브리어(구약), 라틴어(교리), 독일어(개신교신학), 그리고 영어(선교)를 습득해야 합니다.
논리는 말 그대로 논리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합니다. 논리학 책을 보고 논리의 전개를 배우셔야 합니다.
철학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하늘에서 왓지만 인간들에게 설명하는 순간 철학의 옷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신학은 꽃을 피웁니다
문화사는 기독교의 역사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연관을 맺고 있기에 문화를 이해햐야 합니다
심리학은 인간 이해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익숙해야 사람을 잘 섬기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단순이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4. 체험의 길
목사는 영적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묵상과 기도생활과 성령체험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교단체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시민단체에서의 봉사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교회와 선교단체와 시민단체”에서의 삼각 편대식 교차 훈련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성령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체험이 있으면 목사로서 사회 봉사자가 되지만 성ㄹ형 체험이 없으면 단순한 자선사업가적인 사회봉사자가 되거나 미개인 계몽가가 될 뿐입니다. 성령체험으로 확실한 구원의 체험을 얻고 다른 것들을 체험할 때 가장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생기바다
글쓴이 : 서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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