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교부의 영성과 향심기도(관상기도) / 남성현
사막교부의 영성과 향심기도(관상기도)
남성현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는 향심기도(혹은 관상기도, 구심기도, 침묵기도, 센터링 침묵기도 혹은 Centering Prayer)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고조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한국관상지원단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망을 통해 향심기도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감신대의 권희순 교수가 매주 기도 모임을 열고 영성심리치료센터와 디아코니아 자매회에서 정기적으로 워크샵과 집중 기도를 하고 있으며, 목회자 중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향심기도의 전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70-80년대 한국 개신교 성장의 주된 동력이었던 부흥회 영성의 퇴조와 더불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의 사경회 영성, 본격적인 교회 성장기의 부흥회 영성 이후에 여러 대안적 영성 중의 하나로써 싹을 틔우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향심기도(관상기도)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론의 전반부는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후 후반부에는 사막교부들의 영성을 관상기도의 고전 중의 하나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과 비교해 볼 것이다. 몸 말 향심기도 혹은 관상기도 (향심기도 혹은 관상기도의 역사) 향심기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전통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어로 된 최초의 서적으로 심오한 영성을 소개하는 무지의 구름이 그것이다. 저자와 정확한 저술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 16세기에 가르멜회 소속이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 혹은 하나님과의 신비적 일치(합일)을 설교하는 신비 설교가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등 향심(관상)기도에 대한 책을 남겼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가톨릭 내에서는 이런 신비적 기도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고 관상의 전통은 전통적인 추론적 묵상과 정감적 기도에 밀려 겨우 명맥만을 이어 내려왔다. 오늘날까지도 천주교 내의 기도는 주로 이성적 기능에 의존하는 ‘말씀으로 기도하기’(lectio divina, 흔히 ‘거룩한 독서’라고 함)가 대세이다. 개신교 안에서는 신비기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고 정감적 기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향심기도의 현대적 부흥은 토마스 키팅 Thomas Keating 등의 공헌에 기인한다. 그는 미국의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장으로 있다가 베네딕트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이후 향심기도에 대한 워크샵과 저술 등을 통해 기도운동을 하고 있다. 토마스 키팅이 이런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5년이며 이후 향심기도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인 관상지원단이 1983년에 창설되었고 2002년에는 관상지원단 한국사무국이 문을 열었다. 향심기도라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이처럼 최근의 일이다. (향심기도의 원리와 방법) 향심기도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 정지하는 지점(침묵)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현존)는 기독교 신비학의 가르침이 그 출발점이다. 인간 편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통로가 된다. 인간의 감각적, 지적, 정서적 활동이 잠잠해질 때에, 다시 말해 자아가 한없이 작아질 때에 자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한없이 커지게 된다. 이처럼 향심기도는 침묵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회중기도 등의 예전적인 기도나 구송기도, 경건의 시간 등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는 기도와 구별된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내면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면서 거룩한 단어(주님, 하나님, 그리스도 등)를 선택한다. 거룩한 단어는 자아의 의지와 의도의 상징이다. 둘째, 편안히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거룩한 단어를 의식으로 떠올린다. 셋째, 침묵으로(즉, 감각과 의지와 기억을 모두 내려놓고) 기도한다. 기도 중에 상념(想念)이 떠오른다면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약 20분 정도 기도한다. 넷째, 기도 후 약 2-3분 정도 조용히 머무른 다음 의식으로 돌아온다. (향심기도와 관상기도) 향심 기도의 ‘향심(向心)’이란 말은 센터링 기도 Centering Prayer를 번역한 것이다. 한국 관상지원단이 만든 것처럼 보이며, 이런 추론이 옳다면 향심이란 단어는 2002년 이후에 만들어진 신조어일 것이다. 향심이란 단어의 역사가 극히 짧은 반면, 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된 개념이 있다. 그것은 컨템플라티오 contemplatio(처음에는 헬라어 theoria에 대한 기계적인 번역에 불과했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는 관상(觀想)이라고 번역하여 왔다. 무지의 구름 이후 어둔 밤 등을 통해 전해 내려온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한다. 이런 관찰은 관상기도와 향심기도의 차이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관상기도는 교회의 전통 속에서 내려온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기도’를 의미하며, 향심기도는 그 방법을 위해서 소개한 대로 현대인들에게 보다 적합하게 만들어진 기도 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약식 관상기도인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로 인도하는 기도이다. (관상기도의 철학적 전통) 관상기도는 신비신학의 전통에서 연유한다. 기독교 신비신학은 플라톤-플로티누스로 연결되는 (신)플라톤주의의 신의 초월과 내재의 철학적 기초의 바탕 위에서 생성된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 영혼은 신과 동족성(syngeneia)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영혼은 신 아래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 본성적으로 영혼은 감각계를 떠나 영혼의 본래 고향인 신에게로 회귀하려고 한다. 이런 영혼의 상승의 종국은 신과의 합일이다. 절대자에게로 귀의하는 것을 플라톤은 테오리아(theoria, 관상)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관상을 위한 단계를 제시한다. 각성, 교육, 정화(윤리적 정화, 지성적 정화)를 거친 이후 영혼은 절대선과 합일하게 된다. 합일의 단계가 테오리아, 즉 관상인데, 이는 지성적 활동이 아니다. 영혼은 절대선을 결코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접촉하고 합일 할 수 있을 뿐이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구도를 좀 더 세분해서, 세계의 과정은 일자의 유출(흘러넘침)과 회귀(epistrophe)로 설명했다. 유출되어 감각계에 존재하는 영혼은 영혼의 고향인 일자(플라톤의 선 자체)에게로 회귀하려고 한다. 플로티누스는 기독교 신비학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자는 개념도 없고 학문도 가능하지 않은 존재 저편에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부정신학이 된다. 부정신학은 기독교 신비학의 일반적인 신학적 관점이 된다. 기독교 신비학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다른 공헌은 영혼의 상승을 내면화 한 것이다. 영혼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일자에게로 향하는 상승은 자아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은 내 마음의 깊이 보다 오히려 깊은 곳에 계시고, 내 마음의 높이 보다 오히려 높은 곳에 계십니다’라고 쓰는 것은 플로티누스의 영향이다. 플로티누스는 영혼의 회귀를 정화(katharsis)-조명-합일(unio mystica)의 3단계로 설명했고 이는 기독교 신비학의 구도로 차용된다. (관상기도의 신학적 전통 : 관상학의 삼 단계와 부정신학) 플라톤의 관상의 단계(각성, 교육, 정화, 합일)를 받아들여 기독교 관상학의 단계를 최초로 체계화한 인물은 오리게네스이다. 오리게네스는 영혼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을 윤리학(etike, 성서의 잠언에 해당), 자연학(physike, 전도서에 해당), 관상학(theorike, 아가서에 해당)으로 설명했다. 이후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와 플로티누스에 근거해 빛(katharsis 정화와 photismos 조명, 잠언), 구름(theoria 관상, 전도서), 암흑(anakrasis 연합, 아가서)으로 설명했다. 이런 전통 위에서 5세기의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관상의 단계를 정화(katharsis), 조명(photismos), 완전(teleiosis) 또는 합일(henosis)로 설명했다. 이후 중세 신비주의자들은 디오니시우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므로, 정화, 조명, 합일의 하나님께 다가가는 삼단계 영혼의 길은 관상기도를 설명하는 구조적 틀로 사용되었다.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부정신학의 전통은 플로티누스에게서 꽃을 피운다. 켈수스가 부정신학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므로 오리게네스는 긍정신학을 전개한다. 반면 4세기의 동방의 위대한 신비가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플로티누스의 영향 아래에서 부정신학을 전개하고 그의 입장은 위 디오니시우스를 통해 에크하르트 등의 기독교 신비주의와 관상기도 전통 속으로 들어왔다. 부정신학에서는 신의 초월성이 강조된다. 인간은 초월적인 신을 인식할 수도 없고, 그 분에 다가갈 수도 없다. 관상가들은 부정신학의 근거 위에서 묵상 등의 지성적 기도나 의지적인 정서적 기도로는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에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는 이런 긍정적 관점(긍정신학) 대신 인간적인 모든 능력을 내려놓을 때에만, 즉 자아가 한없이 작아져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인 무(無)가 될 때에만 하나님의 현존을 충만히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관점에서 관상기도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된다. 침묵이란 언어가 없는 상태 뿐 아니라 개념(지성)과 상상과 기억과 의지 등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사막 교부들의 관상적 삶 (사막교부의 영성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 어둔 밤은 엄격한 의미로 향심기도 혹은 센터링 침묵 기도 등의 현대적 방법론을 위한 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관상적 삶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책이다. 센터링 (침묵) 기도가 좁은 의미로서 약 20분 정도의 시간으로 하루에 수차례 이루어지는 ‘제한된 관상기도’라면, 어둔 밤은 관상가의 기도 뿐 아니라 삶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관상을 다룬다. 어둔 밤은 기도를 포함한 관상적 삶을 다루는 책인 것이다. 그런데 관상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철학적 전통과 신학적 전통에서 이미 사용된 개념이다. 어둔 밤의 관상적 삶(기도)은 고대 교회에서 이미 존재했는가 ? 어둔 밤의 저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의 인물이다. 관상기도의 고전으로 불리는 무지의 구름은 14세기의 것이다. 그렇다면 14세기 이전에 무지의 구름이나 어둔 밤이 제시하는 관상적 삶과 기도가 존재했는가를 탐색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수고가 될 것이다. 4세기 초기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지성주의적 전통에 속해 있으므로 비(非)지성주의적인 관상기도와 직접적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관상기도와 거리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둔 밤을 읽은 후에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을 한쪽씩 넘기다 보면 이 두 전통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막에 살았던 인물들의 삶이 어둔 밤에서 제시하는 관상적 삶과 비슷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금언집은 4-5세기 수도자들의 짧막한 금언이나 삶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담아놓은 일종의 모자이크 화 같은 것이다. 어둔 밤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따라서 금언집 안에서 관상기도나 관상적 삶에 대한 조직적 해설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막 교부들의 말 한마디나 하나의 일화는 사막의 영성가들이 관상을 이론화 시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관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4-16세기에 꽃을 피운 관상적 삶을 10세기나 앞선 4-5세기 사막교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억견(臆見)에 그칠 것인가 ? (어둔 밤 : 감각의 밤-침묵-정신의 밤 혹은 영의 밤 -신적 합일) 어둔 밤의 내용은 1부 ‘감각의 밤’, 2부 ‘영의 밤’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그리고 영의 밤 마지막 부분에는 신적 합일에 대해서 다룬다. 이처럼 어둔 밤은 기독교 신비학의 고전적 도식인 정화, 조명, 합일을 명료한 단계로 구분하여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을 연구하는 현대의 저자들은 대체적으로 고전적 도식을 이용하여 어둔 밤의 관상적 삶의 단계를 설명하기를 즐긴다. 감각의 밤은 감각적 세계에서 떠나는 것을 다룬다. 심리학적으로는 아동 초기부터 형성되는 생존/안전, 애정/존중, 힘/통제라는 욕구에 의해 형성된 거짓 자아로부터의 해방이다. 보고, 느끼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감각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애착과 애집(愛執)이 생겨난다. 이렇게 감각은 욕(欲)의 근원이 되는데, 감각이 무뎌지고 욕이 어두워지는 ‘밤’에 들어가는 단계가 감각의 밤이다. 신비학의 전통으로는 카타르시스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지만 맛을 탐하지 않으며 먹을 수 있다면 감각의 밤에 근접한 것이 된다. 침묵을 좋아한다는 것은 감각의 밤이 다다랐다는 명백한 표시가 된다. 기도자는 이전의 렉티오 디비나 식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논리적 묵상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 성서를 통한 상상이나 추리에 흥미를 잃는다. 피조물에게서 낙을 찾지 못한다. 침묵을 통해 보다 깊은 밤인 영의 밤 혹은 정신의 밤으로 다가간다. 기억, 지성, 의지가 씻겨 나간다. 이렇게 정신이 씻겨 나간다는 의미에서는 정화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며 정신이 비워진다는 의미에서는 고전적 도식의 조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정신의 밤에서는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명예라고 생각했던 것, 개성이라고 용납했던 것, 윤리적으로 옳으며 영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런 모든 것이 씻겨 나간다. 정신의 욕(欲)이 사라진다. 현대 심리학으로 설명하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거짓 자아의 잔재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문화적 조건과 종교적 관념 등의 일체의 무의식적 잔재의 사슬로부터 풀려나는 과정이다. 감각의 밤에서 감각을 통해 들어온 ‘세상’이 사라진다면, 여기에서는 ‘내’(자아)가 사라진다. 나는 무한히 축소되고 내가 비어버린 그 공간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 마치 태양에 가까이가면 내가 어두워지는 것과 같다. ‘구속한 주와 십자가’가 자아의 빈자리를 채우시는 것이다. 정신의 밤을 통과하면서 신적 합일이 이루어진다. 요한은 이를 캄캄한 관상이라고도 하고 비밀이라고도 한다. 순수 영인 하나님께서 순수 영인 정화된 영혼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이다. 순수 영 아래의 모든 것은 파악 할 수 없으므로 이런 신적 은혜는 비밀이다. 합일은 완덕의 상태이다. (사막교부들의 관상적 삶 : 감각의 밤) ‘감성이 끊기고 욕정이 식고 모든 욕이 잠들어 고요해진’(어둔 밤 76쪽) 상태가 감각의 밤이다. 감성적 자아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욕(欲)과 맛의 신발을 벗은 모세는 감각의 밤을 통과하는 예가 된다(어둔 밤 63-65). 사막의 영성가들은 이런 감각의 밤을 삶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던 자들이었다. 알파벳 모음집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형제가 ‘내 마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는데, 티토에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입과 위가 열려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A 티토에스 2, 367쪽). 사막의 거주자들은 감각이 동요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기에 그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일 교부는 이렇게 말했다. 육적인 사물을 피하라. 왜냐하면 사람이 오랫동안 그 공격을 받고 있으며, 흡사 몹시 깊은 우물가에 몸이 기울어져 있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원수는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쉽게 그 사람을 우물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러나 육적 사물을 멀리하는 사람은 우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와 같다. 원수가 그를 밀어 넣기 위해 우물가로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억지로 떠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주시는 것이다. (S 2,12b) 4-5세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말의 뜻을 이런 방향에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한 시대였다. 말하자면 감각의 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Imitatio Christi에서 꼭 통과해야 할 문으로 생각되었다. 한 수사가 어느 원로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습니까 ?’ 원로는 속옷을 벗어 허리에 걸치고,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치며 말했다. ‘수도자는 이래야 하네. 물질적인 사물에 대해서 알몸이 되어야 하고, 이 세상(감각)의 유혹과 시련 앞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거든’. (S 6,16) 고대 후기의 심리학적 관점도 감각의 밤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포이멘은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주지 말라’고 했다. (A 포이멘 80, 285쪽) 감각의 요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고 충족될 수 없는 만큼 영혼은 동요하며 상처를 입게 된다. 감각이란 영혼을 상처 입히는 가시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한 형제가 ‘내 육신은 병들어가고 있는데도, 내 정욕은 약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더니, 포이멘은 ‘정욕은 가시덤불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포이멘 161, 301쪽) 그렇다고 사막의 수도자들이 육체를 넘어선 초인(超人)이었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수도자는 파토스(물物로 인한 마음의 요동침)는 제어될 뿐 계속 살아있다(A 아브라함 1, 83쪽)고 했다. 포이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식과 의복과 수면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그것들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는 있습니다’ (A 포이멘 185, 306쪽) 십자가의 요한은 ‘없이 사는 것이 멋’(어둔 밤 29쪽)이라 한다. 현세적인 것(은 물론 영적인 것까지도)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욕념(欲念)은 마음의 집착이나 애집을 만들고(어둔 밤 28쪽) 잡스런 사념(邪念)으로 기도를 방해한다(어둔 밤 33쪽). 감각의 밤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에바그리우스가 말했다. ‘온갖 종류의 애착을 그대 마음에서 뽑아 버려라. 그렇게 하면 고요한 생활이 동요되지도 교란되지도 않는다’. (S 2,8) 도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 원수가 네 영에게 의심을 제기하며 내면의 평화를 어지럽힐 것이다’. (A 도울라스 2, 109쪽) 욕념으로 인한 평화의 결핍은 수도자의 몸을 약하게 만든다. (S 4,18) 감각의 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중요한 열매 중 하나는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추리나 이론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어둔 밤 67쪽). 묵상이나 추론을 하지 않게 되며 이것이 감성의 밤이요 정화이다(어둔 밤 54쪽, 56쪽, 76쪽). 요한은 스콜라 철학의 사변적 경향이나 전통적인 렉티오 디비나의 지성적인 성서 읽기를 거부한 것이다. 금언집에도 유사한 맥락의 내용이 있다. 레두의 암몬 교부가 시소에스 교부에게 물었다. ‘성서를 읽을 때 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정성들인 강론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원로는 대답했다. ‘그건 불필요한 일이오. 차라리 마음을 비우면서 언어의 은사를 얻도록 애쓰시오. 그러면 그런 걱정에서 해방될 것이오’. (S 8,16 / A 시소에스 17, 338쪽) (사막교부들의 관상적 삶 : 침묵) 십자가의 성요한은 감각의 밤을 통과하면서 기도자는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고 한다. 감성에서 영성의 생활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넘어가는 중간 지대는 침묵이다. 침묵 없이 관상은 없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추론이나 묵상 등 정신활동의 중단을 의미한다. 침묵은 그 시작부터 초기 공주수도원에서 강조하던 덕이고 사막교부들도 이들과 공유하던 바가 있었다(S 10,50 / A 아르세니우스 2, 25쪽 ; S 4,1 머리속을 스쳐가는 온갖 생각을 다 말하는 것은 자기를 상실한 것이다). 그런데 사막교부들의 침묵은 공주수도자들을 넘어선다. 아가톤 교부는 3년 동안 조약돌을 입 안에 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야 그는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S 4,7 / A 아가톤 115, p.66) 마르코 교부 : 당신은 왜 우리를 피하십니까 ? 원로 :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순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은 그럼에도 모두 단 하나의 원의 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많은 원의를 가지고 있거든요.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S 17,5)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서 도망쳐서 홀로 고독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태양볕에 익은 포도송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익지 않은 포도와 같습니다.(A 모세 7, 232쪽) 한 형제가 이웃을 칭찬하는 것이 좋은 일이냐고 물었더니, 팜보는 ‘침묵하는 것이 더 좋다’라고 대답했다. (A 포이멘 47, 277쪽) 사막의 기도자들이 침묵을 좋아했던 것은 영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고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 (S 2,11) 내면의 평화를 사랑하는 수도사는 적의 화살을 맞지 않지만 사람과 어울리는 자는 끊임없이 공격당한다. (A 닐루스 9, 252쪽) 파스톨 교부는 ‘자네의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그 고통에 대한 승리는 침묵을 지키는 데에 있다네’라고 말했다. (S 16,9) 어떤 형제가 베사리온에게 ‘저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다. 베사리온은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A 포이멘 77, 285쪽) 사막교부 엘리야는 관상기도의 침묵을 문자 그대로 행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무념무상의 정적을 좋아하였다. (S 1,11) (사막교부들의 관상적 삶 : 정신의 밤 혹은 영의 밤) 십자가의 요한은 정신의 밤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어둔 밤 90쪽).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인가 ? 자아는 한없이 축소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되는 것이다. 지성은 어둡게 되고 의지는 메마르게 되며, 기억과 애착은 비워진다. 내가 좋다고 추론하는 모든 것, 내 성향이나 의지가 이끌리는 모든 것,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신의 상흔과 과도한 집착,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정신의 밤에 해당한다. 감성이 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신의 밤이 이루어져야 한다. 감성의 혼란은 모두 정신에 그 힘과 뿌리가 있고, 따라서 정신이 정화되기 전에는 감성의 모반과 사악이 씻어질 수 없다(어둔 밤 89쪽). 십자가의 성 요한은 디오니시우스를 거명하면서 그의 부정신학을 예화로써 빗댄다.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여 어두워지는 것처럼, 태양을 바라볼수록 시각이 흐려지고 어두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빛은 인간에게는 어두움이 된다(어둔 밤 95쪽). 영혼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빛이 밝아지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이런 관상의 차원을 삶으로 살았다. 사막의 관상가들은 자신의 종교적 선 혹은 도덕적인 선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대 눈에 의롭게 보이는 바를 과도히 믿지 마시오.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말고 혀와 육욕을 제어하시오. (S 1,2) 사제가 범죄한 형제를 교회에서 쫓아냈더니, 베사리온도 함께 일어나 나가면서 ‘나도 죄인입니다’라고 말했다. (A 베사리온 7, 93쪽) 시소에스는 이성과 의지 전체를 비우고 청소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찾는 길임을 알았던 관상가였다.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나 자신이 있는 곳에서 찾지 말라. (A 시소에스 40, 344쪽) 마토에스는 정신의 밤을 통해서 비워야 할 거짓 자아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어느 수도자가 마토에스 교부에게 물었다. ‘제가 어딘가에 가서 살게 된다면 거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 ‘그대가 어디에서 살든, 자신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애써 찾기 말게. 예컨테 나는 수도자들의 회합엔 가지 않는다 혹은 무엇무엇은 먹지 않는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 말야. 그런 실천은 근거없는 명성이나 가져다 줄 것이고 이윽고는 여러 가지 성가신 일을 만나게 할 거니까. 그런저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기 때문이지’. (S 8,11) 또 어떤 원로가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부심하다 보면, 영적 풍요를 잃게 되어 메마름만 남는다’. (S 8,23) 사막의 교부들은 부정신학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부정신학적인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요한 교부에게 완덕에 관한 금언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원의(願意)대로 행한 적이 결코 없으니 가르쳐 줄 게 아무 것도 없다네. (S 1.10) ,.... 파스톨 교부는 부정신학적 관점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청동담이며 뛰어넘을 수 없는 바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의지가 그대를 놓아 준다면 그대로 역시 시편에 적혀 있는 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시편 18,29-30). 그러나 사람이 혼란되어 자기의 의지를 정당화시키려 들면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암모나스 역시 파스톨처럼 자기세계의 포기라는 관상의 삶을 알고 있었다. 암모나스는 ’좁고 협착한 길(마 7,14)이 무엇입니까 ? 라는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좁고 협착한 길이란, 당신의 생각을 통제하며, 하나님을 위해 당신 자신의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았나이다‘(마 19,27)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A 암모나스 15, 75쪽) 안토니우스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던 어떤 수도자에게 관상의 삶을 이렇게 가르쳤다. 어느 수도자가 안토니우스 교부에게 청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자네가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나처럼 자네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걸세’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S 10,3)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바, 지성이 어두워지고 의지는 메마르고 기억과 애착이 비워지는 것은 무(無)나 공(空)이다. 이 역시 부정신학에서 즐겨 쓰는 개념으로 신비가들에게서(특히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에크하르트에게서) 특징적이다. 사막의 관상가들은 이런 개념을 체계화 시키지는 못했지만 남아 있는 금언은 사막에서 이루어진 무의 삶을 증언한다. 어느 형제가 아도니아스에게 ‘무(無)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물었다. 아도니아스는 ‘그것은 자신을 짐승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짐승들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다. (A 포이멘 41, 276쪽) 시소에스 교부는 말하기를 ‘아무 것도 아닌 자로 간주되도록 하라. 자신의 원의(願意)를 물리치며 근심 없이 머물라. 그러면 그대는 안식을 얻으리라’했다. (S1 ,17) 죽음은 무의 상태에 비교되곤 한다.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는 듯 살아갈 일이다(S 1,8) 성자 테오필루스 대감독은 죽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아르센 사부여, 그대는 복되도다. 항상 이 (죽음의) 때를 보며 살았으니’(S 3,5). 안토니우스의 생애 Vita Antonii가 보여주는 것처럼 무덤 은 사라진 나의 (잔여)세계를 뜻한다. 한없이 작아지고 결국은 사라져 정신의 무덤 속에서 무(無)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일까 ? 십자가의 성요한은 태양에 가까이 가면 자신은 (완전히) 어두워진다고 쓴다(어둔 밤 153쪽). 캄캄한 관상이다. 어둔 밤이다. 닛사의 그레고레우스가 말했던 암흑이다. 이는 비밀학으로 악마도 자연감각도 이성도 미치지 못한다(어둔 밤 158쪽). 순수 영인 하나님께서 각각과 정신이 비워진 순수 영인 영혼에게 하시는 언어이다. 따라서 영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이다(어둔 밤 159). 얼이 빠져 나간다(어둔 밤 110-112쪽). 이런 신적 합일의 상태에서 영혼은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쪽)가 된다. 금언집은 탈혼 상태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참조 S 3,15). 나가는 말 향심기도는 현대식으로 개조된 관상기도이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로 이끌어주는 과정이며 관상기도는 궁극적으로는 관상의 삶을 지향한다. 관상기도 혹은 관상적 삶의 고전적인 교범은 어둔 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중세가 해체되던 시기에만 관상의 삶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기독교의 새로운 영성인 수도주의가 태동하던 4-5세기에 이미 관상의 삶이 존재했다. 거대한 공허인 사막의 대자연 앞에서 자신을 한 점 모래에 비기며 하늘을 대면했던 신앙인들이야말로 최초의 관상가들이요, 이후 모든 관상가들의 모태이다. < 참고도서 > 1차 자료 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최민순 옮김, 바오로 딸, 1973. 무지의 구름, 클리프턴 월터스 편, 성찬성 옮김, 바오로 딸, 1997. 사막교부들의 금언집(S, 주제별모음집), 요한 실비아 옮김, 분도, 1988. 사막교부들의 금언집(A, 알파벳모음집), B. 와드 편역, 이후정,엄성옥 공역, 은성, 1995. 에크하르트, 그에게는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다. 플레밍 엮음, 안소근 옮김, 바오로 딸, 2002. 2차 자료 토마스 키팅 외, 구심기도, 허성준 옮김, 분도, 2003. 토마스 키팅, 센터링 침묵기도, 권희순 옮김, 가톨릭 출판사, 2006. 토마스 키팅,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엄무광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99.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 입문, 빛나는 밤, 프란치스꼬 지음, 가르멜 수도원 옮김, 분도, 1991.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카트레트 지음, 가르멜 수도원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91. 앤드류 라우트, 기독교 신비사상의 기원, 신태웅 역, 풀빛목회,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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