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마음이 뜨거운 체험(2011-0522) 주일 설교

우순(愚巡) 2011. 5. 27. 18:13

마음이 뜨거운 체험

 

   :: 누가복음 24:30~35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할렐루야!

   오늘은 웨슬리 회심 주일입니다. 회심주일은 감리교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 목사가 1738년 5월 24일에 경험하였던 올더스케잇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전 세계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합니다. 우리 서울연회는 오늘 오후에 이화여고 내의 류관순 서울연회 모든 감리교회가 함께 모여 기념 성회로 모입니다.

 

     왜 우리는 오늘 이 날을 기념할까요? 이것은 감리교인의 입장에서는 생일과 같기 때문에 기념을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교회사적인 전환점이기 때문에 기념을 합니다. 흔히 기독교의 3대 회심이라고 하면, 다마스커스의 바울의 회심, 밀라노의 어거스틴의 회심, 그리고 올더스게이트의 존웨슬리의 회심을 듭니다. 물론 크고 작은 회심들이 많지만 이 셋의 회심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회심은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열었고, 어거스틴의 회심은 기독교 신학과 교리를 세웠으며, 웨슬리의 회심은 부흥운동과 성령신학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별히 웨슬리의 회심은  개신교의 3대 지류 - 세번째 기둥-가 만들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개신교의 첫 번째 지류는 1517년 10월 31일에 있었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두 번째 지류는 프랑스 북부에서 스위스로 건너온 존 칼빈의 예정론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세 번 째 지류는 존 웨슬리의 회심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이것을 개신교회의 3대 지류라고 부릅니다. 모든 개신교회는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 중에 한 사람을 따릅니다. 물론 미세한 차이의 다른 지류들이 있지만 크게 보면, 독일과 게르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루터교회는 루터를 따르고, 장로교와 침례교 같은 예정론자들은 칼빈을 따르며, 영국과 영연방국가들을 중심으로 감리교회, 구세군, 성결교, 나사렛교회, 순복음이라고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성회등은 웨슬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셋은 개신교회의 삼대 지류이면서 세 기둥들입니다.

 

   그런데 이 셋 중에 21세기의 본류는 웨슬리의 전통을 따르는 오순절 부흥운동 교회들입니다. 하바드 대학교의 신학자 데이비드 햄튼은 21세기에 가장 강력한 개신교회의 본류는 존 웨슬리를 따라 성령운동을 하는 감리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될 것이라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웨슬리안들이 개신교회의 본류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철학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웨슬리의 신학을 중용과 통합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웨슬리 목사가 성공회 목사를 통해서 구교회의 전통을 받았으면서도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를 통해서 청교도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고뇌하다가 회심을 통해서 체험을 얻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깊은 평형감각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평형감각은 대단히 값진 신학적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웨슬리가 썼던 일기 가운데 1759년에 썼던 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입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습니다.

 

   “고함이나 경련, 환상, 신비체험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너무 과신하여 그것이 내적인 변화의 전부인 양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없으면 모두 헛된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위험이 있다. 반대로 이러한 현상들을 너무 소홀히 취급하여 무시해버리거나 이러한 현상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도 또한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급작스럽고 강하게 역사하는데 그러한 때에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육체적인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은 고무하고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자시의 역사를 더욱 뚜렷이 보여주시려고 준비한 꿈이나 입신 또는 환상을 보도록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험들은 자연의 은총과 일치하게 된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이러한 현상들을 모방하여 유혹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지만, 사단이 이것을 모방하기 때문에 악령의 역사와 혼동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전체 현상들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웨슬리 목사는 너무 뜨거워서 흥분하는 영열광주의도 안 되지만, 너무 차가워서 이성주의에 빠지는 냉정주의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지표는 아름다운 ‘중용의 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가장 아름다운 중용의 길 -The best beautiful middle way-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그 때까지 있었던, 양극단에 치우친 기독교의 흐름을 제대로 잡아주는 신앙의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 이러한 중용과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잘 받아들일 경우에 최고의 가치가 되지만, 어설프게 받아들일 경우에는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감리교신자들은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즉 구교도 아니고 신교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이것도 가지고 있고 저것도 가지고 있는 중용과 통합의 교회인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감리교회의 뿌리가 되고 있는 성공회와 그로부터 나온 감리교회의 차이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성공회는 그 기반을 세 가지의 표준에 두고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 하지만, 1517년 마틴 루터를 통해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구호를 따라서 성경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 전통과 성경 사이에서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면 인간의 이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웨슬리는 훌륭한 학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전통적인 신앙도 있고, ‘한 책의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경 중심의 신앙도 아주 분명합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우수한 엘리트 지성인이자 링컨대학의 교수로 옥스퍼드 대학의 홀리클럽 지도자로 합리적인 지성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님 부활을 믿기는 믿는 것입니까? 여러분,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천당이 정말로 있긴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교인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교인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 교인입니다. 종교적 신자는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종교적 생활에 익숙한 종교 기능공들입니다. 언제 교회에 가는지, 교회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회의를 하는지,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머리로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모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초자연성을 믿지도 않고, 영혼의 기쁨도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도 복음의 열정도 복음의 사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신자는 다릅니다. 복음적 교인은 교회의 제도나 형식에는 소외되기로 하지만 하나님 중심의 은혜파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신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확신, 기쁨, 능력, 열정, 사명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종교적 교인이 아니라 복음적 교인이 되야 합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바로 그것을 이룬 체험입니다. 복음적 교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더더욱 종교적 기독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적 교인이 되도록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기독교 지식이 목사나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 옛날에는 목사가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컴퓨터에 앉아서 “존 웨슬리의 회심”이라고 검색어를 치면,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글들이 검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존 웨슬리의 회심일 당시의 일기도 목사가 읽어주지 않으면 일반 성도들은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들어가서 1738년 5월 24일이라고 쳐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웨슬리의 일기의 본문이 다 뜹니다. 우리는 이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머리는 아주 커졌는데 마음은 아주 차가와졌고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한 채ㅔ 종교기능공이 되갑니다.

 

   18 세기의 웨슬리는 그 당시의 지성셰계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교인의 삶을 살면서 깊은 고뇌에 빠졌던 사람이었다가 복음적 교인으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목사입니다. 18세기 이신론과 합리적 사유가 팽배했을 당시 지성인이었던 존 웨슬리가 종교적 신자로서 모르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니까? 초대교회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교회의 전통을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었던 청교도 신앙에 대해서도 그는 어머니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옥스퍼드 대학을 통해 배운 철학적,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그는 아주 냉정하고 이성적인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종교적 교인이었고, 나름대로의 상대적인 의를 가지고 있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의는 가졌지만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는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었고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극적인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회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복음적 교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웨슬리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25년 22살에 준회원목사가 되어서 안수를 받았는데 회심을 할 때까지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13년이 되었는데도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부활절에 계란도 수없이 만들고, 칸타타도 열심히 연습하고, 할렐루야를 부를 때에는 일어나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가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하고 물어보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당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면,가는 것은 고사하고 “천국이 어디 있나, 교회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협박하는 것이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지. 뭐 다 착하게 살자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멤버쉽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챤으로서 종교적 의인의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적절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종교 엘리트도 될 수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사람들 앞에 ‘난 부활을 안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예수가 자신의 주님이심이 고백되지 않는 종교적 신자에게는 머리는 남산만 할지라도 가슴은 새가슴이 되어서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회심주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력하게 체험하고 믿음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야 합니다. 회심주일은 머리의 신앙이 마음의 신앙이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지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앙입니다. 웨슬리의 1738년 회심의 날의 웨슬리의 일기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한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전 경에, 그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구원을 위해 내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고 나는 느꼈으며, 주께서 나의 죄를, 심지어 나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유별나게 나를 모욕의 대상으로 삼고 또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나는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방금 내가 마음속에 처음으로 느낀 바를 간증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원수는 내 마음에 속삭이기를 ‘이것은 믿음일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 그 기쁨이 있느냐?’하고 말했다. 그때 나는 평강과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을 믿는 믿음에 근본적인 요소이지만, 거듭남의 초기에 보통 나타나는 희락, 특히 깊은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희락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어떤 때에는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때에는 보류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나는 많은 시험을 받아 싸웠으나,나는 울부짖었으며 모든 시험은 물러갔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내가 율법 하에 살아갈 때에는 내가 가끔 이겼지만, 내가 은혜 아래에 살아갈 때에는 늘 이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항상 정복자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입니다. 5월 25일 일기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주 예수여’하는 말이 나의 입에도 마음에도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힘이 내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는데 드려지고 있음과 나의 영혼이 끊임없이 그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에 성바울 교회에 다시 출석하여 찬미 속에서 나의 노래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스런 친절에서 오며, 그러하기에 ‘나는 나의 입으로 당신의 진리를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전하리이다.’하는 말씀을 맛보게 되었다.”

 

 

    웨슬리 목사는 회심을 체험하고 나서, 즉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고 나서 그 마음속에 사단과의 싸움을 경험합니다. 사단과의 싸움이 일어났는데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는지 이 믿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울부짖어 기도하다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언제나 이기는 -율법 아래서 때때로 이기는 승리가 아니라- 은혜 아래서 항상 이기는 자, 예수만이 주님이심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그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웨슬리는 찬송을 부를 때에도,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찬송을 부르는 다섯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다 같이 부릅시다(sing all), 열심히 부릅시다(sing lustily), 느리지 않게 부릅시다(sing in time), 영적으로 마음을 다해 부릅시다(sing spiritually).  웨슬리는 강력한 확신으로 복음의 능력을 설교하고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며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성공회 성직자들은 감당이 안 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서를 가지고 주어진 틀에 따라서 기도해야 하는데 은혜로 기도하며, 차가운 이성주의에 빠져 있는데 귀신을 내쪽고 방언을 말하며 입신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성공회는 웨슬리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는 교회의 강대상에서 설교하지 못하자 이제 길거리에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왔습니다. 광산의 근로자들이 왔습니다. 돌을 던지는 깡패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영국의 유명한 국회의원인 ‘윌버포스’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노예제도는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하며 사회를 바꾸는 대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거철에만 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가가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가 달라졌습니다. 웨슬리의 마음에 큰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웨슬의 회심은 영국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은 웨슬의 부흥운동이 영국 사회를 무혈혁명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합니다.

 

 

     웨슬리는 강단을 얻지 못해서 길거리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주님이 찾아왔는데, 몰라 봤습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3년 이상을 같이 다녔음에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리고 그들이 길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와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길에서 있었던 일!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감리교회는 고교회가 아니라 낮은 교회입니다. 전통만을 강조하는 성공회를 고교회라고 합니다. 이 성공회에서 쫓겨나서 길에서 은혜 받고 길에서 시작한 부흥 운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감리교회는 낮은 교회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지식이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감리교회 신앙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달랐던 것입니다. 전통과 성경과 이성으로 이끌어지던 성공회의 3중 표준에 한 가지 -체험-을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머리의 신앙이 아니라 마음의 신앙!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뜨거워지는 신앙!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교회가 감리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 생활에 익숙한 종교적 기능공이 되지 마십시오. 교회 생활에 익숙한 종교 기능공이 되시면 안 됩니다. 종교적 신자가 되시면 안 됩니다. 머리는 압니다. 그러나 가슴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목사가 된지 13년 만에 체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구나!” 오늘 이 뜨거운 마음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감리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감리교회의 신앙을 신학자들은 4중 표준이라고 부릅니다. 전통과 성경, 이성과 체험을 4중 표준이라고 말하고, 이 체험을 강조하는 감리교회의 신앙을 좀 더 뜨겁게 해보기 위해서 따로 모인 사람들이 바로 성결교회입니다. 웨슬리의 자선사업을 가지고 독립한 것이 구세군입니다. 이 성결교회에서 더 은혜받기를 사모하다가 성령을 체험한 것이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 교회입니다. 만약, 성결교회나 구세군이나 또는 순복음 교회나 미국의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복음주의 교회가 자기들의 교회가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성령신학에 근거한 교회라고 말하지 아니하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이 신학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가 좋아하는 미국의 리전트 대학의 총장인 빈슨 사이난의 ‘세계 오순절 성결운동의 역사’(이영훈 박명수 역, 서울말씀사)를 보면, 약 40쪽에 걸친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자신들의 뿌리가 나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성결교회 신학자인 도널드 데이턴의 '오순절 신학의 뿌리'(조종남 역, 대한기독교서회)라는 책에도 보면 그 서문의 30쪽을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햄튼은 아예 책 제목을 ‘성령의 제국 감리교’(이재은 역, 기독교문서선교회)라고 하였습니다. 21세기의 모든 개신교의 본류는 바로 웨슬리의 성령체험을 따르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이것이 중요합니다.  머리로부터 가슴까지 오는데 웨슬리에게는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13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도덕주의자이며, 사회적 지성인이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천국에 갈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습니까? 예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안 믿어지신다면, 오늘 여러분은 웨슬리처럼, 하나님 앞에 구하시길 바랍니다. 웨슬리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했습니다. ‘하나님 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시길 구합니다. 내 마음 속에는 산만한 지식이 있지만, 그러나 내 가슴은 차가워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를 원합니다.’그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이 존 웨슬리의 회심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교회를 섬기시고 유지시키는 데 여러분의 공로는 지대합니다. 그러나 오늘 웨슬리의 이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웨슬리가 조지아주의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웨슬리가 선교에서 돌아오면서 런던 항구에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나로 인하여 저 북미의 인디언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 나는 누가 구원해줍니까?”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절, 추수감사절 행사도 잘하시고 여름성경학교 행사도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감을 가지고 이 교회를 잘 섬겨오셨습니다. 치하와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회심주일을 맞아 다시 여러분께 이 한 말씀을 전합니다. 웨슬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나는 누가 천국으로 인도합니까? 내 마음 속에 믿음이 없습니다.” 오늘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종교적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외향은 분명히 신자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체험이 없 어서 확신이 없습니다.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을 내게 주시옵소서.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세계를 믿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바로 이것이 복음적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종교적 기능공에서 복음적 신자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이 바울과 어거스틴과 견주어서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바울은 박해자요, 어거스틴은 방탕자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완전을 지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박해하다 돌아선 사람이 아닙니다. 방탕자에서 돌아선 것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완전한 거룩을 위하여 홀리클럽을 만들고 옥스퍼드의 지성인으로 엘리트로 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류로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다가 회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상대적인 의를 따지자면 웨슬리는 완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그의 가슴을 뚫고 찾아온 성령의 체험을 경험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믿음이 없었구나. 내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구나.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이제야 알게 되었구나.” 그리고 그의 삶이 180도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영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영연방국가에 복음을 전하였고, 21세기에는 개신교회의 최대의 본류가 될 것이라고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으로부터 감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길거리에서 은혜받고 길거리로 쫒겨나서 생겨난 교회입니다. 그들은 성공회의 화려한 예배당에서는 쫓겨났지만,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도 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또한 감리교회의 위대한 점입니다. 웨슬리는 은혜 받고 나서 거만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은혜를 받고 체험을 경험한 순간 자신을 모욕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면서 성령의 체험을 길거리에서 증언하다가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건강한 신앙인으로서 완전을 추구하다가 회심을 경험했고, 회심한 후에는 모욕과 핍박을 주었던 사람들까지도 기도하면서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고 감리교회를 일으켰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왜나하면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밖에 계신 하나님(Deus extra nos)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Deus in nobis),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로 다가오신 하나님(Deus pro nobis)을 체험하여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체험,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신 성령님의 체험을 기념하는 날이 웨슬리 회심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상동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머리로만 믿는 차가운 신앙이 아니라 마음이 뜨거워져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 복음의 열정, 복음의 사명을 회복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도록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교기능공이 아니라 마음이 뜨거운 복음전도자가 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