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신학(神學)/역사신학

낡은 사도신경은 버리고 오늘의 사도신경을 취하라! (정강길)

우순(愚巡) 2009. 5. 2. 10:36



 
낡은 사도신경은 버리고 오늘의 사도신경을 취하라!
 
-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 작업만으로는 충분치 않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실
 
 
 
사도신경은 얼마만큼이나 역사적 사실인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은 오늘날 전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매주 일요일 예배시(혹은 세례 문답시를 비롯한 여러 교회 행사들 등등)에 읊조리는 사도신경(한글판) 전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의 고백’이라는 사도신경 전체 문구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혹은 몇 퍼센트나) 반영되어 있을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라면 위의 사도신경 전문을 온전한 역사적 사실로서 믿는가라고 질문할 경우 세계 안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즉, 사도신경에 쓰인 초자연주의에 대한 문구들도 거리낌 없이 실제적 사실로서 받아들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다음의 내용들은 어떠한가?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아드님 해모수왕은
오룡거에 올라타고 땅에 내렸다.
...............
하백이 푸른 강에 풍덩실 뛰어
홀연히 잉어 되어 자의로 노니니
해모수는 수달되어 마구 덮치고
하백이 날개 붙여 꿩 되어 나니
해모수는 시랑되어 뒤를 붸는다.
.......................
수레가 물 밖으로 나기도 전에
해모수는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구름타고 혼자서 날아갔고야.“

고구려 건국신화에 해당하는 동명왕을 노래한 이 구절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인가? 기독교 안에만 있으면 사실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 밖에 있으면 사실이 아닌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은 위의 사도신경이 그 옛날 당시의 고백으로서 의미는 있을지언정 온전한 역사적 사실로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그 안에 몇 가지 사실들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유신론적 입장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 같은 극소한 몇 가지들은 나름대로 사실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위의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전문들을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로서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도신경에 대한 판넨베르크 신학의 순진성

나 자신이 사도신경을 일말의 관점에서 그나마 좋게 보고자 하는 오늘날의 현대 해석자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않은 채로 이러한 혼동의 오류의 현실을 남겨두면서 사도신경을 좋게만 해석하려는 학자들은 참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직무 유기라고 생각된다.

이를 테면 그 유명하고 똑똑하다는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이해를 보자(『사도신경 해석』[정용섭 역] 참조). 그 역시 사도신경이 근대 모더니티를 거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불편스러운 현실과 곤란한 문제들을 낳고 있다는 점만큼은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러한 오늘날 사도신경으로 인해 파생되고 있는 문제점들을 자신의 사도신경 해석을 통해서 극복하면 되리라 생각하는 그런 순진함을 보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사도신경 해석의 예를 들어보자. 판넨베르크 신학자 역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전설>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전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기 위함이었고 이것은 결국 예수의 선재성과 연결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나름대로 사도신경의 각각의 문구들에 대한 해석적 작업을 펼쳐보이면서 사도신경 구절들에 대한 해석이 각별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내가 보는 사도신경에서 파생되고 있는 결정적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근대 모더니티마저 거친 현대 세계가 우리가 놓여 있는 21세기 현실임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근대적 비평부터 거부하고 있기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중세기에 놓여 있는 참담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을 대할 때마다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분간하지 못하는 혼동의 오류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결국 사도신경도 그저 <사실의 언어>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전근대라는 중세기적 현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여전히 당면하고 있는 기존 기독교의 현실이다. 만일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적 작업만으로 이러한 혼동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만, 예배시마다 세례문답시마다 어쩔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저절로 뇌까리게 만들만큼 이 세뇌적 문구를 그저 해석 작업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나이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고대인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이 제아무리 좋다고 한들, 내가 보기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일 뿐이다. 물론 사도신경 해석 작업 자체는 의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를 오늘날 매주 예배 때마다 사용할 만큼 그러한 정도의 의미는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오늘의 우리가 드리는 오늘의 예배이지 더 이상 과거 시대의 예배가 아닌 것이다. 소통이 아닌 불통스런 기독교라는 현실에서 이제 새로운 창조적 소통으로서의 사도신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홍정수 교수 역시 남미의 해방 전사들이 죽어가면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해서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지만, 내가 보기엔 사도신경 때문에 예수를 잘못 알고 죽어간 영혼들은 그런 남미 해방 전사들보다 수천수만 배나 많은 참담한 기독교적 현실이 더 시급한 우선이라고 여겨진다. 내 생각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가 있듯이 그런 식의 사도신경이라면 태워서 불 지르는 게 훨씬 낫다고 본다.

만에 하나 우리의 기독교 교리가 공식적으로 명기해놓기를, 사도신경은 1차적으로는 고백의 언어이지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고 매우 뚜렷하게 명시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에게 인지시켜놓고 있는 현실이라면 나는 사도신경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주장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잖은가.

그 똑똑하다는 판넨베르크마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시대적 표현 양식의 언어가 다를 때에 겪는 혼란에 대해서다. 오늘 우리가 그 옛날의 고대인들처럼 자신의 실질적 체험이나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 신화나 전설로 설명하기도 하는 그런 시대의 사회를 살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는 엄밀한 자연과학의 세례마저 입고 있는 21세기 현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폐기처분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 오늘 우리가 사도신경을 계승할 수 있다는 얘긴 것인가?

그 옛날의 사도신경은 우리 시대의 사도신경으로 대체되어야!

나는 사도신경 안에 그 옛날 고대의 신앙 선배들이 겪은 의미 있는 신앙 체험들이 녹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통을 계승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매우 소중하고 값진 체험들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놓여 있다. 즉, 고대에는 그러한 사도신경 표현이 최선의 신앙고백이었다면 21세기의 우리들은 좀더 현대화된 소통의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체험을 고백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옛날에는 이것이 허락되었는데 왜 오늘날에는 이것이 허락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기회를 주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거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유신론>으로서의 신관은 더이상 소통되지 않는다. 정작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문도 새롭게 쓰여져야만 하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나는 우리의 신앙이 예수사건에만 기초되어 있다면, 우리의 예수사건은 1세기에, 2세기에, 3세기에, 16세기에, 19세기에 그리고 오늘 21세기에 언제든지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되어지는 영원한 현재적 사건으로서 여긴다.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오늘날의 신앙고백으로도 승화될 수 있는 지점라고 본다.

각 시대마다 표현 양식의 언어가 다른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유동하는 세계 안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언제나 그러한 유동하는 현실 세계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진정한 보편은 제각각의 특수함들로 드러나지 그것들과 결코 괴리되어 있지 않다. 왜 우리가 고정된 과거에 묶여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판넨베르크도 개방된 세계와 고정된 사태를 말하지만, 그에게서의 개방된 세계란 본문은 고정되어 있는 채로의 해석에 대해서만 그 개방성이 허락될 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 조직신학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옛날에는 예수사건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는 <해석학적 틀>로서 기독교 조직신학을 축조했다면, 오늘날에는 그보다 훨씬 더 최신의 철학 체계들이 있기에 얼마든지 그보다 더 나은 또 다른 해석학적 틀로서 기독교 신학 전반을 새롭게 축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기회를 왜 마다해야 한단 말인가?

<대체>는 <해체>가 아니다. 흔히 <대체>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해체>와 엄밀히 분간하지 못한 채로 이를 과격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대체>야말로 엄연한 현대적 의미의 적극적인 과거 계승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그 옛날의 사도신경을 다른 형식화로 대체하는 입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나는 그 옛날 사도들의 신앙고백문은 오늘날 21세기 사도들의 신앙고백문으로도 얼마든지 새롭게 대체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나 자신이 이토록 과감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분명하게 겪고 있는 오류와 비극적 현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적 신앙고백으로 대체하는 현대 교회들도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이 현재 다니고 있는 예수살기교회(http://club.cyworld.com/welivejesus)의 신앙고백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온 세상을 낳으시고 기르시며 품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고난 속에서도 언제나 생명의 기운과 희망을 주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씨앗으로서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에 힘쓰는 수행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매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고통당하는 이웃과 사귀는 가운데
나눔과 베풂, 살림과 섬김의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아멘“

이와 비슷한 고백문으로 새길교회 신앙고백문도 있다. 향린교회의 신앙고백문도 어떠한가.

1.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지금도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시고 억압 속에서 자유를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해방의 소리가 되시어 고난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게 하시는 예수님

<음송>
영이신 하나님 변혁의 영이신 하나님
우리는 주님 위에 세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뤄지는 평화와 평등과 정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해방을 위해 일하는 주님의 선교 속에서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준 진리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짐을 믿습니다.
 
<후렴>
우리는 예수의 몸과 맘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생명의 숨결
성문 밖으로 낮은 자리로 새 하늘 새 땅으로. 아멘.

나는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사도신경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병무에게 신앙고백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 그는 성만찬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신앙인이었다. 그 깊은 신앙고백은 예수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다양한 체험에서 나온다고 본다. 안병무는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그 옛날의 사도신경이 아닌 오늘날의 신앙고백으로서 표현해내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이러한 저마다의 신앙고백문 가운데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며 역사하시는 삼위일체의 그 하나님을 믿고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은 그 옛날 사도신경으로 고백했던 신앙 선배들이 겪은 하나님과 언어적 표현은 달랐을 지언정 그 궁극적 지시에 있어선 다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 옛날의 사도신경을 오늘날의 사도신경으로 대체하려는 이유는 그것은 그들 시대의 언어이지 오늘 우리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맥락에서 볼 경우 우리가 그 옛날의 사도신경의 문구를 여전히 고집하는 태도야말로 21세기 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분명하게 살아 숨쉬는 하나님을 오히려 화석화된 하나님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즉, 그 옛날의 사도신경을 고집하는 문자적 자세야말로 영원한 현재로서 깊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정화시켜 죽일 수 있는 위험 역시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정통은 온갖 변화와 다양성들을 배제하지 않는, 영원한 현재로서 능히 살아내는 과정 그 자체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는 기독교 정통(orthodox)을 무조건 폐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무뎁뽀적인 기독교인도 아니며, 무조건 해체하겠다는 식의 안티기독교인은 더더욱 아니다. 적어도 우리 앞에 그 어떤 막강한 권위의 정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류와 비극의 현실에 선행할 수는 없다고 보기에 그런 점에서 대해서만큼은 기독교 정통에 대한 새로운 개정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뿐이다.

생각해보라. 기독교 정통을 <화석화된 문자>로만 고집스럽게 계승하겠다는 자세야말로 더욱 위험천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라도 변질 될까봐 그러는가? 내가 보기에 기독교 교회사는 본래의 예수사건 이후에 끊임없이 그 간격이 멀어져 왔었을 뿐이다. 오히려 예수사건은 성문 밖에서 이어져 왔었다고 본다(어차피 이런 얘긴 또다른 논의로도 이어지는 얘기인지라 또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엔 정통을 화석화된 문자로만 고집하는 자세야말로 오히려 과거 정통에 대한 올바른 계승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 같은 기독교 정통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계승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혼동하는 오류를 겪고 있는 심각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당연히 기독교 밖 진영의 현대인들과는 소통하기가 매우 힘들 수밖에! 새롭게 변혁되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 시대의 상식들과 소통될 수 있는 현대의 언어로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교회의 사역들이 새롭게 언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들을 주시고 계시는데 우리가 왜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마저 차단해야 한단 말인가.

알고 보면 진정한 정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진정한 정통은 언제나 시대를 선도할 만큼 능히 힘이 있어 늘 새로운 변화마저도 거뜬히 포용한다. 진정한 정통은 온갖 다양성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정통은 늘 변함없이 시대와 호흡한다. 그래서 알고보면 정통은 늘 새롭다. 정통은 과거에 있지 않다. 정통은 항상 현재 진형형에 놓여 있다. 단지 그 정신만이 영원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