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나를 따르라!

우순(愚巡) 2012. 8. 25. 21:41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예배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간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예배함으로 한 주을 시작하셔서 이 번 한 주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1. 주일은 주님의 날이요 행복한 날이요  희망의 날입니다.

 

주일은 행복한 날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며,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주일은 주님과 함께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날에 예배하는 자들에게 "동행"을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매 주일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마태복음 28장 29절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사시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예배로 시작하는 한 주 한 주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동행과 함께 승리의 시간들이 되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28장 29절의 말씀 - 동행의 약속-을.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힘들 때에 우리에게 위로하는 여러 가지의 말이 있습니다.그 중에서 우리에게 와 닿는 말중 하나가,  당신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니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우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배는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이 놀라운 희망 -주님의 동행 -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한 주를 사시었습니까? 지난 주에 저는 기도, 심방, 상담, 협의를 하면서 한 주를 보냈습니다. 보통 수요일이나 목요일이면 재무간사가 헌금보고를 합니다. 그러면 헌금자를 위하여 개인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다가 헌금자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도 하고 축복합니다. 새가족 심방도 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커피샵을 시작한 임 호 성도님 가게를 심방했습니다. 또 환우들을 찾아 병원심방도 했습니다. 서울정형외과, 삼성의료원, 보훈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액세사리를 파시는 남궁양순 집사님의 남편이신 김경석 씨가 보훈병원에 계시는 데 찾아가서 함께 기도했더니 아멘하셔서 참 기뻤습니다. 취업을 위하여 청년 가족과 상담도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하상훈 권사님과 생명사랑밤길걷기  자살예방 행사에 대하여 협의했습니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면서, 제 마음은 시편 40편의 말씀에 사로 잡혔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시편 40편에 깊이 빠져서  시편 40편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했습니다.

 

   <시편40: 1~5>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편 40편의 말씀을 보니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말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이 답답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가득하신 분은 특별히 더 오늘 예배 시간에 진한 마음으로 주님의 동행과 하나님의 들으심을 느끼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배하러 온 것은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 하나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시고 기쁜 마음으로 이 한 주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우리를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기가 막힌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듯이 우리들이 세상을 살다보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우리가 놓일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에서 건져주시사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40:2> “나를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견고하게 하시며 새 노래를 부르게 하셨도다.”

 

 

3. 하나님에게는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생각이 많습니다.

 

   또 시편 40편 5절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에게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도 많아서 누구와도 견줄 수가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생각이 많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누군가 우리 삶에 들어와서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리를 돌보아 주는 것이 큰 위로와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시편 40편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많다는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내가 나를 위해서 세운 계획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세운 계획이 더 많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고려하고 있는 그 수많은 생각들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려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계획이 더 많습니다.

 

 <시편 40: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성도는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갖고 있는 우리를 향한 생각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생각이 더 많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세운 계획보다도 더 많은 생각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삽니다. 내가 나를 위해 세운 계획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세운 계획이 더 위대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는 기적이 많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생각이 많다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가 나를 위해 세운 계획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계획대로 사는 새로운 비전을 꿈꾸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신 우리 모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이 많으신 것을 확신하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세운 계획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세운 계획이 더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확신해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많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4. 좋은 신앙은 예수님을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누가 좋은 신앙인인가요? 믿음의 능력이 있는 사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아주 올곧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 헌신과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아주 개혁적이고 참신한 사람, 선하고 착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사회에 봉사와 구제를 많이 해서 사회복지에 기여하는 사람? 모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진정 기독교 신자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그저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내가 나를 위해 세운 계획보다 더 위대한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 주님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좋은 신앙은 나의 신앙관이나 방법의 탁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 자체가 좋은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세관에 앉은 마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굉장한 훈련을 받고 따라갔습니까?  마태가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한 첫 번째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마태가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도리어 함께 욕을 들은 것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마태를 비난했습니다.

 

  <마9: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가  무슨 헌금을 했습니까? 봉사를 했습니까? 그렇다고 3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태가 예수님을 보호했나요? 이 사람도 도망갔습니다. 마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 비하여서는 지명도도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자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태가 한 유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일어나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따라가는 좋은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또 좋은 교인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성찰하기도 합니다. 다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자체입니다.

 

   고든은 왜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못하실까?’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 제목은 설교를 못하는 목사님들에 대한 가르침인데 내용을 깊이 음미해보면 결국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들입니다.  이 책에서 고든은 목사님들이 설굘를 못하는 네 가지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1. '도덕주의' 설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사람의 행실만 고치려고 하는 설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2. '요령을 가르치는 설교':  요령만 제대로 익히면 죄인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설교인데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메시지를 무시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3. '자기 성찰'의 설교: 믿음을 전할 시간에 믿음을 자꾸 부정하고, 내 안에 정말 믿음이 있는지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마구잡이 비판으로 신앙이 자라지는 않는데도 많은 설교자들이 여기 빠져 있습니다.

 

4. '사회 복음' 혹은 '문화 전쟁':  우리 문화에서 잘못된 점을 개인적으로나 정부의 강제력으로 개선려는 설교입니다. 흑백논리에 심취한, 애국주의에 불타는 설교자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고든의 분석을 음미해보면 설교의 문제점이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문제맘 들여다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꾸게 하는 설교, 세상살이를 잘 하게 하는 요령의 설교, 자기 성찰에 천착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설교, 사회적 제도 개선을 외치는 설교들은 모두 다 회중에게 관심을 갖게 하지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사람을 분석하거나, 사람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 보거나, 사람을 선동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따라 가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5.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따름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에수님을 따라가는 좋은 방법을 고안해내고, 좋은 교인이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은 다 본질이 아닙니다. 좋은 방법을 택하면 좋은 길을 가나요? 좋은 교인이 되면 구원을 받나요?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은데 사실 틀렸습니다. 구원은 방법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생명도 진리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찾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참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주 분명합니다. 기독교신앙은 나를 부인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무조건 따라 가는 것입니다. 참 미련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신앙은 미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해 보이는 기독교신앙 -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가는 이 미련한 기독교신앙-이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전 1:18~ 2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좋은 신앙인은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 가는 성도들입니다. "나를 따르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쓰하셨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이후로 마태는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마태는 주류가 아니었던지 베드로나 아고보나 요한에 비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 나섰다는 애기도 없고, 권력을 청탁한 적도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는 한 켠으로 비켜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마태가 훌륭했던 것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는 아주 많은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통도 쌓였고, 지식도 쌓였고, 심지어 성경해석까지도 보펴화되었습니다. 인터넷 시대와 함께 목사들의 설교도 더 이상 새 것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록 일반화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 교인들은 컴푸터를 이용하거나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목사의 설교를 모니터링하기도 합니다. 성경본문을 치면,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원고들이 검색됩니다. 표절하는 지 검사도 해봅니다.  사회 통신시설의 발달로 이젠 더 이상 나올 지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발달하고 그만큼 엄청난 지식이 쉽게 검색이 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따름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부족합니다. 그냥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분석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비판도 잘 하는 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 곧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 -은 아주 아주 적어 보입니다. 희소한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베드로처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잘 따라가는지, 바르게 가는 지,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정작 우리가 따라가야할 예수님을 놓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신앙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오는 자격을 물으셨나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잘 성찰해서 자격이 있으면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나요? 예수님이 의를 원하셨나요? 예수님이 우리의 도덕성을 원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오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냥 따라오라!!!!!! 참 모순입니다. 참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냥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결국 2000년 동안 모든 것을 실험해 보았더니 가장 위대한 메시지는 무엇이냐? 그것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그러한 말을 한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는 헬레니즘 문명이라고 하는 그리스 문명의 총아가 만들어낸  당시의 수준에서는 최첨단 문명 도시입니다. 그런 고린도 도시의 헬레니즘 철학에 바탕을 둔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는 십자가의 도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은 그냥 에수님을 따라가자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이 예수를 그냥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멍청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판단, 우리들의 경험, 우리들의 지식, 2000년 동안 쌓아왔던 역사와 전통으로 볼 때에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를 받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께서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그곳에 지혜가 있고 그곳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신앙이 필요하지,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라갈 것이냐 하는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 단순하게 보면, 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지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의 보폭도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기가 하면 주님이 인도하시고, 주님이 나를 이끄시고, 주님이 나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가운데 뒤처지는 사람을 챙기시고 흩어지는 사람을 챙기실 것입니다. 내가 챙기고 내가 시비를 걸지 않아도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간단한 신앙의 원리를 잊어버리고 아주 복잡한 신앙의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미로에 갖혀 버립니다.

 

6. 에수님을 끝까지 따라 가시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 언제까지?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끝까지 따라가라고 말합니다. 언제까지 따라가나요?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에 보면, 우리가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히;3:12~14>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가다가 옆에 따라가는 사람이 늦게 간다고 거기에 관심을 쏟고, 갈지자로 간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을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내 시야에서 주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앙이란아주 간단합니다. 이 한주를 새롭게 시작하시는데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가 세운 계획보다 더 위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 기적이 많다는 말씀을 신뢰하시고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냥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무조건 따라 가는 것입니다.

 

   <히6: 10~ 12>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려면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라 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예수님과의 거리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가는데 멀찍이 따라가다가 시험에 빠져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따라가야 끝까지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마26: 57~58>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7.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입니다. 에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6: 23~24>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라고 하니까 굉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의 기둥이 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우리 각자만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십자가만을 주십니다. 그 십자가는 무겁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우리의 멍에와 우리의 짐이 가볍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짐과 주님의 멍에가 가볍고 쉽습니다.

 

   <마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목사들은  목사로서 많은 사명감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좋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목사의 길이 어려운 길이라고 말합니다. 목사의 십자가가 힘들고 무겁다고 말합니다. 장로님들도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다 말합니다. 심지어 정치가들조차도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십자가가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거친 사람들들에게는 하나님의 사역, 자기 십자가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가볍고 쉽습니다.

 

    저 자신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는 상동교회를 몇 천명의 교인으로 만들어라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따름이었습니다. 그냥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네가 정말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할 것이고 내가 너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할 것이고 내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니 내가 아버지께로 너를 이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너는 나를 따라오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방법이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예수를 끝까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의 판단도 내려놓고 자기의 기준도 내려놓고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헬라의 철학자들과 지혜자들에게는 얼마나 멍청한 일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냥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냥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그냥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한 주간 예수님께서 따라오라는 말씀을 듣고 아멘하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