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의 설교 이야기”
서철 목사(상동교회 담임목사)
<들어가는 말>
저는 상동교회 담임목사 서철입니다. 1981년도에 구로중앙교회(현 베다니 교회) 교육전도사를 시작으로, 강화도 양도제일교회 담임전도사로 섬기던 1983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현재 10년 째 섬기고 있는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기까지 35년 째 감리교회의 목사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주제는 <설교에 목숨을 걸라>입니다.
이 주제를 부흥아카데미를 기획하신 서길원 목사님에게서 받은 이후로 제 자신 스스로 저의 설교를 돌아보며 <자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설교에 목숨을 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설교에 목숨을 걸었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정말 좋은 설교가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 수준에 맞추어서 <어느 목사의 설교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소박하게 35년간의 고뇌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아직도 제 안에 마지막 촛불처럼 타고 있는 작은 불꽃만큼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고 싶습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성경에는 설교에 목숨을 걸었던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랬고 요한이 그랬습니다. 잘 아시듯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전파는 목숨을 건 설교였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체험 이후에 저자거리에 나가 설교한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십자가 예수를 전했습니다. 기독교전승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합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하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은 박해를 받아 도망을 가야 했고 옥에 갇혔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혔습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었던 예수님과 사도들은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기독교를 세웠습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쉽게 말해서 기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코미디언은 가짜를 진짜 같이 말하는 데 목사들은 진짜를 가짜처럼 말하는 것이 첫 번 째이고, 둘째는 아나운서는 별 것도 아닌 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명료하게 전달 하는데 목사들은 대단한 천국복음을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도록 흐릿하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면 설교자가 믿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2. 웨슬리처럼 설교에 목숨을 걸면 반드시 영적부흥을 경험합니다.
21) 웨슬리는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가 설교강단을 뻇겼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일기를 보면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을 하기 전 부터 강단을 뻇기기 시작했습니다.
가> 1738년 5월 7일
나는 오전에 성로렌 교회에에서 설교하였고 그 다음에는 성 캐더린 그리이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나는 큰 힘을 얻어 양쪽 교회에서 강력한 발언을 하였고 그 결과 두 교회에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 1738년 5월 9일
나는 성 헬렌스 대성당에서 대단히 많은 회중에게 설교를 하였다 내 마음은 박차올라 마귀에게 눌려 있던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차게 선포하였다. 후에[ "목사님, 더 이상 여기에서 설교하지 마세요,"라는 맗을 들었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아았다
다> 1738년 5월 14일(주일)
나는 올더스케이드 성 앤 교회에서 아침에 설교하였고 오후에는 시보이 채플에서 설교하였다 다른 몇 군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성 앤 교회에서도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는 통보를 곧장 받았다.
22) 웨슬리는 설교에 목숨을 걸고 야외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 1739년 4월 2일 (월) 한남 마운트의 야외설교
오후 4시에 나는 좀 더 대담하져서 간선도로 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시가지로 연결된 나지막한 언덕위에서 근 3, 000여명의 군중에게 전도하였다 내가 설교한 성경말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하심이라 하였다
나. 1739년 3월 31일(토)
저녁에 나는 브리스톨에 도착하여 휫필드를 거기서 만났다 나는 나의 전 생에를 통하여 (아주 늦게까지) 예의와 질서에 관계된 은 모든 점에서 아주 고집스러웠으며 그 결과로 예배당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영혼의 구원이라 할지라도 거의 죄악시 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휫필드가 주일에 나를 야외에서 설교하는 일에 처음으로 내세웠을 때 나는 그것에 나을 어떻게 적응시켜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 1739년 4월 1일
(주일 저녁에 휫필드는 떠났고) 나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모여 익숙해진 니코라스 거리의 작은 집에서 우리 주님의 산상설교를 강혼하기 시작했다
라. 1739년 4월 8일(주일)
아침 7시에 브리스톨에서 근 1000명에게 설교하였으며 그 후에 킹스우드의 한남 산 마루터에서 역 15,000명에게 설교하였다 나는 복음적인 예언자들이 전한 목마른 자들은 다 물에 나아오며 돈 없이도 나와서 값었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으로 저들을 초대하였다 근 5천명이 오후에 로스그린에 모였으며 그들 한 복판에 나아서 “주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그는 내게 나아와 마시어라” 고 외쳤다
마. 아버지 무덤에서 8일간 설교
마지막 집회는 세 시간이나 설교를 했는데 천국이 내려 온 것 같았다고 합니다. 성 안드레 교회는 1696년부터 1735년 사무엘의 나이 72세까지 섬겼습니다. 사무엘은 이 교회 정원에 묻혔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 후인 1742년 당시 성 안드레 교회 담임목사인 롬리에게 주일 오후 예배 시에 설교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을 당합니다.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규율에 대하여 도전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자 웨슬리 목사님은 한 평 남짓한 아버지의 무덤에 올라가 8일간이나 설교를 합니다.
23) 웨슬리는 목숨 걸고 설교하고 뜨겁게 기도하다가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가. 1739년 1월 1일의 일기
【“월요일, 홀씨와 킨췬, 잉햄, 휘트필드, 허친스와 내 동생 찰스는, 약 60명의 형제들과 함게 페터레인의 애찬식에 참석하였다. 새벽 3시경 계속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벅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땅바닥에 넘어졌다. 그 분의 위엄이 임재 하는 가운데 두려움과 감탄 속에 조금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소리로 우리는 외쳤다. "오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나. 1759년 11월 25일 (일)
오후 집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로 경험하였다. 확신 보다는 위로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에 이 곳 에버튼에 있으며 살펴 본 대로 역사하시는 방법에 있어 상당한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큰소리로 외쳐대거나 고꾸라져 경련을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몇이 가볍게 떨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댈 뿐 많은 사람들은 넘치는 평화 속에서 새 힘을 얻었다.
고함이나 경련, 환상, 신비체험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너무 과신하여 그것이 내적인 역사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없으면 모두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위험이 있다. 반대로 이런 현상들을 너무 소홀히 취급하여 무시해 버리거나 이런 현상들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도 또한 위험이 따른다.
반면에 진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타락된 죄인들에게 급작스럽고 강하게 역사하신다.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급작스레 고함을 지르거나 육체적인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
2) 믿는 사람들에겐 그들을 고무하고 북돋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더 뚜렷이 보여 주시려고 신비한 꿈이나 입신 또는 환상을 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3)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경험들은 자연의 은총과 일치하게 된다.
4) 사탄은 하나님의 연사를 방해하려고 이런 현상들을 모방하여 유혹한다. 그렇다고 이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전체 현상들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된다. 처음에는 이런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현상이든 그것이 진실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되거나 왜곡된 것인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출처 : 존 웨슬리, 『존 웨슬리의 일기』,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4년 11월 15일, p228
3. 설교에 목숨을 건다는 무엇인가?
설교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믿음의 확신에 근거한 진정성과 간절함으로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아주 기본적인 것은 자기가 전하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고 그것을 전하는 목적에 대한 진정성과 간절함이 강한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도 믿고 너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가 목숨을 걸고 설교한다는 것은,
31) 자기가 전하는 설교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갖고 전하는 것입니다.
32) 자기가 전하는 설교를 회중이 들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고 전하는 것입니다.
33)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전하는 것입니다.
34)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35) 진정성과 간절함은 철저한 준비와 열정적인 전달을 수반합니다.
4. 설교에 목숨을 걸려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설교에 목숨을 걸려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천국복음의 내용에 대한 <자기 확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1)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저희 교회 7월 목회계획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둘 째 주일 오후에 교회학교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는 데 강사로 우리 교회 원로장로님이신 임성택 장로님을 선정하고 부탁드렸습니다. 임성택 장로님은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삼양사 사장을 하신 원로장로님이신데 신앙이 좋으신 분이십니다. 제게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가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에게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본문과 설교제목과 설교내용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로님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강한 확신을 갖고 행동하십니다.
42) 사무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엘리가 부르는 소리인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감리회의 사중표준은 성경과 전통과 이성과 체험인데 감리회의 특징은 체험에 있습니다. 성경은 정교회와 개혁교회와 공유하고 있고, 전통은 정교회-로마 가톨릭교회와 공유하고 있으며, 이성은 성공회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은 우리 감리회의 고유한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43)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기독교신앙을 신화나 설화로만 이해하지 않고 살아있는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화적인 신학적 사고는 문화분석이나 심리분석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설화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인문학적인 의미추구를 하지만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지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설교에 목숨을 걸 <영적인 힘>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체험을 얻기 위하여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 보십시오.
44) 우선 자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하는 성전에서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저는 2012년 10월 11일에 아주 좋은 체험을 했습니다. 상동교회 빈 성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냐?, 범사에 감사하냐?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냐?” 저는 그날 하나님이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는 내적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읽으며 진정성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제 설교에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4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자기만의 기도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한얼산 –오산리 –대한 수도원- 칠보산- 얍복강 기도원-강남 금식기도원-광주기도원 –마리산 기도원 - 이름 모를 태백산과 오대산 기도원 등에서 기도할 때 큰 힘을 얻곤 했습니다.
4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인들 가운데 기독교 목사님들이 대체적으로 종교적인 수행이 약할 것입니다. 특히 설교 중심의 사역을 하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그렇습니다. 무당의 무병을 아십니까? 수도승들의 수행을 아십니까? 저들도 그리할진대 우리는 더 깊은 수행과 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쩜 우리는 우리 지식에 근거하고 싸구려 가십거리에 능수능란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치열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다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5. 설교에 목숨을 거시려면 소통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51) 설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언어소통기능입니다. 중보자 또는 매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리 녹녹하지를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학자들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회중의 영적인 요청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52) 설교자는 사랑과 축복의 흐름을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힘든 것은 목회 행정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 때문에 사랑과 축복의 평정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요셉의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53) 설교자는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의 논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설교의 핵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실 저 자신도 제 설교를 들으면서 종종 자주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1부 설교와 2부 설교가 다릅니다. 1부 설교 때 더 헷갈립니다. 2부 때는 정리가 됩니다. 리허설이 습관이 되면 좋지요.
6. 설교에 목숨을 거는 목사는 무엇보다도 설교 준비에 철저합니다.
61) 설교 준비의 시간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62) 설교 인용의 근거 자료를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계셔야 합니다.
63) 설교의 시간 안배를 정확하게 하셔야 합니다.
64) 설교 내용의 숙지와 논지와 초점을 분명히 인지하셔야 합니다.
7. 설교에 목숨을 거실 목사님들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71)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죽음을 이기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72)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소통하되 타협하지 마십시오. (和而不同 화이부동)
73)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영적인 권세를 누리십시오
74)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회중이 듣고 행동하게 하십시오
75) 설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8. 설교자로서 위기의 순간들
81) 양도제일교회 전도사 시절(20대중반) – 모방의 유혹과 영성의 빈곤
* 열정과 기술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했다
* 기존의 틀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관행에 익숙해졌다
* 십자가에 죽고 나만이 새로 태어나는 진정한 거듭남이 부족했다
82) 군목과 양도제일교회 담임목사 시절(20대후반) – 의로운 설교의 용기 부족
* 83년 신군부의 통치 하에서 제한된 설교 –너무 군대 위주 설교
* 86년과 87년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의로움의 빈곤
* 새로운 창조를 이루지 못했다
83) 30대 초반의 우왕좌왕 설교 – 아는 것은 많은데 소통이 안됨
* 나는 교인을 몰랐다
* 어떻게 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몰랐다
* 그냥 말만 했지 듣지를 못했다
84)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의 부흥사적인 들 뜬 설교
* 익숙한 기교가 발전을 가로막았다
* 어설픈 우월감이 진정성을 상실시켰다
* 분위기를 타다가 깊이가 부족했다
* 부흥회적인 설교의 한계를 인식했다
85) 50대 전후의 설교 – 낯선 상황에 대처가 부족했다
* 상동교회의 지성과 역사의 낯 설음
* 부흥회적인 설교의 강점과 현장에서의 부딪힘
* 삶이 수반된 설교가 진정한 설교이다
*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깊음을 사모함
* 진정성과 간절함을 마음 깊이 기도하고 있음
존경하는 서울연회 부흥 아카데미 목사님들께 부족한 사람의 설교 이야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사실 드릴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35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내고 아차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35년간 산을 올라가다가 이제는 조용히 산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땀을 흘리며 산을 올라오시는 목사님을 뵙고는 딱히 드릴 말이 없어서 그냥 조심스레 한 마디 해 봅니다. 조심하세요. 높은 산을 조심스레 오르시고 산 내음을 깊이 들여마실 수 있도록 조심하세요^^ 조심스레 오르시면서 흐르는 바람소리도 들어보시고 장단 맞추는 벌레소리도 들어보시고 길가에 피었다가 지는 풀 한포기도 깊이 들여다보세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정성이 있고 간절함이 있으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설교한다면 바위도 움직이지 않을까요? 아마도 오랜 세월 산을 지키고 있는 거목들도 나뭇가지 흔들며 손짓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교회가 희망입니다. 그래도 예배가 축복입니다. 그래도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래도 기도가 기적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설교합니다. 그리고 진정성을 가지고 설교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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