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조직신학

한반도평화론

우순(愚巡) 2006. 9. 15. 07:38
분단현실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인 분석과 이해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간혹 감리교회 안에서 극우적 견해는 직간접적으로 표명되지만, 보다 종합적인 시각이 결여되어 균형있는 시각이 아쉬워 다소 긴 글이지만 여기 올립니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신대  박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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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의 정신적 상황

        구한말 조선시대의 사대부의 당파싸움에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조선은 동남아 강대국인 청과 일본 사이에서 정치적 의존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의 정치가들은 주체적 사유에 취약하여 중국을 향해 중화사상에 젖었고, 새로운 신진문명을 받아들이려는 신지식인 층은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수용과 더불어 서구를 향하여 조선보다 앞서 개방한 일제의 진보적 문물사관을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에 앞서 주체적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물안의 개구리를 자처하던 진보의 폐쇄를 상징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풍미했던 유교의 역할은 유불선을 토착화시킨 민중종교들과는 달리 사대부의 정치적 싸움의 수단이 되었다. 유교의 보편적 가치를 왜곡시켜 개인의 자유를 유교적 규율에 매어 놓고 사회 통치를 위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질서로 바꾸어 버렸다. 비록 상대적이며 가역적 관계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아래에서 위로향한 덕목이 사회질서에 의하여 의무화 지워진 것에 비하여 위로부터 아래로의 덕목은 지배계층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적 사회이론의 근간이었던 군사부일체라는 지배논리는 충효의 정신을 강조하여 아래로부터 위로의 비판과 감시보다는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가부장적 지배 질서를 강조하는 사회통합의 논리와 이념을 제공했다. 따라서 가족관계에서나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의 자의식은 개인이 아니라 주어진 기존 질서와 전통 속에서 오래전부터 형성된 집단의 규범에 복속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진취적 미래성과 차별 없는 보편 정신을 배제한 가족주의, 집단주의, 지역 연고주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집단의 논리 안에 개인을 폐쇄시키는 사고와 행위를 강요하였다. 집단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이거나 새로운 질서 형성을 위한 노력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낙인이 찍혀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양의였던 서재필이었다. 그는 그의 가족 삼대가 역적으로 낙인 찍혀 광화문에서 참수되는 결과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사상의 자유와 창조적 사유가 허락되지 않는 사회의 보수성이 새로움의 지평을 봉쇄하고 있었으므로 전통과 보수가 강할수록 진보적 요구는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 말기에 일어난 갑오경장 사회변혁 운동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결여된 사회 안에서 오랜 기간 억눌리고 수탈당해왔던 민중의 저항이었다. 동학사상이 지향했던 근대화, 자주화의 기치는 반봉건 반외세 운동의 정신을 표방한 것으로서 우리 근대사의 자주적 사회정치 이념의 출처가 되었다 동학의 사회정치 이념은 동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인간 평등과 존엄에 관한 믿음, 즉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유불선을 통합하여 이루어 낸 동학의 생명존중 사상은 봉건적 세계관 안에 기생하던 차별적이며 서열적 사회질서의 타파와 더불어 근대적 평등과 자유이념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도래를 예견한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으로 이어졌다. 1894년 시작된 동학혁명은 3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진압되고 말았지만 조선민중에 의한 사회적 변혁의지가 명료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후 동학사상은 반외세 민족의 자주를 되찾으려는 3.1 독립운동, 반독재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4.19 혁명을 비롯하여, 지배자적 세계관을 벗어나 민중적 세계관을 형성하며 인간존엄의 보편가치의 확대해 나가려는 민중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적 사상의 전거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동학사상은 유교적인 사대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이며 민주적 가치를 앞세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는 평등사상과 인권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윤리적인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유교적인 위에서 아래로의 질서에 비하여 동학사상은 아래로부터 인간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에서 우러나는 자유와 평등사상이 축이 되어 현존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려는 세계관, 즉 후천개벽사상을 그려내었다. 유교가 중시했던 삼강오륜의 조화적 질서 이면에 담고 있었던 군사부일체사상의 가부장성도, 차별적 인간관계도 동학의 빛에서 본다면 불평등성의 이념적이며 제도적 정당화의 논리를 담고 있던 것이다. 비록 의와 례를 중시하고, 기능적 상이성에 따른 조화를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사상은 이미 기존의 사회 안에서 주어진 신분과 관계에 따라 의무와 책임을 구별함으로써 차별적 관계구조를 심화시킬 소지가 깊었다. 더구나 효를 중심한 가족주의, 충을 필두로 하는 민족주의는 임금과 아버지와 남편을 한 편에 우위 시키고, 신하와 자식과 아내를 종속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지배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유교철학이 음양 사상에 따른 조화의 우주론을 강조하였다고 하지만 그 조화는 가부장성내에서의 조화였고, 그 조화는 신분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는 그것이 보편적인 가치를 가졌던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에서는 보편주의보다는 배타성에 근거한 가족주의, 지역주의, 연고주의 등의 폐해를 낳았고, 보편성 없는 민족주의로 인하여 배타적인 보수성과 폐쇄적 세계관에 쉽게 몰두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 폐쇄적 보수성은 현대사회에서조차 그 역기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근대 국가철학의 비신성화와 더불어 일어난 보편적 인권사상이 신분적 차별을 철폐하고, 남여를 차별하는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의 폐해를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관계론은 여전히 전근대적 세계관의 그늘 아래에서 형성된 보수적, 가부장적 차별주의의 틀을 현대사회에서도 지지하고 있어 우리 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서구 근대사상의 확대과정과 산업혁명의 여파가 동아시아를 향할 때 조선은 유학자들의 중화사상을 벗어나지 못하여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향해서는 쇄국정책까지 도입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였고, 서구문물의 유입을 차단하려는 보수성에 신념을 둔 이들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의 문물을 일찍이 익힌 일제의 침탈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고, 외세의 내정간섭을 자초한 사대주의적인 조선 지식인들의 한계가 드러나 1910년 민족의 자주권을 상실하고 강요된 한일합방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국권의 상실이 자주능력의 무능과 정치철학의 빈곤이 직접적인 것이었다면, 일제통치의 말기 강대국들의 타협을 제물이 된 한반도의 분단은 유교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 당시 주체적 자주능력을 상실한 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했을 뿐 아니라 급기야 근대 세계를 깊은 갈등으로 밀어 넣은 이념 충돌의 자리로 한반도를 전락시키고 말았다.
        
        20세기 중반 세계적으로 약소민족의 해방을 불러온 범세계적 민족 자결주의의 정신이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우리민족이 해방되었을 때에도 역사적으로 체득해 온 너 죽고 나 살기식의 당파적 폐습은 민족공영의 틀을 여지없이 와해시켰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분단의 벽이 세워져도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수수 방관 하였으며, 그사이 미소제국주의에 편승한 정치가들은 이념대립의 갈등을 불러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극심한 민족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왔다. 보편성을 상실한 유교철학의 통치이념은 현실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유입 앞에서도 그 역사적 유효성의 한계와 더불어 파당주의적 무능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 것이다.

        한반도에 기독교 사상의 유입의 속도가 빨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유교의 전근대성과 파당적 근성을 넘어서 이를 대체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민중적 기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적 질서개념과 파당적 이해관계에 몰두하던 유교적 습성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 토착화되어 퇴폐적인 유교적 관습을 일상화 시켰다. 전근대적 삼강오륜 충효사상을 필두로 굳건한 가부장적 전통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지닌 보수성과 결탁하여 형식적 가족주의, 지정학적 파당성을 조장하여 배타와 차별의식을 끊임없이 조장해 왔다. 이념적 각축장이 된 한반도 안에서 400만 명이 살상을 당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신앙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모든 책임을 사상적 대립으로 해소시켰다. 이념전쟁이 불러온 전쟁이 원인이 아니라 영적 전쟁을 치른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냉전체제가 붕괴된 지 수십 년이 지나가도 여전히 영적 전쟁의 대상으로 좌파 우파를 나누며 지속적인 분단을 조장하는 단세포적 사고에 충실하다. 한국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심각한 폐해는 유교적 폐습의 잔재를 상속하고 있는 기독교, 그리고 이념 전쟁의 뒷골목에서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적색경보를 울려대는 극우적 성전론자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외세에 의한 해방은 일제수탈정치로부터의 해방이었지만, 그 여파는 조선 지식인들의 좌우분립을 불러왔고, 밖으로부터 유입된 이념의 상이성은 너 죽고 나 살기식의 비합리적 파당정치로 조선의 지식인들을 몰아갔다. 이념적 갈등을 넘어서 민족 우선주의 노선을 주장하던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급기야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존한 정치가들에 의하여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되기 시작하더니 이념적 파당성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역사를 불러왔다. 인간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의에 관한 논리 없는 이념 싸움은 생존을 건 전쟁을 불어와 이념 투쟁은 곧 상대편 존재의 생존조차 부정하는 극단을 불러왔다. 바로 이러한 극단적 대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당파싸움의 연장이었고, 전 국민을 향한 교도적인 정권들에 의하여 더욱 이념적 당파성이 강화되었다.

        이념적 분단은 체제의 분단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한 편은 자유민주의를 표방하는 인사들에 의해 독재정권이 미국의 그늘 아래 이어졌고, 다른 한 편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경직된 일인 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로 굳어 갔다. 한반도 남쪽은 독재에 대한 저항이 가능했으나 북쪽은 저항보다는 강요된 침묵이 6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 지속의 요인은  민족 내분의 분열을 불러오는 당파 주의적 습성과 당파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대주의적 외세의존이 불러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뿌리 깊은 당파적 이해관계는 민족개념이나 자주개념을 집단의 이익에 상위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상의 결핍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존과 대화의 논리를 거부하는 극단적 대립을 불러왔으며, 당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가치를 창안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상적 무능과 빈곤을 드러내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 상황은 결국 전쟁을 통하여 분단 체제의 공고화를 불러왔고 지속적인 분단은 이념의 이질화와 더불어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북한 사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사회체제를 유지해 왔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화된 독재체제를 지향했으며 급기야는 김일성-김정일로 승계되는 권력의 부자세습을 당연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남과 북을 갈라놓은 분단 현실은 오늘날 매우 심각한 군사적 대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독재적 사회주의의 대립과 심각한 삶의 질적 차이를 불러왔다. 북한이 일인 독재치하에 아직도 매어 있다면, 남쪽은 이념 대립을 조장해온 오랜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화의 발전 단계에 이르렀다.

        2004년 국민 총생산은 북한이 208억불, 남한은 6,810억불로 남한이 북한의 32.8배(3.6%)에 달한다. 국민소득은 남한이 북한의 15.5배, 북한의 대외 대외무역 능력은 28억 6천만 불로 4,783억 달라를 수출한 남한이 무려 북한의 167배(6%)에 달한다. 정부예산 규모는 북한이 25억 1천만 달러에 비해 남한은 1,034억 달러로 남한이 21배가 넘는다. 전력 생산능력은 북한이 777만KW에 비하여 남한은 5,999KW로 근 8배에 이른다. 발전량에서는 남한이 북한의 206억KWh에 비하여 14배에 달하는 3,421억KWh를 생산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한의 능력은 세계 11위에 달하고, 북한에 비하여 남한이 보유한 자동차 수는 무려 근 700배나 상회하고 있다. 남한의 국민 총생산이 북한의 33배에 달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북한 사회는 오랜 일인 독재치하에서 남한 사회의 경제적인 경쟁의 대상에서 제외된 낙후된 사회로 전락한 것이다.

        반면 주체사상을 앞세워 자주 국방을 역설해 오던 북한은 경제 구조의 취약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군사적 방위능력을 가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무기의 수로 평면 비교한다면 북한이 수적 우세를 주장할 수도 있으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한의 무기체제는 대부분 낙후된 재래식 무기로서 화력과 실질 전투력에서는 남한과 대립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2006년 영국 의회에 보고된 한 문서에 의하면 2000년 북한은 군사비로 20억불을 사용했지만 남한은 120억불을 사용했고, 일본은 440억불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2002년 영국 국제전략문제 연구소(IISS)의 분석을 이용한 한 보고서에 의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때 북한에 2배 이상 우위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미 남한은 북한의 여섯 배, 일본은 북한의 22배의 군사비를 지출해 왔기 때문이며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서 북한이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남한을 침범하는 도발을 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보겠다. 더구나 국방연구원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1974년부터 2003년까지 남한이 군사비로 지출한 비용이 68조 4448억 원인데 비하여 북한은 이에 반도 못 미치는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에 더하여 한국군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약 151조원을 투입해 정보전 및 전력의 현대화를 기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결국 남북한의 분단과 대립은 이념전쟁을 넘어서 경제, 군사, 및 정치적 이질성을 불러오고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야 하는 강요된 상황에 피차 직면함으로써 현대 국가가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의 틀을 형성하는 과제를 미루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국민의 인권, 교육, 건강예산을 축소해야 하는 정황을 초래한 것이다. 남한은 국민 총생산 세계 11위의 국가로서 그 위상에 걸 맞는 인권 및 복지 정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북한의 대립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하여 극단화되었고, 반세기를 걸치면서 남북한을 다양한 측면에서 이질화시켜 지역적 분단을 넘어선 삶의 질에서의 분단을 초래함으로 더 깊은  분단 상황을 문화적으로도 고착화시키고 있다. 분단상황을 남북한의 한민족의 삶의 질 저하를 불러오는 극단적인 군비경쟁을 불러왔고, 북한의 경우 그 경쟁력을 상실하여 그 비폐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박승덕은 민족 내부의 계급적 대립을 민족 분열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며 민족분단을 불러온 것은 외세의 개입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분단의 원인을 그렇게 인정한다 하여도 60년 동안의 분단 상황이 만들어 낸 분단의 고착화는 외세의 개입을 없앤다 하여 일순간에 평화 통일을 불러올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분단 이후의 상황은 민족적 일치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고질적인 당파적, 사대주의적, 이념화된 종교의 맹목적 적대감, 장기간의 이질화, 경제적 불균형 등으로 굳혀진 고착화된 분단 상황이며, 우리는 이런 정황을 단순히 외세의 개입에 의하여 벌어진 이질적 분단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통일에 관한 노력은 남북한의 이질성 그 자체를 극복하려는 당사자들의 지속적이며 다차원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평화를 위한 방안

        한 반도의 평화는 크게 보아 미소중일 강대국의 이권과 동남아의 안보, 그리고 한반도 내의 권력구조와 상응하는 변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반도에서의 평화로운 통일논의는 단순히 남북의 갈등의 극복이라는 과제로 요약될 수 없다. 오히려 남북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노력은 남한이나 북한 내부의 갈등을 촉진할 수 있는 요소도 많아 남남갈등, 혹은 북북 갈등을 불러오고 있는 실정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한반도에서의 평화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한 진전을 불러오고 있지만 구체적인 민족 통일에 대한 기대는 아직도 요원하다.

        세부적인 통일 논의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미국 코넬 대학교 교수인 마크 셀던(Mark Selden)이 정리하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이 가장 명시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쎌던이 설명하는 첫째 접근법은 “부시 행정부가 선호하고 일본이 지원하는 입장으로, 북한 정권의 불안정화와 붕괴를 강조한다. 이 입장은 아시아·태평양과 그 밖의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우월성에 기초한 틀에서 작동하는 남한에 북한이 흡수될 것이라고 추정 한다. 이 입장은 북한 핵무기 개발문제를 협상해 왔던 이전의 노력들(북미 제네바 협의)을 외면하면서 화폐위조와 밀수혐의로 북한을 경제적·재정적·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정권의 목을 조르는 한편 북한을 향해 ‘민주주의’라는 기치를, 최근 몇 년간 이라크에 재앙을 가져다 준 바로 그 기치를 쳐들고 있다.”

        이 접근법은 과거 소련과의 냉전체제를 지속시키며 군비경쟁을 부추겨 왔던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력, 기독교 우파들과 뜻을 함께 하는 미국 및 일본의 근본주의적인 극우 라인과 연계되어 있다. 한반도 안에서는 주로 극우파적 기독교를 대변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가진 좌파에 대한 성전론(holy war)과 일맥상통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20세기 초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자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신앙적 신념을 필두고 적색공포를 확산시켰던 바와 흡사하게, 남한의 근본주의자들은 거의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우파와 종교적 우파의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인 2006년 9월 2일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군사주의적 깃발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재향군인회와 한기총의 연대집회가 바로 이런 종류의 보수 정치와 보수 종교의 연대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비신앙적인 정치집단도 좌파와 싸울 때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연대한다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이러한 자리에 부패한 사학을 바로 잡으려는 사학법 개정을 사유 재산권 침해와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실리를 노리는 완장을 두르기도 한다. 한 편은 종교 행위를 수단으로, 한 편은 정치선전을 목적으로 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런 극우적 적대적 대립의 강화라는 방식은 최소한 북한 정권의 붕괴로부터 시작하여 북진통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적대관계를 생산해 왔다. 그들이 꿈꾸는 통일이란 한 편이 몰락해야만 하므로 심각한 대규모의 전쟁 없이 쉽사리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휴전선 근방에 배치된 북한의 이천 여기의 장거리포 및 중거리 야포,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약 600기의 스커드 미사일이 발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다양한 측면에서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한의 입장에서 승리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이를 위하여 수도권을 초토화시킬 각오를 하지 않으면 승리를 담보하기 어려운 전략 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북한은 6.25전쟁 당시 초토화되었던 북한 주요 도시의 악몽을 스스로 초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북한에 대한 남쪽의 공격은 그 도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할 리가 없으므로 북한 사회 전반의 초토화는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남한군은 북한군에 비하여 월등히 화력이 강한 현대화된 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일본에 기지를 두고 있는 핵미사일을 탑재한 미 잠수함들은 호시탐탐 북한의 불순한 책동을 응징할 준비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50년에서 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이 약 400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던 것에 비하면, 비록 단기간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그 배 이상의 생명을 해할 것이며, 재산상의 피해와 산업구조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본다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런지 모르지만 민족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동족간의 상잔을 거듭 치르며 자해하는 꼴이 된다. 과연 극우적 기독교는 이런 길을 신앙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길은 한국 기독교가 평화의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아니라 군사폭력을 휘두르는 전쟁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길이다.

        쎌던이 분석하는 또 하나의 길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가 가지고 있는 입장으로서 중국이 동의하고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군사적 긴장 완화, 경제적 지원, 경제개혁을 촉진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마침내 남북한의 경제적·사회적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다. 2000년 6.15 공동 선언에서 예견된 대로 이런 과정은 남북한 연합, 그리고 마침내는 통일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첫째 입장이 북한 정권의 몰락을 통한 북한 사회의 체제변화를 요구하는 강요라면, 둘째 입장은 보다 포괄적인 지역적 안정을 기반으로 남북한 두 정권의 입지를 더욱 유연하고 개방적인 입장으로 나가게 하는 권유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평화를 위하여 한 편의 몰락을 의도한다면 후자는 평화를 위하여 갈등의 해소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안 이외에 제 3의 입장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 그것은 고도의 지역적·지구적 긴장을 띤 한반도의 현상을 - 반세기 이상 지속된 - 유지하는 길이다. 이 길은 긴장 완화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일부를 포함한 이 지역의 이해 당사자 다수가 사실 선호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경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남북 간의 대립과 긴장상태를 유지 지속시키는 것이며,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과제를 미결 상태로 남겨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한반도에는 지난 60년 이상이나 되는 대립의 역사를 지속시켜 긴장과 위기가 이어지고, 군비 경쟁이 지속되며, 시시 때때로 민족 생존의 위기가 오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수백만이 몰살되어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우파의 전략, 민족주의적 화해와 공존을 위한 단계적 긴장완화 전략, 그리고 지속적인 긴장과 군사적 대립을  우지하면서 분단 상황을 고착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무엇이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친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기독교인들의 평화관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없이 명료한 것이다.

기독교 평화론의 형성과제

        북의 몰락과 흡수통일, 화해와 공존의 모색을 통한 민족연합, 그리고 남과 북이 긴장과 위기를 불러오는 대립 각을 유지하는 상태의 지속, 이 세 가지 방안 중에서 기독교적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반도 평화 방안은 당연히 두 번째 방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긴장완화와 화해 및 공존을 모색하려는 과제는 미국과 일본의 우파들의 공격적인 요구에 의하여 국제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대세에 따라 국내 우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제네바 북미 합의서에 기초하여 북한이 핵탄두용 원료를 빼낼 수 있는 중수로 원자로를 가동하지 않고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고, 그 공사가 완성될 때까지 매년 50만 톤의 중유를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던 1994년 제네바 북미 합의서의 정신을 어긴 측은 우파들의 반발을 겪은  미국정부이다. 북미 간 합의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극소화하던 미국이 그 합의를 실질적으로 이행하기를 거부하게 된 것은 결국 미국의 대북 정책에 있어서 자국 내 우파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혼란과 갈등을 안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결국 남한에서나 미국에서나 앞서 언급 했던바 세 가지 접근 방법에 대한 일정한 합의보다는 상이한 견해들과 입장에서 비롯되는 내적 갈등이 대북 정책에 혼란을 불러오거나 새로운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가 우파의 정치 노선을 따라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며 거룩한 전사인양 군사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기독교 복음에 근거한  평화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군사주의를 앞세워 공존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매우 호전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호전적인 미국의 우파나 일본의 우파와 연대하며 한 반도를 또다시 전쟁이라는 죽음의 제전으로 몰고 가는 일은 매우 반 평화적이며, 반 기독교적인 행위라고 규정받아 마땅하다. 이런 입장은 매우 쉽게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과 대립을 지속적으로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고 복지예산을 돌려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만드는 반인권적인 상황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북한은 인민의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희생시키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야 하는 강요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남한은 군사적 대립의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북한 군사비의 몇 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지출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무기 수출국들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이러한 긴장이 지속되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가 60년 이상 군비를 지출하며 대립하지 않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다면 적어도 남한 사회의 교육 및 복지 수준을 선진국 못지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군사적 대립은 남북한 국민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며 나아가서 경제 문화적 후진성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이런 대안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을 뿐 아니라, 퇴행적인 이념투쟁의 잔재를 기독교 복음과 혼동하고 있는 사고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군사주의적 수단인 칼과 창을 녹여 보습으로 만들어 삶의 도구로 삼을 것을 노래하는 성서 속에 나타난 평화 사상을 외면하고 민중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며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군비를 증강하는 길을 지원하는 것은 결국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고철이 될 것들을 위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지출하게 만들면서 한반도 민중의 삶을 희생시키는 행위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미소가 냉전체제를 강화하면서 수천억 달러를 들여 만들었던 핵탄두들과 그 탄두를 숨겨 두었던 기지들을 핵탄두 감축 협상에 따라 폐기해 온 역사적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왜 이 좁은 한반도에서 그들이 범했던 오류를 우리가 다시 반복해야 하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립보다는 대화와 공존, 위협보다는 신뢰의 구축, 붕괴를 기다리기 보다는 협력과 지원을 통한 상생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 보다 바람직한 평화의 길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 의지는 자국의 방위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관용되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있지만, 사실상 북한의 핵개발은 한반도와 일본의 비핵화의 기조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오고, 나아가 동남아 평화 구축을 위한 노력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간주되어 북한의 고립을 더욱 자초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사회를 고립시키고 몰락을 초래하려는 외적 위협요인을 줄여 나가도록 노력함으로써 북한이 고립과 존립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우며, 상생과 공존을 향한 평화 구축을 위하여 신뢰를 나눌 수 있을 때 북한의 핵개발의지의 포기도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은 차원의 경제교류, 이산가족 상봉의 확대, 북한 관광의 활성화, 자유무역 지대의 확대 등 한반도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접근법은 상호신뢰의 기반 구축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간혹 북한 사회 내부의 갈등을 표출하는 사소한 군사적 도발 행위나 벼랑 끝 작전 및 시위적 행위에 대해서도 남한 사회가 다소 인내할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향후 4년 동안 155조원에 달하는 남한 군사력 증강 계획을 수행하면서 남한이 북한을 안심시킬 수 있을지, 또한 미국이나 일본의 우파들이 북한을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며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위협행위가 지속된다면, 그리고 북한의 경직된 권력구조가 끊임없이 벼랑 끝 전술을 구가하면서 핵개발 시도 등 국제사회의 신뢰를 거듭 상실한다면, 아마도 평화스러운 공존의 길은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일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우파적 요구와 민족적 동일성에 기반을 둔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시도하는 평화적 요구는 시시 때때로 충돌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자유주의라는 이념적 가치보다 민족주의적 통일과 공존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민족 화해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 나갈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극단적 대립과 긴장의 지속은 평화가 아니며, 반생명적인 전쟁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은 한반도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를 나누는 공존의 가능성을 찾고, 공존 너머 민족의 통일을 내다 볼 수 있는 비젼 형성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민족적인 가치를 저버린 기독교 신앙은 종교 파벌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조선시대 이후 망국적인 사대주의와 파당주의를 반복하는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좌우로 나뉘어 분단된 한반도 이전에 우리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분단시킨 요인이 외세의 개입이었다고 볼지라도, 이제는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때이며, 민족적 합의와 일치를 포기한 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사대주의적 정략에 분단의 지속에 대한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 역사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식인이라면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이념대립의 시대가 막을 내린지 오래된 오늘의 시점에서 정략적인 좌파 우파론을 펼치며 민족 분단을 지속시키고, 전쟁의 신을 불러오는 것은 일종의 민족적인 자해행위이며,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우상숭배적인 정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과 중공이 포기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망령이 북한을 통하여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여 극단적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는 종말론적 호전론자들은 영적전사들이 아니라, 단지 냉전체제를 유지시켜오던 우파의 잔재일 뿐이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평화 형성의 과제를 수행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사상이 배태해 온 평화사상의 핵심인 비폭력성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예수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은 비폭력적 평화주의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신학적 원칙이 긍정되어야 한다. 이 초월성은 현존하는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라고 대변하는 우상 숭배적 태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신학적 원리이다. 손쉽게 이념적 가치에 기독교적 세례를 주는 것은 기독교 사상을 사람의 생각에 속한 것으로 만드는 신앙의 변질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우상 숭배적 태도에 빠지는 것이기 쉽다. 따라서 좌우의 이념을 따라 줄을 서는 것은 바람직한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이념적으로 무장시키려 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적그리스도적인 태도라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는 이조시대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족 없는 당파성, 이해관계에 따른 사대주의, 그리고 자신들의 신념을 절대화하여 상대의 존재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반인권적 정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한 반도를 향한 기독교 평화 형성의 과제를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폭력적 대안을 평화적 대안으로부터 구별해 내고 보다 성서적이며 평화적인 실천방안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평화적 실천방안은 요약하자면  위기와 대립의 지속을 조장하거나, 민중의 삶의 질를 저하시키며 군비를 증강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방안이 아니라, 화해를 통한 신뢰구축, 협력을 통한 상생공존,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질성 극복을 넘어서 이루어 낼 수 있는 비폭력적인 민족 통일의 과정을 담은 진보성을 지녀야 한다. 1987년 우리나라 국민이 노무현 정부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국민이 가진 사회 진보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극우적인, 근본주의적인 상극적대립보다는 대화와 상생의 가치를 선택한 것이며, 군사주의적 폭력을 등에 업은 정복적 권위주의보다는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며 삶의 질을 높여 나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이런 국민들의 기대에 걸 맞는 진보성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니고 있으며 국가행정의 차원에서 이를 실현해 나갈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회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은 전쟁없는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방향만은 분명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론 형성의 관점에서 진보적 입장을 정리한 이남주의 견해는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진보적 시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한반도에서 분단체제의 극복과 이를 계기로 촉진되는 동북아 국가들 사이의 협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도 미국식 표준, 혹은 신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아닌 더욱 인간적인 표준과 원리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동북아시아· 동아시아가 특정 패권국가의 지배질서에 편제되지 않고 탈중심적인 협력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셋째,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문제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의식적이고 사회구조적인 장벽이 약화될 것이며, 이는 사회 민주주의 등 더욱 진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다양한 노력들을 한층 촉진시킬 것이다.

        이상과 같은 진보적 입장은 적어도 세계적으로는 탈제국주의적인 인간화, 동아시아에서는 탈 패권주의적 협력 공동체,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진보의식의 확대와 촉진을 포함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의식의 확대와 촉진은 다차원적으로 정의되고 있는 보편가치의 확대를 의미하며 이는 환경, 생명, 인권, 민주적 가치들을 다른 제 이념들보다 더욱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입장으로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연대의 가치를 확산시켜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배제를 극소화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진보적 사상과 가치를 받아들여 보다 더 커다란 인식 공동체(epistemic community)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990년 이후 세계 종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세계윤리 형성과제는 한반도 인식공동체 형성을 위한 보편적 가치의 인식의 확대를 위하여 매우 중대한 보편적인 논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서 보편 가치에 대한 피차의 승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인식 공동체의 형성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평화윤리적 노력은 인식 공동체 형성과제로 이어져야 더욱 심도 있게 활발히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인식 공동체 형성과 평화의 길

        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화윤리의 형성과제는 군사주의적 우파 세력과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극우적 연대의 형식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군사주의와 기독교 성전론(holy war)의 조잡한 연대로서 결코 한반도의 안정과 공존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극우적 연대가 풍기는 호전적 통일 방안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을 몰락 이후 세계가 이념적 대립보다 생존 및 생명과 환경적 가치가 보다 장기적인 국가나 민족의 안전과 번영을 불러올 수 있다고 관점으로 그 입장을 바꾼 시야에서 본다면 매우 낡은 이데올로기에 천작하는 입장으로서 참된 평화보다는 일종의 보수적 세력의 연대로서 정치적 세력 시위의 성격이 짙다고 본다. 이 입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북간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함으로써 분단의 연장이나 분단의 고착화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민족간 한 편의 몰락을 한 편의 승리로 착각하는 반민족적인 태도는 결국 친미 사대주의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게 한다.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온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한 반도 평화 정착을 위하여 보다 바람직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사회 윤리적 역할을 찾으려면 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이 합의한 진보적 평화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평화스러운 연합이나 통일은 연합과 통일을 이루려는 두 집단 간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에 대한 인식을 공동적으로 가지는 인식 공동체 형성이 선행될 때 가장 평화적인 공존을 넘어서서 통일 또한 가능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진보해온 사상적 틀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보편가치의 승인은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있는 공동의 사회 윤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념보다는 생명과 환경이, 민족과 인권이 더욱 존중될 수 있을 때, 그리고 정의와 평화와 자유와 연대의 보편 가치들이 분단을 통하여 이질화된 두 집단을 위한 공통분모를 만들어 분단 상황을 극복하게 돕는 힘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은 기독교 복음에 근거하여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종교 및 사상을 가진 이들과 함께 논의하며 합의해 온 세계윤리의 기틀을 복음 안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보편가치의 실천을 통한 평화에로의 합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남북의 분열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호전적인 우파적 한미공조보다 민족의 공존과 화해와 협력을 지향한 민족공조를 생명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더 높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그 형태가 한나라 두체제가 되던지, 연합체가 되던지, 아니면 한나라 한 체제가 되든지를 막론하고 우선 제국주의적인 군사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탈 중심적인 국가 간의 협력과 합의를 찾는 외교적 노력과 더불어 남북한 민중의 생명 가치를 높여 나갈 수 있는 의식공동체 형성에 참여해 나갈 때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매듭지어 말하자면 한반도의 분단은 조선시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우리의 반민족적, 사대주의적 파당성에서 나는 그 뿌리를 본다. 지연, 혈연, 학연에 연루된 학자들이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학설을 이용하고, 권위주의적 왕권의 비인간적 권력행사 방법을 이용하여 대립각을 벌리고 있는 상대편과의 공존 그 자체를 거부하고 너 죽고 나 살기식 당파성을 조장해 온 뿌리 깊은 역사적 오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한국인의 자기 비하적인 파당성은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는 자기변명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 공조를 위하여 국공합작을 했던 바 있고, 일본 열도가 분열되어 당파싸움으로 점철할 때 일본 열도의 일치의 정신에서 파벌싸움을 그치고 새로운 개혁에 뜻을 모은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외세에 의하여 균형을 잃은 이념적 파당성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불러와 수백만의 민중이 살상을 당하고, 이어지는 민족의 지평을 상실한 파당적 정권들은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올 뿐 400만 이산가족의 한을 풀지 못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을 우리가 되살린다면, 우리 안에 있는 파당성을 근심하며 경계할 일이다. 그것은  인연, 지연, 학연의 카르텔을 통하여 집단적 이익에 맹종 헌신하는 사유를 형성함으로써 도덕판단에 있어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보편적 원칙들을 파당적 이해관계를 통하여 굴절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파당성이 유효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창조적 사유는 묵살되고, 집단의 거친 소리만 알아듣는 사회가 된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양심적 판단을 억압하고, 시류와 권력의 구조에 따라 선악에 대한 판단을 엇바꾸는 행위가 더욱 유효한 행위라고 믿게 되므로, 결국 이런 사회에서는 정치집단의 이익을 지킬 수는 있어도 사회의 공공성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이러한 뿌리 깊은 습성은 도덕판단에 있어서 보다 넓은 보편타당함을 상실하고, 집단의 이익보다 더 큰 민족 공영의 가치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한 자에게 굴종하는 사대주의적 습성은 굴종의 의미보다 굴종을 통하여 얻어내는 기득권의 확대를 이익이라고 판단하는 지식인들의 반민족적인 행위들이 숨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객관성을 상실한 이익을 감추고 위선적 구호와 선전을 통하여 도덕적 판단의 잣대를 바꾸어,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사회를 더 깊이 타락시키는 폭력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파당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논리를 쫒아 통일을 꽃피워 보겠다는 일부 극우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발상은 역사적 기억상실을 가진 자들이 오류를 반복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거절하고 구태의연하고 전근대적인 권위주의를 존속시키며 교회와 대학을 점거하고 유무형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지식인들의 파렴치한 행위들은 바로 이렇게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정신의 결과로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이들에게서 어떻게 평화로운 공존의 열매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신앙 공동체의 노력은 먼저 우리가 상실한 지평, 곧 보편적인 인간다움을 찾아온 인류의 진보적 가치들을 되찾아 연대함으로써 파당적 이해보다는 공익적 이해를, 특수한 관계보다는 보편적 가치의 향유를, 인간성을 손상하는 극단적 대립보다는 화해와 공존의 철학을, 편협한 이원론적 사유에서 나온 거룩한 전쟁의 선포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한 생명가치의 확대를 기하는 것이 분단사회 안에서 분단을 넘어선 평화형성을 위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남북이 모든 분야에서 자유, 정의, 평등, 연대, 생명을 중심한 보편가치를 확대하여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인식 공동영역을 형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남과 북의 평화만이 아니라, 너와 나, 그들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추구해 나갈 수 있다.  민족 공영을 외면하며 추구한 파당적 분열 -> 일제의 식민지화 -> 민족적 동일성을 부정하는 외세 유입과 그에 따른 이념투쟁과 한반도 분단 -> 한반도 전쟁과 독재정권에 의한 분단의 고착화 -> 남북 사회 전반에 걸친 불균형 초래 - 라는 도식에서 잃어버린 민족 정체성을 되찾고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모색하려면 우리 안에 내재되어 끝없는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파당적 습성과 권력구조를 먼저 해체하고, 한반도 안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길 밖에 없다. 따라서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는 포월적인 하나님 신앙을 가진 기독교 동동체는 특수한 이익관계를 전제한 분열구조를 벗어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와 승인이라는 인식 공동체 형성을 통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세력과의 공조보다는 민족 공조의 기반을 다지고, 국내의 특수한 집단 이익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인간 존엄에 관한 진보적 사유의 확대를 기하며 남북 간 공존과 평화를 향한 합의의 길을 찾도록 노력하는 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