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양식 원고<2007년도>
<1>
찬송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성경 창 1: 1
요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삶의 주어
오늘 나눌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삶의 주어이신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현관문은 창세기입니다. 창조신앙은 기독교의 뿌리이며 기독교의 기반이됩니다. 기독교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창세기의 창조로 시작하고.......기독교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끝납니다.
그 중에도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의 문을 여는 마스타 키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로 열 때만 기독교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고...인간이 출현하게 되었으며...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도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 창조의 첫 구절에서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주어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들의 삶의 주어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창조가 시작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를 지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박물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고학의 대상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학적인 사변의 관념이 아니고 심리학적인 투사체의 허상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 역사하시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지금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선사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높은 데 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19세기의 이성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정통주의로 회귀했다고 해서 신정통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또한 말씀과 계시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첫 고백도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고백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삶의 주어일 때는 혼돈입니다. 공허입니다. 흑암입니다. 혼돈가운데서 방황하고, 공허함 때문에 우울하며, 흑암아래서 살 길을 잃어버리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삶의 주어가 되면 빛이 옵니다. 혼돈의 방황이 끝납니다. 공허의 우울이 끝납니다. 흑암의 절망이 끝납니다. 그리고 살길이 열립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살길이 열리고 갈 바를 알게 되며 목적의식이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테초 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은 창조를 이어가십니다. 그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의 상태입니가? 아니면 유의 상태입니까? 만약 유라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무라면 무가 영원한 무가 아니고 유가 될 수 있음을 인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십시요. 창조주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베푸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유를 선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기도 아닙니다. 물질도 아닙니다. 세상 권력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의 삶의 주어로 삼는 사람만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삶을 에덴동산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삼으십시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것 처럼 지금 여기서 다시 당신의 삶에 위대한 창조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분은 삶의 주어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의 주어이십니다.
질문: 지금 당신의 삶의 주어는 누구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삼게 하옵소서. 제 마음이 혼돈으로 방황하고, 공허로 슬프며, 흑암 때문에 길을 잃어 버렸사오니 빛을 주시옵소서. 제 삶을 전적으로 맡기오니 제 삶의 주어가 되시사 빛을 창조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찬송: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
성경: 창세기 1장 2절
요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의 운행
오늘은 “성령의 운행”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성령의 운행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은 성령님께서 운행하신 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특성 가운데 신의 속성 즉 성신으로 운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땅은 수면 즉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신께서 물로 덮여 있는 땅을 운행하셨습니다. 운행이란 무엇입니까? 운행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 32장 11절에 나오는 독수리의 습관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32:11)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들을 훈련시켜 날게 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만든 후, 그 위에 너풀거리며 새끼들을 받아서 날개 위에 업습니다. 운행이라는 메라헤페트는 독수리가 새끼를 날게 하려는 사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독수리의 날개 짓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명기32:9-12)
잠시 물질의 크기를 생각해봅시다. 물질이란 그 크기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입니다. 물질은 자기보다 큰 공간 안에서는 오직 한 곳 에서만 존재하지만, 자기보다 작은 공간 안에서는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자기보다 큰 산속에 있으면 산정상이든 산 허리든 산 아래든 한 곳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보다 작은 밥그릇을 손에 잡고 있으면 사람은 밥그릇 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고 중턱에도 있습니다.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작은 애벌레를 생각합시다. 아주 작은 애벌레가 쟁반을 건너가려면 우리가 바다를 건너듯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애벌레는 작기에 쟁반이 바다 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애벌레보다 크기에 쟁반이 한 뼘 두 뼘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입니다. 물질은 자기보다 큰 공간 안에서는 오직 한 곳에서만 존재하지만 자기보다 작은 공간 안에서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던 땅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태초에도 그리 하셨고 출애굽 때에도 그리하셨으며 지금도 그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났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나 계실까? 우리의 아픔을 알고나 계실까? 우리의 기도를 듣고나 계실까? 하나님이 나까지 챙기고나 있을까? 아니야! 하나님은 이곳에는 안 계셔, 아니야 하나님은 나는 버리셨을 거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땅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땅을 바라보시고 껴안고 계십니다. 또한 땅보다 크신 분이시기에 혼돈의 땅일지라도 공허의 땅일지라도 흑암의 땅일지라도 그 시작이 어디며 그 끝이 어디며 어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기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령의 운행은 우리를 껴안고 우리들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의 운행을 통해 우리를 껴안아 주십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십시요. 그리고 날아 오르십시요. 벼랑 끝은 떨어지는 절벽이기도 하지만 날아 오르는 비상점이기도 합니다.
질문: 지금 서 있는 곳은 떨어지는 벼랑 끝입니까? 아니면 날아오르는 벼랑 끝입니까?
기도: 전능하신 오늘도 저의 마음이 성령님의 품 안에서 위로받게 하옵소서. 제가 서 있는 자리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일지라도 성령님의 운행아래 살면 날아오를 것을 믿사오니,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말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