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하나님의 의(2011-0529) 주일 설교

우순(愚巡) 2011. 5. 28. 21:53

하나님의 의

 

      (로마서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할렐루야!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초대교회의 인사말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 서로를 축복하면서 인사하십시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 잘 하셨습니다. 우리 좀 더 다정하게 다시 해볼까요? 이 번에는 긍휼까지 포함해서 인사합시다. 은혜와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교회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혜와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인사 반복>

 

    저는 우리 교회가 오늘처럼 늘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은혜로왔으면 좋겠습니다. 자주 말합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입니다. 교회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성소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요즘의 한국 교회는 내부 분쟁과 지엽적인 전투로 모든 에너지를 소실하고 영적 전쟁에서 패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 교회별 전투가 아닌 기독교 전체가 한 마음으로 악한 영들과 싸워 이겨야 핳 것입니다.

 

1. 웨슬리의 회심은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회심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웨슬리가 회심을 하면서 깨달은 의입니다. 웨슬리는 273년전 올더스케잇에서 회심을 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았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느라 어제 하루 종일 웨슬리의 일기와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 낯선 의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했습니다. 이전에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은혜가 되었고 제 심령이 다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를 감사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선포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는 희랍어 'dikaiosune theou'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 뜻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사람끼리 비교해서 얻는 상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절대적인 의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만들 수도 이룰 수도 없는 한계적인 의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의요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의입니다. 때문에 이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의입니다. 이 의가 복음에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천사가 전해준 소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막1:1)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에 관한 약속입니다.(롬1:2)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희랍어 유앙겔리온 (euangelion)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유-앙겔로스(eu-angelos)의 합성어로 앙겔로스 곧 천사가 전해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중의 소식 으뜸 알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0~11)


 

   웨슬리는 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홈 피에 목원대학교 이선희 교수가 제공한 웨슬리 회심 자료를 올려놓았습니다. " 웨슬리의 회심에 대한 그 자신의 증언 "입니다. 이 글은 웨슬리의 일기 중에 회심이 있었던 5월 24일의 상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웨슬리 일기 원본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글 중 7번과 8번과 9번의 내용은 핵심이 '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의 대비입니다. 웨슬리가 회심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에는 자기가 배운 것도 많고 너무 현명했다고 고백합니다.

 

  "  7. <전략>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것들은, 즉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고 했던 것들이 나 자신의 행위(my own works)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추구하는 소위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실로, 내가 그전에 다른 이름 하에 추구하였던 바 '나 자신의 의(義)'(my own righteousness) 바로 그것이었다.

 

    8. 나 자신의 행위들과 나 자신의 의를 신뢰하는 이 세련된(refined) 방법 가운데서(신비적 작가들에 의하여 그토록 열심히 주입교육을 받은 대로), 나는 침울하게 질질 끌려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 안에서 아무런 위안도 도움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까지 말이다.(선교사로서: 역주) 그러나 (미국행)배 안에서 나는 다시금 외적인 행위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저주시는 긍휼을 베푸셔서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아교도들(Moravian brethren)을 동반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는 바, 이들은 나에게 "보다 탁월한 길" (a more excellent way)을 보여주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소위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배운 것이 많고 현명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 길은 나에게는 어리석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인간도 그것으로써는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는 저 義(that righteousness)를 설교하고, 따르고, 신뢰하기를 계속하였다.

 

     9. Savannah에 있었던 기간 동안 내내 나는 이런 식으로 허공만 치고 있었다. 그 분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a living faith in Him)에 의하여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義'(the righteousness of Christ)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을 추구하였다. 그것도 모든 시간을 바쳐 열심으로 노력하였다. 나는 이 때 적절히 말해 "율법 아래" 있었다.(롬6:14)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율법은 선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내적인 사람에 있어서 율법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나는 "육적이요, 죄 아래 팔려 있었다". 매일 같이 나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바를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그것을 나는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그, 원하는 바 선을 어떻게 실행할지를 나는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을 나는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는 악, 그것을 나는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하였거니와, 그것은 바로, 내가 선을 행하고자 원할 때 악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내 지체 속에 있는 법이 내 마음의 법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여전히 나를 죄의 법 속에 포로로 잡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롬7:14-23).

 

     웨슬리의 고백은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기 의를 추구하느라 죄와 싸우고 있을 뿐 죄로부터 해방되지 못하였고다, 이는 결국 율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상태였다.

 

  10. <전략>  왜냐하면 나는 죄와 더불어 싸움을 하고만 있었을 뿐, 죄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는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주는 증거가 없었다.(롬8:16) 실로 그런 증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증거를 믿음으로써 추구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로써 추구하였기 때문이다.(롬9:22)

 

    11. 1738년 1월 영국으로 돌아올 때, 죽음의 절박한 위험 속에서,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매우 마음이 편치 않은 가운데서, 이 불안의 원인이 불신앙(unbelief)이라는 것과 그리고 참된 살아있는 믿음(a true, living faith)을 얻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유일의 것"(눅10:42)이라는 것을 나는 강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믿음을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its right object)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즉,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이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2. 웨슬리는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구원함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웨슬리를 회심 시켰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루터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바울을 복음전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룰-루터-웨슬리로 이어지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의를 맏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의이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의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도 이 하나님의 의가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의로움입니다.

 

    지난 주는 존 웨슬리의 회심 273주년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273년전 '의로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웨슬리에게 회심을 가져다 준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자기의 의는 경건의 모양같은 인간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 얻는 어느 정도의 의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의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웨슬리는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순간 자기의 의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했습니다. 웨슬리는 이를 하나님의 호의라고 설명했습니다. 웨슬리는 이 하나님의 의를 모라비안 교도들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깨달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울의 성경 기록과 루터의 성경해석과 웨슬리의 회심을 통하여 명료해졌습니다. 

 

    루터는 이 의를 낯선 의(justitia aliena)라고 불렀습니다. 이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아 (propter christum) 주어지는 의로움입니다. 웨슬리를 회심시켰던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간주됩니다. (propter christum reputari nos justos) 우리 자신의 격질 또는 자질(qulalitat)로 부터 오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의로움 즉 우리 바깥에 있는 의로움입니다. 낯선 의는 모든 자를 의롭게 만든다 (aliena justitia omnes fiat justi) 그리고 이 의로움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한다. 의인은 자기의 의로운 격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받은 자도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의롭기 때문에 의인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의롭다고 간주해주시기 때문에 의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의인(義人)이 아니라 의인(義認)입니다. 칭의(稱義)도 실제로 의로운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 의롭지는 않지만 의롭다고 불러주는 것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주(看做)라는 말과 전가(轉嫁)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의롭지는 않지만 의롭다고 간주하고, 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의를 넘겨주어서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 낯선 의, 전가되어진 하나님의 의로만 이루어집니다. 자기 의에 천착해있던 웨슬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회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3. 웨슬리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 생각하는 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희랍어 '엑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ek pisteos eis pistin)을 번역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 곧 믿음을 갖게 한다는 뜻이며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며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출밤점이요 목표라는 것이며 믿음만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상동교회 성도들은 독서를 잘 하시니 꼭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루터의 글도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웨슬리의 일기는 나원용 감독님이 번역하신 '존 웨슬이의 일기'(KMC)도 괜찮고, 루터의 사상은 구영철 목사님이 번역하신 파울 알트하우스의 '마르틴 루터의 신학'(성광문화사)도 좋습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믿음과 신념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믿는 신념을 믿음과 착각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 자기가 이해한 율법, 자기가 배워온 전통에 대한 신뢰와도 착각합니다. 혹자는 웨슬리처럼 자기의 의로움을 위하여 자기의 선행과 덕행을 믿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낯선 것입니다. 나의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심리상태가 아니고, 철저하게 나의 바깥에서 나에게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 의롭다고 인정받는 신앙고백입니다.

 

   웨슬리는 일기에서 이 의를 몰랐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학식과 현명함이 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말합니다. 웨슬리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은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나는 믿음이 없었다. 이게 회심 전후의 인식을 위하여 일기에 쓴 회심일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아직도 율법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기의 의로움에 천착해 있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게 배풀어 주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웨슬릭가 회심을 통하여 얻은 것은 예수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의 자각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통한 체험입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성령체험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아니라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체험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사건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로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의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성령체험을 통하여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만 우리의 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매우 값진 선행과 덕행이겠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는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의일 뿐입니다. 웨슬리가 회신 전에 얻으려고 추구했지만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자기 의, 예수님 없는 자기만의 의, 믿음으로 얻지 않았기에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적인 공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 밖에서 오는 하나님의 자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입니다.

4.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나타나심'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타난다는 말은 아포칼립테타이(apokalyptetai)의 번역입니다. 이 말을 쉽게 아실려면 요한계시록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아포칼립스 요하노이(apokalypsys ioannoy)입니다. 다시 말해 '나타나다'라는 말은 요한 계시록처럼 계시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타나다'는 무력한 인간 곧 죄성으로 가득찬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스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계시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해주셨습니다. 에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의는 상대적 의요 약간의 우월적 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의, 곧 그리스도에게서 나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웨슬리가 고민했던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회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심 중에 다마스커스의 바울의 회심은 박해자의 회심입니다. 밀라노의 어거스틴의 회심은 방탕자의 회심입니다. 그에 반해 웨슬리의 회심은 완전자의 회심입니다. 경건한 자의 회심입니다. 인간적인 비교만 하면 바울의 회심이나 어거스틴의 회심은 불의한 자의 회심이지만 웨슬리의 회심은 의로운 자의 회심입니다. 웨슬리는 바울처럼 박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티처럼 사색만 하는 방탕아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인간적으로 비교하면 웨슬리는 의이이었습니다. 그는 훈련받은 대로 철저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이요, 독서한 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동방 정교회의 수도사적인 신앙을 가리고 있었던 경건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웨슬리가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였다. 나는 율법 아래 살았다. 우리는 웨슬리의 이 고백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아래 사십니까?  혹시 여러분도 웨슬리처럼 배운 것도 많고 너무 현명하서서 자기의 의로움에만 천착해 있으신 것은 아니십니까? 혹시 아직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자기의 심리적인 믿음만을 가지신 것은 아니십니까? 혹시 스스로 경건하시려고 노력을 하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의를 가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율법 아래서 신음하시면서 마음에도 없는 불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간구하십시오! 웨슬의 회심이 위대한 것은 참된 신앙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려고 간구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에 충실했고, 길거리 집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말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임을..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나타 있음을 ... 복음은 천사가 전하여 준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희랍어 euagellion은 angelos 천사가 전해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의 의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기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회심을 통하여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는 회심 후에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자주 인용했습니다.

 

  (로마서8장1절~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로마서8장15절~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웨슬리가 회심을 체험하고 나서 얻은 것은 승리자의 자신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율법 아래서는 때때로 정복자였으나 회심 후에는 언제나 정복자로 살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일기 16번) "그리고 여기서 나는 지금과 과거의 상태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게 되었다 나는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울법하에서와 같이 은혜 아래서도 나의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나는 자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때때로 정복당하였으나 ,이제 나는 항상 정복자(always conqueror)이다. "

 

   또한 웨슬리는 하나님과 자신이 화평한 것을 체험했고 오랫동안 근심하던 두려움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불안감을 이기게 하였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회심 다음날인 1738년 5월 25일의 일기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1738년 5월 25일 일기 17번)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주 예수여! 라는 말씀이 나의 마음에 그리고 입에도 꽉차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힘이 내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는데 쓰여지고 있음과 나의 영혼이 끊임없 이 그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에 성 바울 교회에 다시 출석하여 찬미속에서 ' 나의 노래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스러운 친절에서 오며, 그러기에 나는 나의 입으로 당신의 진리를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전하리이다 ' 라는 좋은 말씀을 맛보았다. 그러나 원수는 "만일 네가 믿는다면 왜 좀 더 분명한 변화가 없느냐? 하며 두려움을 넣어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아니 내가 아니지만)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과 화평하다는 것을 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178년 5월 25일 일기 18번) "그러나 아무래도 좀 두렵지 낞느냐? 그리고 그것은 네가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라는 시험이 계속되었다. 나는 내 주님에게 나를 위하여 대답해 주십사 하고 간구하고 성경을 펴서 바울이 말한 "밖으로는 싸움과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씀을 읽었다. 그러고서 "자! 내 안에 두려움이 있다고 하여도 나는 나아가야만 한다."하고 나 스스로 매듭을 짓고 그러한 두려움을 내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제 저는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며 루터가 깨달음 종교개혁의 진수이고 웨슬리를 회심시킨 하나님이 은혜요 자비입니다. 오늘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시면 이 하나님의 의를 꺠달으셔야 합니다. 웨슬리가 회심하기 전처럼 학식과 현명함 때문에 자기 의로움에만 천학해 있지 마시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의입니다. 이 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베풀어주시는 의입니다.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의이며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의입니다. 이 의를 얻은 자만이 구원을 받으며, 이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꺠닫고 자기의 의로움에서 해방된 영적 체험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 교회사적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진지하게 꺠달아야 할 믿음의 본질은 이 하나님의 의를 얻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