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2012-0304) 주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로마서 5:1-1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사순절
오늘은 사순절 둘쨰 주일입니다. 저지난 주 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을 뜻합니다. 오순절을 오십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사순절과 오순절을 계산할 때의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오순절은 오십일을 그대로 정해서 일주일을 칠일씩 계산함으로,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7주가 되는 다음 주일을 오순절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은 일주일을 칠일로 계산하지 아니하고 육일로 계산하여 40일을 부활절까지 역산을 하게 됩니다. 육일씩 계산하여 6주까지 하면 36일이 됩니다. 올해는 4월 8일이 부활주일이기 때문에 지난주부터 계산하면 4월 8일까지가 36일이 됩니다. 그러면 역산을 하여 40일은 항상 수요일에 채워지게 됩니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에 시작하기 때문에 이날을 성회수요일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왜 오순절은 일주일을 7일로 계산하는데 사순절은 6일로 계산할까요.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이 포함되어진 오순절, 성령강림절은 주일을 계산하여 포함하지만,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사순절은 예수님의 인성이 고난을 받았으니 주일을 빼자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실제 46일입니다.
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까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또 기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순절의 고난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절정은 죽음이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사건이었다면 사순절의 시간을 깊이 묵상하면서 기념하고 지켜야 할 성도의 삶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사실입니다.
3. 인간의 절망과 복음의 능력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은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부터 읽어보면, 로마서 3장은 인간에 대한 지독한 절망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인간은 의인이 없는데 하나도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는 속임을 일삼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잘못 해석하면 지극히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이 로마서 3장의 인간을 향한 이 지독한 절망에서 종교개혁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감리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막힌 역설을 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지독한 인간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복음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에 있는 말씀은 이러한 복음에 대한 메시지를 단언적으로 잘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종교개혁과 감리교회의 부흥이 로마서 3장의 인간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인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복음의 능력 안에서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그리고 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인 믿음, 바로 이것이 이 지독한 인간 절망을 해결할 수 있는 한 축입니다.
4.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우리의 지독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는 단언적으로 고난, 그리고 구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을 당함으로 우리가 대속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따라가는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는 자들을 2000년 동안 이단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지식의 논리에 갇혔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죽어서는 안 되기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대속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는 죽는 인간의 인성을 지녔습니다. 분명히 예수는 자신의 인성을 가지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 인간의 지독한 절망,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 24~25절은 이러한 진술을 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어서 죽었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로마서 3장에 나타난 인간의 지독한 절망의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은 우리가 오늘 읽은 대로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잘 예언하는 구약성경은 이사야 53장입니다. 53장 3~5절은 대표적인 성경구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다고 합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이 신약 성경에 두드러졌던 것은 빌립의 전도였습니다. 빕립이 전도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이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았던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성령을 따라 나아가 물어봅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기를 “일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분명히 이 내시는 예배하러 예수살렘에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 그는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었는데, 말씀을 깨닫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잘 했는데,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분명히 드렸는데,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수레에 올라가서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가 읽는 성경은 이것입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의 그가 이사야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빌립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빌립의 이 메시지를 통해서 이 이사야서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5. 복음의 메시지 : 절망과 희망과 대속의 피
여러분, 로마서 3장에서 5장에 이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니 지독한 인간에 대한 절망에 대한 현실의 인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통해서 열려진 구원의 길,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의 말씀을 다시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피의 복음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 내시는 이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았으니 이 나라의 매우 고위층의 인사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배하러 왔습니다. 이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 왔으니까 이 내시보다 더 정성을 들여 예배하러 온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의 복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배하러 간 사람이었고, 그 시대의 공직자였고, 그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을 다시 보면,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를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우리가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피의 복음에 대해서는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더 정확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7절입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그리고 11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14절에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결국 대제사장, 그리고 피의 복음,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히브리서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신 이 복음이 오늘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고,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6~28절의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세상 끝날에 나타났는데,그 이유는 제사를 단 한번으로 완성하여 끝장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의 모든 중보를 마무리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소을 잡고 매번 하나님 앞에 속죄의 번죄를 드리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면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이 사순절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내시처럼 예배하러 갔는데, 내시처럼 말씀을 읽는데, 내시처럼 사회적으로 자신의 지위도 가졌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를 모르는 채 예배하고 예수를 모르는 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모른 채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면, 그의 신앙은 알맹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 사순절은 오늘 예수가 우리를 위해 단번에 드려지신 제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피의 복음을 경험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그리스도의 받을 고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서는 결론을 이렇게 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한마디로, 이 사순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깨닫고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아멘으로 믿는 믿음이 생긴 사람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서 경건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여러분, 환난 중에도 그리스도의 이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인데,이 소망은 성령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의 희생제사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의롭다 칭함을 주신 믿음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이 사순절을 지나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환난 가운데에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주간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