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에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요9:1~7) 2012-1118
초막절에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요한복음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초막절에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입니다. 지난 두 주간 추수감사절인 초막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주일로 " "초막절에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입니다.
1. 초막절(추수감사절)은 축제의 절기였습니다.
초막절은 축제의 절기였습니다. 광야의 고난과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축제의 절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회상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였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화하면서 '지금 -여기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이 '지금-여기서' 다시 함께 하시리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막절의 축제는 과거의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에는 다섯 가지 축제를 벌였습니다. 소리의 축제, 물의 축제, 빛의 축제, 춤의 축제, 풀의 축제입니다.
(1) 소리의 축제 - 초막절에는 '호쉬아 나' 지금 구원하옵소서! 라는 소리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흔히 호산나라는 소리의 축제는 시편 118편 25절의 기도문을 소리 높여 부르는 축제입니다.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번제단에 초막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서 번제단을 돌며 소리를 높여 기도문을 찬양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번제단에는 모짜에서 꺽어온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 놓고, 사람들은 손에 손에 '아르바 미님'이라는 네 종류의 나무 가지를 들고 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국합니다. 지금 구원하옵소서! 초막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소리의 축제절입니다.
(2) 물의 축제 - 초막절에는 물의 축제를 벌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길어온 물을 번제단에 부으며 다음 해 농사를 위하여 이른비를 내려 달라고 관제의식을 거행합니다. 제사장들은 은나팔을 불며 실로암 연못에서 길어 온 물이 수문을 통하여 번제단에 도착하도록 돕습니다. 광야의 고난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고난이 기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지나 엘림에 이르게 하셨던 것, 반석에서 물을 내셨던 것을 기억하며 물을 번제단에 붓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농사를 위하여 이른 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3) 빛의 축제 - 초막절에는 여인의 뜰 네 모퉁이에 있는 촛대에 불를 붙여 예루살렘을 밝힙니다. 횃불 행렬도 하면서 환한 빛을 밝힙니다. 초막절의 빛의 축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고난받는 자신들의 안내자였음을 확인합니다. 초막절에는 이 빛의 축제를 통하여 흑암의 절망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을 찬양합니다.
(4) 춤의 축제 - 초막절에는 여인의 뜰에서 밤샘 축제를 벌이는데, 아이들은 물론이고 노인들까지 다 나와서 춤을 춥니다. 이 날 만큼은 나이를 잊고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춤을 추면서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찬양하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젊은 날에 지은 죄를 용서하사 우리로 행복한 노년을 맞게 하셨으니 찬양하라! 춤을 춥니다. "
(5) 풀의 축제 -초막절에는 풀로 장막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광야의 고난을 회상합니다. 초막절에는 아파트 베란다에, 빌딩 베란다에, 길거리에 곳곳에 초막을 만들어 축제를 벌입니다. 초막은 광야의 장막생활을 재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집은 영원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초막절(추수감사절)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초막절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초막절은 구원의 완성을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인데 우리 주님은 바로 구원의 완성자이시기에 초막절의 축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축제의 주인공이심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자치 이야기(요2:1~11)는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공생애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처음 표적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의 핵심은 축제의 회복입니다. 포도주가 모자라서 축제가 깨져갈때 예수님이 축제의 무대 한 가운데로 나오셔서 축제를 회복시키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항아리에 물을 채워 포도주를 만듦으로 축제를 회복시킵니다.
자 좀 더 구체적으로 초막절의 축제와 예수님을 함께 묵상해볼까요?
(1) 우선 소리의 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막1:1) '호쉬아 나' 지금 구원하옵소서! 초막절은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바로 이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요12:13) 예수님은 호산나 찬양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호산나의 구체적인 응답의 소리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으며, 예수님에게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2) 그 다음 물의 축제입니다. 성령의 생수입니다.(요4:10) 물은 성령입니다. (요7:39)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오던 관제의식의 핵심은 이듬 해 농사를 위한 이른 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놀라운 생명의 물 성령의 생수를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요4:10> "네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너는 그에게 구하였을것이요 그는 네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었으리라"
그런데 그 생수는 그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입니다.
<요7: 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3) 빛의 축제는 더더욱 확연합니다. 예수님은 참 빛입니다. (요1:4~9)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 빛입니다. (요8:12) 예루살렘을 밝히던 여인의 뜰 네 모퉁이에 붙여진 불빛은 예수님의 빛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다.(요1:9)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요8:12) 이제 더 이상 여인의 뜰에서 불을 밝히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어 그 또한 세상의 빛이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축제를 벌입니다.
(4) 춤의 축제 역시 우리 예수님이 구원의 날에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춤의 축제는 여인의 뜰에서 벌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요8:1~11) 어른들은 밤 새 불렀던 사죄의 은총에 대한 노래가 생각이 나서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구원얻을 성도들이 벌이는 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하여 춤의 축제를 벌입니다. (눅15장) 다윗은 우리들이 베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찬양합니다.(시편30편 11절).
(5) 풀의 축제, 초막의 축제는 거처의 축제입니다. 사람은 살 집이 있어야 안정을 얻습니다. 초막은 광야의 장막을 회상하는 것인데, 영원한 장막에 대한 희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광야같고 우리는 언젠가 나그네 같은 이 삶을 청산하고 영원한 장막에 거할 것이라는 믿음의 희망이 초막의 축제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거처를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에수님은 우리를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3)
이처럼 예수님은 초막절의 다섯 가지 축제와 구속사적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완성자시며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성경은 구속사의 책이고, 구속사는 구원의 역사인데, 모형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구경할 집 모델 하우스와 살 집 리빙 하우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초막절 축제는 신약의 예수님에게서 완성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에수님은 구원의 완성, 구속사의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3. 예수님은 축제의 주인공으로서 시각장애우를 초막절의 축제에 초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초막절 끝자락에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셨습니다. (요9:7) 이는 축제로의 초대입니다. 초막절의 축제는 남여노소 모두가 참석하는 축제입니다. 초막절의 축제는 노인들도 춤을 추는 축제입니다. 일 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이 함께 즐기는 축제입니다. 모두가 참석하는 축제가 초막절 축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두가 참석하는 축제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우였습니다. 율법은 시각장애우를 부정한 자로 여겨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왕따요 소외요 버림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시각장애우의 눈을 고쳐주사 축제의 대열에 합류하에 했습니다.
2)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셨지만 율법의 한계를 넘어 율법을 완전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초막절의 축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벌이는 최고의 축제였지만 불완전했습니다. 바로 율법의 한계때문입니다. 소외자가 나오기 때문이요, 부정한 자를 만들기 때문이요, 구원의 잔치에 빠지는 자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명도 부정한 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요3:16)
3)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합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은 중요한 영성의 근거요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랑이 덧붙여질 때 완전해지고 완성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기관리 Self -control을 위하여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할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이 경건의 지름길이지만, 타인에 대하여서는 율법이 쏘는 것이요 죽이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를 쏘고 죄는 율법의 권능입니다. (고전15:56) 그래서 율법은 끊임없이 비난과 정죄의 덫에 걸립니다. 율법은 오직 사랑이 수반될 때만 완전합니다. 자기 관리에는 율법이 최고지만, 타인 사랑에는 사랑이 최고입니다.
4) 예수님이 시각장애우를 고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시사 초막절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초막절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광야의 고난과 위기를 벗어나게 하시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초막절의 축제를 묵상해보십시오. 소리의 축제, 물의 축제, 빛의 축제, 춤의 축제, 풀의 축제를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마디로 쫒기는 대중입니다. 이념적 혼란 때문에 대중이라고 하지만 신학자들은 민중이라고 하고, 역사학자들은 노예 또는 천민이라고 합니다. 군사적으로는 도망자이지요. 한 마디로 생존을 위해 쫒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초막절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5) 예수님이 시작장애우를 치료하신 것은 시각장애우를 초막절 축제에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초막절의 깊은 의미인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한 것입니다. 삶의 위기와 고난에 직면하여 쫒기고 있는 대중들, 서민들, 민중들, 천민들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도들이 예배하러 오실 때 세상의 풍파에서 쫒기다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쩜 우리는 교회에 오셔서 더 이상 무의미한 회의나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될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쫒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중이요 도망자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성소이며,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4. 예수님이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신 실로암 연못은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해줍니다.
1) 에수님은 시각장애우의 눈을 실로암 연못의 물로 씻어 치료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요9:7) 예수님이 시각장애우를 실롬암 연못으로 보냈습니다. 왜 실로암 연못일까요? 실로암 연못이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해주기 때문입니다.
2) 자 성도 여러분!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우리 몸을 예루살렘 도시라고 하십시다. 그러면 오른 쪽 어깨쯤 되는 예루살렘 동북 쪽에 기혼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의 왼쪽 다리쯤 되는 예루살렘 서남 쪽에 실로암 연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샘과 못이고 둘 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습니다.
3) 그런데 주전 720년에서 주전 701년경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수 많은 난민들이 발생합니다. 이 때 남 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정치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경쟁하고 싸우던 관계였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동족이니 난민들을 돕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서쪽에 난민들을 받아들였는데 이 때 예루살렘 인구가 10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4) 바로 그런 역사적인 상황, 난민들이 몰려 드는 상황, 광야의 위기와 고난처럼 삶의 절박한 현장에서 쫒겨오는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난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베풉니다. 물입니다. 난민들을 위하여 물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 밖 동북 쪽에 있넌 기혼 샘과 실로암 연못을 연결하는 수로를 예루살렘 성 밑으로 뚫습니다. 일종의 지하수로입니다. 그리고 앗시리아 군대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기혼샘의 입구를 막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난민들을 살립니다. 실로암 연못은 바로 그렇게 난민들을 살려준 연못이었습니다.
<대하 32: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
5) 실로암 연못은 원래는 빗물을 받아두던 웅덩이였습니다. 우기에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건기에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모자랐고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 수로를 통하여 기혼 샘에 연결됨으로 실로암 연못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실로암 연못의 물이 초막절 축제에 사용하던 관제의식의 물입니다. 예수님은 난민을 살렸던 그 실로암 연못의 물, 기혼 샘과 연결되어 있어서 늘 풍족하게 채워져 있는 그 실로암 연못의 물로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였습니다. 이는 난민을 살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각장애우 곧 초막절 축제에서 소외된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실로암 연못은 약한 자를 배려하시고, 삶에 쫒기는 대중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해줍니다.
5. 우리 모두 축제의 삶을 위해 예수님의 수로를 뚫으시기 바랍니다.
1) 우리는 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난과 위기 가운데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삶의 절박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래서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시각장애우처럼 초막절 축제, 하나님의 사랑의 축제를 누려야 합니다.
2) 해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축제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표적은 축제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깨져갈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사 축제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의 중심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면 축제가 다시 시작됩니다.
3) 저는 지난 10월에 아침 조례를 마치고 텅 빈 성전 안에 혼자 들아와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낙심했던 마음에 새 힘이 생겼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제 눈이 밝아지면서 타인의 죄는 작아지고 제 죄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날 저는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반복해 불렀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떄 주님이 크신 은혜를 주셨습니다.
4) 실로암 연못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실로암 연못은 그저 빗물을 받아 두던 평범한 연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혼 샘에 연결할 때 항상 물이 넉넉하게 채워져서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생수가 흘러야 합니다. 성령의 생수가 차고 넘쳐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의 생수가 가득 가득 부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기혼샘물을 끌어오던 히시기야 수로처럼, 예수님의 수로 은혜의 수로를 연결해야 합니다.
5) 좀 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좀 더 예수님에게 집중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우기에는 빗물이 넘치다가 건기에는 바싹 마르던 실로암 웅덩이 같으면 신앙이 부침을 거듭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샘물의 근원에 연결하면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물이 흘러 넘치듯이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예수님의 수로를 뚫은 사람, 예수님의 은혜의 물길에 연결된 사람은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은혜가 충만합니다. 삶의 현장이 언제나 축제의 현장입니다. 이 한주간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생수를 마시고 목마르지 않는 삶, 축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6. 자 이제 눈을 뜨시고 예수님과 함께 축제를 회복하십시오!
1) 예수님은 초막절에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시고 축제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요9:7) 예수님은 시각장애우를 실로암 연못에 보내셨습니다. 실로암은 원래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우를 샘물이 마르지 않는 실로암 연못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지 읺는 샘물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교회로 보내십니다. (요7:37) 교회는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실로암 연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고(요9:37) 예수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요9:38) 그런데 그 배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시니 예수님의 배 예수님의 몸통은 교회 바로 그 자체입니다. 교회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2) 자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 성령의 생수로 씻어 고침을 받고 눈을 떠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각장애우 치료 기사에서 핵심 단어는 '보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시각장애우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했습니다.(막10:51)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시면 눈이 떠져서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생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이며, 교회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성소이며, 교회는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교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교회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빗물을 받아두는 웅덩이였지만 기혼 샘에 연결되니 물이 마르지를 않았습니다. 교회는 모순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성령의 생수가 마르지 않습니다.
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치료를 받으시고 눈이 밝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의 두 시각장애우는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마9:27~30) 그리고 눈이 밝아진 후에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렸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눈이 빍은 사람은 사물도 사람도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압니다. 두 시각장애우는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이 밝아져야 예수님이 보이십니다. 시작장애우들은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 소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치료를 받았고,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소리입니다. 설교도 소리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소리입니다. 소리를 따라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치료를 받으시고 눈이 빍아지시기를 바랍니다. 눈이 밝아진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을 벗겨 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겨주셨습니다.(행9:18) 그 때부터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주님이 치료해주시사 예수님을 바로 보게 하셨습니다. (행9:17~19)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축제를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모두의 눈이 밝아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축제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