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장성한 사람(고전13:11)생기나라 (2009-11-30)

우순(愚巡) 2009. 11. 30. 11:40

<장성한 사람>

 

   (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늦가을을 노래합니다. 철이 든 사람은 초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임재를 기다립니다. 어제는 대림절(대강절)이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대림절(Advent)은 성탄전 4 주간으로 '오다'라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투르  공의회(507년)에서 제정한 후 9세기 부터 성탄전 4 주간을 대림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목사는 보라색 스톨을 두르고, 강단에는 보라색 대림초를 켭니다. 보라색은 기다림의 색이요 왕의 색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색깔과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색깔이 동일하게 보라색인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신 주님이십니다.

 

   저는 어제 주일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장성한 사람은 어른이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어린 아이의 일이 무엇입니까? 장성한 사람이 버려야 할 어린 아이의 일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어린 아이 짓은 분열입니다. 분열은 지극히 독선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교회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각종 은사가 가득한 교회로서는 빛이 있는데 반해, 네 가지 파벌로 분열하여 서로 싸우는 교회로서는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최고의 교회이면서도 분열의 상처가 깊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어린 아이라고 나무랍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 가지 파벌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수위권을 존중하는 사람들(베드로파), 교회의 설립자를 존중하는 사람들(바울파), 능력있는 설교가를 존중하는 사람들(아볼로파), 복음의 원조를 존중하는 사람들(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저마다 일리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중의 제자이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아볼로는 설교를 제일 잘했으며, 그리스도는 복음의 원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마디로 일축합니다. 모두 다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우스운 애기 하나 할까요? 지난 주에 심방을 갔던 집사님 집에 모녀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려고 하니까 새끼 강아지는 천방지축입니다. 컹컹 짓어대고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심방을 받으시는 집사님이 웃으시면서 엄마 개는 나이가 많아(?) 철이 들어서 예배 준비를 잘 하는 데 새끼 개는 어린 아이라 철이 없어 천방지축이라는 것입니다. 훈련이 안되서 그렇답니다. 반면에 훈련을 받은 엄마 개는 두 다리를 바닥에 깔고 예배할 준비를 합니다. 경배와 찬양을 드릴 준비가 완벽합니다.(?)  개들도 훈련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제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아픈 영상이 있습니다. 오래 전 홀트 복지회에 봉사를 할 때 만났던 환우의 모습입니다. 대두증 환자였는데 머리가 제 머리보다 컸습니다. 반면에 손과 발은 아주 작고 몸도 아주 작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불쌍해서 축복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안내하시는 분이 저보고 기도를 잘 못했다고 합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혹시 제가 무엇을 잘 못했나? 혹시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를 사용했나? 무안해져서 근심스레 물어 보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 못했나요? 그러자 안내하신 분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크게 잘 못했지요!" 이 젊은이 보고 아이라고 했으니까요? 이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30이 다 된 청년입니다. 예?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는 저보다 더 큰데 몸은 갓난 아이입니다.

 

    문득 저는 우리 신앙이 대두증 환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머리는 엄청 크지요, 든건 너무 많지요, 그런데 몸도 손도 발도 다 어린 아이입니다. 머리는 커가는데 몸은 작아지는 대두증은 정말 가슴 아픈 질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국의 저질 우유 파동으로 2004년도에 대두증을 앓다 죽은 사람이 60여명이요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200여명이 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저질 우유를 먹으면 큰 일 납니다. 신앙생활도 저질 우류을 먹으면 안됩니다. 건강한 우유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대두증을 앓게 됩니다. 우리 상동교회는 건강한 양식을 제공합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사랑의 신앙은 아주 건강한 영적인 우유입니다. 여러분 어른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십시요. 그리고 채우십시요.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두 가지 단어로 요약됩니다. 온전히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일 때는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알지만 어른이 되면 온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이 제일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13:12-13)

 

   여러분은 진실을 아십니까? 거짓과 사실은 다릅니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도 다릅니다. 거짓은 속이는 것이기에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도 표면에 드러난 사건의 나열이기에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사건의 나열 이면에 내재된 인간의 감정과 호흡이 들어있는 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무의미하게 사실만 언급하는 건조한 원칙론은 거짓보다도 더 나쁩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를 바라보는 모 야당과 박 모씨의 원칙론은 정말 진실일까요? 자기들의 정치적인 생명력은 살아남겠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볼 때 혼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과 진실은 다릅니다. 숨겨진 인간의 호흡을 보지 못하면 사실은 거짓보다도 더 무서운 속임수가 될 수 있습니다. 어설프게 원칙을 말하는 정치가들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교회생활은 더 말할 나위없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보다도 깊은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제일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나약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정의를 외면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가치를 온전히 아는 사람들은 사랑이 제일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정말 강한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2012년'이라는 영화는 노아 방주의 현대판 이야기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한 힘이 어디 있습니까? 노아(영화의 주인공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 잭슨 커티스의 사랑입니다. 이혼한 노아의 아버지 잭슨 커티스(존 쿠샥)는 지구 내부의 온도 증가로 지구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의 권력과 싸우며 아들을 지켜냅니다. 미국 영화의 특징은 가족애입니다. 종말론적 영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의 김정오 권사님은 연세대학교 법학교수이십니다. 김정오 교수님은 다리가 불편하십니다. 어머니 김영숙 권사님은 김정오 교수님을 업고 학교를 다니시며 아들을  연세대학교의 교수로 키우셨습니다. 김영숙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다리가 불편하신 김정오권사님을 업고 학교를 다니시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비진리,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도 뛰어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면 불의를 용납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사랑은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 조차도 뛰어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셨습니다.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 청년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귀신들린 여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을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예비하는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을 때 비난하던 어리석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입니까? 도대체 정의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힘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초월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율법주의자들의 어리석은 길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중심 은혜중심의 개신교 성도라고 말하면서 중세의 형식주의로 돌아가고 무의미한 종교재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물(水)처럼 흘러 가는 것(去)이 법(法)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감리교회는 법을 자랑하다가 사회 재판정에서 1년이 넘도록 혹독하게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웨슬리가 원했던 것은 법이 아닙니다. 감리교회가 규책쟁이라는 것은 경직된 법치주의를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모여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김진두 목사의 웨슬리학 최근 저서의 이름은 '웨슬리와 사랑의 혁명'입니다. 웨슬리는 사랑의 혁명가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위대한 신앙은 사랑입니다. 가톨릭의 전통과 개혁교회의 성경과 성공회의 이성에 체험을 첨가한 웨슬리의 성령체험의 표징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신학의 백미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수입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사람이십니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시고 온전히 아시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시기 원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시고 온전히 아시며 사랑하시도록 방향을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처럼 말하지 말고 장성한 사람처럼 말하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처럼 깨닫지 말고 장성한 사람처럼 깨달으시 바랍니다.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지 말고 장성한 사람처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전제된 생각, 사랑이 수반된 깨달음, 사랑이 내재된 말이 장성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간 장성한 사람의 사랑으로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도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것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될 것입니다. 저는 감리교회 목사를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 혁명을 가르쳤던 웨슬리 목사님처럼 위대한 감리교회 목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저리 생각해도, 말씀을 묵상하면 할 수록, 기도를 드리면 드릴 수록, 우리 신앙인의 비상구는 사랑입니다. 우리 감리교인의 정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곳에 기독교의 꽃이 활짝 핍니다. 사랑을 굳건히 지켜갈 때 감리교회의 충실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끝으로 웨슬리의 어록을 음미해봅니다. 

 

 "사랑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약이요, 무질서한  세상의 모든 악을 치료하고, 모든 인간의 불행과 죄악을 치료하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특효약이다'(WJW.,8,p,3)"

 

 "감리교인이란 성령에 의하여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히 부어져 몸과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WJW.,8,p,341)

 

  " 나는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감리교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WJW.,8,p,265) 

 

(김진두 목사의 "웨슬리와 사랑의 혁명"에서 재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