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웨슬리 신학
[스크랩] 존 웨슬리의 영성-설교를 중심으로-
우순(愚巡)
2006. 4. 17. 13:33
존 웨슬리의 영성
-설교를 중심으로-
조종남편, “요한웨슬레 설교선집”,(서울:서로사랑,1998).
지도교수 방성규 박사
발 제 자 서 철(박사과정 2기)
발 제 일 2003년 6월 10일
한영신학대학교 대학원
1. 존 웨슬리의 생애
존 웨슬리는 감리교회 운동을 일으킨 영국사람으로 1703년 6월17일 엡웻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리와 모친 수산나 웨슬리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725년 9월19일 22세에 성공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그 이듬해인 1726년 3월17일에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729년에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경건운동을 함으로 Methodist(규칙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Methodist(규칙쟁이)라는 말이 감리교회의 교단명칭이 되었다. 1735년 10월21일에는 미국 조지아 선교여행을 떠났으며 2년 후엔 1737년 12월 2일엔 사반나를 떠나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웨슬리는 1725년에 카톨릭저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회심을 경험했는데, 1738년 5월24일에는 런던의 올더스케잍에서 복음적 회심을 경험함으로 강한 구원의 확증을 얻었고 성령중심의 신학상을 수립하게 되었다. 루터는 성자 중심의 신학을, 칼빈은 성부 중심의 신학을 수립했지만 웨슬리는 1738년의 복음적 회심으로 성령중심의 신학을 수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739년 브리스톨에서 처음 야외설교를 했으며, 1751년 2월 18일엔 바질 부인과 결혼했고, 1755년 1월엔 신약전서 주석을 발간하였다. 1755년 5월 6일엔 리즈에서 성공회와의 분리문제를 토의 했으며, 1766년 63세때는 기독자의 완전을 발간하고, 1772년 8월 14일 때는 웨슬리 전집 17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772us과 1783년에 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고, 1781년 10월 8일엔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었으며, 1791년도 3월 2일에 88세를 일기로 시티로드에서 소천하여 1791년 3월 9일 시티로드에서 거행되었다.
그 사이1788년에 설교집 제 2집이 발간되었고,1790년 웨슬리의 신약전서 개역판이 발행되었으며, 1790년10월6일엔 마지막 야외설교를 하기도 했다.
2. 선택설교
1) 우리자신을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빌2:12-13). 1785년도 설교집
2)원죄(창6:5). 1759년 설교집 제4권
3)신자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고후5:17) .1771년 설교집 제 4권 수록
4)신자의 회개(막1:15).1767년 작성, 1768년 소책자, 1771년 설교집에 수록
5)그리스도인의 완전((빌3:12) 1741년 출판
6)성령의 증거(1)(롬8:16). 1767년 출판
7)성령의 증거(2)(롬8:16).
8)은혜의 수단 (말3:7)
3. 웨슬리의 영성
1)웨슬리의 고뇌
웨슬리의 영성을 이루고 있는 근간은 중용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용이다. 그리고 조화다. 그러나 이 중용과 조화는 대등한 두 존재의 균형감각을 말하는 변증법적인 조화와 중용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전제되어진 인간의 자유가 만나는 역설적인 조회이며 중용이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의 주권으로 완성되어지기에 인간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내세우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선재적으로 먼저 임하여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함으로 믿음을 얻게 되어 구원을 경험케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역설적인 중용의 조화이다. 후에 위와 같은 웨슬리의 역설적인 조화와 중용의 사상은 복음적 신인협동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씨름하던 웨슬리의 고뇌로부터 온 것이다.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일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 책임도 없다는 말인가? 인간은 구원사역에 아무 관여도 안한다는 말인가?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배제되어야 하겠지만 인간의 책임마저도 배제된다면 구원의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이 배제된 하나님의 단독적인 구원사역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지만 인간이 참여가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이고, 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독자적인 선택에만 의한다면 선택받은자의 이면에 있는 유기된 자의 멸망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구원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독백이라면 하나님은 폭거를 이루시는 독재자일 뿐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는 아니지 않는가? 이런 웨슬리의 사상적 고뇌로부터 역설적 조화론과 복음적 신인협동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웨슬리의 협동설은 "신단동설안에서의 협동설(Synergism in the framwork of monergism)"이다.
2)웨슬리의 영성의 단초
인간의 참여와 책임을 묻는 웨슬리의 고뇌를 풀어준 영성의 단초는 선재적 은총이다. 어거스틴에게서 배운 선재적 은총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개혁신앙을 따르면서도, 단순히 노예와 같이 폭군에게 이끌려가는 ‘예정론적-일방적 구원론’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구원받는 자식의 인격적인 구원론을 펼치게 되었다.
선재적 은총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안에서 밀리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회개케 하는 은혜요 깨닫게 하는 은혜이다.
따라서 이 은혜는 시작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회개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보다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경험함으로 완성되는 은혜이다. 이 선재적 은총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얻는 은혜라는 점에서 웨슬리는 카톨릭의 공로주의나 인간의 의지만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적인 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결국 웨슬리의 고뇌로부터 얻은 인간의 참여와 책임은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은혜의 사건이며 그서도 결국은 하나님이 게회하시고 섭리하신 일이기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게 되는 영적인 사상이다. 웨슬리는 극단적인 개혁교회와 자유주의 사상을 넘어 조화와 중용을 말하기에 either/or의 이분법적인 신학이 아닌 both/and 의 종합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다.
3)웨슬리의 설교에 나타는 영성의 흐름
(1)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텍스트로 삼은 여덟 개의 설교에는 일정하게 흐르고 있는 영성의 줄기가 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하, 구원을 유지하게 위하여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인간이 해야 되는 영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묻는다고 하지만 카톨릭 같은 공로주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개혁교회 신앙처럼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아래에서도 인간이 할 수 있으며 해야만 되는 그 무엇을 묻고 있다.
(2)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에서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론과 함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된다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인간이 해야할 그 무엇인가를 제기한다. 인간이 해야 하는 그 무엇인가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이다. 이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라는 뜻이다. 이 철저하게 하는 구원사역에 인간의 일이 있다(86) 구원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義認이고 義人입니다. 전자는 루터식의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론을 말하고 후자는 웨슬리식의 의의 실현을 통한 구원론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義人은 義認을 얻은 후에 오는 것이며, 義認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고, 義人은 성결한 삶을 통해 그 구원을 철저하게 완성시킴으로 죄의 부패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3) 당연히 그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웨슬리는 “원죄”를 설교하면서 존 테일러 박사의 소시니안주의적인 원죄부정을 비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능력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원죄론을 주장했다(95) 인간은 원죄를 가졌지만 선행적 은총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회복되게 되었다 하지맘 인간에게는 죄의 부패성이 그대로 남아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에 멸망한다. 웨슬리는 원죄 때문이 아니라 자범죄 때문에 멸망 받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원죄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죄책을 제거하였지만 죄의 부패성이 남아 구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6,112-113) 그러므로 에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책을 제거하고 구원받은 인간은 죄의 부패성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고 그 은혜 안에서 온전히 새로워져야 합니다.
(4) 이렇게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신자안에 있는 죄입니다. 웨슬리는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On sin in the belivers)"라는 설교를 통해 신자들안에도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죄는 범죄행위에 오는 외적인 죄와는 다릅니다. 죄의 부패성을 말합니다. 이점이 웨슬리가 모라비안과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모라비안들은 칭의의 순간에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에서 모두 해방된다고 믿었지만 웨슬리는 칭의를 통해 신생하는 순간 외적인 죄에서는 해방되지만 아직도 내적인 죄는 마음에 남아서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115)
이것은 두 개의 세력이 싸우고 있다는 바울의 인간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연과 은총 유과 영의 세력이 신자에게도 있음을 말해줍니다. 웨슬리는 아주 중요한 말을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지배하는 곳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죄가 있는 곳에는 계실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게셨다면 구원은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두개의 서로 다른 견해는 무엇을 말하나요?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게십니다. 그러나 죄가 지배하는 곳은 떠나십니다. 죄가 있지만 죄가 지배하지 않는 곳은 죄와 싸우는 곳입니다. 죄와 싸우는 곳에 예수님은 게시고 내주하십니다(124)
(5) 그러므로 신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웨슬리는 이 이야기를 “신자의 회개”에서 강조합니다. 웨슬리는 신자들일지라도 죄의 부패성이 암아 있음으로 온전한 성화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제거되는 죄의 부패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죄에 대하여 웨슬리는 세 가지 입장을 넘어섭니다. 정통주의자들은 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137),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원죄를 부정하기 때문에 죄의 부패성을 간과합니다 그리고 모라비안들은 칭의와 함께 죄가 다 소멸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들을 넘어섭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불신자가 칭의를 얻은 회개가 있고, 신자가 성화를 이루는 회개가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을 얻어 죄책을 제거하게 되고 후자는 성화를 이루어 죄의 부패성을 제거합니다(138) 그러므로 믿음과 함께 기독교의 입구일 뿐만 아니라(139) 믿은 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기독교의 본관입니다
(6) 신자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회개함으로 성화에 이르는 사람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온전한 성별, 온전한 성화, 온전한 사랑리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185) 웨슬리는 1725년의 종교적 회심과 1738년의 복음적 회심을 통하여 개신교의 은총의 윤리와 카톨릭의 경건한 윤리를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185). 이런 웨슬리의 사상이 “그리도인의 완전”이라는 설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은 부담이 됩니다(186) 웨슬리는 이 말을 말하면서 무흠한 완전을 말하지 않고 성경적인 와전을 말합니다(186,193) 무흠한 완전이나 완숙한 완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완전은 영화의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완전입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성장한 완전한 사람을 말합니다(194)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며 자기를 정결케 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거룩하게 되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점차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웨슬리가 평생 지녀온 두 가지 명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웨슬리는 완전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했고 그런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의 증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신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합니다. 웨슬리는 성령을 이야기할 때 열광주의도 비판햇고 합리주의도 비판했습니다. 전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만을 앞세우는 문제가 있고 후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부정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함께 간저적인 증거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바른 성령관을 가졌습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웨슬리를 합리적인 열광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8) 위와 같은 웨슬리의 영성의 특성들은 은혜의 수단을 강조하게 됩니다. 말씀묵상, 기도생활 그리고 성찬예전이 강조됩니다. 은혜의 수단을 부정하고 성령에 의한 믿음만을 강조하던 모라비안 계통의 훼더레인파들과 웨슬리가 결별하게 된 것도 은혜의 수단에 관한 사상차이때문 이었습니다. 웨슬리는 훼더레인의 지도자였던 몰더의 정숙주의를 비판하면서 은혜의 수단을 강조합니다.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죄를 깨달을 수 있으며 회개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수단은 공로가 아닙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재적으로 주신 은총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원은 철저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웨슬리는 공로주의도 정숙주의도 넘어섭니다. 은혜의 수단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외적 표시, 말, 행동을 말합니다(301) 이런 은혜의 수단가운데는 은밀한 기도나 대중과 함께 하는 기도, 성서연구, 주의 성찬등이 잇습니다(302). 이런 은혜의 수단들은 반드시 목적에 부합되게 이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은혜의 수단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단 한가지의 죄도 씻을 수 없습니다(303)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304) 그러나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대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305) 그 길이 바로 믿음과 은혜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 곧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믿음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을 넘어서지 못하며, 구원을 위한 공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출처 : 생기바다
글쓴이 : 서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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