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웨슬리 신학

[스크랩] 존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4부

우순(愚巡) 2006. 4. 17. 23:11

서철 목사님의 상동 감리교회 담임 목사의 취임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하며,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서 더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가 올리는 것은 존 웨슬리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글입니다.  보시면 알시겠지만, 이 글이 가장 먼저 씌어져야 할 것인데, 제가 부족해서 순서가 뒤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되어질 글들은 웨슬리의 옥스포드의 생활이나, 조지아 선교사로 갔던 일들,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만남이라든지, 감리교의 성장의 3 단계들 그런 연후에 스톤의 책의 목차대로 웨슬리가 행했던 산상설교에 대한 설교라든지 결혼과 전쟁에 관련된 일들, 자유나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등을 살펴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글에 어느 정도의 내용을 담아야 할런지 아직은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이곳에 실른 글은 아주 학문적인 글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개 교회에서 교인들의 교육 자료로 삼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서 때로는 요약을 하고, 때로는 각주 없이 각 저자들의 생각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물론 각주들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달려고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나중에 교인들이나 다른 분들에게 그렇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올린 글을 읽어보시고, 잘못된 부분들이나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되면 지체없이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생기나라의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니...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4부


1. 출생

존 웨슬리의 부모는 새뮤얼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이다.  존 웨슬리의 출생을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로날드 스톤에 의하면, 새뮤얼과 수잔나,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칼빈주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가정에서 출생하였는데, 이 두 가정들이 모두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영국 성공회라고도 한다)에 반대했던 집안들(비국교도)이었다.  새뮤얼과 수잔나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후에 결혼을 한다.  결혼 후 이 두 사람은 영국 국교회의 전통을 따라는 교회로 옮겼는데, 자신들의 배경이 되었던 칼빈주의 전통은 소중하게 간직했다.

웨슬리의 부모가 살던 시대의 정치, 종교 사회의 긴장과 갈등들은 새뮤얼과 수잔나의 결혼생활에도 깊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두 사람이 가진 정치?종교적 충성도는 두 사람의 결혼을 파탄지경까지 몰고 갔다.  웨슬리의 부모가 살던 당시에 영국왕 윌리암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영국 황실을 위해서 가족기도회 때, “아멘”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멘”하기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수잔나가 윌리암 3세를 영국 왕권을 강탈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아버지 새뮤얼은 이런 수잔나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급기야 새뮤얼은 서로가 다른 두 왕을 섬기고 있다면, 그들 역시 각기 다른 침대를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웨슬리의 부모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 새뮤얼이 주교구 회의를 위해서 런던으로 떠났고, 새뮤얼은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낸다.  자연스럽게 새뮤얼과 수잔나는 별거에 들어간 셈이 된다.  나중에 당시의 영국왕 윌리엄이 죽은 후에, 이 두 사람은 여왕 앤을 영국의 통치자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로서 이 두 사람은 정치?종교적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  그 결과로 태어난 사람인 존 웨슬리라고 한다.1)  그래서 웨슬리를 “화해의 열매” (the fruits of reconciliation)2) 이라고 불렀다. 

웨슬리는 1703년에 영국의 엡워스(Epworth)에서 태어난다.  웨슬리가 태어날 당시의 영국은 인구가 550만 정도였고, 대부분의 마을들은 작은 시골풍이었고, 문맹률이 높았고, 가난한 나라였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러니까 1791년의 영국은 세계적인 제국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했고, 웨슬리는 전 세계를 자신의 교구로 여겼다고 로날드 스톤은 말한다.  스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By the time of his death in 1971, England had grown to dominate a worldwide empire, and John regarded the whole world as his parish."3)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웨슬리가 전 세계를 자신의 교구라고 선포하게 된 이유가 영국의 제국주의 확대라는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이 스톤 개인의 해석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1739년 늦은 3월에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브리스톨에 와서 그곳에 많은 열매가 있으니 자신이 맡았던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에 응답한 웨슬리는 브리스톨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웨슬리가 목격한 것은 휫필드의 옥외 설교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교 방식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모든 양식, 전통, 관례 등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왔던 웨슬리는 교회가 아닌 곳에서 영혼을 구원한다는 행위 자체가 “죄”로 생각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목사로서 살았던 당시의 영국의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옥외 설교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통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옥외 설교라는 형식이 “롤라드의 가난한 성직자”라는 종교 개혁 이전 시대의 이단 (the heretic Lollard “poor priests”)과 종교 개혁 이후에 영국 국교회에 반대했던 순회 설교자들과 관련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면 왜 웨슬리가 옥외 설교라는 형식에 대해서 놀랐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1739년 4월 1일 웨슬리는 휫필드가 로즈 그린(Rose Green)이라는 곳의 작은 언덕에서 3천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다음날 오후에 웨슬리는 옥외 설교를 함으로써 자신이 좀 더 비참한 처지에 놓이는 것에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브리스톨에 있는 조시아 턱커(Josiah Tucker) 라는 올 세인트(All Saint) 라는 교회의 교구 목사가 휫필드와 웨슬리의 설교 방법과 신학을 공개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속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믿었던 웨슬리는 턱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브리스톨의 감독 죠셉 버틀러(the Bishop of Bristol, Joseph Butler)에게 다음과 같은 논리로 맞대응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a Fellow of a College, 옥스퍼드대학교 Lincoln College의 Fellow(교수)로 임명되었던 것을 가리킨다)의 나의 목사 안수는 어떤 특정한 교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국 국교회의 모든 부분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목회는 교구의 경계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나는 “모든 세계를 나의 교구로 여긴다.”

God has called me to preach the gospel, and as a Fellow of a College my ordination is not to any particular parish but to any part of the Church of England; therefore my ministry is not limited by parish boundaries, but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4)


여기서 그 유명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이 유래되었고, 오늘날까지 모든 감리교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된다.


다시 웨슬리의 출생과 관계된 부분을 살펴보자.  웨슬리의 집안은 시골에서의 삶이라든가 엡워스에서의 생활처럼 고립된 삶을 살았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웨슬리의 아버지와 조부는 옥스퍼드를 졸업한 인재들었고,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는 당시의 상류사회와 연관이 있는 잘 알려진 장로교 성직자의 가정 출신으로 런던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웨슬리의 증조부와 조부는 영국 국교회에 반대했던 성직자였다.  또한 증조부는 의술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웨슬리의 조부는 성직자 임명과 평신도 사역에 대해서 영국 국교회의 감독들과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으로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감독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5)


웨슬리 아버지, 새뮤얼(1662-1735)


웨슬리의 아버지 새뮤얼은 성례전과 기타 예식을 중요시하던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자신이 갖고 있던 칼빈주의적 전통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새뮤얼의 이런 노력은 엡워스에서의 그의 목회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되었고, 미국의 사바나(Savannah)에서 존 웨슬리와 동생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선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새뮤얼은 자신을 보다 넓은 영국 사회, 개혁 운동, 그리고 지방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새뮤얼은 학문적이고 문학적인 작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시인이 되고자 열망했고,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시를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스톤에 따르면, 새뮤얼은 욥기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사후에 출판되어 많은 저명인사들이 구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새뮤얼의 이런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새뮤얼은 가정을 부양할 경제적 능력을 부족하여, 그의 기족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스톤은 새뮤얼의 가정이 가난 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새뮤얼이 벽돌로 된 교구 목사관을 지었던 사실을 예로 든다.  이 목사관은 불에 타서 없어지게 되는데 다시 짓기 위해서 돈을 빌려야 했으므로 가정의 빚이 늘어나게 된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교회와 주변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새뮤얼의 가정이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고생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은 새뮤얼이 재정 관리를 아주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톤은 여긴다.  실제로 새뮤얼은 자신의 부채 때문에 감옥에도 간 적이 있었는데, 감독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새뮤얼의 가정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교회와의 연결 덕분에 새뮤얼과 수잔나는 자신들의 아들들을 영국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토지도 부족하고 현금도 없었던 그들에게, 딸들은 아들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본 것 같다.  사실 나는 당시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새뮤얼과 수잔나의 딸들은 결혼을 위한 신분 상승을 위한 후보자가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스톤의 책에 나와 있는 영문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The lack of land holdings or cash flow, however, did not make their daughters candidates for preferment for marriage, Stone의 책, 33페이지에 나와 있다).

수잔나를 대한 사랑이 깊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뮤얼은 고집이 세고, 가정에서 때때로 폭군적인 기질을 보였다.6)  또한 새뮤얼은 교구의 교인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7)  그리고 새뮤얼이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수잔나와 자신의 자녀들을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사실이나 재정 관리를 너무 못했던 사실들은 아버지 새뮤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큰 장애요인들이 된다.



어머니 수잔나 (1669-1742)


수잔나는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고 청교도 전통을 중요시했던 새무얼 앤슬리(Dr. Samuel Annesley) 라는 목사의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수잔나의 아버지는 집은 작은 교회로 여겼고, 잘 정돈된 장소가 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설교했다.  수잔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경건의 훈련을 잘 받았던 것 같다.  수잔나는 13살이 되었을 때, 비국교도의 교적을 버리고,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게 된다.  하지만, 수잔나의 개종이 가족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은 않았다.  수잔나가 새뮤얼과 결혼하면서, “몸에 밴 규칙적인 삶, 가정에서의 경건, 개인적인 신앙생활, 사회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한 학습” 등에 대해서 철저할 것을 강조했던 앤슬리 집안의 가풍과 신앙적 유산을 그대로 웨슬리 집안으로 가져왔다.  수잔나는 철저히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지하게 모든 삶을 살아가려고 했다 (영국의 청교도들(Puritans)은 카톨릭 교회의 신앙적 영향력을 철저하게 반대하면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기간 중에 행해진 모든 타협에 대해서 아주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어떤 종교적 교리 등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직접적인 신앙 체험, 철저한 도덕 생활, 단순한 예배 의식 등을 강조한 아주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신앙생활과 더불어 일상생활을 강조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활동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꾀했지만, 1603년 이후의 여러 정치, 종교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된다.  급기야는 1660년 군주제 복구와 더불어 영국 국교회주의 부활은 1662년의 기도 방식 통일령 (the Act of Uniformity)을 제정하게 된다.  이 제정령에 따라서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때부터 청교도들은 비국교도 (Nonconformists)라고 불리게 된다.  이런 정치, 종교적 와중에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이들 중 일부분이 미 대륙으로 1620으로 이주하게 된다.8)).  새뮤얼과 수잔나는 모두 비국교도로서 강한 청교도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수잔나의 자신 만의 신앙일기를 계속 썼으며, 이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웨슬리나 챨스의 신앙 습관의 중요한 일부가 되게 된다. 

자녀들의 교육은 전적으로 어머니 수잔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수잔나의 가정 교육은 철저하게 청교도적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드물게, 수잔나는 여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새뮤얼과 수잔나의 일곱 명의 딸들은 모두 바느질을 배우기 전에 글 읽는 것을 먼저 배웠다.  수잔나는 가정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두었다.  수잔나는 아이들에게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도록 교육시켰는데, 매를 무서워하도록 가르쳤고, 아이들은 소리 내서 울 수 없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큰 소리를 내며 떠드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서 집안에 마치 아이들이 없는 것 같게 만들었다.  자녀들에게 하루에 세 번의 식사만 주었고, 간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저녁은 6시에 먹고, 그 후에는 기도하고 씻고 옷 갈아입고, 8시에는 잠자리에 들게 했다.9)

리처드 헤이?b레이터(Richard P. Heitzenater)는 수잔나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아이들 교육과 관련해서, 수잔나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의 건전한 정신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이들의 고집을 꺾는 것과 아이들에게 순종하는 성격을 갖게 하는 것이다: “In order to form the minds of children, the first thing to be done is to conquer their will and bring them to an obedient temper.”10)  수잔나가 이런 교육 철학을 고수한 것은 그녀가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이 반항의 근거가 되고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만심이 죄의 근원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니버와 수잔나가 서로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수잔나에게는 아이들의 고집을 꺾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의 권위에 아이들을 복종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수잔나는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서 고분고분한 아이들은 만드는 것에서부터 평화와 구원이 온다고 믿었고, 신앙 엄수와 기도, 그리고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를 갖도록 교육시켰다. 

이런 수잔나 밑에서 모든 자녀들이 다섯 살이 되면 철자와 읽기를 배웠고, 읽기 시작하면서 자녀들에게 창세기를 읽혔다.  매일 자녀들이 배운 것을 복습시켰고, 자녀들은 매일 6시간씩 공부했다.  수잔나는 자녀들이 매일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신앙과 열정을 가진 어머니다.  수잔나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특히 존 웨슬리를 위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웨슬리의 누나들과 여동생들의 삶은 수잔나의 교육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순탄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새뮤얼과 수잔나의 딸들에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단 한 명(Anne)만 제외하고, 수잔나의 딸들의 결혼 생활은 파탄으로 끝나거나, 버림받거나, 일찍 죽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잔나의 자녀 교육에 대한 강조와 열정이 딸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아들들에게만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새뮤얼과 수잔나의 딸들과 관련된 이런 슬픈 가족사는 당시의 영국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회이었는가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수잔나의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 습관은 존 웨슬리에게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영향를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존 웨슬리가 평생 동안 아주 규칙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것은 존 웨슬리 개인의 외적 경건 생활에 아주 도움을 주었고, 더 나아가서는 초기 감리교인들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신앙생활의 활성화를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웨슬리가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과 훈련을 받았던 것은 웨슬리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 못했다.  스톤은 이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한다: “또한 존은 그의 부모님들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John seemed also not to have been given a sense of being loved by his parents.”11)).  존 웨슬리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어머니 수잔나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한다.

수잔나는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에 올더스케이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까지 웨슬리의 중요한 신앙 상담자로 역할을 하게 된다.12)  왜 올더스케이트의 경험 이후에는 웨슬리가 수잔나에게 더 이상 신앙 상담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주 신앙 상담을 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1738년 이후의 수잔나는 매우 고령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여기 저기 설교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느라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수잔나에게 신앙적 조언을 구하는 횟수가 현격하게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웨슬리가 더 이상 수잔나의 신앙에 대한 조언을 구하지 않은 것은 올더스케이트 체험의 영향을 컸을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다시 말하면, 엄격한 청교도식의 교육이 가진 강점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규칙적이고 철저하게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개개인의 신자를 어려서부터, 혹은 장년의 사람이라도 잘 훈련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청교도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언뜩 보기에는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율법주의에 빠질 우려도 많이 있다.  이 율법주의의 단점 중의 가장 심각한 것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이 포근한 사랑을 주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은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일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그런 하나님과 만나는 신자는 마음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과 주변의 사람들의 눈에 나지 않도록 매우 노력을 해야 한다.  존 웨슬리의 내면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외면적인 개인의 경건 생활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존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해서 아버지 새뮤얼이 그런 웨슬리는 걱정할 정도였다.13)  자신의 삶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려는 웨슬리의 집착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생활이나 미국 조지아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을 때도 계속 되었다.  강한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로 무장한 강한 어머니 수잔나의 강력한 영향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올더스케이트의 회심 경험 이후에 만난 하나님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와 잘못을 잊고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웨슬리가 청교도적 유산들을 완전히 벗어던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율법주의적인 엄격함을 강조해서 사람을 옥죄이는 청교도주의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청교도주의가 가진 장점들, 예를 들면, 어떤 신앙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던 정신들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올더스케이트의 경험 이후의 웨슬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그리고 아주 체계적으로 감리교가 태어날 수 있는 든든한 배경들을 만들어갔다.  그것도 사랑과 율법이 가진 장점들을 제대로 살려가면서...

참 좋은 부모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무조건 자녀들을 받아들일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엄하게만 다스릴 수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항상 고민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모두들 열심히 최선을 다 한다고는 하지만, 결과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와 지혜를 구해야 할 일이다.


1) Ronald H. Stone, John Wesley's Life and Ethics, 29.


 

2)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Methodists, 27.


 

3) Stone, 30.


 

4) Heitzenrater, 102.


 

5) Stone,


 

6) From http://www.intouch.org/myintouch/mighty/portraits/susanna_wesley_213595.html


 

7) From http://gbgm-umc.org/UMW/Wesley/quiz/1b.stm


 

8) From http://mb-soft.com/believe/txc/puritani.htm


 

9) 위의 글, 36.


 

10) Heitzenrater, 26.


 

11) Stone, 40.


 

12) Stone, 33-34.


 

13) Stoen, 38.


 

출처 : 생기묵상원
글쓴이 : 김충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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