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웨슬리 신학

[스크랩]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 미주 LA 기념 대회 주제 강연 (2)

우순(愚巡) 2006. 4. 17. 23:12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 미주 LA 기념 대회 주제 강연 (2)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 사이에서
― 요한 웨슬리의 정신에서 본 '메쏘디스트'의 정체성 문제 (II)
(Between Oxford and Aldersgate
― The Problem of Methodist Identity in the Wesleyan Spirit)

 

김흥규 목사 <텍사스 성루가 연합 감리교회>

 

3. 올더스게잇으로 가는 길

 어제 아침 제 강연의 1부에서 저는 웨슬리의 옥스퍼드 시절의 특징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올더스게잇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강연에서 올더스게잇의 극적인 체험 후에 옥스퍼드 시절과 비교할 때 어떤 변화와 차이가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초점을 집중할 것입니다.

 (1) 조지아: 제 2차 메쏘디스트 운동의 發興
 신성 클럽을 주축으로 한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은 산발적이지만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여전히 구원의 확신 문제에 대하여 머뭇거리며 무엇인가 미진한 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웨슬리는 하나의 중대한 결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이 병들어 급속하게 늙어가자 아들 요한에게 엡워쓰 교구를 맡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미 1733년 1월에 이와 같은 오퍼가 왔을 때 요한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인 사무엘 2세를 비롯하여 여러 가족 친지들을 동원해서 요한에게 압박을 가했습니다. 長兄인 사무엘 2세는 "요한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크라이스트 처치를 위해서도 아니고 옥스퍼드 대학도 아니고 영국 국교회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엡워쓰 목회를 맡아야 한다고 닦달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집요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에 계속 남으려고 했던 요한의 결심은 단호한 것이었습니다. 1734년 11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가장 경건해질 수 있는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 역시 가장 경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하늘 아래 옥스퍼드만큼 경건을 함양시키기에 적절한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엡워쓰에 내려가 아버지의 목회를 떠맡는 것을 영 내키지 않게 생각했던 요한도 사무엘의 죽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1735년 4월 요한은 아버지가 평화롭게 돌아가시게 해드리려고 엡워쓰와 우르트의 목회를 承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회는 길지 않았는데 4월 25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약 2개월 동안만 아버지의 교구를 돌보면서 슬픔에 잠긴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2개월이 지난 후 웨슬리는 다시 옥스퍼드로 내려가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교수로서의 직무와 경건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7월 국교회 사제 존 벌튼(John Burton)으로부터 조지아에 선교사로 갈 의향이 없는지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엡워쓰에서의 繼父牧會가 아직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웨슬리가 이러한 오퍼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신생 대륙 미국이 세상으로부터 退去해서 기독자의 완전을 실험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여겼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조지아에 갈 뜻을 굳히고 벌튼에게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조지아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웨슬리가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둘째로, 자신이 조지아에서는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성결을 영국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토로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옥스퍼드의 성결 운동에 심각한 한계에 봉착한 웨슬리의 솔직한 內心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기에 주목됩니다. 다시 말해서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바 영혼 깊은 곳에서의 갈망이 있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결국 웨슬리는 1735년 10월 14일, 그 어떠한 포지션도 확보하지 못하고 월급도 기대하지 못한 채 조지아의 자원 선교사로 떠나기 위하여 영국의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로 나갔습니다. 얼마 전에 국교회 사제로 안수받고, 조지아 식민주의 지사인 제임스 오글쏠프(James Oglethorpe, 1696-1785) 장군의 인디언 원주민 담당 서기로 임명된 동생 촬스와 옥스퍼드 메쏘디스트 운동의 주요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벤자민 잉햄(Benjamin Ingham), 런던 상인의 아들 촬스 델레모트(Charles Delamotte) 등 네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수산나는 두 아들이 조지아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몹시 기뻐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스무 아들이 있다고 하면 내가 그들을 다시 못 본다고 할지라도 미국 선교사로 고용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레이브센드 항구를 떠나 대서양을 향한 선박 「Simmonds」호에는 다른 일반 승객들과 함께 특히 26명의 모라비안들이 同乘하고 있었습니다. 18세기에 해양 여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1735년 10월 14일 그레이브센드 항을 떠난 배가 1736년 2월 5일 조지아의 사바나에 도착했는데 이 넉 달 동안 웨슬리는 수시로 위협하는 대서양의 거센 풍랑에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예컨대, 1735년 11월 23일 선실에 누워 있던 웨슬리는 무시무시한 풍랑이 배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할 때 죽음의 공포를 느꼈으며 죽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12월의 항해는 그런 대로 순탄했으나 1736년 1월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특히 1월 17일부터 25일 사이에 대서양의 강력한 풍랑이 웨슬리 일행이 탄 「Simmonds」호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때에도 웨슬리는 죽음 앞에 한없이 무기력하고 불신앙적인 자신을 처절하게 체감했습니다. 특히 1월 25일에 「Simmonds」호를 강타한 풍랑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과 모라비안들의 의연한 태도를 비교하게 만들음으로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 때의 경험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일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라비안들이 시편을 읽음으로서 예배를 시작한 가운데 마치 바다의 심연이 우리를 다 삼켰듯이 파도가 넘실대면서 큰 돛대를 산산조각을 내버렸으며 배 위를 덮으면서 갑판 사이에 쏟아져 내렸다. 영국인들 가운데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독일인들[모라비안들]은 차분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는 또 물었다. '그러나 당신들 중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역시 죽음을 겁내지 않았습니다.(필자 번역)

 죽음의 공포 앞에 초연한 모라비안들의 신앙에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웨슬리는 이 장면을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들 중에 단연 최고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웨슬리는 이후에도 천둥 번개나 풍파 등의 자연적인 재해 앞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이 있는데, 이 날 이 체험 이후에 '믿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관계는 웨슬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케네쓰 칼린스(Kenneth Collins)가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회심의 한 기준이 된다고 해석한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 올더스게잇 체험 전과 후를 가장 명확하게 갈라주는 특징이 바로 '죽음의 공포'의 有無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올더스게잇 이전에 웨슬리는 분명히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으며,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아직 구원의 확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올더스게잇 체험 후에 웨슬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은 'a real Christian'의 구원 체험을 시험하는 아주 중요한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었던 것입니다.

 1736년 2월 6일 조지아에 도착한 웨슬리는 제일 먼저 옥스퍼드의 신성 클럽과 비슷한 성격의 메쏘디스트 운동의 기지 구축에 나섰습니다. 웨슬리가 조지아에서 제일 먼저 직면하게 된 문제는 윤리적인 무질서였습니다. 이미 배에서부터 웨슬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술에 만취된 채 흥청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적어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어서는 철저히 금욕적이었는데 배 안에서 포도주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으며 육류를 먹지 않고 쌀과 비스킷만을 먹는 粗食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웨슬리의 금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조지아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은 無法者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無風地帶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국 국교회의 교리 원칙을 철저히 적용하여 懲治하려고 했던 웨슬리였으니 조지아 선교는 그 시초부터 난항을 예고했습니다. 

 이 즈음에 웨슬리는 모라비안 목사 오거스트 스팡겐버그(August Spangenberg)와 만나서 중요한 영적 도전을 받습니다. 스팡겐버그가 웨슬리에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웨슬리는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세상의 구주임을 저는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팡겐버그는 "옳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고 재차 다그쳤습니다. 이 때 웨슬리는 매우 어정쩡하게도 "I hope he has died to save me."--"저는 예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라고 확신 없는 대답을 했습니다. 스팡겐버그와의 대화에서 웨슬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해주는 성령이 不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배 안에서부터 모라비안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던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에게 적어도 구원의 확신과 관련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본격적으로 열렸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사바나와 프레데리카(Frederica)를 오가며 과거 옥스퍼드에서 실험했던 경건 그룹들을 양성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사바나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실패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웨슬리의 지나치게 엄격한 훈육 방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지아 선교를 대참패로 몰고 간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소피아 합키(Sophia Hopkey)라는 철없는 여인과의 失戀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이 실연 이야기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아시리라 생각되지만 조지아 선교의 실패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급적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합키는 그 당시 나이 18세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용모를 가졌는데 조지아의 최고 행정장관(Chief Magistrate) 토마스 코우스톤(Thomas Causton)의 姪女였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열 다섯 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 戀慕의 정을 느꼈습니다. 흥미롭게도 웨슬리가 여성들에게 어떤 이성적인 연모의 정을 품게 되는 전형적인 패턴은 상대방 여성들이 웨슬리가 몸이 아플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해주었을 때였습니다. 예컨대 거의 결혼 일보 직전까지 갔던 1748년의 그레이스 머레이(Grace Murray)와의 한바탕 해프닝이나 일생일대의 대실수로 기록된 1751년 런던의 부유한 무역상의 과부 메어리 베제일(Mary Vazeille)과의 결혼 역시 웨슬리가 과도한 전도 여행으로 몸이 몹시 아팠을 때 극진한 간호를 받음으로 싹이 텄습니다. 합키와의 경우도 1736년 8월 웨슬리가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합키로부터 정성어린 간호를 받은 후부터 결혼 상대로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웨슬리는 합키를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결혼 상대자로서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이내 아직 나이 어린 합키의 미숙함을 보고 나서 배우자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합키와의 결혼이 자신이 宿望했던 인디언 선교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크게 망설였습니다. 사실 웨슬리 자신은 불행한 결혼 생활이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모든 메쏘디스트 설교자들에게 할 수 있으면 'celibacy,' 즉 獨身主義를 지킬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독신 생활이 성결 생활에 훨씬 더 유리하다는 웨슬리의 소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할 수 없다는 논리로 합키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웨슬리는 자신이 엄격한 영성 훈련을 통하여 적어도 自制의 문제만큼은 철저하다고 자부했는데 합키와의 관계에서 오는 연애 감정은 그와 같은 훈련이 무효라는 사실을 체험하고서는 아연 질색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웨슬리의 대(對) 여성관계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여성 사랑,' 즉 'AGAPE'와 'EROS'의 양극 사이에서 고민할 때마다 웨슬리는 언제나 그 귀결점이 에로스는 억제하고 아가페 쪽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BOTH A & B'의 양수겸전 혹은 양자통합으로 나아갔는데 이상하게도 대(對) 여성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혹시 에로스의 치명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웨슬리가 합키를 만나면서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inordinate affection,' 즉 '절제할 수 없는 愛慾의 감정'이었습니다. 웨슬리는 합키와의 사이에서 순간순간 불일 듯 일어나는 '에로스,' 즉 애욕의 감정이 '아가페,' 즉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결국 소망했던 인디언 선교를 그르치게 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웨슬리가 숙맥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웨슬리와 같이 완전 강박증을 가졌던 聖者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愛慾의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웨슬리에 대한 각종 전기들을 읽어보면 웨슬리는 적어도 대여섯 명의 여자들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 사랑을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확실히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해 볼만한 하나의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합키와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은 해놓았지만 이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합키를 향한 愛慾의 문제를 통제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한편 자기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웨슬리의 선언을 듣고 합키 역시 소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737년 3월 9일, 웨슬리에게 자신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다며 그동안 여러 차례 거짓말을 했던 합키는 윌리엄 윌리엄슨(William Williamson)과 성급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웨슬리의 가슴은 실연의 상처와 번민으로 소용돌이쳤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날 밤 웨슬리는 정원을 서성거렸지만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그 날의 충격을 일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처음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이런 경우를 당해 본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내 무절제한 애욕의 감정을 마음대로 풀어 놓으셨다. 아, 합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독배가 내 영혼을 삼켜버렸다.' 이런 생각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1737년 3월 12일 합키가 퍼리스버그(Purrysburg)에서 성실치도 못하고 경건치도 않은 윌리엄슨과 결혼식을 올렸을 때 웨슬리의 실연 문제도 일단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합키의 결혼식이 웨슬리의 가슴 깊은 곳 배신의 상처까지 아물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웨슬리는 1737년 8월 7일,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합키에게 성만찬을 받지 못하도록 禁함으로서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고 맙니다. 사실 웨슬리처럼 완고한 원칙주의자의 눈으로 볼 때 합키의 경솔한 행위와 또 아무런 참회의 표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교회법으로 볼 때 성찬식에 금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웨슬리는 합키가 여러 차례 공중 예배와 성찬식에 빠진 것을 결정적인 구실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합키의 남편 윌리엄슨이 볼 때 이것은 명백히 인권 침해요 인격모독이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무려 10가지나 되는 죄목으로 26명으로 구성된 대배심원들에게 기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기소 재판은 하나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웨슬리로 하여금 영국으로 되돌아가도록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에 대실패를 하고 싸우스 캐롤라이나의 촬스톤(Charleston) 항을 떠나 「Samuel」호를 타고 출발해서 1738년 2월 1일 영국의 딜 하보(Deal Harbor) 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웨슬리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는 1년 9개월 정도 복음을 전한 뒤 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조지아를 떠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기 위하여 미국에 갔었으나 오히려 내 자신부터 하나님께 회심하지 못했다."

 여러분, 제가 왜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옥스퍼드만 가지고서는 웨슬리의 생활이 온전치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비록 옥스퍼드적인 규율과 결심이 웨슬리로 하여금 어느 정도 성결하게는 만들었지만 인생의 魔性的인 문제 앞에서는 아무런 맥도 못 추는 참담한 현실을 조지아에서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조지아는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요 루비콘 강인 것입니다! 웨슬리는 조지아를 지나 옥스퍼드에서 올더스게잇으로 移動했던 것입니다!

 물론 조지아 선교가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전부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 웨슬리는 교회의 세계 선교적 사명을 뚜렷이 자각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겸손을 배웠습니다. 옥스퍼드의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온 몸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1725년 이후 가지가지의 훈련 방법과 엄격한 규율을 통하여 그렇게도 도달하고자 열망했던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은 여전히 먼발치에 있는 蜃氣樓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 편에서의 성결 노력만 가지고서는 진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확연히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적인 방법으로, 즉 이성과 규율, 결단 등만으로 진정한 기독자가 되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여기에 올더스게잇의 필요성이 강력히 떠오르게 됩니다!

 웨슬리가 조지아 선교를 위해 영국을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한 때 웨슬리의 신성 클럽의 멤버였던 조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놀라운 부흥 운동이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다음에 런던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자신이 한 때 이와 같은 영적 갱신 운동의 先驅者였지만 현재는 많이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는 초조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내 웨슬리는 예전의 옥스퍼드 메쏘디스트 운동과 같은 형태의 소그룹 운동의 점화에 나섰으며 금방 세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런던에 돌아온 지 몇 주 되지 않아서 웨슬리는 독일에서 건너 온 모라비안 지도자 피터 뵐러(Peter Bohler, 1712-1775)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뵐러와 한 4개월 동안 교제하면서 웨슬리는 구원론에 관하여 중요한 신학적 통찰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구를 조직하는 기술까지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당신이 믿음을 가질 때까지 신앙에 대하여 설교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이제 당신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믿음에 대하여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서 도전했습니다. 특히 뵐러와 함께 조직한 'band,' 즉 '신도회'가 'Fetter Lane Society'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이 Fetter Lane Society를 중심으로 런던에서의 제 3차 메쏘디스트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요한 웨슬리가 런던에 돌아와 捲土重來를 모색하고 있을 무렵, 촬스 웨슬리가 요한에 앞서 1738년 5월 21일, 오순절 성령 강림절에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촬스는 몸이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심장의 이상한 박동"을 느끼고 "내가 믿는다, 내가 믿는다!"고 외쳤습니다. 동생의 회심 소식뿐만 아니라 다른 메쏘디스트들의 영적 체험 역시 요한의 마음을 한층 더 무겁고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요한 역시 촬스의 회심 후 사흘만에 올더스게잇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2) 올더스게잇 회심의 의의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체험을 다음과 같이 일지에 적고 있습니다.

저녁에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던 올더스게잇 모임에 갔다. 한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심령 속에 역사하는 변화를 말할 때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들을, 그렇다 나의 죄들까지도, 다 없애주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해주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 나는 더욱 특별한 방법으로 무례하게 나를 이용했고 박해했던 사람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내 가슴에 내가 처음 느꼈던 감정을 공개적으로 증거했다.(필자 번역)

 웨슬리는 이 순간의 희열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증거한 뒤, 그 날 밤 촬스 웨슬리의 방에서 "Where shall my wondering soul begin?"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이 회심 사건을 계속해서 축하했습니다. 이제 웨슬리에게 신앙은 더 이상 어떤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되었으며 하나의 'experiential reality,' 즉 '경험적인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PRO ME,'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웨슬리는 더 이상 'nominal Christian,' 즉 이름뿐인 기독교인이 아니고, 'real Christian' 즉 진짜 기독교인이요 'Bible Christian,' 즉 성서적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올더스게잇 체험 후 웨슬리는 자신이 조지아에서 허공을 치는 헛수고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Righteousness,' 즉 義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믿지 않고 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끝이 없는 영적 싸움을 싸웠지만 정복자가 되지 못했으며 어쩔 수 없이 죄를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무수히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세계만으로는 영적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올더스게잇의 넓은 거리로 뛰쳐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올더스게잇 이후에 이제 웨슬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체험의 'authenticity,' 즉 '진정성'을 시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체험이 진짜 기독교인의 체험이요, 성서적 기독교인의 체험이냐 하는 것을 테스트하는 과제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믿음과 확신의 열매, 즉 죄와 의심,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즉 한 마디로 말해서 'holiness'(성결)--와 성령 안에서 평강과 사랑, 기쁨--즉 한 마디로 말해서 'happiness'(행복)--이 충만한가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 사건 후에도 여전히 유혹은 받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승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형태로 위안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이 평화는 누릴 수 있었는데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기쁨은 누리지 못했지만 지속적인 평강과 죄로부터의 자유함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degrees of faith,' '믿음의 정도'에 대해서도 의심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의심은 진짜 믿음과 추호도 竝存할 수 없다고 가르쳤는데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체험 후에도 믿음의 정도가 시시각각 다르게 느껴지는 현실에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독일의 헤른훗트(Herrnhut)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모라비안 공동체의 지도자 친첸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를 禮訪하게 됩니다.

 결국 친첸도르프와의 만남에서 웨슬리는 몇 가지 중대한 신학적 통찰력을 얻지만, 모라비안들이 성화를 의인화에 해소시켜서 '죄의 용서'를--즉 'imputed righteousness'(전가된 의, 의인화)를-- '죄로부터의 자유'--즉 'infused righteousness'(주입된 의, 성화)--에 확장시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 없는 완전성이 구원의 필연적인 표시나 증거가 된다고 보는 모라비안의 견해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웨슬리는 믿음(faith)과 확신(assurance)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고 의인화와 성화를 동일시함으로서 '믿음의 정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화의 필요성조차도 긍정하지 않는 모라비안들의 靜寂主義(quietism) 입장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웨슬리가 보기에 확실히 모라비안들은 성화의 열매에 해당되는 것들을 구원받은 표시로 볼 뿐 아니라 회심 그 자체를 기독자의 완전과 同格化시켰으며, 결국 구원 혹은 의인화 그 자체를 성화로 간주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른 사람은 어떤 영적 엘리트가 되어서 그 어떤 성결의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反율법주의적이고 수동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모라비안들로부터 어떤 기구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스킬은 배웠지만 '정적주의'라는 신학적 입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체험 이후 'faith alone'(의인화)이라는 개신교적인 대원칙을 'holy living' 혹은 'good works'(성화)라는 카톨릭적 주제에 앞세웠지만 옥스퍼드 시절부터 그토록 염원했던 성화의 차원을 끝까지 잡으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모라비안적 정적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루터-칼뱅적 反율법주의자들과도 구분이 됩니다. 

 올더스게잇 이후에 웨슬리가 옥스퍼드 중심의 소수 엘리트 구원에서 보통 사람들, 특히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 계층을 중심으로 한 Mass Movement로 방향을 바꾼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제 요원의 불길과 같이 번지는 웨슬리의 열정적인 복음 운동에 국교회 사람들은 설교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노골적인 반감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웨슬리의 순회 전도 활동을 꼬집으면서 옥스퍼드에서 교수 활동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교구에서 목회 활동을 해야만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웨슬리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세계 전체를 저의 교구로 봅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간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국교회 강단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웨슬리가 옥외 설교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던 조지 휫트필드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手順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처럼 국교회 원칙에 철저했던 사람이 옥외 설교를 시작했던 것은 하나의 혁명적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슬리가 옥외 설교에 대하여 애당초 어떤 혐오감을 보였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내 자신을 이와 같이 이상한 방법의 옥외 설교와 거의 화해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지 않을 경우 거의 하나의 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국교회 안에서의 입지가 좁아졌고 무엇보다도 옥외 설교를 통하여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휫트필드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1739년 4월 2일, 한 거리의 도로 위에서 약 3천명의 청중들에게 옥외 설교를 처음 시도했습니다. 그 후 웨슬리는 주로 도시 빈민들이나 광산 노동자, 농부 등을 겨냥해서 거리나 시장통, 공동묘지 앞, 광산 채굴장, 등등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야외 설교를 해서 한 때 6만 명까지 청중을 동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케네쓰 칼린스의 지적대로 올더스게잇 없는 옥외 설교는 공허하기 짝이 없으며, 옥외 설교로 이어지지 않는 올더스게잇 역시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올더스게잇 체험 이후 웨슬리와 메쏘디스트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18세기 영국 사회에 대대적인 부흥의 물결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3) 올더스게잇 회심의 신학 사상적 특징
 저는 시간 관계상 올더스게잇 이후에 어떤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 다만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 이후의 가장 극명하게 달라진 차이점의 한 양상을 신학적인 주제로 말씀드리고 올더스게잇 부분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올더스게잇 이후 웨슬리가 가장 예민하게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 은총의 'instantaneousness,' 즉각성이었습니다. 사실 웨슬리 신학을 바로 이해함에 있어서 두 세트의 개념들, 즉 'instantaneousness.' '卽刻性'과 'gradualness,' '過程性', 그리고 'imputation,' 즉 '轉嫁性'과 'impartation,' 즉 '分給性'의 역동적 관계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각성과 전가성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하에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성과 관련되어 있고 과정성과 분급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윤리적 참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가성과 분급성의 개념 세트는 주로 기독론과 관련되어 있지만 즉각성과 과정성의 개념 세트는 의인화와 성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구원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편에서의 책임적 동참을 강조하기 위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여기에서 즉각성과 과정성을 좀 더 부연해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즉각성은 주로 개신교적인 강조점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주어지는 무상의 선물성과 은혜의 'actualization,' 즉 현실화를 강조하는 반면에, 과정성은 카톨릭적인 강조점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준비와 책임적 동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텍사스 오스틴에서 LA까지 여행을 한다고 할 때 여행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지만 최후에 이르게 될 도착점, 즉 여행의 목적이 실현되는 즉각적인 순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 신학의 과정적인 강조점만 붙들고 즉각적인 성격을 간과할 경우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총을 無色케 하며 마치 구원이 어떤 순간에 주어지는 초월적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점진적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게 되는 바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웨슬리를 읽게 될 위험이 있으며, 반면에 과정성을 무시한 채 즉각성의 차원에만 눈을 돌릴 경우 인간 편에서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전 과정에서의 준비와 노력을 무시한 채 수동적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의 즉각성과 과정성의 관계는 단지 시간순서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구속의 'initiative,' 즉 주도권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옥스퍼드 시절 웨슬리는 즉각성보다 과정성에 더 몰두했었으며, 올더스게잇 이후에 비로소 오랜 성결 훈련의 과정 끝에 회심의 체험이라는 즉각성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즉각성과 과정성의 이해를 좀더 돕기 위하여 禪佛敎와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즉각성과 과정성의 개념 세트는 불교에서 脫覺하여 成佛의 경지, 즉 廓徹大悟에 이르는 것이 '頓悟'--즉 별안간 깨닫게 되는 것인가--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漸修'--즉 점진적인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가--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적 개념으로 환치해 볼 때 웨슬리 신학의 구속론적 주제들 중 어떤 부분은 거의 '頓悟頓修'-- 즉 일순간에 득도에 이르는 과정--에 비견할 수 있으며, 또 다른 부분들은 '頓悟漸修'--한번 깨달은 것으로 그쳐서 안되고 평생 동안의 수행과정을 통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함--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주지할 것은 웨슬리가 즉각성을 강조할 때--심지어 성화와 '전적인 성화'로서의 '기독자의 완전'에 있어서까지--자칫 자신의 구속론이 인간의 공적주의나 율법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초월적 은혜의 선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매우 정교한 신학적 장치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또 다시 강조하고 싶은 논점은 1738년 이전, 특히 옥스퍼드 시절에 웨슬리는 자주 '의인화'와 '성화'를 혼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경건과 자비의 실천이 의인화의 결과라기보다는 義認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화가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성화의 노력 끝에 얻어지는 과정적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올더스게잇의 극적 회심 이후 그는 의인화를 체험하기 전까지 선행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우선 순위를 재정렬시켰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新生'(New Birth)에서 의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로, 즉 우리의 행위 여부와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전가되는 선물로서,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로, 즉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책임적으로 동참하여 얻게될 점진적인 과정으로서 구분했습니다. 의인화가 하나님과 우리의 외적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바 상대적 변화라면 성화는 우리 내면의 변혁을 가져다주는 진짜 변화임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올더스게잇 이후에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웨슬리가 적어도 구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두철미 개혁주의적 원리를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웨슬리는 루터가 믿음에 비해 선행과 성화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킴으로서 빠졌던 'solafidianism,' 즉 '信仰至上主義'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오직 믿음'만이 의인화의 단 하나의 필요 충분의 근거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에서 철저한 개신교 신학자였습니다. 웨슬리 자신의 말대로 하면, 믿음은 "용서받기 위하여 'immediately,' '즉각적으로,' 'indispensably,' '불가결하게,' 'absolutely,'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단 하나의 요소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웨슬리는 또한 의인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점진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인화의 즉각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의인화의 즉각성을 위하여 '오직 믿음'만을 강조할 때 웨슬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루터-칼뱅과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밖에도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갈라주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학적 논점들이 있지만 이제 이쯤해서 올더스게잇이라는 메타포로 상징되는 세계를 끝내고 제 강연의 결론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3. 웨슬리의 정신에서 본 Methodist의 정체성 문제

 이제 저는 강연을 마치면서 우리 메쏘디스트의 正體性 문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메쏘디스트'를 굳이 '감리교인'으로 번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자리에 감리교인 뿐만 아니라 성결교와 나사렛 교회, 구세군 등등 모든 웨슬레안들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메쏘디스트'라는 말을 웨슬리에게 영향을 받은 汎 웨슬레안들을 통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메쏘디스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메쏘디스트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까? 메쏘디스트를 다른 교파의 교인들과 구분시켜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웨슬리 선생 탄생 300주년을 맞아 이와 같은 정체성의 질문들은 다시 한번 점검해볼 만한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일찍이 메쏘디스트의 미래에 대하여 이런 염려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메쏘디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 없는 종교의 형식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서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약에 메쏘디스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그 교리와 정신, 그리고 훈련을 다같이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염려가 하나의 可能態에서 現實態로 바뀌어져 가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메쏘디스트들이 웨슬리와 메쏘디스트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처음 가졌던 정신을 점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교조 웨슬리의 정신을 다시 한번 배워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웨슬리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여기에 메쏘디스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要諦가 있습니다.  

 저는 본 강연에서 웨슬리 정신의 본질을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이라는 두 개의 메타포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웨슬리 본연의 정신은 일생 동안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왔다갔다하는데 있었습니다. 어느 시기에는 옥스퍼드적인 양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났고, 또 다른 시점에는 올더스게잇적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등 그 강조점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은 항상 웨슬리의 신학과 목회의 전 영역에 있어서 'check & balance,' 즉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왔습니다. 단순히 견제와 균형만 이루어 온 것에 그치지 않고 두 세계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가장 건강하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화해되고 통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후예들인 우리 메쏘디스트들 역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다 붙들고 양극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통전시킬 때에만 진정한 메쏘디스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의 양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속해야만 할까요? 시간 관계상 저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메쏘디스트들은 거룩한 方法主義者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첫 번째 강연에서 '메쏘디스트'라는 말의 어원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듯이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갖가지 영적 방법들에 천착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적 교회 성장론을 부르짖는 크리스티안 슈바르츠(Christian Schwarz)나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이 비판하는 요점이 무엇입니까? 이른바 교회 성장이라는 것이 "그저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는 식의 '영성 지상주의적 사고 방식'과 "인간의 기술이나 방법으로 얼마든지 교회 성장이 가능하다"는 식의 '방법 지향적 사고'의 愚를 지적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말을 극단적인 신본주의와 극단적인 인본주의를 경계한 웨슬리와 相通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분명히 일부 칼뱅주의자들과 같이 극단적인 신본주의자도 아니고, 일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인본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神-人本主義者들'인 것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당신이 일할 수 있습니다. . .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는 선행 은총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 펠라우기우스적 신인협동설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칼뱅적 결정론도 넘어 서고 있기에 神-人本主義에 서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 50% 인간 50%를, 칼뱅과 같은 신본주의자들은 하나님 100% 인간 0%를 각각 강조한다고 할 때, 神-人本主義者인 웨슬리는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 펼쳐지는 선물성이라는 사실에서 '하나님 100%'와 인간의 책임적 결단과 참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효화된다는 사실에서 '인간 100%'를 강조한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슈바르츠와 워렌이 경계한 두 가지 公賊, 즉 '영성 지상주의적 사고 방식'--즉, 신본주의--과 '방법 지향적 사고 방식'--즉, 인본주의--을 웨슬리 역시 경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성장이 인간의 숙련된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또한 메쏘디스트는 단지 영혼을 컨버젼시키는 일에만 관심 가질 뿐 아니라 책임적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nurturing,' 양육시키는 일에도 여러 가지 거룩한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하나님의 은혜로 'spontaneously,' 즉 저절로  일어난 자연적 운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사실에서 교회 성장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메쏘디스트들로 불린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 특히 빈민층을 찾아다니며 벌인 뜨거운 성결 운동 없이는 메쏘디스트 교회가 일어날 수 없었음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교회성장 운동과 관련해서 웨슬리적 관점에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의인화'--하나님의 전적이며 수동적인 은혜--와 '성화'--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능동적이고 책임적으로 동참하는 것--가 함께 갈 때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를 지향할 수 있으며 성숙과 성장을 동시에 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거룩한 방법론자들입니다, 영적인 방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빛과 소금된 직분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웨슬리가 그토록 염려했던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종교의 형식만 갖춘 속빈 강정과 같은 메쏘디스트들이 만연해 있는 이 때에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의인화와 성화를 다 붙들어서 'faith working through love,' 즉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갈 5: 6)을 온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거룩한 방법주의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academia, 신학과 ecclesia, 교회를 다 잡아야만 합니다. 오늘날 일부 메쏘디스트 신학자들은 목회자들, 특히 부흥사들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경향성이 있으며, 일부 메쏘디스트 목회자들 특히 부흥사들은 신학자들이 교만하고 목회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불평합니다. 심지어 신학자들을 함부로 이단으로 'anathema'하여서 종교 재판에 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결코 웨슬리 선생이 원치 않는 바, 메쏘디스트 본연의 정신으로부터 크게 이탈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자비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관용과 신학적 다원성을 적극 긍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웨슬리가 대학 내 소수의 엘리트들만의 성결화 운동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으로 넓게 나아간 것을 우리 메쏘디스트들이 꼭 기억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신학교와 로컬 처치를 엄격하게 양분하는 것이 신학의 전문화와 독립성, 그리고 고도의 엄밀성을 위하여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利點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분리는 신학교와 목회현장, 신학자와 목회자 혹은 평신도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사실에서 지대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practical divinity,' 즉 '실천 신학'은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종합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신학교와 교회 현장의 대립 혹은 유리 현상을 교정해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의 실천 신학적 모델은 이미 그 자체로서 건전하며 창조적인 까닭에 오늘의 강단 신학과 부정적인 비교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강단 신학들이 기독교인들의 일상 생활이나 실제 예배, 전도 등에 일탈되는 현실을 염두에 둘 때 웨슬리 신학은 오히려 이러한 강단 신학을 교정하고 갱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요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신학과 목회현장의 양극을 특유의 실천 신학으로 통전시켰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화해시켰습니다. 프라이가 제시한 유형 5와 유형 1의 양극 긴장을 해소했습니다. 사실 웨슬리는 앨버트 아우틀러가 'Plundering the Egyptians,' 즉 '애굽인의 물품을 약탈하기'로 표현했던 것처럼 당대 최고의 철학, 문학, 예술, 윤리학, 심지어 자연 과학과 의학에까지 정통해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메쏘디스트 설교자들이 오직 성경책만 읽으면서 설교하는 것을 준엄하게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아우틀러의 조사에 따르면 1725년 이후 약 1,400 여명의 저자들과 이들이 저술한 약 3천 여종의 각종 다양한 주제들을 두루 섭렵했다고 합니다. 차터하우스와 옥스퍼드의 교수 출신답게 웨슬리의 방대한 학문과 정교한 논리의 세계는 그 누구도 추종을 不許할 만큼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차가운 신학의 상아탑 속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folk theologian,' 대중 신학자가 되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거리로 뛰쳐나와 신학을 생활화했습니다. 'Orthodoxy,' '정통 교리'를 탐구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Orthoparxis,' 즉 '정통 실천'에 까지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웨슬리의 위대성이 있으며 우리 메쏘디스트 신학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한 메쏘디스트들이 되려고 한다면 신학자는 목회자를 무시해서 안되고 목회자 역시 신학자를 함부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의 메쏘디스트가 진정으로 메쏘디스트다운 본연의 정신을 회복하려면 신학 강단과 목회 강단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옥스퍼드에 있는 신학자들은 올더스게잇을 체험해야만 하고 올더스게잇에 종사하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옥스퍼드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양자 사이의 건강한 긴장과 균형이야말로 메쏘디스트의 장래를 위하여 심히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의 건강한 공생관계는 1972년 아우틀러에 의하여 처음 제안된 이래 웨슬리 신학을 상징하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 '四重規範'(quadrilateral)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웨슬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quadrilateral'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웨슬리의 전 저술물 속에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의 네 가지 규범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상호보완과 견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전통에 의하여 밝혀졌고, 개인의 체험을 통하여 활기를 띠게 되며, 마침내 이성으로 확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은 성경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카톨릭과 구별되며 전통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개신교와도 다릅니다. 또한 체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이 처치인 영국 국교회의 형식주의와 다르고 이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모라비안주의와 같은 정적주의나 신비적 열광주의와 구분이 됩니다. 요약하면 웨슬리 신학은 성경의 우선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카톨릭과 같이 전통과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시도를 막아줄 수 있으며, 전통은 과거의 유산을 돌아보아 오늘의 신앙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에서 개신교적 뿌리 없음을 보완해줄 수 있으며, 이성은 무분별한 열광신비주의나 미신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체험은 극단적 理性盲信主義로부터 뜨거운 가슴의 종교를 지지해 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reasonable enthusiast,' '이성적 열광주의자'로서의 웨슬리는 그 후예들이 기독교 신학이 빠질 수 있는 모든 편향적/극단적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중용과 조화, 일치의 신학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 메쏘디스트들은 옥스퍼드의 세계와 올더스게잇 세계 모두에 양발을 내디뎌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성과 체험이 함께 가고, 성경이 전통과 함께 가게 해서 살아 있는 신학적 목회와 목회적 신학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앨버트 아우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함으로서 제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 옛날 "개신교적인 것"과 "카톨릭적인 것"을 따로 분리시켜 놓은 것은 더 이상 생산적인 양극이 아니다. 이제 단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독교적 미래는 진정으로 카톨릭적이며, 참으로 개신교적이며, 진실로 개혁적인 교회를 찾는 것에 달려 있다. 요한 웨슬리--카톨릭적 정신을 가진 개신교인이요, 사랑 안에서 열매맺는 신앙에 의해서 창조된 기독교적 삶의 영웅적 비전을 가진 개혁자요,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살았고 이들로부터 사고했으며 자신의 모든 판단들을 경험과 이성의 법정 앞에 갖다 놓은 신학자--바로 이러한 웨슬리가, 만일 무시할 경우 더욱 빈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바, 내일의 교회를 위한 하나의 보배를 제공한다. (필자 번역)

제 강연을 끝까지 경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글쓴이 : sola-grati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