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 미주 LA 기념 대회 주제 강연 (1)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 사이에서
― 요한 웨슬리의 정신에서 본 '메쏘디스트'의 정체성 문제 (I)
(Between Oxford and Aldersgate
― The Problem of Methodist Identity in the Wesleyan Spirit)
김흥규 목사 <텍사스 성루가 연합 감리교회>
1.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
"도대체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학교(Academy)와 교회(Church) 사이에 무슨 일치가 있단 말인가?"(Tertullian, Pres. Haer. 7). 이것은 일찍이 라틴 교회의 교부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 160-225)이 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여기서 아테네는 철학 혹은 이성을 말하며, 예루살렘은 신학 혹은 신앙을 뜻할 것입니다. 철학과 신학의 긴장 관계, 혹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 관계를 표현해주는 메타포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 특히 근본주의자들일수록 학문이나 세상적인 지혜의 無用性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이 믿음의 순수성을 조직적으로 잠식하는 Hubris, 즉 교만으로 생각해서 이지적인 것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아테네를 경원시하는 입장을 리처드 니이버(Richard H. Niebuhr, 1894-1962)의 유형론을 빌릴 경우 'Christ against Culture,' 즉 '문화를 적대시하는 그리스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을 무조건 폄하하는 무신론적 세속주의자들과 기독교적 인본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진리를 오직 이성과 경험이라는 잣대로만 검증하려고 할 뿐 아니라 기독교를 비롯한 세계 종교 일반을 거대한 신화적 체계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안에서도 분명 예루살렘보다 아테네를 더 자주 배회하며 애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이성과 과학만이 기독교 교리와 실제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아테네 편향적인 사람들은 니이버의 유형론을 적용할 경우 'Christ of Culture,' 즉 '문화에 함몰된 그리스도'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긴장 관계를 기독교 신학 안으로 끌어 들여서 좀더 철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대극적인 관계를 예일 대학의 역사 신학 교수로서 조지 린드벡(George Lindbeck)과 더불어서 'Post-liberal Theology,' 즉 '자유주의 이후의 신학,' 혹은 'American Barthianism'을 주도했던 한스 프라이(Hans Frei, 1922-88)의 유고집「Types of Christian Theology」, 즉 「기독교 신학의 유형」의 빛에서도 mutatis mutandis, 즉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 보다 흥미롭게 관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프라이는 이 책에서 다섯 가지 유형론을 대별시킴으로서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과 방법론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유형과 다섯 번째 유형은 그 성격과 방법에 있어서 정반대가 되는 양극의 신학 유형이며, 이 사이에 유형 2, 유형 3, 그리고 유형 4의 신학이 각각 위치합니다. 여기에서 유형 3의 신학은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단을 적절히 통합하는 중도 신학이며, 다시 유형 2의 신학은 유형 1과 유형 3의 신학을, 그리고 유형 4는 유형 3과 유형 5의 신학을, 각각 적당히 절충하고 있는 바 양극단 사이의 중도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형 1 신학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제 1 유형의 신학은 신학이 철학이나 사회학, 심리학, 물리학, 등등과 마찬가지로 종합대학의 한 분과로서의 공중적인 위치를 갖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경우 신학이 실행되는 현장은 고도의 학문적 규범과 엄격한 리서치 방법이 강조되는 대학이 되며 의미와 진리에 관한 일반적 기준이 신학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이 붕괴될 뿐만 아니라 신학을 'Religious Studies,' 즉 '종교학'의 한 영역으로서 간주하게 됩니다. 프라이에 따르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이 유형 1 신학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확실히 예루살렘보다 아테네에 훨씬 더 경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바른 신학의 기준이 기독교 공동체에만 국한된 내적 규범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면서 'public criteria,' 즉 엄격한 '공중적 규범'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유형 1에 정반대 되는 유형 5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을 'an aspect of Christianity,' 즉 '기독교의 한 양상'으로 보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confessional theology,' 즉 '고백 신학'을 전개하려는 입장입니다. 이 경우 기독교 신학은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내적 언어에 대한 'self-description,' 즉 '자기 기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하기가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철저히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신학의 의미와 진리는 어떤 외적이며 공중적인 진리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내적 규범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프라이에 따르면 유형 5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자는 이른바 'Wittgensteinian fideist,' 즉 '비트겐슈타인 신앙제일주의자'로 알려진 디 지 필립스(D. Z. Phillips)입니다. 제 5 유형 신학의 경우 비록 신학을 해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아테네에 신세를 질지 모르지만 그 강조점과 가치의 선호도에 있어서는 예루살렘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의미와 진리는 아테네식 의미와 진리 기준으로서는 바로 해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회 중심의 신학 혹은 고백 신학의 극단적 형태가 유형 5의 신학인 것입니다.
이제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 신학이 가지는 특성을 어떻게 타협하며 절충하는 가에 따라서 유형 2와 유형 3, 유형 4의 신학들이 각각 산출됩니다.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을 적당히 조화시킨 중도적 신학이 유형 3인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와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로 대표됩니다. 두 사람은 비록 자유주의적 신학 방법론을 택했지만 케리그마와 상황의 상관성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철학과 신학, 혹은 신학과 목회 현장의 양극을 화해 종합시키려고 했던 신학자들입니다. 유형 3의 신학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다 왔다갔다하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극을 통전시켜보려는 'Moderate Camp'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유형 2의 신학은 유형 1과 유형 3 사이에 위치하는데 좀더 아테네 쪽으로 기울어진 신학을 말할 것입니다. 이 경우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고백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긍정은 하지만 신학적 진리의 타당성이 교회의 내적 진리 기준이 아닌 보편적 진리 기준, 혹은 공중적 신학 규범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프라이에 의하면 데이빗 츠레이시(David Tracy)와 슈버트 아그덴(Schubert Ogden),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등이 제 2의 신학 유형에 속하는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루살렘보다 아테네에 더 깊이 침잠된 신학자들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형 4의 신학은 유형 3과 유형 5 사이에 위치하면서 좀더 예루살렘 쪽으로 기울어진 신학 진영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보편적인 진리 기준을 무조건 배격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신학이 본질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데 있다는 사실에 더 강조점을 둡니다. 프라이에 따르면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유형 4의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위기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나왔으며, 신학의 본향인 교회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운동이었기 때문에 아테네보다 예루살렘 쪽에 좀 더 발을 깊이 내딛은 것으로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로컬 처치의 목회자이기 때문에 유형 4의 신학을 가장 선호합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 역시 18세기의 시대적 상황을 우리 시대로 환치할 경우 이와 같은 제 4 유형에 가장 近似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헨리 랙(Henry Rack)이 웨슬리를 'Reasonable Enthusiast,' 즉 '이성적인 열광주의자'로 부른 것에도 간접적으로 나타나지만, 웨슬리는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힌 전도자였지만 무분별한 부흥사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양극을 창조적으로 종합시킨 목회자적 신학자요, 신학자적 목회자로서 이성적인 부흥사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되 아카데미아보다는 에클레시아 쪽으로 조금 더 경도된 바 유형 4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한 가지 조건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한스 프라이의 유형론이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상관성의 문제와는 각도가 다를 수도 있으며 relevance도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프라이가 제시한 다섯 가지 신학 유형은 적어도 아테네를 무조건 배격하는 근본주의 신학자들이나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을 쉽게 경멸하는 무신론적 세속주의자들 역시 고려 대상에 넣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라이의 유형론은 기독교 신학의 자료와 대상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바 '진정한 의미의 신학'의 세례를 통과한 '계몽된 신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프라이는 신학자들이 아테네와 예루살렘 중 어느 쪽에 더 치우는가의 偏重의 정도를 관찰하면서 양자의 긴장관계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 강연의 도입 부분에서 왜 이처럼 장황하게 아테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그리고 프라이의 다섯 가지 신학 유형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것이 요한 웨슬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웨슬리는 아테네 지향적인 신학자였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 지향적인 목회자요, 부흥사였습니까? 그리고 웨슬리는 프라이의 다섯 가지 유형론 중에 어떤 유형에 속할까요?
저는 제 강연에서 이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웨슬리가 고민하고 씨름했던 두 세계를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이라는 상징적인 메타포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그 넓고 거친 의미에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도식과 분명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옥스퍼드가 학문의 세계를 의미한다면 아테네와, 올더스게잇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면 예루살렘과 각각 상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프라이의 유형론에서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단적 형태 역시 그 廣大한 의미에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의 메타포와도 유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유형 1은 옥스퍼드 쪽으로, 유형 5는 올더스게잇 쪽으로 굳이 접목시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본 강연에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이라는 메타포를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상징 관계성, 혹은 유형 1과 유형 5의 양극적 신학 형태론보다 훨씬 더 좁고 엄밀한 의미에서, 즉 웨슬리적인 신학과 목회의 범주 안에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특히 저는 강조점을 어느 쪽에 더 많이 두는 가에 따라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을 다음과 같은 이항대립으로 병렬시켜보려고 합니다.
*옥스퍼드: 신학교, 이성, 엘리트 중심의 소수구원, 카톨릭적 경향성, 인간 편에서의 성결 노력(행위), 성화, 분급성(impartation), 과정성(gradualness)
*올더스게잇: 교회 현장, 체험, 대중 중심의 만인 구원, 개신교적 경향성, 오직 믿음만으로, 의인화, 전가성(imputation), 즉각성(instantaneousness)
제가 굳이 제 강연의 제목을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 사이에서'라고 정한 것은 웨슬리가 일평생 동안 이 양자 사이를 방황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를 배회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양자를 화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 통합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촬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가 킹스우드(Kingswood) 학교의 개교식에서 어린이를 위해 지은 찬송시에서 읊었던 노래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지식(knowledge)과 절대로 필요한 경건(vital piety)을 하나로 통일시킨" 쾌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 발제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저는 본 강연에서 웨슬리가 옥스퍼드로 대변되는 세계와 올더스게잇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에 다리를 놓은 접속의 신학자요 목회자라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웨슬리는 개신교주의와 카톨릭주의를 화해시켰습니다. 웨슬리는 비록 개혁주의적 노선 위에 서 있었지만 개신교의 치명적인 약점--흔히 反율법주의적 경향성(antinomianism)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한 인간의 무력화 현상--을, 카톨릭적인 장점--흔히 인간 편에서의 율법적인 구원협조(synergism)와 성결화 과정에 대한 강조--을 받아들임으로서 양자간의 갈등을 절묘하게 화해시켰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인 양상 때문에 웨슬리는 신교나 구교 모두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당할 여지가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저는 이와 같은 '웨슬리적 종합'이야말로 교회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양분해 온 '신학교와 교회 현장,' '이성과 체험,' '의인과 성화,' '성직자와 평신도,' '개신교주의'와 '카톨릭주의' 등등의 모든 相剋的 대립을 결정적으로 해소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은 "Either Oxford or Aldersgate'의 양자택일의 신학과 목회가 아닙니다. "Both Oxford and Aldersgate"의 양자통합의 신학이요 목회입니다.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의 상극적 긴장을 창조적으로 연결시키는 'connectional theology,' '연결 신학,' 혹은 'conjunctive theology,' '접속의 신학'인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옥스퍼드냐? 올더스게잇이냐?"의 질문 앞에 어느 하나를 폐기하지 않고 양자를 다 잡고 창조적으로 변혁시키려는 것이 웨슬리의 지배적인 정신이었습니다. 실로 웨슬리는 머리와 가슴, 자연과 은총, 의인과 성화, 믿음과 선행, 신학과 교회, 텍스트와 콘텍스트, 성직자와 평신도, 카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 등등의 대립되는 요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한결같은 주제로 지양 화해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제 제 강연의 목적이 분명해졌다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삼단계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성격의 논증 과정을 밟고자 합니다.
첫째로, 본 강연의 전반부에서는 웨슬리의 옥스퍼드 생활의 특징을 밝혀낼 것입니다. 특히 1738년의 올더스게잇 체험과 더불어 옥스퍼드 시절인 1725년 국교회의 deacon 안수를 앞두고 매우 중대한 회심을 했던 사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옥스퍼드 시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729년부터 1735년까지 '神聖 클럽'(Holy Club)을 중심으로 전개된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을 추적해보자 합니다. 이와 같은 두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서 저는 웨슬리가 위에서 언급한 '옥스퍼드'라는 코드로 상징되는 제반 요소들과 힘겨운 씨름을 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둘째로, 목요일 아침 저에게 주어질 두 번째 시간에는 1738년 5월 24일 일어난 올더스게잇 회심 사건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저는 특히 웨슬리가 왜 이와 같은 극적인 회심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 본 뒤, 옥스퍼드 시절과 비교해서 회심 전과 후에 어떤 변화와 차이가 있었는지를 조명해 볼 것입니다.
셋째로, 제 강연의 말미에서 저는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의 특징들을 다시 한번 총정리해 본 후에 우리 웨슬레안들이 웨슬리 본래의 정신에 따라 어떤 正體性을 확립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제 강연을 마치자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제를 추구함에 있어서 두 가지 유보적인 단서를 달아두는 것이 책임있는 학자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이라는 메타포는 저의 발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working tool,' 즉 '작업 장치'일 뿐 이 도식이 웨슬리의 신학과 목회 전체를 100% 엄밀하게 갈라주는 분기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웨슬리는 옥스퍼드 시절에도 올더스게잇으로 상징되는 제반 특징들을 정도의 차이이기는 하지만 이미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올더스게잇 이후에도 옥스퍼드로 상징되는 요소들을 혼합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옥스퍼드와 올더스게잇은 웨슬리의 생애의 매 시기에 있어서의 정도의 차이나 강조점의 强弱에 따라 좀 더 지배적인 혹은 덜 지배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특징에 대한 메타포일 뿐, 어느 한 국면에만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바 배타적인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둘째로, 앞에서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관계나 한스 프라이 교수의 다섯 가지 신학 유형론을 언급했지만 웨슬리 시대의 신학과 목회 현장이 오늘의 신학이나 목회 현장과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의 옥스퍼드는 이른바 'Wissenschaft'로 상징되는 이성과 과학적인 학문 세계를 추구하고 있지만 18세기의 옥스퍼드는 아직 교회와 대학이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제일가는 존재 목적이 비판적인 학자들을 길러내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교회를 섬길 성직자를 길러내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웨슬리가 공부했던 18세기의 옥스퍼드가 학문적인 비판 정신이 매우 퇴조해서 최정상의 전문적인 학문을 추구하기에는 매우 굼뜬 바, 지적 태만의 시기였음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과 같이 대학에서 전문적이고 최고 수준의 비판적인 학문성을 추구하게 된 것은 1810년에 세워진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부터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당대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라고 했을지라도 오늘의 대학 수준으로 보면 그 학문성이 크게 떨어지는 상태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가 조심스럽게 어떤 조건을 붙여두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웨슬리의 시대와 우리 시대가 매우 색다른 정신사적 분위기였다는 사실이며, 바로 이 때문에 오늘 우리의 눈으로 웨슬리를 해석하는데 한계와 난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와 같은 序說的인 논의를 기초로 해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 옥스퍼드 시절의 웨슬리
(1) 웨슬리와 옥스퍼드
웨슬리는 1720년 6월 옥스퍼드 대학교의 Christ Church에 들어갔습니다. 6년 간의 기숙학교 차터하우스를 마치고 나이 열일곱 살에 옥스퍼드 산하의 독립 대학들 가운데 가장 크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에 입학했던 것입니다. 옥스퍼드는 아버지 사무엘이 Exeter College를 졸업했으며, 사무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을 비롯하여, 요한보다 12살 연상의 맏형 사무엘 웨슬리 2세와 4 살 연하의 동생 촬스 역시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를 마쳐서 네 부자(父子) 모두가 옥스퍼드의 동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옥스퍼드는 웨슬리家와 4대째 인연을 맺은 유서 깊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옥스퍼드는 영어권 대학 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 1096년부터 그 희미한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 웨슬리를 비롯하여 웨슬리家의 3형제가 다녔던 크라이스트 처치는 1525년 월시(Wolsey) 추기경이 설립한 학교로서 옥스퍼드 내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학교였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와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이 학교 출신이며, 영국의 역대 수상들 가운데 13명이 크라이스트 처치 출신이라고 합니다. 크라이스트 처치를 비롯한 옥스퍼드 산하의 대학들은 주로 영국 사회의 정부 관료와 의사, 율사, 성직자 등을 길러내는데 치중했던 바 엘리트 지배 집단의 산실이었습니다.
웨슬리는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1724년 학사 학위(BA)를 받았고, 1727년에는 석사 학위(MA)를 취득했습니다. 석사 학위의 논문 주제는 동물들의 추리 능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석사 학위를 마치면서 특히 세 가지의 주제들--즉 '동물의 영혼에 관한 문제,' 'Julius Caesar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을 가지고 강연도 했는데, 불행하게도 모든 원고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계속 공부하면서 웨슬리는 1725년 9월 19일 한국 감리교회의 준회원 목사 안수에 해당하는, 영국 국교회의 deacon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728년에는 기감의 정회원 목사급에 맞먹는 정식 사제(presbyter 혹은 priest)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시절 웨슬리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사건은 1726년 3월 17일, 옥스퍼드 내의 또 다른 명문 Lincoln College의 Fellow, 즉 교수로 선출된 일입니다. 아들 요한이 옥스퍼드의 교수가 되었을 때 아버지 사무엘은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내 아들 잭키[요한]는 이제 링컨의 휄로우랍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옥스퍼드의 교수로 선출된 웨슬리는 미국의 조지아 선교를 떠나던 1735년까지 장장 15년 동안 옥스퍼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더욱이 옥스퍼드의 교수에게는 1년에 한 차례씩 종신토록 연금이 주어지는 특전이 있었는데 어디까지나 독신으로 있을 경우만 가능했습니다. 이로 볼 때 웨슬리가 옥스퍼드로부터 교수 연금을 받았던 것은 1751년 나이 48세에 메어리 베제일(Mary Vazeiile, 1710-1781)과 때늦은 결혼을 할 때까지였으므로 옥스퍼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30년 이상이나 됩니다.
웨슬리의 옥스퍼드 대학 초창기는 그 당시 일반 대학생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의 요한은 경쾌하고 대하기 편했으며, 특히 대화를 즐겨했고 합니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은 커피집을 들락거리거나 보트를 타고 노를 저었으며, 주사위 놀이, 당구, 체스, 카드놀이, 테니스, 수영 등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시간이 주어질 경우 극장에도 갔습니다.
벧콕(Badcock)은 21세의 청년 대학생 웨슬리의 삽화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요한은 매우 분별력 있고 명민한 대학생이었는데 치밀한 논리구사로 모든 사람의 허를 찔렀으며 아주 쉽게 논리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 웃음을 날려보냈다. 요한은 최고의 고전적인 취향과 가장 개방적이고 남아다운 기상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는 명랑하고 활기찼으며, 위트와 유모로 분위기를 바꾸는 재주가 남달랐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볼 때 요한의 성격을 특징짓는 신중함과 자로 잰 듯이 정밀하게 시간을 사용하는 기질은 적어도 옥스퍼드 초기에는 형성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신앙 생활은 의무감에 못 이겨 하는 외적 행위 위주였습니다. 비록 기도했고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했고 일년에 세 차례씩 성찬도 분급받았지만 어떤 내적인 확신을 갖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2) 1725: 웨슬리의 지성적 회심
그러다가 웨슬리에게 어떤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가져 온 해는 1725년이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웨슬리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국교회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옥스퍼드가 주로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커리큘럼에 치중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직 안수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725년 사순절 기간 동안 웨슬리는 deacon 안수를 받기 위하여 여러 경건 서적들을 읽는 가운데 처음으로 어떤 획기적이고 진지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결 전통의 경건주의자들의 책들, 예컨대 Thomas a Kempis의 「De Imitatione Christi」와 Jeremy Taylor의 「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Holy Dying」(1650), Robert Nelson의 「The Practice of True Devotion」(1708), 그리고 William Beveridge의 「Private Thoughts Upon Religion」(1709)등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는 가운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특히 테일러의 책을 읽은 다음부터 웨슬리는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성결 생활의 제일가는 규칙이라는 테일러의 제안을 따른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건생활의 진보 과정을 정기적으로 측량할 요량으로 1725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거의 직전까지 일기를 적어 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 서적을 탐독함으로서 웨슬리는 성결의 문제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기질의 문제, 즉 마음의 할례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즈음에 웨슬리는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몇 장을 읽으면서 나는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의도의 순수성에 대하여 말한 부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즉시 나의 전 생애를, 즉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어느 부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아니면 내 자신에게, 즉 사실에 있어서 마귀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이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수단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확신했다.(필자 번역)
이와 같은 웨슬리의 고백으로 비추어 보아서 우리는 1725년이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종교의 제일가는 목적이 'holiness,' 즉 성결에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이름뿐인 'nominal Christian'에서 내면이 변화된 'real Christian'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지요. 어쨌든지 간에 수많은 웨슬리 학자들이 1725년을 1738년의 올더스게잇 회심과 더불어 중대한 회심의 한 국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웨슬리가 이와 같은 체험을 한 뒤 과연 자신의 염원대로 성결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1725년부터 1738년까지 웨슬리는 어떤 결단과 경건 생활의 규칙을 적용함으로서 'freedom from the power of sin,' 즉 '죄의 힘으로부터의 자유'로서의 성화에 달성하기를 염원했으며, 죄의 용서로서의 의인화 확신 역시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올더스게잇 체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웨슬리는 의인화의 선결 조건이 성화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편에서의 부단한 성화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1725년 이후 웨슬리는 분명 하나님과의 화목과 구원의 확신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았지만 아직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1725년의 체험은 아직 미완성의 회심이었으며, 머리와 가슴 중에 머리 쪽의 회심에 더 가까웠습니다. 로너건(Lonergan)의 말을 빌리자면 'intellectual conversion,' 즉 '지성적인 회심' 혹은 'critical conversion,' 즉 '비판적인 회심'일 뿐 삶의 지축을 흔드는 實存-體驗的인 회심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지적이며 비판적인 성격은 올더스게잇과 비교할 때 웨슬리가 책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고 결단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입증됩니다. 1725년의 회심이야말로 옥스퍼드적 특징을 유감 없이 발휘해주는 바 아직도 이지적이며 결단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holy living,' 즉 '성결'과 'faith alone,' 즉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대원칙 중에서 성결 쪽으로 더 경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회심은 1738년에 가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의 옥스퍼드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는 그의 '신앙'에 대한 정의입니다. 1725년 7월 29일 어머니 수산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일종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합리적 근거 위에서 어떤 명제에 동의하는 것으로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신앙을 합리적 근거 위에서 동의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가 모든 증거들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증거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은 마침내 필연적으로 이성으로 해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필자 번역)
그 다음 달에 수산나는 아들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모든 신앙이 지적 동의이기는 하지만 모든 지적 동의가 신앙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해 11월에 보낸 편지에서 수산나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것에 대한 지적 동의란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기 때문이란다." 요한은 어머니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이 계시하는 진리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증거를 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믿는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725년의 지적 회심 직후의 웨슬리의 신앙 이해는 충분하지 않으며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지적 동의가 신앙의 아주 중요한 속성이지만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 확실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이성에 의하여 입증되든지 아니면 성서의 권위에 의하여 뒷받침이 되든지 간에 그 자체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적 동의만으로서의 신앙은 우리의 머리는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가슴과 내면 깊숙한 곳의 기질과 감정은 건드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적 동의(assent)는 반드시 하나님을 모든 가치의 중심으로서 믿는 신뢰(trust)와 함께 결합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fides'는 반드시 'fiducia'와 함께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1725년 직후의 웨슬리는 이와 같은 신앙의 多面的인 성격을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저는 웨슬리의 1725년의 회심이 충분치 못하다고 보는 것이며 올더스게잇 회심과 보충될 때에만 완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Holy Club':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
이제 우리는 웨슬리 자신이 옥스퍼드에서의 '제 1차 메쏘디스트 운동의 태동'이라고 불렀던 'Holy Club'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메쏘디스트 운동의 'chief manager,' 즉 '최고 관리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신성 클럽이 촬스 웨슬리의 주도 하에 일어난 운동이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Holy Club'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요한과 촬스 형제를 제외하고서 최초의 메쏘디스트들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1726년 3월 17일에 웨슬리는 Lincoln College의 교수로 선임되었습니다. 1726년 11월부터 한 2년 간 아버지의 목회를 돕기 위하여 엡워쓰에 내려가 있는 동안을 제외하고서 1735년까지 웨슬리는 옥스퍼드 캠퍼스에서 상주하면서 희랍어 신약과 논리학을 학부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철학적 논쟁의 사회도 보았습니다.
1727년 8월,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을 도와 부사제 일을 보기 위하여 엡워쓰와 우르트로 낙향했습니다. 웨슬리는 이 기간 동안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경건 서적들을 읽었습니다. 1729년 아니면 1730년에 웨슬리는 특히 윌리엄 로우의 「Christian Perfection」과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1728년 7월 웨슬리는 국교회의 정회원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하여 엡워쓰에서 옥스퍼드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성직 서임을 받은 후 웨슬리는 곧바로 엡워쓰와 우르트로 돌아와 아버지 사무엘의 목회를 다시 도왔습니다.
한편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촬스는 매주 성례전에 참석하면서 경건 생활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동료들까지 권면하고 있었습니다. 1729년 5월 촬스는 형 요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옥스퍼드를 영적으로 갱신하기 위하여 작은 성결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니 한번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서 요한 역시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촬스가 주축이 되어서 모이던 그룹은 단지 성만찬만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경건 서적들을 열심히 읽고 종교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토론까지 했습니다. 이른바 옥스퍼드 메쏘디스트 운동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가까워져 오면서 요한과 촬스가 고향인 엡워쓰로 내려가고 또 한사람의 주축--아마 최초의 메쏘디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바--인 윌리엄 몰건(William Morgan)이 자기 집으로 돌아감으로서 이 모임은 일단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1729년 10월 21일, Lincoln College의 학장 존 모얼리(John Morley)는 웨슬리가 교수로서 학교를 떠나 있어서는 안되고 학교에 나와 의무를 다해야 한다면서 소환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1729년 11월, 웨슬리는 엡워쓰의 목회를 중단하고 다시 옥스퍼드로 되돌아가 교수직을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동안 중단했던 성결 그룹 활동을 촬스와 윌리엄 몰건 등과 함께 재개했습니다. 그 다음해 봄 로버트 컬크햄(Robert Kirkham)이 동참했으며 이 그룹은 정기적으로 경건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규칙적으로 모여서 성결 운동에 천착하는 사람들을 조롱 조로 여러 가지 별명을 지어 붙이기 시작했는데, 'Holy Club,' 'Godly Club,' 'Bible Moths,' 혹은 'Supererogation Men'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Methodist'라는 말은 한 2년 정도 후인 1732년 중반 경 크라이스트 처치의 학생이었던 존 빙햄(John Bingham)이 "우리 중에 새로운 메쏘디스트들이 출현했다"고 말했을 때 처음 세인들 속에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성 클럽의 중요한 멤버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결 훈련에 관하여 웨슬리에게 많은 통찰력을 제공했던 옥스퍼드 학생 존 클레이톤(John Clayton)이 1732년 8월 웨슬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메쏘디스트'라는 말을 웨슬리에게 적용함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떠남으로서 메쏘디스트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상당 부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쏘디스트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때로 경멸적인 의미에서 또 때로는 외경스러운 칭호로서 웨슬레안들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이톤의 언급 이후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서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많은 옥스퍼드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 해 12월 런던의 신문「Fog's Weekly Journal」에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실림으로서 옥스퍼드에서의 웨슬리 운동을 지칭하는 대중 용어로 통용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웨슬리 이전에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잠시 살펴봅시다. 본래 '메쏘디스트'라는 말은 17세기에 칼뱅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긍정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폄하해서 불렀던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붙들려고 했던 칼뱅주의자들이 볼 때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인위적인 방법들을 추구하는 것이 위험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New Methodists,' 즉 '新방법주의자들'이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웨슬리를 지도자로 해서 옥스퍼드의 신성 클럽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메쏘디스트라는 이름 역시 경멸적인 별명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 옥스퍼드에서 웨슬리 형제를 중심으로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규칙적이며 엄격한 방법에 천착했던 사람들을 메쏘디스트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쏘디스트라는 말의 본뜻은 성결에 이르기 위하여 갖가지 효율적인 성결 수단과 방법--특히 칼뱅주의자들과는 다른 아르미니우스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方法論者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On Laying the Foundation of the New Chapel'에서 메쏘디스트 운동의 始原을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메쏘디스트라는 말을 "특별한 식이요법이나 운동 방법 등에 의하여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은 고대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의 일군의 의사들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식이요법이나 운동 요법을 강구했던 것처럼 웨슬리와 메쏘디스트들이라고 불린 사람들 역시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했기 때문에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주어졌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입니다.
웨슬리는 일찍이 메쏘디스트라는 말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메쏘디스트'라는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영원한 망각 속에 묻혀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여전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저는 어떤 종파나 당파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야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럴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알도록 합시다." 웨슬리의 말처럼 메쏘디스트라는 형식적인 이름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름을 계속해서 쓰려고 하는 한 그 이름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메쏘디스트라는 말은 옥스퍼드의 신성 클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에게 부쳐진 별칭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신성 클럽을 주축으로 한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많은 사람들이 아닌 겨우 4-5명에서 7-8명 정도의 엘리트 학생들이 여러 그룹을 형성하여 散發的으로 모인 성결 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신성 클럽 한 그룹에 속한 수십 명의 학생들이 Lincoln College 안의 웨슬리 교수실 한 군데에서만 모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핵심 그룹은 언제나 웨슬리 형제들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1732년 중반 경에 존 클레이톤이 가담함으로서 다른 방계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은 2중 구조, 즉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핵심 그룹과 클레이톤을 주축으로 한 방계 혹은 위성 그룹으로 이루어진 多發性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방계 위성 그룹은 3-6명 정도를 단위로 해서 시간과 장소도 다양하게 모였으며, 어떤 가입식이나 퇴출 등의 원칙도 없는 순수 자발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더욱이 1733년부터는 '클럽'이라는 세속적인 이름을 쓰지 않고 '메쏘디스트'라는 말로 적극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메쏘디스트가 되고 안되고의 문제는 이 그룹에 가담하거나 이 그룹이 내건 신조를 지키는 것에 달려 있지 않았고 구원의 열망에 불타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life-style'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들이 했던 활동은 무엇일까요? 위로 수직적으로는 'works of piety,'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건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도, 성경 강독, 경건 서적 읽기, 조기 기상, 성만찬 분급, 금식 등을 규칙적으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수평적으로는 'works of mercy,' 즉 대 사회적인 자비와 박애를 베풀기 위하여 감옥과 고아원 방문, 극빈자 돕기, 교육 활동 등에 매진했습니다. 이른바 개인적인 성화와 사회적인 성화 모두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면 리처드 하이첸레이터(Richard Heitzenrater)는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주로 세 가지 영역에 초점을 집중했다고 봅니다. 첫째로, 'scholarship, 즉 '학습'에 매진했습니다. 성경을 비롯하여 경건주의 신비주의 전통 서적들을 대량 읽음으로서 개인적인 경건 생활을 함양하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고전 교육에 유별나게 치중했던 당시 옥스퍼드의 학풍과도 맞물려 경건에 유익한 고전들을 수없이 탐독하고 열띤 토론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둘째로, 'devotion,' 즉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옥스퍼드 의 메쏘디스트들은 모일 때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의 신앙 고백을 점검했습니다. 명상과 자기 검증, 기도와 성경 읽기, 금식, 자기 부인, 조기 기상 등을 통하여 전 삶이 하나님께 바쳐지기를 열망했습니다. 특히 영적 진보를 주기적으로 첵크하기 위하여 일기를 기록하는 습관이 멤버들 사이에 유행했습니다.
1732년 멤버 중 하나인 윌리엄 몰건이 갑자기 요절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웨슬리 그룹이 극단적인 금식을 강요해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사실 1734년에 윌리엄의 형인 리처드 몰건(Richard Morgan)이 아버지에게 이런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웨슬리의 지도 하에 있는 메쏘디스트들은 그들 삶의 매 시간, 아니 매 분까지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간의 비평이 사실무근이 아님은 같은 해 1월에 쓰여진 웨슬리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웨슬리는 일기에서 매 시간 혹은 매 분마다 결심했던 사항을 제대로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 첵크했으며, 헌신의 정도를 1-9까지의 수치를 정해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독서, 방문, 집필, 대화, 등등의 모든 행위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꼼꼼하게 적고 있습니다.
사실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은 경건주의 서적을 읽기 위한 하나의 작은 독서회 혹은 문학회 형식으로 출발했습니다. 옥스퍼드라는 대학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걸맞게 웨슬리 형제는 경건주의 전통의 서적들을 강독하고 토론하기 위하여 주기적인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어도 1730년대 말쯤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정기적인 성례전을 행하고 감옥과 극빈자들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세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경건 생활과 박애 활동으로 세상 사람들은 'Holy Club'으로 불렀으며, 조금 지나 'Godly Club'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732년에 초대 교회를 모방한 아주 엄격한 성결 훈련을 시도했는데 특히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엄격한 성결 훈련과 방법에 천착하는 사람들을 이즈음부터 '메쏘디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social outreach,' 즉 對 사회적인 자선활동을 실시했습니다. 옥스퍼드 메쏘디스트들은 케슬 감옥(Castle Prison)과 보카도 감옥(Bocardo Prison) 등의 형무소를 방문해서 중죄수들을 교화시키려 했고 또 자금을 모아서 직접 돕기도 했습니다. 또한 병원에 방문해서 병약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 도마 교구에 있는 'workhouse,' 즉 救貧院을 일주일에 두 세 차례씩 방문해서 극빈자들을 도왔는데,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노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거나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들은 어린이와 노약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극빈 노약자들에게는 무료로 음식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對 사회적인 자선 사업에 옥스퍼드 메쏘디스트들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웨슬리의 설교 "The More Excellent Way," 즉 "더욱 더 뛰어난 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은 1년에 30파운드를 벌었습니다. 그런데 28파운드로 생활하고 40쉴링은 남에게 주었습니다. 그 다음 해 60파운드를 벌어서 여전히 28파운드로 생활했으며 32파운드는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삼년 째 되는 해에 이 남자는 90파운드를 벌었는데 62파운드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년 째 되는 해에는 120파운드를 벌었는데 예전과 마찬가지로 28파운드로 생활했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92파운드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더 훌륭한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필자 번역)
이러한 기록은 이미 옥스퍼드 시절부터 웨슬리가 개인적인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성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줍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옥스퍼드에서 이와 같은 경건 활동과 자선 행위는 메쏘디스트들만이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이첸레이터에 따르면 메쏘디스트들을 群鷄一鶴처럼 다른 그룹들과 구분시켜 주었던 것은 웨슬리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성결 행위와 인격성이 하나로 결합한 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과 자비를 양축으로 하는 성결의 방법이 철두철미 그들의 전 삶의 영역 속에 침투되어서 강도 높고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1744년 대학 설교에서 옥스퍼드가 도덕성과 성결 훈련에 있어서 낙제점이라고 혹평을 가함으로서 옥스퍼드와 공식적으로 斷交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식적인 절교 후에도 웨슬리는 가끔 옥스퍼드 교정을 방문했으며 말년에 이를수록 옥스퍼드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깊어만 갔습니다. 1772년 동생 촬스에게 쓴 私信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옥스퍼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주 '내 과거의 삶을 돌려달라!'고 부르짖는단다. 나로 하여금 다시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가 되게 해다오! 크건 작건 간에 내가 옥스퍼드 시절에 지켰던 모든 규칙들을 재개하는 것이 내게 최선이 아닐까 자주 의심하고 있단다. 나는 그 때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했었는데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지내 왔던고!(필자 번역)
이와 같은 소회가 보여주듯이 옥스퍼드는 웨슬리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었던 사상적 요람이요 아름다운 영혼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의 시기는 적어도 웨슬리가 조지아에 선교사로 떠나던 1735년까지 갖가지 규율과 방법들을 內外의 성결에 도달하는데 적절한지 시험했던 'Holy Experiment,' 즉 '거룩한 실험' 기간이었습니다.
(4) 옥스퍼드 메쏘디스트 운동의 신학 사상적 특징
이제 제 강연의 전반부를 마치면서 옥스퍼드라는 코드로 상징되는 세계의 요점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은 몇 몇 개인에게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채 不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올더스게잇 이후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mass movement,' 즉 대중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사실과 견주어 볼 때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은 미완성이요 실패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옥스퍼드가 웨슬리에게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옥스퍼드에서 익히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던 論理學인데 이 논리적 기술은 웨슬리에게 두고두고 중요한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기질상 어머니 수산나를 닮아서 냉철하고 조직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논리적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옥스퍼드에서 갈고 닦은 논리학은 장차 온갖 부류의 반대파와 논쟁을 벌일 때 매우 유용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Lincoln College의 휄로우라는 신분 역시 범인들이 함부로 손상시킬 수 없는 威容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자신의 책표지에 자주 'a Fellow' 혹은 'a Late Fellow of Lincoln College'라는 타이틀을 일부러 적어놓음으로서 적대자들이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초기 신학 사상과 목회를 결정지었던 옥스퍼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저는 앞에서 웨슬리가 기독교 신학 사상사에 있어서 대립되는 양극을 창조적으로 통합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웨슬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 양극이 정도의 차이일 뿐 항상 混在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옥스퍼드 시절에는 그 양극 중 교회 현장보다는 신학교 쪽으로, 체험보다는 이성 쪽으로, 대중 중심의 만인 구원보다는 엘리트 중심의 소수 구원 쪽으로, 오직 믿음만이라는 개신교적 경향성보다는 인간 편에서의 성결 행위에 더 집착하는 카톨릭적 편향성으로, 의인화보다는 성화 쪽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전가 받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적으로 참여하는 쪽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힘으로 전혀 어떻게 할 수 없이 순식간에 즉각적으로 체험하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점진적으로 참여하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웨슬리 신학이 정교한 조직 신학이 아니라 그 때 그 때마다 상황에 응답하기 위해 시도했던 'occasional theology,' 즉 '상황적 신학'이기 때문에 옥스퍼드의 세계와 올더스게잇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옥스퍼드 시절에도 올더스게잇적인 특징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며, 올더스게잇 이후에도 옥스퍼드적인 요소들이 다량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옥스퍼드 시절에 정도의 차이에 따라 혹은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지배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던 특징들을 범주화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성결에 이르기 위한 갖가지 인위적인 경건 방법에 천착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조롱조의 말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옥스퍼드의 'Holy Club'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Methodists,' '방법주의자들'이라는 용어는 올더스게잇 이후에 나온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 이것은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물론이고 웨슬리 자신이 기억할 때에도 행위 위주의 아주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웨슬리가 올더스게잇 이후에 'holy living' 혹은 'good works'와 'faith alone' 둘 중에 후자를 더 優先視했다고 할 경우, 세상 사람들은 웨슬리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용어를 부쳐주었을까요? 아마 메쏘디스트와는 다른 별명을 부쳐주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바로 이와 같은 假定的인 질문이 옥스퍼드의 메쏘디스트 운동의 독특한 성격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에서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칼뱅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白眼視해서 부쳐준 이름임을 지적했습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적극 긍정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New Methodists'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다면서 이단적인 사람들로 공격했습니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이 'New Methodists'라고 비판했던 그룹들 중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일부 국교회의 진보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이신론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New Methodists'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면 구속론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의한 義,' 즉 'Works-righteousness'를 반드시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Sola Fide'와 'Sola Gratia'의 양대 원리를 축으로 해서 이중 예정론을--즉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인 구속론, 불가항력적인 은총 등을--굳게 붙들려고 했던 칼뱅주의자들이 성결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 편에서의 행위와 방법에 천착하는 것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옥스퍼드의 웨슬리는 분명히 'faith alone'이라는 개신교적인 대원리와 'good works'라는 카톨릭적인 대주제 중에 후자에 더 깊이 몰두했습니다. 의인화보다 성화를 우선시했습니다. 'imputation'보다 'impartation'에 더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instantaneousness'보다 'gradualness'에 더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옥스퍼드 시절에도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붙들었지만 의인화와 성결화 중에서 후자를 더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화가 의인화의 선결조건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옥스퍼드가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숭앙했다는 學風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성화를 의인화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마치 수레를 소 앞에 두는 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올더스게잇 체험 이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웨슬리는 'faith alone'과 'holy living'의 두 축을 죽을 때까지 양수겸전했지만 그 순서를 재정렬시킨 것은 1738년 이후부터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옥스퍼드의 소수 엘리트를 중심으로 벌어진 성화 운동이 보통 사람들을 겨냥한 대중 복음 운동으로 轉換될 올더스게잇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