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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우스와 웨슬리 비교
지금까지 우리는 알미니우스의 구원론의 중심개념들과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알미니우스의 구원론의 중심개념들이 웨슬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과연 얼만큼이 비슷하고, 얼만큼이 다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길 원한다. 그러나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알미니우스는 구원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칼빈의 예정론의 부분에 있어서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의 신학을 펼쳤기 때문에 많은 한정적인 모습이 보여질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서 웨슬리는 분명한 구원론의 체계 정립이 있다 둘을 세세한 모습에서 비교한다는 것에 대해선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웨슬리를 알미니안이라고 부르는 만큼 둘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 웨슬리를 알미니안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누어 보겠다.
1.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유사점
1) 죄의 기원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에 있어서 죄의 기원은 하나님에게서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의 오용이라는 점이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추구하게된다. 이것이 아담으로 인한 아담의 범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을 범하였다. 이것은 타락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는 칼빈의 입장과는 대조되는 점이다.
2) 죄의 처벌과 유전
죄의 기원이 인간이기에 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그로 처벌도 인간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 즉 원죄로 인한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과 죄책과 처벌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파되었다. 원죄하의 인간은 전적타락, 전적부패 속에서, 스스로 선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에 대해선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글에서 일치한다. 원죄하의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악만을 선택하며 나아갈 뿐이다.
3) 은혜의 대상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는 웨슬리와 알미니우스의 생각이 일치한다. 즉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웨슬리는 스스로 알미니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웨슬리는 스스로 "알미니안주의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한다"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만을 구원하기로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구원하지 않기로 영원부터 작정하셨다고 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이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그리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범죄와 죄들로 인하여 죽은 모든 자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었다'고 하므로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위해 죽었다' 라는 기록된 말씀을 가진 모든 사람에 관하여 그 말씀대로 되도록 영원부터 작정하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택자만을 위한 대속"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의 전화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웨슬리가 알미니우스의 견해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으로서 그가 스스로 알미니안이라고 이야기한 첫 번째 근거이다. 칼빈의 택자만을 위한 대속의 오류에 대하여 대항하고자 스스로 알미니안이라고 지칭하였다.
4) 은혜에 대한 항거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저항할 수 있음'이라는 생각에 찬성한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불가항력적이다, 즉 아무도 번개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할지라도,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구라도 그가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은혜에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스스로 알미니안이라고 자처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이것 역시 예정론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은혜에 저항하는 모습은 성경에서도, 인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 칭의 받은 성도의 타락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은 칭의 받기 전이나 후나 동일하다. 인간은 칭의 받은 후에도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여 져서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타락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생각에 찬성한다. 알미니우스는 이미 칼빈주의의 견인사상에 반대하였으며, 항의자의 조항에도 다섯 번째의 조항이 " 신자로써 그리스도와 연합 된 자들은 그들이 직면하게 될 모든 시험을 견디어내도록 풍성한 은총과 능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같은 은혜와 능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멸망 받을 수도 있다."(요약)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웨슬리의 알미니안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한다"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참 신자는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참 신자라도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수 있되, 불결한 죄로 인하여 떨어져나가는 정도뿐만 아니라, 완전히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 번째 역시 견인설의 오류에서 탈피하고자 웨슬리는 알미니안을 택했다. 신자는 완전히 타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칭의 전이나, 후나 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존되어 있어야 한다.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것 이외에는 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받을 자를 예정한 것이 아니고,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알미니우스와 웨슬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보았다.
2.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차이점
알미니우스가 웨슬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웨슬리를 알미니안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은혜의 개념에 있어서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은혜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야에 따라서 킬빈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펠라기안이 될 수도, 세미펠라기안이 될수도있고, 웨슬리안이 될 수도 있다. 우선 알미니우스가 이야기하는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그는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런 상황에서 참된 선을 향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하고, 불구가 되고, 허약해지고, 굽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갇히고, 파괴되고,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쇠약해지고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고무되지 않으면 어떤 능력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의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없이는 전혀 무능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볼 때에 아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이미 파괴되어진 자유의지에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질 때에 이미 무능했던 자유의지가 변하여져서 스스로 안에 능력이 생기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말에서도 그는 '은혜에 있어서 고무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무되다'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인하여 내안에 파괴되어졌던 자유의지가 올바르게 작동하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의 이런 표현은 그가 펠라기안주의를 거부하면서 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에게 펠라기우스처럼 은혜라는 말과 관련해서 착각하고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나에게 있어 그 말은 단순히 마음의 조명, 감정의 마땅한 순서. 그리고 선한 것에 대한 의지의 경향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연적이고 육적인 인간의 마음은 모호하고 어둡다는 것과 그의 감정은 부패하고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의 의지는 완고하고 불순종한다는 것과 인간 그 자신이 죄로 죽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참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숙고하며 원하며 시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성, 감정, 의지, 그리고 그 모든 능력에 있어서 중생하여야 하며 새로워져야 될 필요가 있다. 그가(타락한 인간) 이러한 중생 또는 회복에 참여하게 될 때에 나는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으므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바라며 이행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계속적인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알미니우스가 정의한 은혜가 무엇인가? 그는 " 단순히 마음의 조명, 감정의 마땅한 순서, 그리고 선한 것에 대한 의지의 경향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 속에는 알미니우스의 은혜는 그 인간 속에 내제되어져 있는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한 필수적인 하나의 과정처럼 생각할 수 있는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위의 표현을 통해서 은혜를 통해서 일깨워지는 인간 내에서의 가능성을 지성, 감정, 의지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은혜를 통해서 내 안의 지성, 감정, 의지가 새로워져서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주생에 참여하게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은혜 없이도 내 안에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면이지만 부분타락을 이야기하는 로마 카톨리의 반펠라기우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원죄로 인하여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파손되었지만, 완전히 파손된 것은 아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인간 안의 이전까지의 파손되었던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신인협동설로 이야기 되는 부분이다. 인간이 구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원죄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겠지만, 알미니우스가 체계적인 구원론을 정립했다기보다는 칼빈의 예정론에 반발하는 정도로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체계에 있어서는 미흡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웨슬리는 위와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다. 웨슬리는 결코 신인협동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의 선행의 은혜는 초자연적인 은혜이다. 초자연적인 선물로서 주어지는 양심은 결코 지성, 감정, 의지와 같은 인간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웨슬리는 'On Conscience'이라는 설교문에서 양심이라는 현상이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즉,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는 하나), 사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을 넘어서서 그 위에 주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라고 보고 있다. 더 명백히 말하기를 소위 양심이라 하는 그러나 사실은 선행은혜라는 현상은 "자연이 아니라, 이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개개의 인간을 비추는 참 빛이신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넘어선 초자연적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은혜를 통한 구원은 인간의 내재적인 요소의 회복을 통해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별개로 구원만을 위한 은혜로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분명히 선행의 은혜를 표현하길 "인간의 모든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을 넘어서서 그 위에 주어진 하나님의 초 자연적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에 대해서는 웨슬리는 이해력과 정서와 어느 정도의 자유, 즉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스스로 자신을 통치할 수 있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이해력과 정서, 자유등 인간의 내적인 요소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조금의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100%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역사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이것은 내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다. 또한 내 공로도 될 수 없다. 이 온전한 순종을 이선희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100% 일하시고 이에 응하여 내가 100%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멘'으로 응하는 것이다. '아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이 일만이 옳습니다. 그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모두 완전히 배제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아멘을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자연적 및 인간적 기능과 힘과 노력을 100% 가동했으되,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이 옳고, 그 이외의 가능성은 모두 완전히 배제되므로, 이 모든 나의 것이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서 100 % 무가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오로지 하나님만이 옳으시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만이 옳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멘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유일하게 타당한 응답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순종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보여야 하는 유일한 반응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순종하는 것(즉, 아멘으로써 말하고 행하는 것)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행은혜를 포함한 모든 구원의 은혜(즉, convincing grace, justifying grace, sanctifying grace)에 있어서 하나님의 100%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간은 최선을 다해 아멘으로써 말하고 행하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0%로 만드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의미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act와 인간의 react'의 올바른 의미이다.
즉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와 세미 펠라기우스의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세미 펠라기우스로 오해할 만한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또한 은혜에 대한 개념 자체가 웨슬리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 Tong - 구원받은 죄인괴수님의 목회 자료 & 정보 업그레이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