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실천신학
[스크랩] (감리교 군목단 수련회 세미나) 영 적 비 전 (Spritual Vision)
우순(愚巡)
2006. 4. 22. 18:18
(감리교 군목단 수련회 세미나)
영 적 비 전 (Spritual Vision)
서 철 목사(인천복지교회 담임목사)
새즈믄해 5월23일, 여선교회 연합회 제주도 수양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미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장16절-17절)*********
여는 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군선교를 담당하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군종사관 41기로 임관하여 육군 군목으로 시무하다가(1983년-1986년) 전역하여 지금은 복지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서철 목사입니다. 부족한 사람이라 강의 요청을 망설였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위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섰습니다.
저는 ‘영적 비전’을 주제로 저의 목회 철학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논리성이 약하지만 역으로 목회자이기 때문에 현장성과 실제성이 있기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종의 졸고와 강의를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펴는 말
1. 비젼의 중요성
김호식 목사는 교회를 ‘꿈을 파는 슈퍼마켓’이라고 말합니다. 꿈을 파는 슈퍼마켓! 그렇다면 목사는 누구입니까? 꿈을 주는 자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전달해주는 ‘섬기미’ 입니다. 꿈을 주는 자이던지 아니면 전달자이던지 우리는 우리의 청중들에게 꿈을 주기 위하여 먼저 ‘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꿈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먼저 꿈을 갖는 사람 곧 비젼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전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시각입니다. 미래를 미리 바라보는 예견의 지혜요 안목이며 소망입니다. 목사는 앞을 보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지도자들은 모두 앞을 보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가나안 점령의 공신 여호수아와 갈렙, 새벽을 깨운 느헤미야, 민족의 통일을 보았던 에스겔, 그리고 유럽선교의 선구자 바울등 모든 영적 지도자들은 오늘이 아닌 내일을 미리 바라 볼 줄 알았던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
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 게 보이
리라.“(예레미야 33:2-3)
비전을 갖기 위해 우리는 문화의 다양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K. Bart는 한 손엔 성경을 한손엔 신문을 들라고 했습니다. 복음과 문화의 양면성을 말하지요. 오늘 날은 신문 대신 한 손에 컴퓨터를 들어야 합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지금은 정보사회가 됐습니다. 정보수집, 정보분석, 정보활용이 중요한 문화의 도구입니다.
G.Theissen은 다양한 문화의 옷을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1차 사도총회(행15장)가 열렸던 예루살렘 회의는 유명한 선교선언 “동일한 복음 다양한 선교”를 남겼습니다.(예수운동의 사회학, 원시그리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참조)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는 모두 ‘예수 복음’이라는 동일성을 가졌지만, 방랑선교(베드로)와 정착선교(바울)라는 선교의 다양성을 가졌습니다. 또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이며 거지 형태로 전도했지만, 바울은 무할례자의 사도이며 자급자족 형태로 전도했습니다. 타이센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이러한 다양성의 선교 스타일이 그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꼭 맞는 ‘적절한 형태’임을 밝혔습니다. 복음은 동일하지만 선교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성은 다양한 문화의 옷이며 문화 분리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비전을 가진 목회자는 이 다양한 문화의 옷을 어떻게 입어야 복음의 본질을 더 잘 전할 수 있을지 시대와 공간의 미래를 바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Vision은 카리스마를 갖게 합니다. 현대의 흐름은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해체주의를 걷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주의(Post Modernism)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자체는 더 존중하는 역설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부정하기에 일체의 위선과 가식을 벗기고 나니 진실이 없지요. 없는 만큼 있는 권위의 진실을 그리워 합니다. 비전은 권위주의 해체 과정에서 상실된 목회자의 지도력을 회복케 하고 권위를 갖게 합니다. 권위주의 권위는 권위자의 인위적인 권위이기에 불안하지만, 비전의 권위는 회중으로부터 부여 받은 위임의 권위이기에 안정되고 지속적입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를 갖게 됩니다. 위장된 카리스마는 부정적이지만 부여 받는 카리스마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매력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존경을 받아야 하고 신뢰감을 주어야 합니다.
Vision의 카리스마는 회중의 위임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회중의 의사수용이 필요합니다. Megatrend 2000의 저자인 존 나이스 비트와 그의 처 패트리셔 애버딘은 사회유형의 변천을 설명하면서 생산결정인자에 주목하고 있습 니다. 농경사회(생산자)-산업사회(유통자)-정보사회(소비자)로 변해온 사회구조의 변화는 소비자의 가치를 중요시하게 만들었습니다. 학생(학교), 노동자(기업), 국민(국가), 고객(매장), 환자(병원), 시민단체(정치)의 인권과 목소리가 중요해집니다. 이제 교회에서는 교인의 이야기가 중요해졌습니다. 물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존재나 사도로서의 목회자의 자리를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의 흐름이 생산자와 유통자를 거쳐 소비자로 가는 이 시대를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며, 이제는 목회 현장에서 목사의 독재화나 장로의 관료화가 통하지 않는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 통신의 발달은 쌍방향 통신시대를 열었고 이전 보다 더 투명한 도덕성과 명료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보다 많은 성실성과 실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중의 요구에 맞는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부여 합니다. 이런 것을 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앞서 가며 믿음으로 열어 가는 비젼의 안목입니다.
2. 영적 비전(Spritual Vision)
비젼을 말할 때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영역의 비젼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비전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21세기의 화두입니다. 나이스 비트는 21세기의 특징중의 하나를 천년왕국의 부활로 보았습니다. 이성(19C)과 과학(20C)의 한계상황은 인간의 눈을 감성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지능지수(IQ)보다는 감성지수(EQ)를 중요시 합니다. 이런 경향은 보다 깊은 감성의 영역(편의상)인 영적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사랑과 영혼, 천녀유혼, 은행나무침대 등으로 대변되는 동서양의 천사와 귀신숭배까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Multimedia시대를 맞아 "듣는 문화(Audio Culture)"가 ‘보는 문화(Video Culture)"로 바뀌어진것과 만화산업에 기초를 둔 Animation Culture의 부흥과 맛물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합니다. 감성문화의 경향에다가 기독교 자체의 영적 속성까지 합쳐저 모든 사역에 ‘영적’이라는 접두사나 수식어를 붙입니다. 영적 목회, 영적 찬양, 영적 기도, 영적 수련회 또는 영성목회 영성훈련등이 그렇습니다. 문화의 틀거리를 읽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 기독교 자체가 영적인 영역의 지식이라는 점에서 분명 타당한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적 비젼도 같은 흐름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적 영성입니까? 불교의 무아경지적 초월의 영성입니까? 아니면 힌두이즘의 ‘인간의 신화(神化)’적 영성입니까? 아니면 Mind controll같은 심리학적 훈련의 과정입니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무분별한 영적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나 돌이켜 봅니다. 저는 ‘우리의 영성’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의 Identity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의 근본적인 전제가 필요합니다. 창조신앙의 영성, 성경중심의 영성, 복음전도의 영성입니다. 창조신앙의 영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고, 성경중심의 영성은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의 영성이며, 복음전도의 영성은 웨슬리 목사의 회심과 선교의 영성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적 연성입니다. 하나님을 실재(實在)하시는 창조자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외로 진보주의적 신학의 경향은 인간화(人間化)를 강조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경도되어 하나님을 있다고 전제하는 ‘가정적 믿음’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신학적 경향은 인간 중심의 영성을 추구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유도하는 힌두이즘적 뉴에이즈 운동의 경향을 보입니다. 또 하나님보다는 인간중심에 서기에 진화론적 발전과정의 "제일 원인(Prima Causa)"정도로만 이해합니다. 인간의 신화(神化)나 진화론적 측면에서는 인간과 신의 연속성은 있으나 불연속성이 없어지기에 인간이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Adam Complex(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보게 되려고 하는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실제로 실재하시는 창조자로 믿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그분의 피조물로 고백하는 ‘신-인간’의 관계설정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창 1장 1절은 기독교 영성의 마스터 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의 영성은 진화론적 경향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창조론적 영성이어야 하고 창조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행위입니다. 설령 불트만의 말대로 신학을 인간학으로 정의 한다고 하더라도(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목회는 신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 보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인가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Theologie ist Anthropologie"가 아니고 "Theologie ist fur Anthropologie"입니다.
또 우리의 영성은 종교개혁적 전통위에 서 있습니다. 요즈음의 기독교 영성운동이 말씀의 권위를 상실하거나, 성경중심이 아닌 개인의 감정경험위주로 가는 위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양한 문화의 옷을 수용할 때에 너무 무분별하게 받아 들여 오히려 기독교가 이방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는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카톨릭시즘에 너무 회귀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개신교 목사입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위에 서 있습니다. 토착화의 장점을 인정합니다만 혼합주의는 경계해야 되겠고, 중세 이후로 기독교의 참 영성을 추구한 말씀 중심의 종교개혁적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루터는 성경을 발견했고, 깔뱅은 성경을 해석했으며, 웨슬리는 성경을 실천했습니다. 개신교 신학의 세 스승은 모두 성경중심의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구호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Sola Scriptula!) 웨슬리는 성경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성경을 진리의 유일한 표준(The only standard of truth)과
또한 순수한 종교의 유일한 모형으로 삼고 읽을 뿐만 아니라 연
구하기 시작하였다.”(Work11:367)
이런 말씀 중심의 경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6:4)”
이 말씀이 우리를 능히 든든하게 해줍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
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그리고 세 번째 우리의 영성은 복음전도자였던 감리교회의 창시자 John Wesley 목사의 회심과 선교의 영성입니다. 루터는 천주교와의 교리논재을 통하여 이신득의의 교리를 만들었고, 깔뱅은 루터의 칭의 교리를 바탕으로 예정론적인 성경해석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위에서 어떤 것은 동의하기기도 하고(이신득의), 어떤 것은 수정하기도 하면서(예정론) 복음전도에 앞장섰습니다. 생활중심의 변혁을 외치며 복음을 전하던 웨슬리의 선교사역은 회심과 더불어 강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감리교회 목사입니다. 우리는 웨슬리의 신학적 유산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는 웨슬리처럼 회심을 경험했나요. 웨슬리처럼 복음전도의 확신을 갖고 있나요. 율법이 아닌 복음전도입니다. 언어유희에 빠지는 사변적인 신학논쟁의 공간을 떠나 삶의 한 복판에서 외치는 복음전도의 담대함과 열정이 있나요. 자기 만족의 감정치유가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외치는 거룩한 복음전도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7)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웨슬리처럼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롬1:16) 기독교의 영성은 이 복음 전도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3. 영적 비젼의 사역
우리 감리교회 목회자들은 비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비전의 사람이 아니라 영적비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실재의 믿음위에서, 종교개혁의 성경중심적 신앙위에서, 웨슬리 목사의 복음전도 사역위에서 갖는 영적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 비젼의 목회 사역은 다양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그 중에 복지교회에서 체험한 작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1)목회철학의 명료성: 생기를 불어 넣는 교회(창2:7,겔37:5)라는 분명한 목회
철학을 중심이념으로 삼고 영적 사역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함
2)지도력의 위임: 영적 카리스마의 획득과 추진력의 신뢰성을 확보하도록
권위를 위임해줌으로 비젼이 이끄는 목회사역을 하게 함
3)평신도 사역의 활성화: 제1차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손에서 성경을 평신도
에게 주었지만, 제2차 종교개혁은 선교사역을 이행시킨다. 그
리고 이런 위임은 많은 평신도 자원 봉사와와 헌신자를 만듦.
4)복음전도의 효율성과 교회성장: 전도가 안된다는 이 시대에 분명한 기독 교 영성위에 선 비전은 진화론자를 전도 시키고 지식층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갖게 한다
5)계층간 동질성과 통전성의 확립: 영적 비전이 이끄는 교회가 되면 계층간 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통전적인 사역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 교회의 선교사역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된다.
6)고정관념의 탈피: 목회경영(Pastoral Management)을 위해 때때로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에 인간중심이나 권위 중심이 아닌 비 젼중심은 훨씬 형식변경을 용이하게 해주고 새로운 패러다 임을 창출하게 한다.
7)영적훈련의 강화: 예배나 기도 또는 사역의 마인드 형성에 있어서 영적비 젼은 분명한 경건적인 자세를 갖게 해준다.
닫는 말
목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목사가 하는 복음전도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기에 자기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 내야 하며,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비전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의 이름에 대한 확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체험위에서 얻는 위대한 영적자산입니다. 목사는 이런한 영적 자산으로서의 비전을 갖고 사역에 임해야합니다.
존경하는 군선교회 회장 송민섭 목사님, 감리교 군목단 단장 박상칠 목사님, 실무를 맡으신 총무 정효현 목사님,본부 선교국의 군선교 담당 간사 문재황 목사님을 포함한 127명의 군인교회 목사님과 영원한 영적 비젼의 동지들이신 사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젊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군선교의 중심에 서계신 감리교 군목단을 위햐여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영 적 비 전 (Spritual Vision)
서 철 목사(인천복지교회 담임목사)
새즈믄해 5월23일, 여선교회 연합회 제주도 수양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미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장16절-17절)*********
여는 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군선교를 담당하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군종사관 41기로 임관하여 육군 군목으로 시무하다가(1983년-1986년) 전역하여 지금은 복지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서철 목사입니다. 부족한 사람이라 강의 요청을 망설였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위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섰습니다.
저는 ‘영적 비전’을 주제로 저의 목회 철학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논리성이 약하지만 역으로 목회자이기 때문에 현장성과 실제성이 있기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종의 졸고와 강의를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펴는 말
1. 비젼의 중요성
김호식 목사는 교회를 ‘꿈을 파는 슈퍼마켓’이라고 말합니다. 꿈을 파는 슈퍼마켓! 그렇다면 목사는 누구입니까? 꿈을 주는 자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전달해주는 ‘섬기미’ 입니다. 꿈을 주는 자이던지 아니면 전달자이던지 우리는 우리의 청중들에게 꿈을 주기 위하여 먼저 ‘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꿈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먼저 꿈을 갖는 사람 곧 비젼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전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시각입니다. 미래를 미리 바라보는 예견의 지혜요 안목이며 소망입니다. 목사는 앞을 보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지도자들은 모두 앞을 보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가나안 점령의 공신 여호수아와 갈렙, 새벽을 깨운 느헤미야, 민족의 통일을 보았던 에스겔, 그리고 유럽선교의 선구자 바울등 모든 영적 지도자들은 오늘이 아닌 내일을 미리 바라 볼 줄 알았던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
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 게 보이
리라.“(예레미야 33:2-3)
비전을 갖기 위해 우리는 문화의 다양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K. Bart는 한 손엔 성경을 한손엔 신문을 들라고 했습니다. 복음과 문화의 양면성을 말하지요. 오늘 날은 신문 대신 한 손에 컴퓨터를 들어야 합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지금은 정보사회가 됐습니다. 정보수집, 정보분석, 정보활용이 중요한 문화의 도구입니다.
G.Theissen은 다양한 문화의 옷을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1차 사도총회(행15장)가 열렸던 예루살렘 회의는 유명한 선교선언 “동일한 복음 다양한 선교”를 남겼습니다.(예수운동의 사회학, 원시그리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참조)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는 모두 ‘예수 복음’이라는 동일성을 가졌지만, 방랑선교(베드로)와 정착선교(바울)라는 선교의 다양성을 가졌습니다. 또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이며 거지 형태로 전도했지만, 바울은 무할례자의 사도이며 자급자족 형태로 전도했습니다. 타이센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이러한 다양성의 선교 스타일이 그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꼭 맞는 ‘적절한 형태’임을 밝혔습니다. 복음은 동일하지만 선교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성은 다양한 문화의 옷이며 문화 분리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비전을 가진 목회자는 이 다양한 문화의 옷을 어떻게 입어야 복음의 본질을 더 잘 전할 수 있을지 시대와 공간의 미래를 바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Vision은 카리스마를 갖게 합니다. 현대의 흐름은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해체주의를 걷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주의(Post Modernism)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자체는 더 존중하는 역설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부정하기에 일체의 위선과 가식을 벗기고 나니 진실이 없지요. 없는 만큼 있는 권위의 진실을 그리워 합니다. 비전은 권위주의 해체 과정에서 상실된 목회자의 지도력을 회복케 하고 권위를 갖게 합니다. 권위주의 권위는 권위자의 인위적인 권위이기에 불안하지만, 비전의 권위는 회중으로부터 부여 받은 위임의 권위이기에 안정되고 지속적입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를 갖게 됩니다. 위장된 카리스마는 부정적이지만 부여 받는 카리스마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매력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존경을 받아야 하고 신뢰감을 주어야 합니다.
Vision의 카리스마는 회중의 위임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회중의 의사수용이 필요합니다. Megatrend 2000의 저자인 존 나이스 비트와 그의 처 패트리셔 애버딘은 사회유형의 변천을 설명하면서 생산결정인자에 주목하고 있습 니다. 농경사회(생산자)-산업사회(유통자)-정보사회(소비자)로 변해온 사회구조의 변화는 소비자의 가치를 중요시하게 만들었습니다. 학생(학교), 노동자(기업), 국민(국가), 고객(매장), 환자(병원), 시민단체(정치)의 인권과 목소리가 중요해집니다. 이제 교회에서는 교인의 이야기가 중요해졌습니다. 물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존재나 사도로서의 목회자의 자리를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의 흐름이 생산자와 유통자를 거쳐 소비자로 가는 이 시대를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며, 이제는 목회 현장에서 목사의 독재화나 장로의 관료화가 통하지 않는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 통신의 발달은 쌍방향 통신시대를 열었고 이전 보다 더 투명한 도덕성과 명료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보다 많은 성실성과 실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중의 요구에 맞는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부여 합니다. 이런 것을 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앞서 가며 믿음으로 열어 가는 비젼의 안목입니다.
2. 영적 비전(Spritual Vision)
비젼을 말할 때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영역의 비젼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비전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21세기의 화두입니다. 나이스 비트는 21세기의 특징중의 하나를 천년왕국의 부활로 보았습니다. 이성(19C)과 과학(20C)의 한계상황은 인간의 눈을 감성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지능지수(IQ)보다는 감성지수(EQ)를 중요시 합니다. 이런 경향은 보다 깊은 감성의 영역(편의상)인 영적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사랑과 영혼, 천녀유혼, 은행나무침대 등으로 대변되는 동서양의 천사와 귀신숭배까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Multimedia시대를 맞아 "듣는 문화(Audio Culture)"가 ‘보는 문화(Video Culture)"로 바뀌어진것과 만화산업에 기초를 둔 Animation Culture의 부흥과 맛물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합니다. 감성문화의 경향에다가 기독교 자체의 영적 속성까지 합쳐저 모든 사역에 ‘영적’이라는 접두사나 수식어를 붙입니다. 영적 목회, 영적 찬양, 영적 기도, 영적 수련회 또는 영성목회 영성훈련등이 그렇습니다. 문화의 틀거리를 읽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 기독교 자체가 영적인 영역의 지식이라는 점에서 분명 타당한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적 비젼도 같은 흐름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적 영성입니까? 불교의 무아경지적 초월의 영성입니까? 아니면 힌두이즘의 ‘인간의 신화(神化)’적 영성입니까? 아니면 Mind controll같은 심리학적 훈련의 과정입니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무분별한 영적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나 돌이켜 봅니다. 저는 ‘우리의 영성’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의 Identity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의 근본적인 전제가 필요합니다. 창조신앙의 영성, 성경중심의 영성, 복음전도의 영성입니다. 창조신앙의 영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고, 성경중심의 영성은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의 영성이며, 복음전도의 영성은 웨슬리 목사의 회심과 선교의 영성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적 연성입니다. 하나님을 실재(實在)하시는 창조자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외로 진보주의적 신학의 경향은 인간화(人間化)를 강조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경도되어 하나님을 있다고 전제하는 ‘가정적 믿음’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신학적 경향은 인간 중심의 영성을 추구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유도하는 힌두이즘적 뉴에이즈 운동의 경향을 보입니다. 또 하나님보다는 인간중심에 서기에 진화론적 발전과정의 "제일 원인(Prima Causa)"정도로만 이해합니다. 인간의 신화(神化)나 진화론적 측면에서는 인간과 신의 연속성은 있으나 불연속성이 없어지기에 인간이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Adam Complex(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보게 되려고 하는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실제로 실재하시는 창조자로 믿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그분의 피조물로 고백하는 ‘신-인간’의 관계설정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창 1장 1절은 기독교 영성의 마스터 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의 영성은 진화론적 경향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창조론적 영성이어야 하고 창조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행위입니다. 설령 불트만의 말대로 신학을 인간학으로 정의 한다고 하더라도(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목회는 신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 보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인가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Theologie ist Anthropologie"가 아니고 "Theologie ist fur Anthropologie"입니다.
또 우리의 영성은 종교개혁적 전통위에 서 있습니다. 요즈음의 기독교 영성운동이 말씀의 권위를 상실하거나, 성경중심이 아닌 개인의 감정경험위주로 가는 위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양한 문화의 옷을 수용할 때에 너무 무분별하게 받아 들여 오히려 기독교가 이방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는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카톨릭시즘에 너무 회귀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개신교 목사입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위에 서 있습니다. 토착화의 장점을 인정합니다만 혼합주의는 경계해야 되겠고, 중세 이후로 기독교의 참 영성을 추구한 말씀 중심의 종교개혁적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루터는 성경을 발견했고, 깔뱅은 성경을 해석했으며, 웨슬리는 성경을 실천했습니다. 개신교 신학의 세 스승은 모두 성경중심의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구호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Sola Scriptula!) 웨슬리는 성경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성경을 진리의 유일한 표준(The only standard of truth)과
또한 순수한 종교의 유일한 모형으로 삼고 읽을 뿐만 아니라 연
구하기 시작하였다.”(Work11:367)
이런 말씀 중심의 경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6:4)”
이 말씀이 우리를 능히 든든하게 해줍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
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그리고 세 번째 우리의 영성은 복음전도자였던 감리교회의 창시자 John Wesley 목사의 회심과 선교의 영성입니다. 루터는 천주교와의 교리논재을 통하여 이신득의의 교리를 만들었고, 깔뱅은 루터의 칭의 교리를 바탕으로 예정론적인 성경해석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위에서 어떤 것은 동의하기기도 하고(이신득의), 어떤 것은 수정하기도 하면서(예정론) 복음전도에 앞장섰습니다. 생활중심의 변혁을 외치며 복음을 전하던 웨슬리의 선교사역은 회심과 더불어 강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감리교회 목사입니다. 우리는 웨슬리의 신학적 유산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는 웨슬리처럼 회심을 경험했나요. 웨슬리처럼 복음전도의 확신을 갖고 있나요. 율법이 아닌 복음전도입니다. 언어유희에 빠지는 사변적인 신학논쟁의 공간을 떠나 삶의 한 복판에서 외치는 복음전도의 담대함과 열정이 있나요. 자기 만족의 감정치유가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외치는 거룩한 복음전도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7)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웨슬리처럼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롬1:16) 기독교의 영성은 이 복음 전도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3. 영적 비젼의 사역
우리 감리교회 목회자들은 비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비전의 사람이 아니라 영적비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실재의 믿음위에서, 종교개혁의 성경중심적 신앙위에서, 웨슬리 목사의 복음전도 사역위에서 갖는 영적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 비젼의 목회 사역은 다양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그 중에 복지교회에서 체험한 작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1)목회철학의 명료성: 생기를 불어 넣는 교회(창2:7,겔37:5)라는 분명한 목회
철학을 중심이념으로 삼고 영적 사역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함
2)지도력의 위임: 영적 카리스마의 획득과 추진력의 신뢰성을 확보하도록
권위를 위임해줌으로 비젼이 이끄는 목회사역을 하게 함
3)평신도 사역의 활성화: 제1차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손에서 성경을 평신도
에게 주었지만, 제2차 종교개혁은 선교사역을 이행시킨다. 그
리고 이런 위임은 많은 평신도 자원 봉사와와 헌신자를 만듦.
4)복음전도의 효율성과 교회성장: 전도가 안된다는 이 시대에 분명한 기독 교 영성위에 선 비전은 진화론자를 전도 시키고 지식층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갖게 한다
5)계층간 동질성과 통전성의 확립: 영적 비전이 이끄는 교회가 되면 계층간 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통전적인 사역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 교회의 선교사역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된다.
6)고정관념의 탈피: 목회경영(Pastoral Management)을 위해 때때로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에 인간중심이나 권위 중심이 아닌 비 젼중심은 훨씬 형식변경을 용이하게 해주고 새로운 패러다 임을 창출하게 한다.
7)영적훈련의 강화: 예배나 기도 또는 사역의 마인드 형성에 있어서 영적비 젼은 분명한 경건적인 자세를 갖게 해준다.
닫는 말
목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목사가 하는 복음전도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기에 자기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 내야 하며,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비전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의 이름에 대한 확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체험위에서 얻는 위대한 영적자산입니다. 목사는 이런한 영적 자산으로서의 비전을 갖고 사역에 임해야합니다.
존경하는 군선교회 회장 송민섭 목사님, 감리교 군목단 단장 박상칠 목사님, 실무를 맡으신 총무 정효현 목사님,본부 선교국의 군선교 담당 간사 문재황 목사님을 포함한 127명의 군인교회 목사님과 영원한 영적 비젼의 동지들이신 사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젊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군선교의 중심에 서계신 감리교 군목단을 위햐여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출처 : 생기바다
글쓴이 : 서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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