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실천신학

성령체험과 복음전도

우순(愚巡) 2006. 9. 23. 18:14
 

주제 “성령체험과 복음전도”



여는말

펴는말

1. 복음전도의 요청

2. 성령과 시대의 흐름

3. 성령과 성경의 증언

4. 성령과 복음전도

1)복음전도의 준비: 사람세우기

2)복음전도의 양육: 완전성화

3)복음전도의 과정: 영적전투

4)복음전도의 결과; 예수영접과 개종

5. 성령충만의 체험

1)약속 2) 기도 3)회개 4) 안수 5)말씀 6) 금식 7)기타

6. 복음전도의 실례

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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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장 4절-5절>



   저는 현장 목회자의 입장에서 “성령과 복음전도”라는 주제로 작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26년째 교회를 섬기고 있는 현장 목회자입니다. 저는 현장 목회자라는 말을 늘 좋아합니다.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세 종류입니다. 신학자와 수도사 그리고 목회자입니다. 신학자가 학문의 영역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만들어 내면 수도사가 몸으로 실천해 보이고 목회자는 검증된 알맹이를 교인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이 셋은 상호 협력적입니다. 물론 목회자 안에서 이 셋이 다 존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극대치를 따진다면 학문에서는 신학자를 따를 자가 없고, 영성에서는 수도사를 따를 자가 없으며, 섬김에서는 목회자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현장 목회자의 섬김은 전도와 양육입니다. 전도는 불신자를 신자로 세우는 것이고, 양육은 신자를 사역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현장 목회자의 핵심사역입니다. 그러나 신학자-수도사-목회자는 언제나 구심력과 원심력의 긴장과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서로 발전해 나갑니다. 신학자의 학문이 원심력을 가지고 진보적인 시각에서 교리의 틀 밖에서도 진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면, 수도사의 영성은 구심력을 가지고 보수적인 시각에서 금욕과 경건의 틀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씁니다. 목회자는 이 둘 사이에서 검증된 진리를 교인들에게 먹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학문의 진보성에 대하여 열려 있으면서도, 영성의 보수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점 때문에 목회자는 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이라 함은 이성의 힘을 인정하고 인간의 책임을 다한다는 뜻이요, 복음적이라 함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확고부동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현장 목회자로서 복음전도의 실제 현장에서 경험했던 작은 이야기들을 소박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펴는 말


1.복음전도의 요청


  왜 우리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나요? 복음전도가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처럼 복음전도 강의 또는 복음전도전략은 복음전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가 필요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교회의 성장과 천국의 실현 그리고 영혼의 구원입니다. 복음전도는 교회성장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복음전도 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복음전도 하는 교회가 자립합니다. 복음전도 하는 교회가 사람을 얻습니다. 복음전도 하는 교회가 사역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전도를 강조하고 복음전도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러한 도구로서의 복음전도가 상업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수적 성장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 못이라며 질적 성장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질적 성장의 구체적인 형태를 성숙과 하나님의 나라 실천에 둡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제자 훈련이요 하나님의 자녀 양육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사회를 바꾸려는 거룩한 뜻을 시도합니다. 웨슬리의 성화 신학을 사회봉사나 사회참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실천합니다. 이럴 때 복음전도는 성장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이웃 사랑과 정의 사회 실현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는 모두 다 실용주의적 성장학의 접근과 사회참여적인 성화론의 입장에서 복음전도를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여는 말에서 언급하였듯이 학문적으로 시비를 가리는 논쟁을 지양하겠습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그냥 현상을 직시해볼 뿐이고 그 현상인식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할 뿐입니다. 저는 목회자이기에 비난은 물론이고 가급적 비판마저도 삼가고, 양자택일을 지양하고 양자보완을 통한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거룩한 실용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의 두 가지를 취사선택해야 할 양자택일의 가치로 보지 않고, 단계적인 순환으로 봅니다. 복음전도는 성장의 도구로서도 기능하고 천국의 실현으로서도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방향성만 다를 뿐 교회성장과 천국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복음전도를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약점과 본질의 호도가 있습니다.

    저는 복음전도를 말할 때 언제나 영혼의 구원이라는 우선순위를 중심점으로 순환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전도는 본질적으로 영혼구원을 위한 것이고, 교회성장과 천국실현은 복음전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전도를 통하여 연혼이 구원받으면 부수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게 되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천국을 실현해 가며 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수록 복음전도의 문이 넓어져 새로운 복음전도의 기회를 얻게 되고 다시 성장이 이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복음전도와 교회성장과 천국실현은 반복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는 영적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환되는 구조 속에서도 중심축이 있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조금 속이 좁은 목회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위임보다 복음위임이 앞선다는 것과 원인과 결과의 순환 속에서도 중심축이 인간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가 우선순위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전도는 영혼구원이라는 우선순위를 중심으로 교회의 성장과 천국의 실현이 함께 돌고 도는 순환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령과 시대의 흐름


   현대는 감성문화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말들로 현대를 정의합니다. 많은 세대를 구분하는 말들도 나왔습니다. 많은 유행어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현대를 감성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데 동의합니다. 지능지수보다 감성지수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흘러갑니다.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만 이런 현상이 시대의 흐름이고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거룩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그런 현상을 전도의 귀중한 삶의 자리로 고려해야 합니다. 훌러리안들의 성장학은 통계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통계학은 철저한 전도대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감성문화의 현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존 나이스비트는 메가트랜드라는 책에서 21세기의 특징가운데 한 가지가 감성문화의 종교적 현상인 천년왕국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천년왕국 운동은 순기능적으로는 기독교의 부흥을 역기능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다시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피터 드러커도 ‘The next society’라는 책에서 감성문화와 함께 기독교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을 애기합니다. 실제로 미국이나 호주 등에서 성령운동은 찬양사역과 함께 기독교 부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하비 콕스도 “Fire from the Heaven(1995년. 번역제목 ‘영성, 여성, 음악’)"에서 1965년도의 세속도시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성령의 불로 교회에 살아계신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후퇴를 이야기 했던 하비 콕스의 다음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나는 성령운동의 세계로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30~40년 전에 풍미했던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죽음’의 이나 사회학자들이 주장한 ‘종교의 쇠락’과는 달리, 오히려 무언가 아주 다른 종요적 현상이 이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당시 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에 의해 교회와 종교에 관한 냉소적인 학문적 진단이 한창일 무렵, 나는 그것들에 쉽사리 영향을 받는 비교적 젊은 학자였다. 나는 너무 빨리 그것들을 수용했고, 그에 따른 신학적 결과들이 무엇일까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볼 때, 교회와 종교의 부정적 미래에 대한 신학자와 사회학자들의 그 같은 예언들은 분명 잘 못이었다.........<중략>.........우리는 일부 낙천적인 종교 관측가들의 주장처럼 새로운 성령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새롭게 갱신된 종교적 활력의 시대, 온 세계적으로 밀려오는 또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각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 하비 콕스, ‘영성, 음악, 여성’ 유지황 역, 19-20쪽>


   사람들은 18세기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서 시작한 인본주의적 사고가 19세기의 이성과 20세기의 과학을 거치면서 전쟁과 환경파괴를 통하여 인간에게 깊은 절망과 불안과 공포를 준 데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젠 이성적인 논리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하게 감성적인 초월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 시대 사람들을 향한 전도는 성령체험을 통한 복음전도를 해야 합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성경의 증언과 시대의 흐름 그리고 복음의 권세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증언은 신앙의 근거가 되는 성경이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는 지를 읽어보려는 것이고, 시대의 흐름은 이 시대의 문화현상 속에서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서 성령의 역할이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며, 복음의 권세는 복음전도 시에 나타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성령의 역할이 어떤 표적을 보이는 지를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3. 성령과 성경의 증언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증언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됩니다. 창조신앙의 성령사역과 신앙고백의 성령사역 그리고 묵시사상의 성령사역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는 현장목회자로서 복음을 전도할 때 이 세 가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성경입니다. 또한 우리 개신교 신학의 출발점은 Sola Fide! Sola Gratia! Soli Deo Gloria!와 함께 Sola Scriptura!를 내세움으로 철저하게 성경중심위에 세워졌습니다.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루터와 깔뱅과 함께 성경중심의 교회를 펼쳐 나갔습니다. 제 소견에는 루터는 성경을 발견했고 깔뱅은 성경을 해석했으며 웨슬리는 성경을 실천함으로 삼겹 줄처럼 개신교신학의 틀거리를 완성했다고 봅니다.



 1) .창조의 영


     창조신앙의 성령사역은 말 그대로 성령께서 창조역사의 성취자시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영입니다. 성경의 현관에 들어가는 문은 모세 오경이며, 그 문을 여는 마스터 키는 창조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은 기독교를 여는 마스터 키입니다. 창조이야기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서 창조 신화나 창조설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저는 소박하게 창조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허구의 신화가 아니고 의미의 설화도 아닌 사실과 섭리의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전 믿어집니다. 목사의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처럼 하나님은 높은데 계신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절대타자이신 그 분 앞에서 말씀을 통한 계시를 통해서만 그 분을 알 수 있기에. 신학의 제일 큰 주제는 삼위일체 신앙고백입니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출발점입니다. 그 창조신앙의 첫 머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ex nihilio) ‘BARA(창조)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중의 한 분이신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덮고 있던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과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과의 오묘한 관계를 만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늘 같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라는 뜻으로 "Tohu wa bohu"(히브리어의 영어식 음역)라고 합니다. "Tohu(혼돈)+wa(그리고)+bohu(공허)"는 늘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혼돈은 구약성경에서 광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광야의 개념을 가지고 있고 광야 자체입니다. 신명기 32:10절과 시편 107편 40절에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32:1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시107:40)"


     혼돈은 이처럼 광야나 황야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어짐으로 출애굽의 광야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혼돈의 땅은 출애굽의 광야의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살 길을 잃어버린 채 신음하는 도시의 그늘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혼돈의 땅은 그래서 방황의 땅입니다. 혼돈은 떠나온 애굽에 대한 후회와 찾아갈 가나안에 대한 불안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땅입니다. 이 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무너지고 쓰러지게 됩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향하여 불편하게 되며 다시 우상숭배에로 도망갑니다.


   혹자는 이 말씀에서 나오는 혼돈과 공허를 바벨론 신화에서 찾기도 합니다. 혼돈을 뜻하는 tohu에서 유래한 혼돈의 바다 곧 원시바다를 뜻하는 tehom을 바벨론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용 tiamat와 연결시키고, 공허인 bohu를 페니키아의 모신 baau에 연결시켜 신화적인 동질성을 찾아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논리적 연결이 부족하고 너무 인본주의적인 전제를 깔고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혼돈의 땅은 태초의 무정형의 땅을 표현하는 적확(的確)한 말이고, 광야의 실상과 도시의 방황을 설명해주는 적절한 단어입니다.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를 설명하는 히브리어 "bara"는 혼돈의 무정형  속에 하나님의 정형(定形)을 세우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말은 또한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세워가는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말속에서 생존조건을 상실하고 죽음의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삶의 아픈 상황을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낀다.


혼돈은 삶의 위협입니다. 혼돈은 방황입니다. 살 길의 상실입니다. 창조는 무와 유의 대립이기도 하지만 혼돈과 우주의 대립이며, 광야와 약속의 땅의 대립입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는 혼돈에 맞서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우주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선물하시고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하십니다. 도시의 방황자들에게 삶터와 일터를 선물하시고 쉼터를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이기셨습니다(마4장) 또한 빈들에서 방황하는 무리를 민망히 보시고 5병2어와 7병2어의 표적을 나타내시어 5000명과 4000명을 먹이셨습니다.(마가복음6장과 8장). 예수님은 귀신들려 광야로 내 몰리던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눅 8: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님은 광야의 치유자였습니다. 한마디로 혼돈의 땅은 광야요 귀신들린 사람들의 거처였습니다. 거기에는 방황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혼돈의 땅에 에덴동산을 세우셨고, 예수님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며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혼돈의 땅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혼돈의 땅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태초의 혼돈과 같이 형태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광야와 같이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얻지 못한 채 마라의 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의 경쟁 속에서 패하고 밀려나 생존의 조건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되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전도란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사건이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내일을 열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복음전도는 철저하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지나면서 방황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성령님의 운행을 겸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운행은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하나님의 신 성령님이 운행하셨고, 예수님은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운행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 32장 11절에 나오는 독수리의 습관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32:11)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들을 훈련시켜 날게 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만든 후, 그 위에 너풀거리며 새끼들을 받아서 날개 위에 업습니다. 운행이라는 메라헤페트는 독수리가 새끼를 날게 하려는 사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독수리의 날개 짓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명기32:9-12)


    우리는 신명기에서 독수리의 날개 짓에 비유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야곱의 자식들을 독수리가 새끼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듯이 황무지인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 창조신앙의 핵심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운행하신 성령님은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혼돈과 공허와 흑임의 땅을 껴안고 계십니다. 물리적으로 물질은 자기보다 큰 물체 안에서는 오직 한 곳에만 존재하지만 자기보다 작은 물체 안에서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보다 크신 분이시기에 모든 세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시며 사랑의 눈으로 껴안고 계십니다. 전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껴안고 창조를 일으키려는 깊은 애정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창조신앙의 성령이해는 에스겔서 47장의 성전의 생수와 요한복음 4장의 해갈의 은혜를 거쳐 요한복음 7장과 사도행전 2장의 하나님의 선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하게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에덴동산의 삶을 회복시키는 창조사건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2) 고백의 영


   신앙고백의 성령사역은 구원론의 완성입니다. 성령님은 고백의 영이십니다. 전도란 영혼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영혼구원은 신앙고백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두고 교리적인 뉘앙스가 다릅니다. 예정론자들은 예정된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믿음론자들은 믿는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카톨릭의 행함론자들은 행하는 자가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또는 고백한자가 행동한다가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진부한 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아주 소박하게 저의 작은 소견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개신교의 삼대 지류인 루터파와 깔뱅파와 우리 웨슬리파의 구원론은 가각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행득의의 구원론이 비성경적이라는 판단아래 루터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구원론을 제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깔뱅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미리 정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고백함으로 얻는 구원이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내 것이 됨을 강조하였습니다. 루터는 고백을 인간의 믿음에 의한 것으로 보았지만, 깔뱅은 고백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고백을 성령체험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로마서 8장 16절과 고린도 전서 12장 3절을 즐겨 인용했습니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확신을 심어 주시며, 우리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주로 고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웨슬리 자신도 성령체험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진 복음적 회심을 하고나서야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복음전도의 사역자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비겁했던 제자들, 부인하고 도망가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는 강력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술에 취한 베드로의 설교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행2:38>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년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구원론은 성자구원론이라면, 깔뱅의 구원론은 성부 구원론이고, 웨슬리의 구원론은 성령구원론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예에서 고백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성서비평학적 측면에서 마태공동체의 신학을 한편으로 접어두고 목회자의 작은 묵상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구원을 위한 고백은 마태복음 16장의 사건일까요? 그리고 그 고백은 이미 예정된 자였기에 고백한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예수를 믿은 고백이었을까요? 만약 16장이 고백이었다면 베드로의 배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성령체험 후에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오순절 사건은 단순한 구원의 확증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었을까요? 많은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제 소견에는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구원을 얻는 다고 확신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님은 은사론이나 성화론의 입장에서만 다루어질 것이 아니라 구원론의 본질파악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결단의 영


   묵시사상의 성령사역은 종말론적 결단입니다. 성령님은 결단의 영입니다. 묵시사상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희망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듯이 희망은 “삼위일체론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 입니다. 신앙이란 희망의 사건입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이며, 인생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의 성소이고, 인생의 역전극을 펼쳐주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희망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희망을 넘어 소망을 선포합니다. 단순한 바램의 희망보다 더 강력한 용어가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바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실상이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단순한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 믿음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사랑과 함께 소망은 영원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종말론적인 결정을 합니다.


  묵시문학의 배경이 되는 소아시아의 박해상황에서도 출애굽 때처럼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또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는 배교와 배신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밀고자도 나왔습니다.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매일 ‘가라사대’로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돌 판에 새겨 와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고 표적을 행하셔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죽으면서 외쳐도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알아듣게 됩니다. 종말론적 상황아래에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단할 수 있습니다. 듣는 자가 깨닫고 깨닫는 자가 결단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듣게 하고 깨닫게 하고 결단하게 합니다.




4. 성령과 복음전도


1)복음전도의 준비: 사람세우기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복음전도를 준비케 하는 일입니다. 전도의 준비 중에 첫 번째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은 인티파타식의 대중선동이나 민중봉기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 진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한 사람 한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인본주의적인 민중사관” 보다는 “신본주의적인 영웅사관”을 지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기독교신앙의 뿌리가 되는 출애굽 사건의 구속사는 불평하는 대중과 순종하는 택자들의 대립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마태복음 13장은 ‘무리와 제자’ ‘저희와 너희’가 대립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 시대 서막은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세움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6장은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게 했던 동역자들의 인물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리스트가 들어 있는 믿음의 전당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이 사람을 세워 가신 일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할 때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전도자를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전도를 성장이나 이념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했을 때는 전도자를 세우지 못합니다. 전도는 큰 시험거리요 무거운 짐덩어리이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기의 신앙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한 도박입니다.


2) 복음전도자의 양육: 완전한 성화


   감리교 신학의 핵심중의 하나가 완전한 교리입니다. 완전한 신앙은 다른 말로도 표현 할 수 있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감리교인은 네 가지 ‘모든 사람’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2)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3) 모든 사람은 구원의 확증을 얻을 수 있다. 4)모든 사람은 완전한 성화를 얻을 수 있다. 이 네 개의 모든 사람 교리는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는 구원의 필요성, 구원의 가능성, 구원의 확증성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완전한 성화는 구원의 완전성입니다. 완전한 성화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구원받은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구원받은 증거를 선행에서 찾습니다. 감리교회 성화론이 사회적 성화론으로 이어지고 이웃사랑과 정의실현으로 나타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보다 더 중요한 것 오히려 선행과 정의실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자가 되는 것, 전도를 하는 것이 완전한 성화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구원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3)복음전도의 실천: 영적전투


   복음 전도는 권세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귀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김기동 목사 식의 잔여 수명론적 귀신론이 아니라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천사 타락론적 귀신론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들의 일을 멸하려 하심임을 믿습니다. 피터 와그너가 마지막에 영적 전투로서의 기도를 말했던 것도 전도가 이론의 논쟁을 통한 설복의 사건이 아니라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심갑주를 입고 무장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에배소서 6:10-2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충만한 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 있습니다. 성령체험을 통하여 회심을 경험하고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충만할 때 하나님의 소욕을 좇아 살 수 가 있습니다 . 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만을 말했습니다.(롬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전도를 안 해 본 사람과 전도를 해 본 사람들의 차이 점중 하나는 영적긴장감의 체험 유무입니다. 전도를 안 해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해 본 사람들은 논리보다는 초월을 이야기하고, 이성보다는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사건을 말하며, 이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간증을 말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실은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회의를 느낍니다. 이것이 과연 도움이 될 까? 요청이 있기 때문에 정리는 했습니다만 제 마음은 함께 산속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받아서 실제로 전도현장에 가서 부딪혀 보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령충만 해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복음전도를 실천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회심을 간증하게 하고 은사를 사용하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령세례가 회심의 사건을 일으키게 하고, 성령세례가 은사를 불일 듯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성령충만함은 거룩한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결국 성령체험은 세 가지 모습으로 전도를 실천하게 합니다. 첫 번째는 회심의 간증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갖게 하고, 두 번째는 은사의 능력을 통하여 귀신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표적을 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열매의 결실을 통하여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의 위대한 삶의 실상을 보여줌으로 전도의 재생산을 가져옵니다.


   4)복음전도의 효과 : 예수영접의 개종


   성령체험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냅니다. 한 마디로 개종입니다. 저는 전도란 말을 선교란 말 보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저는 선교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선교와 전도는 다 같이 중요한 개념이고 선교가 전도보다 광의의 의미를 가졌기에 보다 더 소중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이 자리의 강의 주제와 저의 신앙관에 충실하기 위하여 선교보다는 전도라는 말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복음전도의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럼 복음전도의 핵심인 영혼구원은 무엇입니까? 선교학적으로 많은 논쟁을 할 수 있고, 종교다원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상대주의적 구원론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두에서부터 일관되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소박한 목회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근간으로 삼는 신본주의자이며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는 복음주의자임을 밝혔습니다. 때문에 저의 구원론은 쉽게 말해 예수영접을 통한 개종과 죄 사함을 통한 의인의(義認)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심신의 수양 또는 선행적인 가치관의 일치를 통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옥토가 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온전한 영혼구원을 위한 전단계로서의 가치입니다. 영혼구원의 장으로서의 가치요 준비로서의 가치입니다. 진정으로 기독교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전도의 가치는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은 개종합니다. 저희에 머물지 않고 너희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예수님을 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의 제일 소중한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체험은 개종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강력하게 증거 함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5. 성령충만의 체험


1) 약속(행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

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 기도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2)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3) 회개(행2:38)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 안수

"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7)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5) 말씀(행10:44)

"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6) 금식(행 13:2)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7)기타: 찬양과 개인적인 체험


6. 복음전도의 실례


1) 무속종교인(무당과 박수 가족)


2) 과학자(지질공학 박사, 의사)


3) 군인 (부대장, 불교장교, 군의관)


4) 관리 (우체국장, 국회의원)


5) 상처받은 사람(이혼자, 가정 결손자, 알콜리즘 노인)


6) 타종교인(원불교신자, 유교 노인회장, 불교신자, 유교신자)


7) 평신도 전도의 실례


닫는 말


  전도의 본질은 영혼구원이고 영혼구원은 하나님이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 귀신들은 영혼구원을 방해 합니다. 따라서 전도는 영적 전투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길이요. 그 길은 성령충만함을 받는 길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전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성령충만함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의 신학사상사에서 웨슬리 목사는 많은 자산을 남기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산들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자선사업은 구세군을 통해, 형제사랑은 나사렛 형제단을 통해, 성결운동은 동양선교회를 통한 성결교회와 Holiness Chuch를 통해, 성령운동은 하나님의 성회와 하나님의 교회와 오순절 감리교회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감리교회 그 중에도 한국 감리교회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사상과 함께 조직과 법을 이어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자론 신학(루터)과 성부론 신학(깔뱅)을 완성한 성령론 신학(웨슬리)이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 자랑스러운 성령신학이 전도사역의 활로를 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데 Local Church는 사역을 하기 위하여 “인원-재정-조직”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회의를 많이 하는데 아주 회의(懷疑)적이 되어서 일은 못하고 자리만 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Para Church는 인원 대신에 비전을 묻고 재정 대신에 마인드를 물으며 조직 대신에 사명감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중보기도(도고)를 시작합니다. “인원-재정-조직”과 “Vision-Mind-Mission Statement"의 차이입니다. 회의문화와 중보기도의 문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전도를 위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