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선교사의 기쁨(2010-0711 설교) 전문

우순(愚巡) 2010. 7. 17. 13:24

2010년 7월 11일 주일 설교 『선교사의 기쁨』 - 서철 담임목사

 

 

본문: 빌립보서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저를 비롯한 23명이 6월 29일부터 7월 8일까지 스리랑카에 단기선교사역을 다녀왔습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온 다음날 금요일에 주보를 만들면서 이번 주에 어떤 말씀을 전해야 될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빌립보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선교사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선교사가 기쁨과 선교 기회의 얻음

 

“선교사가 기뻐한다”는 것은 바울의 선교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림과 동시에 선교사의 마음속에 기쁨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말하며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생겼는데 빌립보교인들이 바울을 생각하는 것이 다시 싹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언뜻 읽으면 이 말씀은 빌립보교회가 이전에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대해서 생각을 안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깊이 묵상하면, 이것은 빌립보교회가 바울에 대해서 잊었거나 관계를 끊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느낄 때에 이전에 가졌던 느낌 보다는 또 다른 느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정하 선교사님을 18년 동안, 박종건 목사님을 15년 동안 파송하고 상동교회가 그들을 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빌립보교회가 바울에 대해서 잊은 적이 없지만 바울이 느끼기에는 이전에 빌립보교회가 자기를 생각해주었지만 이제 다시 생각하게 된 이것이 남다르게 느껴졌던 것처럼 오늘 스리랑카 선교사역자들의 느낌 속에 우리 상동교회와 저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남다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금요일 오후 내내 말씀을 준비하며 제가 느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싹이 날 뿐 아니라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바울선교사를 도와야 하는지 기회를 얻지 못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이제 사도바울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상동교회는 지나간 18년 동안 양정하 선교사와 15년 동안 박종건 선교사를 스릴랑카에 보내놓고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이 편지에는 바울이 느끼기에 지금 보여주는 관심은 싹이 다시 돋는 것과 같이 남다른 느낌이 들었고 또 생각만 했지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이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선교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싹이 나야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할 것은 선교사를 보낸 자의 느낌보다 선교사가 느끼는 느낌 속에 남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선교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시 싹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오면 선교사역자들을 도와서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소승불교가 압도적으로 많은 양정하선교사님의 지역, 그리고 반군들이 장악하고 있는 박종건 선교사님의 선교지역들은 모두가 다 선교하기에는 힘든 지역입니다. 그분들에게 바울에게 빌립보교회가 기쁨이 된 것처럼 상동교회가 기쁨이 되어 그 곳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를 소망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속에 들려왔던 것은 ‘참여’였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참여라는 단어를 아주 중요하게 사용했습니다. 1장 5절에서『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말씀하구요 7절에서도『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또한 빌립보서 4장14절에서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4장 15절에도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이렇게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선교사역을 다녀온 직후에 혼자 읽으면서 하나님이 제 마음에 주시는 느낌을 한 가지 갔게 되었습니다.

 

주고받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복음에 참여하고 은혜에 참여하며 괴로움에 참여하고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 자입니다. 더욱이 주고받는 일은 너희 외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자기가 하고 있는 선교사역에 빌립보교회가 참여했다고 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다가왔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내가 마게도냐에 있을 때에 그리고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너희가 참여하기를 내가 부탁했는데 빌립보교회 너희만 참여하고 다른 교회는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진한 외로움이 이 성경구절에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18년과 15년 동안 선교사를 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우리는 잊지 않았지만 그들은 외로움에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에는 기쁨이 있지만 적을 때에 일선의 선교사역자는 외롭습니다. 저는 이 빌립보서 1장 3절 이하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바울의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이며 마게도냐 첫성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루디아의 집에 기도처로 세워서 기도하다가 세워진 이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사역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일로인해서 바울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감격을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에 참여하고 은혜에 참여하고 괴로운 일에 참여하고 주고받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며 정치적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며 바쁘게 인생을 역어가다 보면 이미 어느 분들에게는 벌써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가 참여했던 모임들, 우리가 참여했던 시간들, 우리가 참여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한 번 돌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참여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감사가 넘쳐났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은혜에 참여하고 선교사의 괴로움에 참여하고 그들과 함께 주고 받은 일에 참여하며 동역자의 삶이 될 때에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 지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빌립보서 1장 12절의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또한 1장 21절의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와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은 바울이 엄청난 힘과 절대적인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배고픈 시절, 괴로운 시절, 말할 수 없는 약한 순간이 있었으며 그 후로 내가 견딜 수 있는 자생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합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갖힌 일이 복음의 진전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선교사역자들의 현실은 더운 지역이지만 현지인처럼 살고자 냉장고도 없이 복음을 전하기도 하구요, 차 밭을 일궈서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자생력을 키우기도 합니다. 불교도들이 선교를 못하도록 방해해서 선교지를 잠시 떠나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감옥에 갖힌 것을 복음전파의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역사로 만들어간 사도바울의 간증이 우리 선교사들의 환경을 보면서 오버랩(overlap)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사건자체도 알아야하고 또한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낸 그들의 전화위복되는 간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교회의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넘쳐나고 기쁨이 넘쳐납니다. 눈을 감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려면 너무나 기뻐서 내가 견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복음에 참여한 자요, 은혜에 참여한 자요, 괴로움에 참여한 자요, 주고받은 일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이와 같이 했는데 이제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시 싹이 나서 또 다시 내 마음속에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마음은 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기회를 얻었으니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나갑시다. 나는 배고픈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갖히기도 했습니다. 나는 핍박을 받고 비천한데 있었지만 그렇지만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자생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제는 자리를 잡아갑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괴로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함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은 일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가 빌립보서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바울의 편지의 여백에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선교현장을 여러분이 보다 더 생생하게 인지하고 더 뜨겁게 기도해주시길 원하고, 마음은 있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이제 기회가 왔으니 이것을 선용하여서 선교사역을 도와달라고 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쾌락이 아닙니다. 선교현장에 나가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고 기뻐하면서 상동교회의 교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 없는 감격과 기쁨 속에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며 선교사가 세운 상동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이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성심으로 현장에 나가있는 선교사를 생각하는 마음의 싹이 나고 기회를 포착하고 선용하여 선교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동역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