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짜 : 2008년 7월 13일 설 교 자 : 서 철 담임목사
제 목 : 살아계신 주님 본문말씀 : 요한계시록 1:9~20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희망이고 예배는 축복이며 말씀은 생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생기를 호흡하시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주님을 체험하셨습니까? 그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 1장 18절은 주님이 살아계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으면서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요한계시록 1:18-19) 요한은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 주님에게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요한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혔지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진 요한은 마지막 까지 생존했던 최후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박해를 받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밧모라고 하는 섬에 갇힌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밧모 섬에 가보았습니다. 기류가 별로 좋지 않아서 지금과 같은 현대시설의 배를 가지고도 가기가 힘든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이 섬에 요한이 갇혔습니다. 아마 죄수들을 가두어 두는 섬이기 때문에 가다가 죽어도 좋다고 해서 보낸 섬입니다. 그 섬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사도 요한이 유배자로 끌려갔습니다. 그 요한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이 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평안한 시절에 그냥 큰소리를 치는 그런 믿음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있습니다. 실제 위기의 순간에 닥치면 우리는 두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밧모 섬에 갇혔던 요한은 글을 썼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의 핵심적인 첫 번째 선언은 “우리 주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한 요한의 선언은 믿음의 기반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위에 서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곳에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제가 군목으로 사역할 때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병사들은 3년 동안 복무하는 시간을 실종된 시간처럼 생각합니다. 많은 병사들이 목에 개 줄을 달고 끌려 와서 썩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전방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에게 사랑의 온차를 끓여주며 대기 초소에서 라면을 끓여주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목사님! 저 오늘 자살 하려고 했습니다. 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만나고 나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군대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병사는 내무반에서도 내 놓은 친구였습니다. 험한 말과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제 사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초소에서 커피를 타 주던 군목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무반에서 평안을 가져오는 빌레몬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빌레몬서1:7)”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만납니다. 고독한 유배지에서도 만납니다. 시장에서도 만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귀양살이를 해도 고독한 섬에 혼자 있어도 주님이 계심을 믿고 고귀한 믿음을 지키면서 요한계시록 같은 명품을 남기게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밧모 섬 같은 고독한 섬에 갇혀 있으면 절망이나 죽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계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요즘 SBS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그런 주장들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을 통해서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다중 매체와 매스컴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뿐이지, 역사적으로 계속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무신론적인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켜버립니다. 기독교는 외부의 시각에서 보면 종교이지만, 내부에서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말에는 제도와 형식, 잘 꾸며진 프로그램과 순서, 조직 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되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의 정점에 선 사람들이 종교성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얽어맵니다. 그래서 종교는 존재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이율배반적인 결론을 낳게 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 개신교는 더더욱 종교성보다 복음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제도와 조직과 교권의 권력을 통한 제도 조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생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제도와 조직에 기반을 종교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에 기반을 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
우리가 믿는 주님은 밧모 섬처럼 죽음의 현장 가운데서도 살아계신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아계신 주님’ 한 분만의 음성이면 충분합니다.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한 순간에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새 힘을 얻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녀라면 많은 여자의 소리를 좋아합니까? 많은 남자의 소리를 좋아합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리면 충분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 소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소리를 사모합니다. 한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 처하든지 행복합니다.
밧모 섬에 있었던 요한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있었지만, 주님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에 그늘 행복했습니다. 그는 힘이 넘쳐 났습니다. 박해도 핍박도 고독도 요한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Em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 상동교회에 오실 때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삶의 위기를 직면할 때마다 낙심하지 마시고 승리하십시오. 밧모 섬이나 군대 같은 곳을 갈지라도 숨어서 실패자와 같이 방황할 때라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서 승리하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잔꾀를 믿고 속임수로 살다가 쫓기는 인생이 됩니다. 그는 가족 공동체로부터 벗어나서 한 데서 잠들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은 거기서 돌베개를 하고 잠자던 길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창28:16)” 야곱은 쫓기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향이나 형이 계신 곳에만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야곱은 힘이 났습니다.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고 있던 돌베개를 취하여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과 낙심에 짓눌려서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이번 주에도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감동
끝으로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입니다. 요한이 밧모 섬에 갇혀서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계1:10)”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요한이 거기 있었습니다.(행1:13). 성령에 감동된 자! 성령의 감동을 체험한 자!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가 성령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은혜의 자리 예루살렘을 지키는 자입니다(행1:4-5). 마음을 같이하여 더불어 기도에 힘쓰는 자입니다(행1:14). 회개하는 자입니다(행2:38). 말씀을 청종하는 자입니다(행10:44). 목사의 안수를 받는 자입니다(행19:6). 금식하는 자입니다(행13:2). <2008년 7월 13일자 설교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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