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순(愚巡) 2010. 6. 9. 11:07

2010년 6월 6일 설교(제목: 복음전도)

 

  (눅 4:42-44)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오늘은 복음전도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4:48)』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신이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는 시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하고, 정치와 경제 그리고 시사적인 평론을 하기도하고, 다양한 삶의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설교로서의 기능이지 본질적인 면은 아닙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려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설명 합니다. 그중에 빈번하게 설명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맡는 것 같지만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혹은 부유한 자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자를 사랑하고 힘없는 자를 위로는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첫 번째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또한 누가복음4장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본질적으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축약하여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우리는 왜 예수님의 복음전도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확인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사람 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구별되는 기준점은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령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인간과 짐승이, 인간이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생기로 인해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을 빼버리면,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이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유사하기 때문에 양적인 차이를 가지고 짐승이 조금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그 정도의 유사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루하흐”(the breath of life 하나님의 호흡)라고 하는 생기를 빼버리고 나면 짐승과 인간사이는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질성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고 그 생기를 통해서 생령이 된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도올 김용옥의 『도마복음 이야기, 출판사: 통나무, 2008』와 이어령 교수가 지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출판사: 열림원, 2010』라고 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 속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후에 쓴 글의 내용 가운데 하나가 영혼의 무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무게가 있습니까? 얼마일까요7? 사람이 죽기 전의 몸무게와 바로 죽은 후의 몸무게가 2g~4g 차이가 나더랍니다. 이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진단하는 의사들이 있다고 하는 글을 저자는 언급을 했습니다. 한사람의 지성인이 기독교에 귀의해서 세례를 받고 “내가 이제부터는 기독교 신자다”라고 선언하면서 쓴 글이 영혼의 실체에 대한 긍정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분명히 사람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생령이 우리를 설명하고 있는 인간에 관한 최고의 찬사요 설명일 수 있는데 바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구령열의 회복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하라고 할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백화점은 물건을 팔기위해서 이벤트성의 세일즈를 할 때에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사람을 위해서 이벤트하고 세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서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전도를 합니까? 전도 받아서 오는 한 사람의 영혼은 교회라고 하는 거대한 물류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물품이 아닙니다. 전도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령열입니다. 영혼구원에의 열정입니다. 교회는 구령열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시작할 때에 카리스마틱(charismatic 은사주의) 에너지가 풍성해서 역동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교회가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법제화가 될 때에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에너지를 다 소비하게 됩니다. 그러는 순간 처음에 교회가 가졌던 영적인 파워, 그리고 카리스마틱 에너지는 다 소실되고 결국 자기 덩치를 유지하지 못해서 교회는 서서히 쇠퇴합니다.

 

 

  웨슬리 목사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이 땅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 복음의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염려가 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감리교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많아지고, 사회적인 파워를 지닌 교회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리교회라는 간판은 없어져도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열정이 살아있고 복음을 전하려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복음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잃어버렸습니까? 공룡과 맘모스가 자기를 해치려는 거대한 큰 짐승이 나타나 자기들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멸종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 스스로의 덩치를 유지하지 못해서 지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공룡과 맘모스처럼 거대한 공동체로 성장했지만 그 속에 정말 교회의 본질인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이 에너지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껍데기만 남은 교회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전도의 회복을 위한 두 가지 제안

 

   복음전도의 회복을 위해서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랑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제자들은 예수님하고 안주하고 싶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17:4』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할 때에 결단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사단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제도화되고, 법제화되고, 조직화되는 아주 짤막한 단상(單相)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붙들고 복음전하는 일을 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오늘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 , 역할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이야기 할 때에 우리는 예수가 오신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선언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둘째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로마서1장 16~17절에 나타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여기서의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dunamis)인데, 이 말에서 영어 dynamite(다이너마이트)가 유래됩니다. 복음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이 되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날려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 됩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우리 인생의 장애물이 되고 우리 영혼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다 날려버리면 그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들은 세계를 움직이고 있고, 모든 사상과 법 조직이 로마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 유대 땅에서 온 한 전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복음에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다 무시했을 겁니다. 그들의 정치적인 힘을 보면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변방에 아주 작은 나라의 한 젊은이가 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의 대 사상가들이 바라볼 때에는, 자기들의 그리스-로마 철학, 신화적인 상상력과 문학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이 로마의 중심부를 강타하기 시작하더니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를 기독교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설픈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지성 그리고 식견 앞에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이어령 교수는『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서 “나는 내 인생의 많은 글을 써와서 글쟁이 였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글쟁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예수를 믿는 다고 하니 사람들은 주저 않고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비난도 합니다”라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가 마지막에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자기가 이 전에 썼던 산문과 같은 글들은 하나의 부수적, 부차적인 것들이었고, 이것은 복사기에서 책들을 복사해서 연구하고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이제는 기독교와 시의 창작이라고 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잘 역어 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 부터 미움도 받고, 비난도 받고, 조롱도 받는 것을 꺠달았음을 알았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한 가지 분명히 와 닿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도 전도가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전도를 하자, 전도를 해야만 한다. 어떻게 교회의 집사, 권사, 장로가 전도도 않하느냐? 이런 것은 모두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또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전도하자는 것은 너무나 상업적인 마인드라고 생각해서 현대인에게 역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구원에 대한 열망이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복음을 전한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 이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은 능력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가 됐다고 하는 것, 이 지성인이 예수를 인생의 말년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성공합니다.

 

   여러분! 전도는 성공합니다.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실패한 듯 보여도 성공합니다. 우리는 복음전도가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축복을 확신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의미라든가 교회부흥이라는 부차적인 문제보다 영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성육 목적,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전도가 됐다고 하는 간증들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마귀가 방해합니다만 그래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성경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4:43~44)  그런데 요한 일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3:8』누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함이고, 요한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오심의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는 죄를 짖게 함으로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강력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끝으로 김득중 박사님의 복음서 신학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감신 총장이었던 김득중 박사님은 편집사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그 분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편집사적으로 해석해 놓은 글이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초대교회가 전도대를 파송할 때 파송식의 설교예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에게 전도할 때 실패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씨는 바위에 떨어져서 교회에 등록하지만 뿌리가 약해서 그만 둡니다. 여러분이 전도해서 교회에 등록까지 했지만 계속해서 안 나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되어 교회에 왔다가 뿌리가 없어서 곧 말라 비틀어져서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재리와 염려 때문에 막혀서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가 주워 먹어서 다시 사단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옥토에 떨어져 30,60,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어령씨의 글을 읽으면서, 이 한사람의 전도가 되기까지 딸 민아씨는 눈물뿌리며 기도했고, 100세가 다 되신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계셨지만 그 고독 속에서 늘 아들의 전도를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힘들었지만 결국 이어령 교수가 복음을 영접하고 간증록을 쓰게 되자 그 분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해지고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복음을 전할 때에 길가에, 가시떨기에, 바위에 떨어져서 실패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것이 실패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복음전도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옥토의 씨앗을 통해서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전도를 통해서 영혼 구원하는 일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복음전도의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제도와 조직과 법제 속에서 경직화의 과정을 거처가면서 교회는 죽어갑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카리스마틱 에너지인 영적인 파워가 그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교회를 강건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 속에 복음전도에 대한 확신이 다시 살아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