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밝은 눈(잠15:30) 2012-0805 주일

우순(愚巡) 2012. 8. 4. 20:48

 

 

 

밝은 눈

 

  <잠언 15:30>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1. 눈이 중요합니다.

 

잠을 잘 주무셨나요? 오늘 1부 예배 시간에도 사람이 많이 왔습니다. 잠을 안잔 김에 나온 건지, 잠을 푹 자고 일찍 일어나 축구경기를 보고 나오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TV를 켜니까 승부차기를 했습니다. 이겼어요. 참 대단합니다. 아마 졌으면, 또 페널티킥을 줬다면서요, 거기에 또 오심 논쟁이 나올 뻔 했습니다. 그런데 페널티킥을 2개나 줬는데도 하나를 막았고, 승부차기를 했는데 하나를 막아서 이겼습니다. 7만 관중의 압도적인 일방적 응원에 석연찮은 두 번째 페널티킥 판정까지, 불리한 여건에서도 이겼습니다.

 

한국인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 수영의 박태환, 유도의 조준호, 펜싱의 신아람으로 대변되는 오심 논란에 우리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박태환 선수의 싥격은 몸의 떨림이 문제였고, 조준호 선수의 판정은 번복이 문제였고, 신아람 선수의 패배는 1초의 시산계측이 문제였습니다. 다들 아시듯이 박태환 선수에 대한 실격판정은 정정됐습니다. 조준화 선수에 대한 번복은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신아람 선수의 1초는 타임 키퍼역을 맡은 자원봉사자인 15세 소녀가 시간계측을 잘 못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실격판정을 받은 박태환이 은메달을 2개나 땄습니다. 판정이 번복된 조준호가 동메달을 따고, 1초의 오심으로 눈물을 흘렸던 신아람이 정정당당하게 은메달을 땄다고,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습니다. 이기는 사람들은 오심을 해도, 판정이 번복되더라도 굴하지 않고, 기가 안 꺾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참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오판을 해서 여러분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유난히 여러분들에게만 시간이 불리하게 정지돼서 해야 될 일들을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여러분을 곤경에 빠지도록 몰아세울 수도 있지만, 이기는 사람들은 그마저도 극복하고 메달을 따뜻이 꼭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이렇게 올림픽에 오심이 많을까요, 오심에 분노한 네티즌들 중에는 런던 올림픽의 마스코트가 눈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는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웬록(Wenlock), 패럴림픽의 마스코트인 맨더빌(Mandeville)이 눈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마스코트인 웬록(Wenlock)과 패럴림픽 마스코트 맨더빌(Mandeville)은 금속성 소재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입니다. 웬록은 근대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베르탱 남작이 올림픽을 창설하게 된 계기가 된 대회를 개최한 영국의 슈롭셔 웬록 지역에서 따온 이름이고. 맨더빌은 패럴림픽이 처음 열린 스토크 맨더빌 지역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심지어 극우 기독교인들은 아예 런던 올림픽의 마스코트 컨셉이 사탄과 사람의 결혼식이 라고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런던 웬록과 맨더빌의 외눈이 일루미나티의 상징이며 그 배후에는 프리메이슨 조직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들은 웬록(Wenlock)에서 'N' 'D' 로 바꾸면 바로 wed·lock 곧 혼인을 뜻하고, 맨더빌(Mandeville) 에서 'L'하나를 빼면  Man(인간) + Devile(사탄,악마) 이 되어, '인간과 사탄의 혼인 잔치'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과 신랑 예수님의 혼인잔치'가 아닌 '인간과 사탄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축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냥 마스코트는 마스코트일 뿐입니다. 이런 극우적인 억지주장은 옳지도 않고 복음전도에도 방해가 됩니다.

 

어찌되었든 이래저래 이번 올림픽의 시작은 오심논쟁으로 시작되는 일그러진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는 통한의 1초라는 세계 올림픽 5대 오심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정확한 눈이 필요합니다. 정확한 눈이 옳게 보고 바르게 판단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밝은 눈이라고 정했습니다.

 

 

2. 밝은 눈이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잠언 15장에 나오는 밝은 눈’을 묵상합시다.

 

 <잠언 15:30>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눈이 밝다고 하는 말 속에는 지혜로운 자의 다양한 지혜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마음이 선합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합니다. 아마 다양한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보태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떻습니까? 박태환 선수의 실격을 판정한 심판의 눈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말이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축구가 만약에 졌으면, 두 번째 준 페널티킥은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심판의 눈은 정확해야 하고, 성도의 눈은 밝아야 합니다. 심판의 눈이 편견을 가지면 그릇된 판정을 내립니다. 심판의 눈이 법적인 적용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더라도 그 마음의 동기가 불순하면 악용을 하기도 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밝은 눈은 기술적인 초능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밝은 눈,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눈, 생각이 깊은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밝은 눈의 오해는 이이 에덴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잠언 15장 30절의 밝은 눈과 창세기 3장 5절의 밝은 눈은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잠언의 밝은 눈은 마음이 밝은 영혼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밝은 눈은 기술적인 능력의 눈을 말합니다. 결국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는 서로의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모습만 보고는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립니다.  사단의 유혹으로 눈이 밝아지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사람들의 자기 모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묵상을 했습니다. 우리가 눈이 밝아질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우선적으로 밝아져야지, 우리의 시야에서 하나님이 사라지면, 추한 인간의 모습만이 보인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밝은 눈,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은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ㅈ히로 인해 수치스러운 인간의 모습만 보고는 절망하는 기술적인 시력상승의 눈, 육신적인 비교판단의 눈만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바라보는 희망의 눈이 밝은 눈입니다!

 

 하나님를 바라보는 눈이 밝은 눈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희망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의 눈 이야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롯의 눈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과 롯은 숙질지간(아저씨와 조카)입니다.  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후에 거주할 땅이 비좁아 각자의 거주지를 따로 정하게 됩니다. 그 때 둘은 서로의 눈으로 자기들이 거주할 땅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거주할 땅을 정하라고 우선권을 양보합니다.

 

 

  <창13: 8~9> " 8 아브람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이에 롯은 주저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준 우선권을 이용하여 요단에소 소알까지 즉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합니다.  롯의 선택을 결정하게 된 롯의 눈은 그 땅의 풍요로움이었습니다.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브라함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후에 믿음의 눈으로 남은 땅을 선택하여 동서남북을 바라봤습니다.

 

  <13: 14~18>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동서남북을 바라보았더니 뭐가 보였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롯은 하나님 없는 풍요로운 땅을 바라보았지만,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없는 땅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동서남북 어디나 다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땅이 좋아서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땅이 약속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는 눈의 이야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눈" 이야기가 절정입니다.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강력한 메세지중의 하나가 "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어쩜 성경의 결론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이 되는 요한계시록 21장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말은 요한의 전유물처럼 알고 있지만, 베드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이사야 65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선지자 이사야는 포로로 끌려간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외쳤습니다. 요즘 경영학을 공부하거나 또는 정치학이나 행정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죽음뿐이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그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샤머니즘적이거나 운명론에 자기를 맡기는 나약한 자포자기의 막연한 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투적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희망의 눈이 참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4. 육신의 눈이 좋을대로 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따라 행동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눈이 육신의 눈을 버리고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선은 좋아보이지만 결과가 아주 나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눈, 신앙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눈만 가지고 살면 비극을 잉태합니다. 성경은 육신의 눈에 좋을대로 결정한 사람들의 후유증을 잘 설명해줍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사래와 롯입니다.  사래가 하갈로 인하여 질투할 때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네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고 한 말을 듣고 자기 눈에 좋을 대로 하갈을 구박한 사래의 행동이 비극의 씨앗이었습니다.

 

 

 

<창세기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큰 실수를 했습니다. 사래에게 네 눈이 좋을 대로 하라고 하니까, 그 순간 그것을 빌미로 해서 하갈을 학대하고 내쫓았습니다. 사래는 자기 육신의 눈에 좋을대로 하여 분쟁과 전쟁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이슬람과 유태인의 갈등 밑바탕에 사래의 눈이 있습니다.

 

 

  눈이 좋을 대로 행하였던 비극의 예중 하나는롯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집에 찾아와서 숨겨줬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내놓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숨겨둔 것은 좋았는데 그 다음 대처는 참 잘못되었습니다. 자기 딸을 내주려고 그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창세기 19: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백석대학의 이관직 교수는 [성경인물과 심리분석]에서 심리학적 시각에서 보면 롯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이는 롯이 아버지 역할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롯은 마지막에 동굴에서 자폐증 환자처럼 살게 되는 데, 남자들을 그리워한 딸들에 의하여 술을 강제로 먹게 되고, 딸들에 의하여 술에 취한 채 동침을 하여 모압과 암몬을 낳는 비극의 최후를 맛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 롯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이 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버지 대신 아브라함을 붙여주었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로움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난 것입니다. 결국 이 롯은 이 아버지가 누군지를 배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상실이 두 딸을 소돔성의 사람들이 눈에 좋을 대로 하라고 내어주는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육신이 좋을 대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봐야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상실로 건강한 아버지의 눈을 갖지 못하였던 롯은 자기 딸들을 소돔의 성중독자들이 자기들의 눈에 좋을 대로 행하도록 내어줍니다. 어쩜 이 떄 이미 롯의 딸들은 모압과 암몬의 비극을 잉태해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잘 안보여서 실수한 사람으로는 이삭이 있습니다. 아들을 분간하지 못해서 형제의 비극을 낳습니다.

 

<27: 1>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말씀을 잘 묵상하지 못하다가, 비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삼상1: 1~2>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눈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마음과 눈의 중요성에 대하여 야곱의 양떼 이야기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양들의 눈에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에 따라서 수태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30: 37~43>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외삼촌 라반이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할 때, 야곱은 새끼를 밴 양들 앞에 나뭇가지를 줘서 얼룩무늬가 있게 하고, 점이 있게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나무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을 벗긴 가지를 또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서 양떼를 향하게 함으로써, 양들의 눈에 아롱진 것을 보이게 하고, 얼룩무늬가 있는 것을 보게 해서, 새끼를 점이 있게 출생시키게 했습니다. 양들 조차도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을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눈이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이 결과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이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5. 믿음의 눈, 밝은 눈을 간구하라!

 

 

위와 같은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눈,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밝은 눈을 구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밝은 눈을 갖기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해서, 자신의 눈을 하나님이 밝혀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시편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다윗은 자기의 눈이 열려져서 주의 율법 가운데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율법은 유태인에게는 어려서부터 외우는 것입니다. 그 외운 것을 눈을 열어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수를 수십 년 믿어서 성경을 대충 알뿐만 아니라, 정확히 알고 어떤 경우에는 암송까지 하는데, 우리의 눈이 닫혀서 이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서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놀라운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올림픽 심판의 오심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심판은 나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 내 인생을 이끌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또 다윗은 자기의 눈을 돌이켜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우리들의 눈은 정말 허탄한 것을 많이 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기독자가 하나님의 성에 이를 때까지 보이는 수많은 유혹들을 다뤘습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에 허탄한 것에 너무 눈을 팔고 있어서 살 길로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장군이었습니다.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허탄한 것을 보지않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눈이 오만하지 않기를 구하였습니다.

 

<시편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사실은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긴 다윗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그는 자신의 눈이 오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심판의 오심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을 결정짓고 판정을 내리는 나의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내 눈을 겸손하게 하시고, 내 눈을 밝게 해 주시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임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공격하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그렇게 간구했습니다.

 

 

6.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제 마지막으로 나눌 밝은 눈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교훈의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이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눈이 되고 영혼의 눈이 되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눈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십시오. 한 시간이나 열두 시간이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나를 붙드시는 손, 나를 안아주시는 예수님의 그 품을 느끼시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정확히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민중을 소요케 하는 자로 낙인찍었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귀신의 왕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정확히 바라본 사람들은 보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고, 우리 자신을 승리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