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조직신학
문창옥 교수가 들려주는 화이트헤드 이야기
우순(愚巡)
2009. 5. 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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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사상
화이트헤드(A.N.Whitehead 1861~1947)는 사변 이성과 형이상학적 체계를 역설했던 20세기 철학자이다. 그는 대다수의 다른 철학자들이 사변의 길은 허상 속을 맴돌게 할 뿐이라고 믿고 있던 시기에 거대한 사변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철학이 당대 문명의 다양한 영역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충하는 전제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를 창조적으로 개선 통합하는 데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라는 남다른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대적 조류를 역행하여, 사변의 길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20세기의 사상적 분위기를 대변한 철학자였다고 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분석과 회의를 근간으로 하는 반(反)형이상학적 사조가 지배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단순한 시대의 산물로 전락·소멸하지 않고 21세기를 사는 우리 앞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처음부터 사변철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영국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하면서 처음 택한 전공은 수학이었고 이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것도 수학교수로서였다. 그리고 그와 『수학원리』(1910~1913)를 공동으로 집필한 러셀은 이 시절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저술에서 관계의 논리를 개발하고 순수 수학은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논리적 개념들의 공리적 도식에서 연역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logicism)를 전개하였다. 물론 이런 기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뒤따랐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직관주의적 노선을 택하였다. 그가 후일 괴델의 불완전성 공리를 접하고는, 이를 모든 이론 구성이 유한한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간주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방법적 노선에 따른 이해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나의 첫사랑은 수학’이라고 했을 만큼 수학적 합리성에 대한 그의 애정은 깊었고, 이런 그의 태도는 후일 그의 과학 철학과 사변 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화이트헤드는 1915년 임페리얼 칼리지 이공학부 응용수학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연과학으로 시선을 넓혔다. 이 시기에 그가 심혈을 기울인 일은 과학적, 수학적 개념들이 감각경험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여러 요소와 이들간의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자연인식의 원리』(1919)와 『자연의 개념』(1920) 등은 이런 작업의 결실이었다. 그는 ‘순간에 놓인 자연’이라는 뉴턴적 개념을 폐기하고 자연을 지각된 성질과 과학의 이론적 존재들(예컨대 전자나 양성자 따위)로 나누어 보는 근대적 시각을 거부하였다. 자연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지각 그 자체도 자연 내의 사건이다. 자연의 사건은 전통철학이 말하는 실체와는 달리 반복되지 않으며 서로 이어지고 중첩되는 관계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근대 물리학이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했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기실 시공간적 사건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그 자체로 독자적인 존재성은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과학철학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자연과 인간은 자연속의 사건
화이트헤드가 사변적 모험을 시작한 것은 자신의 이런 결론이 미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각되는 자연뿐만 아니라 지각하는 인간까지도 자연 속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은 그로 하여금 세계와 인간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과학과 근대세계』는 이처럼 과학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으로 시선을 넓혀가고 있는 과도기적 저작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이 모험은 정확히 그가 1924년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로 초빙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내적 외적인 감각경험과 시공간적 사건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대작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1929)는 이 과제를 수행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론 체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저술이 대개 그렇듯이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에 구축되어 있는 웅대한 형이상학 체계는 웬만큼 철학적 훈련을 거친 독자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수리논리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시와 예술, 종교와 상식 등에 전제되어 있는 실재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융화시켜 그 자신의 독특한 언어, 따라서 독자로서는 생경할 수밖에 없는 그런 언어로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경한 언어를 구사했던 까닭은 전통적인 관념과 언어의 속박 하에서는 구체적인 실재의 실상을 기술할 수 없다고 보았던 데 있다. 어쨌든 실재의 구체적인 실상이 드러나기만 하면 우리는 이에 비추어 모든 문명적 사유의 배후에 있는 다양한 전제들은 평가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전통의 관념들을 비판 해체하면서 시작한다.
인간이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시적, 종교적, 실천적 영역에서 구사하는 사고 방식들은 문제되는 사물들의 어떤 특정 측면에만 관심을 두고, 그밖의 다른 것들은 무관한 것으로 도외시한다. 이것은 인간이 다양한 영역에서 향유하는 경험들이 적대적으로 파편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인류문명의 비극이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피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자료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이들을 낳은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가운데 이들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이따금 철학을 ‘추상관념의 비판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물론 추상관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추상관념이 없다면 지식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추상관념은 우리가 그것이 추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그것이 갖는 실천적 유용성에 감탄한 나머지 그것을 구체적인 실재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과 상식에서 흔히 통용되는 환원주의적 사유의 배후에 놓여 있는 그릇된 착상으로서, 화이트헤드는 이를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 부른다.
‘생성’은 ‘존재’보다 더 기본적
화이트헤드는 우선 실재의 구체적 모습에 다가서기 위해 주관-객관의 도식과 추상관념들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인식론 전망을 버린다. 그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인간과 세계간의 차별을 철폐하고 동물, 식물, 바위 등과 인간이 공유하는 특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찾기 위한 실마리로 그는 인간의 경험 그 자체에 주목하였다. 인간의 경험 사건은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실재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한 영역, 다양한 층위의 경험을 통해 실재와 교섭하는 가운데 자연 속의 사건으로서 존립한다. 이를 유비적으로 일반화하면 자연 존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 존재도 인간 존재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이 의존의 방식이 형이상학적 의미의 경험이다. 자연 사건도 인간도 자기 이외의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경험의 구조적 특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경험 사건 자체의 내적 구조로부터 경험의 보편적 구조가 객체적인 것이 주체적인 것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경험에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요인들은 배제한다. 예컨대 의식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 체계의 핵심에 놓인 ‘현실적 존재’는 이렇게 경험 사건을 모델로 하여 구상된 범주적 존재이다. 이것은 객체적인 것을 주체적인 것, 즉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존립한다. 이 과정은 자기 구성의 과정, 즉 자기 생성의 과정이다. 이 과정적 존재들이 세계 과정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는 대부분 이 범주적 존재를 분석 기술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충실한 이해는 『과정과 실재』 전체에 대한 이해와 맞먹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moment)로부터 유추된 것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과정과 실재』의 핵심적 이념에 어느 정도 다가설 수 있다. 우선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고대 그리스 이후 서양의 사유를 지배해온 정태적인 실재관을 거부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현실적 존재의 구조가 경험의 과정, 즉 ‘생성(becoming)’의 과정이라면, 그리고 현실세계가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생성의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생성’은 ‘존재(being)’보다 더 기본적인 범주가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과정의 원리’로 정식화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는 그것의 생성과정에서 ‘살아있다’. 그 과정이 종결될 때 즉 생성이 정태적 존재가 될 때, 그것은 과거 속으로 소멸하고 새로운 생성의 과정에 의해 계승된다. 그래서 우주에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이들의 합종연횡으로 구성되는 현실 세계의 생성이 있다. 전자는 소우주적 과정이요, 후자는 대우주적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이 두 가지 과정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고, 흔히 그의 철학을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현실적 존재들이 경험의 계기에서 유추된 것이라는 점은 이들 존재가 상호 의존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타자를 경험하는 주체로서 존립하거나, 타자의 경험에 주어지는 객체로서 존립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이것은 ‘상대성 원리’이다. 이에 따르면 임의의 현실적 존재에 있어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이며 외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들을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organism)의 철학’이라 부른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17~8세기의 기계론에 대항하여 과학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확보했던 시각이다. 기계론의 특징은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그래서 그 부분들은 상호 독립적이다. 유기체의 경우 부분과 체계 전체는 상호 의존적이다. 특정 유기체에 있어 부분과 부분 사이의 관계나 그 유기체와 우주 전체 사이의 관계는 그 유기체에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과정과 실재』에 구축된 우주론 체계는, 그것이 생성으로서의 존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과정철학’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이들 존재의 상호 의존적 연관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유기체 철학’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구축한 이 우주론의 체계가 완전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후일 정정되고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된 체계이다. 완벽한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하나의 이상적인 목표일 뿐이다. 그가 확신하고 있던 것은 다만 자신의 체계가 전통의 체계가 제공했던 것보다 나은 실재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관념의 모험』(1933)에서 이 사변철학의 체계를 통해 다양한 영역의 인간 활동들, 즉 과학, 종교, 역사, 예술 등을 해명하는 가운데 문명사적 과제에로까지 시각을 확대하였다. 이는 그 체계의 현실적 활용성을 실험하는 작업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2천 500여 년의 철학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이고 포괄적인 체계를 구축한 몇 안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수학자로서 출발했고, 현대 물리학에도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던 화이트헤드가 전통의 관념과 당대의 연구성과를 응집시켜 구성해낸 거대하면서도 세밀한 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다. 사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일개 철학자가 과학과 별도로 우주론 체계를 구성하거나 다른 과학의 체계를 심층적,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반성하기에는 벅찬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가 『과정과 실재』에서 보여준 철학적 우주론은 어쩌면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최후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우주론은 물리과학에서 지식의 전형을 찾고 분석과 실증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던 시기, 그래서 감각을 떠난 인간의 통찰력은 신화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매도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사변적 구성은 인간의 경험을 오도하고 지식세계를 혼란과 정체로 이끌 뿐이라는 비판이 날카롭던 시기에 그는 오히려 사변이 인간에게 충실한 실재 경험을 가능케 하고 그럼으로써 지식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과감한 체계 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변적인 지적 모험이야말로 인류문명을 끌고가는 궁극적 동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형화된 관념적 틀에 안주한 채, 분열과 분화의 길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회색의 문명은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시대시대의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화이트헤드 사변철학의 메시지일 것이다.
화이트헤드 : 존재, 시간, 이성
문창옥
모든 것은 흐른다
“모든 것은 흐른다.” 이것은 서구 철학적 사유의 기원에 놓인 우주의 실상에 대한 근원적 직관이다. 그러나 이 근원적 직관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기점으로 진정한 존재의 동일성을 역설했던 엘레아(Elea) 학파의 논리에 의해 곧바로 허상으로 정리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존재, 사유 가능한 존재는 불변적 동일자이다. 감각이 포착하는 유동하는 세계는 사유 불가능하기에 진정한 존재가 아니며, 진정한 존재가 아니기에 사유될 수 없다. 서구의 정통 철학은 이런 과격한 시각을 피해 가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유동하는 세계와 ‘합리적으로’ 화해할 수 없었다. 이들 철학은 부지불식간에 엘레아 학파의 이념적 유산으로 생계를 꾸려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변화하는 것, 시간적인 것은 언제나 철학의 울타리 밖에 머물러 있었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순수 지속(dur鲴 pure)’에 대한 직관을 전면에 내세워 동일자의 추상성을 폭로하고 엘레아의 이념을 현란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의 실재성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것을 ‘지성’의 영역 밖에 안치함으로써, 순수 지속(실재하는 시간)과 공간적 연장(또는‘공간화된’ 시간) 간의, 그리고 직관과 지성 간의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 또한 엘레아 전통의 한계 안에 있었고, 그 전통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엘레아의 전통, 특히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기점 자체를 파기함으로써 변화 유동하는 사태에 대한 시각을 회복하고 이렇게 회복된 시각 속에 드러나는 유동하는 실재의 실상을 합리적 체계로 기술해 낸다. 이것이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 또는 유기체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이다. 따라서 이 철학은 베르그송에서 첨예화되었던 직관과 지성 간의 이원성을 파기하고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체계 구축을 위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영역, 모든 층위의 경험을 고려한다. 경험론 철학이 전통적으로 주목해 왔던 경험, 특히 정제된 언어로 명석 판명하게 구획되어 나타나는 경험은 인간에게 가능한 전체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의 생동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박제가 되어 벽에 걸린 추상이다. 이런 추상 경험에서 실재의 실상을 포착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이미 묵시적 명시적으로 해석된 경험, 따라서 선택 가공된 경험이다. 인간의 자의적 선택에 앞선 살아 있는 구체적인 전체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일상의 내적, 외적 감각 경험, 과학적 경험, 예술적 경험, 종교적 경험, 그리고 심지어 환상이나 착각까지도 우주의 실상에 대한 모종의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들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두 가지 전략을 택하여 이 과제에 접근한다. 하나는 ‘실체속성’의 범주와 주어술어의 논리 간의 밀접한 상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 실체철학의 모든 구성적 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 해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 상상(imagination)에 힘입어 존재와 시(공)간 간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켜 재구성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은 이 재구성의 최종 산물이다.
실체철학 비판
흔히 변화는 그 주체로서의 존재자가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겪는 모험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것은 상식과 자연언어가 공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예컨대 우리는 “사과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랗더니 어느새 빨갛게 익었군” 하는 식으로 말한다. 이 그림에서 변화는 그 주체인 임의의 동일적 존재 S가 ‘균일하게 흐르는’ 물리적 시간축 위의 임의의 시점 t1에서 성질 Q1을 갖고 있다가 다른 시점 t2에서 성질 Q2를 갖게 되는 사태라고 아주 소박하게 도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식은 변화와, 변화 밖에 있는 동일 불변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 도식은 그 소박성에도 불구하고 서구 합리주의 철학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변화에 대한 합리적 기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기능해 왔다.
이 역사가 간혹 실재 세계의 변화를 긍정적, 적극적으로 기술하는 경우에도, 이 기술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공공연히 변화의 밖에 있는 변화의 담지자 또는 변화의 기점에 호소해야 했다. 그러나 실재가 온전히 변화 생성하는 것이라면 임의의 물리적 시점 t1에서 다른 시점 t2에로 존속하는 변화의 동일적 담지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화’의 궁극성을 인정하는 한, 물리적 시간 속의 한 시점 t1에 하나의 존재 S1-Q1이 있고 다른 한 시점 t2에 또 하나의 존재 S2-Q2가 있을 뿐이다.
며칠 전의 사과와 오늘 아침의 사과는 결코 온전히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전제하는 자연언어의 변화도식은 표피적 변화를 기술할 뿐 긍극적 의미의 변화를 기술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불변의 동일자를 전제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는 변화를 거부, 부정하는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언어의 논리를 따랐던 모든 형이상학적 구성에서 ‘모든 것은 흐른다’는 직관이 이성(지성)의 타자로 비합리적 공간을 배회하든가 아니면 우연적인 현상, 실재의 표피적 흔적과의 부질없는 교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기본적인 이유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도식의 전형은 엘레아의 ‘존재’와 감각적 ‘변화’ 간의 간극을 매개하고 그 양자간의 체계적인 화해를 최초로, 그리고 진지하게 추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변화하는 세계를 기술하면서 사용한 주어술어 논리는 자연언어를 정형화한 것이었고, 그가 존재의 기본 구조로 제시했던 실체속성(substance-attributes)의 범주는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응자이다. 그래서 실체속성의 범주를 축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언어의 묵시적 전제에 따라 그려 놓은 세계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언어의 한계 안에 있었음에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가 형이상학과 논리학에서 보여 준 탁월한 구성적 논의는 그로서는 결코 의도하지도 달가워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실체철학이라는 유령의 산실이 되고 말았다. 특히 근대 형이상학은 이 실체철학의 직접적인 변종들이다. 우리는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라이프니츠(Leibniz), 헤겔(Hegel)에게서 그 대표적인 사례들을 본다.
20세기 철학은 불변적 동일자에 매달리는 근대철학의 사변을 거부하였다. 이는 형이상학적 사변 그 자체를 거부하는 물줄기의 원천이 된다. 형이상학적 사변은 이성에 대한 과잉 신뢰 또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난제들을 양산할 뿐이라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20세기 주류 철학은 더 이상 존재와의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금껏 경험한 화해의 이야기는 모두 공허한 신화로 치부된다. 이들 철학은 존재가 이성으로서는 화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데 묵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이런 공감은 형이상학의 역사가 다중을 현혹시키고 때로 통제 억압하는 이성에 의한 폭력의 역사에 불과했다는 자기 파괴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신화를 만들어 내어 존재와 합리적으로 화해하지 못하는 문명은 쇠퇴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20세기가 향유하고 있는 문명은 곳곳에서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극도로 파편화되어 서로 겉도는 관념들의 충돌 현장에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고 있었다. 이들 관념을 비판적으로 조정하고 극복할 메타 문맥(meta-context)이 필요하다. 그것은 실재의 실상을 알려 주는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신화를 구축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연언어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의 관념들을 넘어서서 사변적 상상의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오늘날 과거의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는 까닭은 그들이 이들 관념을 조정함으로써 다양한 인간 경험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메타 문맥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는 세계와 화해할 신화, 곧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구축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구상한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자연언어는 자연을 적대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통제, 지배하기 위한 실용언어이며, 자연을 인식하고 화해하기 위한 사변언어가 아니다. 전통의 사변언어는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사유를 억압하는 자연언어의 변종이다. 그렇기에 전통의 실체철학과 주어술어 논리는 실재의 실상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유동하는 존재 위에 떠 있는 불안정한 외피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실재를 기술하고 설명해 낼 수 있는 설명항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설명되어야 할 피설명항이다. 진정한 의미의 설명항은 실재의 실상을 관통하는 사변언어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언어를 낳은 전제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변언어를 만들어 구사한다. 그래서 과정철학의 언어는 생경하다. 이 언어에서 변화의 도식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토대와 논리 위에 재구성된다. 그래서 또한 그의 우주론 체계는 한없이 낯설다.
생성의 원자론
화이트헤드가 유동하는 세계를 기술하고 있는 존재론적 지평의 중심에는 t1-S1-Q1, t2-S2-Q2, t3-S3-Q3……의 도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S1, S2, S3…… 등은 과정철학에서 문제되는 모든 사태의 뿌리에 놓인 단위존재(unit-being)이다. 이 단위존재는 위의 도식이 시사하고 있듯이 자신의 시간점에서 생성 소멸할 뿐 시간축을 따라 여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임의의 시점 t1에서 성질 Q1을 갖는 것으로 생성하고 그 생성의 완결과 더불어 소멸한다. 물론 이때 그것이 점유하는 시간점은 0의 시간점이 아니라 폭을 갖는 시간점(unit-time)이다. 이 시간점은 단위존재의 생성에 힘입어 이와 함께 현실화한다. 이처럼 단위시간을 실현시키면서 그 시간 동안 생성하는 궁극적 실재는 화이트헤드가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일상적 경험이 갖는 기본 구조에 대한 반성과,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몇몇 연구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미시 물리적 사태의 기본 특성들로부터 유비적으로 일반화(철학적, 상상적 일반화)하여 탄생시킨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탄생시킨 실재에다 ‘현실적 존재’ 또는 ‘현실적 계기’라는 이름을 준다.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현실적 계기들(즉 과거의 세계 전체)을 자기화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자기 창조의 과정을 통해 존립하고, 이 과정의 완결과 함께 소멸한다. 완결한 주체는 후속하는 현실적 계기의 생성을 위한 소재, 즉 객체가 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로서 생성하고 소멸하여 객체가 된다.
변화하는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계기들의 구성체이다. 현실적 계기들은 세계의 궁극적 구성자이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분할될 경우 그 현실적 존재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론적 지평에서 순차적으로 현실적 계기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그 전체로서의 생성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실적 계기는 생성의 최소 단위이자 존재의 최소 단위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계기는 그 자신의 시간폭을 ‘일거에’ 향유하면서 생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성의 내적 과정은 ‘시간적 전후관계’를 함의하지 않는다. 이 내적 과정을 분할하여 얻는 시간폭은 현실 속에 존립할 수 없는 추상적 시간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성 중에 있는 한, 통일적이고 원자적인 것으로서 분할 불가능하다. 이것이 생성의 원자론(atomism of becoming)이다.
이것은 특히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계기를 ‘획기적 계기’라 부르면서 역설하고 있는 논점이다. 여기서 ‘획기(epoch)’라는 말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발생과 존립’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획기라는 말이 ‘정지(arrest, hold)’라는 어원적 의미 이외에 ‘주기(period)’라는 파생적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주기적 진동’이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 주기 전체를 필요로 하며, 그 속의 어느 한순간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0의 시간점으로서의 순간과 주기적 진동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원자적 시간론
시간축 위에서 잇따라 생성하는 현실적 계기들 사이에는 순차적인 ‘이행’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는 원자적 생성으로서의 현실적 계기가 자신을 완결지어 주체로서는 소멸하고, 후속하는 새로운 현실적 계기들의 생성에 ‘여건(data)’으로 주어지는 그런 일련의 사태의 구조적 반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현실적 계기 하나 하나의 내적 생성은 미시적 과정이고, 한 현실적 계기에서 후속하는 다른 현실적 계기에로의 이행은 거시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거시적 이행 관계를 토대로 무수한 현실적 계기들이 합종연횡하고 있는 구성체가 지금의 세계이자 우주이다. 따라서 세계가 갖는 모든 특성들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생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들의 생성으로 분석되고 기술될 수 있다. 결국 ‘분할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비연장적인 현실적 계기들이 연대하여, ‘분할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연장성을 갖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간이건 공간이건 물리적 차원의 연장성은 현실적 존재들의 상호 연관이라는 근원적 사태에 의존하는 파생적 사태이고, 무한 가분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수학적 연장성은 이런 파생적인 물리적 연장으로부터 다시 추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관념이다. 그리고 지속 없는 순간이라는 개념은 이런 추상적 시간에 들어 있는 관념적 존재를 지칭한다. 제논(Zenon)은 이런 시간을 실재의 시간으로 간주한 결과, 역설에 힘입어 존재의 불변부동을 논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서의 시간은 사실상, 잇따라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계기들이 순차적으로 현실화시키는 ‘획기적 시간’들, 즉 ‘시간의 양자(time-unit, temporal quantum)’들이다. 이들은 현실적 계기의 원자적 생성과 운명을 같이하기에 역시 원자적인 것이다. 그래서 생성의 원자적 단위인 현실적 계기가 구현하는 단위시간은 곧바로 실재 시간의 최종 단위가 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시간철학, 이른바 ‘시간의 획기성 이론(the epochal theory of time)’의 기본 토대이다. 화이트헤드가 생성의 원자론자임을 자처했던 만큼, 이 이론은 ‘원자적 시간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생성의 원자론과 원자적 시간론에서 전통의 존재와 시간(공간) 간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생성(존재)이 시간(공간)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기 때문이다.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관념이다. 그리고 지속 없는 순간이라는 개념은 이런 추상적 시간에 들어 있는 관념적 존재를 지칭한다. 제논(Zenon)은 이런 시간을 실재의 시간으로 간주한 결과, 역설에 힘입어 존재의 불변부동을 논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서의 시간은 사실상, 잇따라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계기들이 순차적으로 현실화시키는 ‘획기적 시간’들, 즉 ‘시간의 양자(time-unit, temporal quantum)’들이다. 이들은 현실적 계기의 원자적 생성과 운명을 같이하기에 역시 원자적인 것이다. 그래서 생성의 원자적 단위인 현실적 계기가 구현하는 단위시간은 곧바로 실재 시간의 최종 단위가 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시간철학, 이른바 ‘시간의 획기성 이론(the epochal theory of time)’의 기본 토대이다. 화이트헤드가 생성의 원자론자임을 자처했던 만큼, 이 이론은 ‘원자적 시간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생성의 원자론과 원자적 시간론에서 전통의 존재와 시간(공간) 간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생성(존재)이 시간(공간)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기 때문이다.
변화와 결합체
현실적 계기들의 계기가 추상으로서의 수학적 시간뿐만 아니라 이런 추상의 토대가 되는 파생적 실재로서의 물리적 시간에도 존재론적으로 앞서는 것이기에, 현실적 계기의 생성은 추상적이거나 파생적인 시간축을 전제로 하는 자연언어의 ‘변화’라는 개념으로는 기술할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요컨대 현실적 계기들 하나 하나는 자신이 점유하는 각각의 단위시간 내에서 생성 소멸하기 때문에‘변화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동하는 거시세계의 감각적 사태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고 자연언어가 품고 있는 변화의 도식을 설명할 토대가 되는 불변자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의 생성 소멸은 변화의 일종이 아니다. 이 양자는 존재론적으로 지평을 달리하는 사태이다.
변화라는 개념은 연장된 물리적 시간을 향유하는 거시적 세계, 현실적 계기들의 ‘결합체(nexus,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 society)’에서 그 자연적 의미를 회복한다. 여기서 변화는, 특정의 현실적 계기들이 잇따라 생성 소멸하는 가운데 빚어지는 이들간의 차이로 환원된다. 앞서의 도식을 사용하자면, 세계의 과정을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인 현실적 계기들을 t1-S1-Q1, t2-S2-Q2, t3-S3-Q3……라고 할 때(여기서 t1, t2, t3…… 등은 ‘획기’, 즉 단위시간으로서의 시간의 양자들을 상징하며, 이들의 연속된 계열이 물리적 시간을 파생시킨다), 변화는 이행관계를 맺는 현실적 계기들인 t1-S1-Q1, t2-S2-Q2, t3-S3-Q3……의 거시적 이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계기들간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도식에서 보자면 자연언어의 논리에 전제된 변화의 담지자인 동일적 주체는 현실적 계기들의 이행적 상호연관으로 구성되는 ‘사회’이다. 이 사회의 동일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현실적 계기들이 모종의 특징을 계승하여 공유하게 되는 데서 온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한정 특성(defining haracteristic)’이라 부른다. 전통의 용어로 하자면 ‘형상(form)’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겪으면서 물리적 시간 속을 여행하는 모든 자기 동일적 존재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감싸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물리적 시간(공간)까지도, 생성 소멸할 뿐 변화하지 않는 원자적 실재들의 역동적인 상호 연대에 의존하고 있는 파생적 실재들이다.
결국 화이트헤드는 생성을 투명한 시간축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실재로 상정함으로써 시간과 존재 간의 전통적 관계를 해체 역전시키고, 변화를 이런 실재들의 계기에서 일어나는 파생적 사태로 기술, 설명하는 가운데 유전하는 세계를 합리적 구도 속에 끌어들였다. 여기서 전통의 실체라는 개념, 즉 다양한 속성들의 동일적 담지자는 사실상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경우 파생적인 것이요, 최악의 경우 추상적, 논리적인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전통의 실체속성의 도식도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은 성질(형상)에 있는 것이요, 실체는 이질적인 생성들로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파생적인 동일성은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현실적 계기들이 공통 특성의 계승을 부분적으로 거부하게 될 때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에 잡히는 거시적 존재들의 붕괴 또는 소멸을 설명해 준다.
사변이성의 모험과 문명의 창조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변화하는 세계를 사변적 이성으로 붙잡고 있는 20세기 신화이다. 그는 이 신화를 통해 존재와 시간, 이성을 화해시킴으로써, 인간이 갖는 모든 층위, 모든 영역의 경험에 의미를 주고자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신화 체계는 해석학적 기능을 갖는다. 이는 그가 다양한 인간 경험에서 드러나는 정보를 빠짐없이 의미 있는 것으로 고려하는 데서 문명이 그 생존의 활력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신화체계는 파편화되어 충돌하는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조정, 극복한다. 그는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적 사유를 억압하는 이들 관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궁극적 목표는 문명의 쇠퇴를 막고 창조적 전진을 부추기는 데 있었다. 그가 반(反)형이상학의 시대를 살면서 이에 역행하여 형이상학적 사변을 역설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사변은 문명을 위한 사유의 모험이요, 그 산물로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은 이 모험의 결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구축한 이 우주론은 자기 파괴의 기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것은 사유로 환원 불가능한 ‘우연적 존재의 집요한 특수성’이다. 이 기제는 그 체계
자체를 개방된 잠정적인 구조로 몰고 간다. 이는 그가 말하는 이성이 존재를 뿌리째 파악하는 독단적 이성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존재와 화해하고 있는 실험이성이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변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실험적 장치이다. 따라서 그의 신화가 우리의 경험을 배반할 때, 유동하는 세계 경험을 적절히 담아 내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신화를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새로운 신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화이트헤드 자신의 요청이기도 하다.
자체를 개방된 잠정적인 구조로 몰고 간다. 이는 그가 말하는 이성이 존재를 뿌리째 파악하는 독단적 이성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존재와 화해하고 있는 실험이성이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변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실험적 장치이다. 따라서 그의 신화가 우리의 경험을 배반할 때, 유동하는 세계 경험을 적절히 담아 내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신화를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새로운 신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화이트헤드 자신의 요청이기도 하다.
(※출처 : 철학아카필로 4월호)
2002-01-04 08: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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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
[명저탐방]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문 창 옥
1.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에게 영향을 준 특정인을 지적하기도 어려운 철학자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서두에 있는 당대의 주류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평가는 그의 철학적 성향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를 둘러싸고 있던 상반된 두 진영의 철학, 논리실증주의가 구상한 합리주의와 니체와 베르그송 유의 비합리주의를 모두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런 평가에서 우리는 그가 이들 어느 쪽에도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 이성에 대한 독단적 확신도 독단적 불신도 모두 거부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는 이처럼 화이트헤드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나 지나친 비관으로 경도됨이 없이, 전통의 철학을 해체하고 당대의 분위기 밖에서 체계로서의 철학을 실험하고 있는 현장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저술은 분명 지적 경계를 혁신했던 몇 안 되는 사례들 가운데 속할 것이다. 그것은 방대하면서도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신조어로 무장한 다양한 면모의 관념들을 엮어 놓고 있는 이 책은 일반인이 읽기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근대 철학에 대한 선이해를 조금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가 구사하는 특이하거나 낯선 용어들이 어째서 필요했는가를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다면 그만큼 우리는 화이트헤드 사상의 경계 안으로 들어서는 셈이 될 것이다.
『과정과 실재』는 1927-28년 학기에 행했던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s) 내용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사변철학을 위한 강의였다. 그는 사변철학을,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정합적이고 필연적인 일반관념들이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시도에서, 우리가 향유하고 지각하고 의지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체계적 도식의 특수한 사례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체계는 일종의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다양한 영역과 층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존재기술인 것이다. 동시에 그는 무엇인가의 의미를 포착한다는 것, 곧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함께 고찰하는 것이며 서로 필요로 하는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립된 존재, 또 그런 것으로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존재란 신화의 산물이다. 그것이 신이든 뉴턴 물리학의 물질입자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온전히 기술하는 체계 또한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정합적일 수밖에 없다.
2.
『과정과 실재』는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I부는 존재 기술을 위한 기본 범주들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열거하고 제II부에서는 이들 범주를 철학사의 다양한 논의를 배경으로 실험한다. 제III부와 제IV부는 그가 기장 궁극적인 단위 존재로 구상한 '현실적 존재'를 분석적으로 해명하고 제V부는 신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대략 이 순서에 따라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밟아간 여정을 개괄해 볼 것이다.
『과정과 실재』의 기본 이념은 표제어 그대로 '실재는 과정이다'라는 언명으로 요약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행하는 과정의 결실에서 생겨나 새로운 요인을 구현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존재 과정의 밑바닥에는 새로운 종합을 끊임없이 산출하려는 힘인 영원한 활동성이 관통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창조성'(creativity)이라 부른다. 우주는 이 창조성의 산물들 즉 그 개별적 구현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조성은 그 다수(many)의 구현체들을 새로운 일자(one)로 종합하는 보편적 에너지이다. 화이트헤드의 범주적 도식에서 이들 세 관념 즉 창조성, 다, 일은 '궁극자의 범주'(category of the ultimate)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그의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에 전제되는 최고의 일반성을 지닌 궁극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별개로 놓아 각기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한정하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호 연관 속에서 의미를 얻을 뿐이다. 요컨대 '다에서 일로의 창조적 전진'이 그것이다. 이 창조적 전진의 사태는 그밖의 어떤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직접적인 직관적 경험에 의해 포착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서 가장 구체적인 단위 존재로 등장하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또는 약간의 의미 차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는 바로 이런 창조적 전진을 구현하는 기본 사례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실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신도 현실적 존재요 우주 속의 하찮은 먼지도 현실적 존재이다. 그 중요성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원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모두 동일한 지평에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초월적·절대적 존재 지평은 사라진다.
현실적 존재는 다수의 다른 존재들을 자기화하는 과정으로 존립한다. 그것은 다수의 타자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때의 자기화 활동을 '경험'이라 통칭한다. 그래서 존재는 경험의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실재가 경험 그 자체라는 학설은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결코 이를 기초로 형이상학을 구상하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occasion)이라는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채택하였다. 이런 존재 이해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전통 철학의 문맥에서 급격히 일탈케 하였다. 철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자아, 모나드, 물질적 원자 등을 존재의 기본 단위로 실험해 왔다. 화이트헤드는 이제 전혀 다른 유형의 존재, 곧 경험을 통해 생성하는 존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계기를 현실적 존재로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구체적인 직접 경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착이다. 직접적 경험은 가장 완벽한 사실인 데 반해 다른 모든 것들은 창백한 추상이다. 물질적 존재나 영혼과 같은 어떤 정태적인 실체가 있고 이들은 이들이 겪는 순간 순간의 경험에서 어떤 역사적 특성들을 획득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간 순간의 경험이 궁극적 실재이며, 정태적 실체는 이 구체적 실재들로부터의 추상이다.
물론 이 존재 일반의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고등 유기체가 그 자신의 세계 가운데 어떤 부분을 조명하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우리 인간조차도 의식하기에 앞서 우주를 '경험'하며 우리는 의식에서 우주의 세부 사실들을 선택 수용할 뿐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의식은 기본적인 범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서조차도 항상 내재하는 것이 아닐 정도로 우주 내의 모든 경험의 방울에 본질적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나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경험 개념에 대한 이런 확대된 이해는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근대 인식론 철학과의 차이로 자리해 있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정 부분 타자 의존적인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그것은 이미 생성한 존재들을 경험의 객체로서 필요로 한다. 그것의 생성 과정은 이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험을 통합하여 하나의 경험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다. 타자 각각을 통일된 향유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경험의 사유화(私有化) 작용은 '느낌'(feeilng) 또는 '파악'(prehension)이라 부른다. 이들 파악을 하나의 복잡한 파악으로 통일시키는 현실적 존재의 내적이고 미시적인 과정은 '합생'(concrescence)이라 부른다. 그래서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그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존재하는 여건들(data), 즉 경험의 객체들을 통합하여 일자인 경험의 주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또한 주체-객체 관계는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 철학에서 주체-객체 관계는 의식적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의 경험 일반을 범주화한 파악이라는 개념은 훨씬 더 넓고 근본적인 존재론적 관계이다. 그것은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맺는 정서적(emotional) 관계이다. 모든 파악은 그 본질적인 요소로 그것의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주체가 그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 곧 정서적 색조이다. 주체는 이런 저런 가능태로서의 객체를 중요한 것, 사소한 것, 또는 관계없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파악의 주체적 형식을 가치평가라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중립적인 대상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정서적 느낌이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 패턴을 제외하고는 여건은 결코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빨간 색은 따뜻함으로, 파란색은 차가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파악은 논리적·정태적 관계가 아니라 객체를 주체의 구성 속에 이끌어들이는 관계활동, 또는 이행(transition)이다. 그것은 정태적인 사태가 아니라 '벡터'(vector)이다. 그것은 저기에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파악은 벡터와 마찬가지로 화살표로 상징될 수 있다. 이때 화살은 저기-과거에서 여기-현재로 달린다. 그래서 그것은 시공간적 연장을 동반하는 관계이다. "저기"는 아무리 미소한 시간차라 하더라도 시간에 있어 지금 이전에 있고, 공간에 있어 "여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품고 있는 실재론을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칸트와 반대로 어떻게 주체적 경험이 객체적 세계로부터 출현하는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우주를 구성하는 미시적 존재로, 우리가 일상적 외적인 감각경험에서 현실적 존재들의 어떤 명확한 원형적 사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수의 현실적 존재들 간의 상호 파악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의 거시적 존재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들을 '결합체'(nexus)라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사물들은 물론이요 우리가 보다 가까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신체도 결합체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직접적인 경험의 궁극적 사실은 기본적으로 현실적 존재, 파악, 결합체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 그밖의 모든 것은 파생적인 추상들이다.
추상적 유형의 존재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유형의 존재는 무규정적 창조성과 대별되는 규정자인 영원한 객체들(eternal objects)이다. 이들 존재는 플라톤의 형상을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현실적 사태를 규정하는 가능적 형식이다. 이들은 감각적 특성, 기하학적 및 수적 특성, 정서적·의지적 특성 등을 이루는 패턴들이다. 생성의 과정에 있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무수한 가능성들로서의 이들 특성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파악함으로써 그 자신을 한정한다. 화이트헤드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파악인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과 구별하여 이들 영원한 객체에 대한 파악을 개념적 느낌(conceptual feeling)이라 부른다.
그리고 물리적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물리적 극(physical pole)이라 부르고 개념적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정신적 극(mental pole)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화이트헤드는 정신과 신체가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라는 학설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과 신체의 문제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모든 논란은 현실적 계기 벌이는 두 가지 활동 양태의 어떤 대비로부터 추상된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계기는 경험의 계기라 했다. 그렇기에 그것의 물리적 극은 불변하는 실체라는 의미의 물질로 구성된 것일 수 없다. 각 계기의 물리적 활동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를 순응적으로 수용하는 측면이다. 그래서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 극은 계기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 들인다는 점에서 계기가 벌이는 창조적 활동의 측면이다. 정신성의 정점에 놓인 의식은 이런 창조적 활동의 극단을 구현한다. 그래서 의식 중추를 이루는 현실적 계기들은 과거에 대한 순응보다는 그로부터의 일탈을 특징으로 지니게 된다. 모든 현실적 계기는, 비록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극의 통합된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한정의 형식으로서의 영원한 객체는 한 계기에 실현된 후, 후속하는 계기에 의해 계속해서 재차 파악됨으로써 반복 실현될 수 있다. 여러 현실적 계기들로 구성된 결합체 가운데 특정의 영원한 개체들을 이렇게 반복해서 파악하고 있는 결합체를 화이트헤드는 '사회'(society)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파악되는 영원한 객체는 그 사회의 한정자 즉 '한정 특성'(defining characteristics)을 이룬다. 이 범주를 통해 생성 소멸의 철학은 실체 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사태를 설명한다.
사회와 한정특성에 대한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변화의 철학이긴 하지만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극단적으로 유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사회처럼 역사성을 가지는 존재는 어떤 일정한 한계 내에서 반복에 기초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또한 그것은, 생성 소멸할 뿐 변화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적 계기와 달리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변화 속에서 어떤 동일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은 밑바탕에 있는 실체 때문이 아니라 한정특성을 구성하는 그 형상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물리과학이 다루는 물리적 사물과 인격적인 동일성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들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절대자가 아니라 가변적인 복합체이다. 모든 사회는 생멸의 운명 아래 있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는 이렇게 생멸하는 사회들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보다 큰 사회 속에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사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그 자체도 하나의 사회이다. 자연과학이 논하는 자연법칙은 이 우주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한정 특성의 일부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것도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 수 없다. 물리적 우주의 쇠퇴는 지금 지배적인 파악들이 보여주는 패턴의 쇠퇴로 해석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에 의해 한정되는 새로운 사회들이 다른 우주시대에 등장할 것이다. 우리의 우주 자체가 새로움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셈이다.
3.
지금까지는 현실적 존재의 체계 내적 지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기본 범주들을 중심의 화이트헤드의 존재 이해와 우주론을 요약해 보았다. 이제 현실적 존재 자체에 대한 분석적 기술을 간략히 살펴보자.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의 내부에 대한 기술에서 인간의 온갖 활동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우리는 기본 골격만을 추려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발생론적 분석과 형태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이들 두 분석 방식은 각각 『과정과 실재』의 제III부와 제IV부의 논의를 구성한다.
발생론적 분석은 경험하는 주체의 자기 창조 과정인 합생에 대한 분석이다. 그 발생의 첫 위상(phase)에서 현실적 계기는 단순히 통합을 위한 여건으로서의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들을 파악한다. 물리적 느낌을 위한 여건은 그 현실세계 내의 현실적 계기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계기를 구성하고 있는 느낌들이다. 이 위상에서 이들 느낌은 순응적으로, 즉 공감의 형식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서 계기의 첫 위상은 과거 계기들의 작용인의 산물이다. 그러나 합생의 중간 위상으로 넘어가면서 현실적 존재는 자신이 구하는 이상(목적)에 비추어 이들 여건에 자신의 색채를 부여하는 보다 주체적인 과정을 진행시킨다. 그래서 합생은 목적론적 과정이 된다. 우선 그것은 첫 위상의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느낌에 의해 질적인 평가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 두 유형의 느낌들은 통합과 재통합을 거쳐 합생의 끝에 놓인 '만족'(satisfaction)의 위상에 이르면 하나의 복잡한 느낌으로 결정된다. 이 최종의 위상인 만족은 사실상 그 첫 위상에서 그 계기가 품었던 이상의 실현이다. 이 최종의 위상에서 현실적 존재는 미래의 존재가 느껴야 할 자신에 대한 예기적(anticipatory) 느낌을 포함한다. 이것은 생성의 완결로서, 후속하는 계기들에게 주어질 여건, 따라서 미래의 창조성을 제약하는 작용인의 역할을 하게 될 실재적 가능태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이렇게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새로운 전망 속에 통일되기를 기다리는 환경 속에 객체들로부터 시작되어 계기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자기 모습의 달성에서 종결되고 이어서 후속하는 생성의 새로운 주체들에 객체로 주어진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경험의 주체는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 요인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스스로 생성하는 주체, 생성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과정의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의 궁극적인 한정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가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문맥에서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에 유기체라는 기술적(descriptive term)용어를 적용하고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부르는 중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유기체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환경적 요인들을 자신의 요소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이를 유비적으로 추론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적 존재가 작용인뿐만 아니라 목적인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발상은 고전적 사유를 이끌었던 목적인과 근대적 사유의 지배자였던 작용인을 화해시키고 있다.
나아가 현실적 존재가 첫째 위상에서 느끼는 작용인으로서의 우주와 마지막 위상에서 주체적으로 느끼는 우주의 차이는 그것이 발견한 다수의 공적인 실재와, 그것이 자신의 것으로 변형시켜 사적으로 경험한 현상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 차이는 목적인에 따른 개념적 가치평가의 결과, 즉 정신적 극의 산물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정신성은 통일하고 변형시키는 작인이라는 근대적 학설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신성이 단순화의 작인이라고 역설한다. 강력한 개념적 느낌을 가지는 현실적 존재는 그의 직접적인 환경 속에 있는 다수의 계기들에 공통된 성질들을 하나의 지배적인 인상으로 통합시켜 단순화한다. 그래서 여건들 사이의 세부적인 차이가 지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고도의 정신적 경험인 의식적 인식에서 다수의 생성의 원자들을 식별하지 못하고 거시적인 대상들만을 보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온전한 지각 경험은 단순한 현상만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와 현상간의 어떤 결합을 포착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 경험은 과거의 환경에 대한 물리적 느낌과 이를 계승하는 신체의 물리적 느낌에서 출발한다. 이런 물리적 느낌을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의 지각'이라 부른다. 이들 느낌을 통해 외부의 인과적 작인은 희미한 정서적 박동의 형식으로 수용된다.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을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선택적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특히 대뇌의 의식 중추를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이들 인과적 느낌들을 끌어 모아 변환·강화시켜 특정한 색채나 냄새 등의 감각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물리적인 인과적 느낌들은 개념적 느낌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지각'이라 부른다.
전통 철학은 인과적 효과성을 도외시하고 현시적 직접성에 주목해왔다. 무엇보다도 후자가 명확하고 명료하여 삶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실천적 유용성에 의해 철학적 사변이 왜곡되는 것을 경계한다. 대표적으로 근대 인식론은 명석 판명성의 유용성에 현혹되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에만 매달린 결과 유아론적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지각이 현실적 직접성의 지각 내용을 통해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내용을 해석하는 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은 두 양태의 지각, 즉 실재에 대한 지각과 현상에 대한 지각이 상호 연관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지각 양태를 '상징적 연관'(symbolic reference)이라 부른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 철학을 비판하면서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감각지각의 인식론이다.
나아가 현상에 대한 이론에서 화이트헤드는 진리관계, 의식적 판단과 인식 등이 어떻게 파악과 이들의 통합에 관한 그의 일반 이론이 제공하는 문맥에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리관계는 현상과 실재의 대응으로 이해된다. 의식적 판단 내지 인식은 주어진 사실로서의 결합체에 대한 느낌과, 가능한 사실로서의 그 결합체, 즉 명제에 대한 느낌(요컨대 명제적 느낌,)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실'과 '사실일 수 있는 것' 사이의 대비를 느끼는 방식이다. 대비가 명확한 만큼 의식도 명확해진다. 이런 대비는 부정적 지각에서 특히 부각된다. 즉 회색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이 집중된 의식을 동반하지 않고 흔히 일어나는 반면 회색이 아닌 것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은 명확한 의식을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이트헤드가 "부정적 지각은 의식의 월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부정적 지각은 자유로운 상상과 일맥상통한다. 허위 인식도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정과 상상에 힘입어 우주에 여건으로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우리의 경험에 도입된다. 상상적 예술과 문학의 가치도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고도 의식의 산물이자 창조적 전진으로서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대표적인 작인이다.
4.
현실적 존재에 대한 형태론적 분석은 그 자신의 생성을 끝낸 완결된 현실적 존재에 대한 분석이다. 이 때의 현실적 존재는 후속하는 모든 생성의 주체에 주어진 객체이다. 그것은 주체로서 소멸한 존재이다. 이는 그것이 더 이상 현실태가 아니라 후속하는 생성을 제약할 가능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창조적 전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속적인 창조적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자기구성 중에 있는 현실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원자적인 것으로 분할 불가능하다. 분할할 경우 그 현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구성을 마친 가능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무한히 가분적이다. 그것이 가지는 이 가분성은 시공간이론의 기초가 되는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의 기본 속성에 속한다.
연장적 연속체는 연장성과 가분성에 기초한 소수의 관계적 특성만을 지닌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시공간의 차원적 성격과 계량적 성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특정한 우주의 국지적인 특성에 불과하다. 이들은 연장적 연속체를 이 우주가 특화하여 구현하고 있는 우연적 요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연장적 연속체는 그 관계항으로 현실적 계기들이 점유하는(또는 점유하게 될) 영역들을 관계항으로 하여 구성되는 가능적 네트워크이다. 각 현실적 계기는 그 과거의 현실세계가 현실화한 이런 가능적 관계성의 네트워크를 계승하고 그 관계항을 이루는 특정 영역을 파악, 점유함으로써 자신의 시공간 양자를 현실화시킨다. 흔히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시공 연속체는 이들 생성의 계기(succession)와 병치 관계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시공간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리고 시공간은 원자적 생성 과정에 선행하는 현실태가 아니라 원자적 생성에 힘입어 비로소 현실화되는 가능태이다. 그것은 가능적 연속체이다. 시간과 공간은 현실적 계기들의 생성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5.
『과정과 실재』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신학에서 정점에 이른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우주론에 종교의 섬세한 직관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는 인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해온 종교적 직관이 유동과 대비되는 영속성의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신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유의 경험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현실적 존재이다. 다른 시간적 계기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양극성을 갖는다. 정신적 극을 이루는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물리적 극을 이루는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이 그것이다. 전자는 영원한 객체들 전체를 질서지어 파악한다. 이 파악에서 신은 초월성과 영속성을 얻는다. 그리고 순수한 가능태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은 신에 의해 파악됨으로써 현실적 근거를 마련한다. 현실적 계기들은 그들의 한정자, 즉 이상을 신의 이러한 파악에서 얻는다. 역으로 말해서 신은 합생의 시초에 그것에 이상을 제공하는 자로서 현실세계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여에 의해 이상적인 것들이 시간적 세계에 작동되고 질서의 형식이 생겨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사물의 기초에는 개념적 느낌의 무제약적 현실태 즉 신이 있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관여는 강요가 아니라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의 기획은 시간적 세계에서 실패할 수 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에게서 전능의 관념을 배제하는 논리이다. 전능한 신은 시간적 세계에 자유와 새로움을 박탈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은 전통적 의미의 창조자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창조성의 피조물이리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신은 '창조적 전진'의 근원적 사례로서, 다자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을 일자로 통일시키면서 탄생(이것은 논리적 의미이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창조에 선행하지 않으며 다만 영속하는 원초적 본성을 통해 시간적 세계의 자기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창조자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원초적 본성은 신의 일부 특성이다. 존재-신학적 논의가 시도해왔던 것처럼 영속하는 초월적 실재와 일시적인 시간적 실재를 대비시키는 것은 후자를 부질없는 착각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는 세계가 구현하는 새로움(novelty)과 무관한 영속성은 죽은 영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을 현실적 존재라고 했을 때 이미 시사되었던 사실이다. 다른 시간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은 유동하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파악한다. 이런 파악으로 구성되는 신의 측면이 결과적 본성이다. 이 측면에서 신은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생성한다. 신 자신이 유동의 한 가운데 들어간다. 여기서 신은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범주적 조건, 즉 경험을 통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신은 유동하는 시간적 세계를 파악하는 가운데, 원초적 본성이 제공하는 초월성을 넘어 그 완전한 현실성을 확보한다. 결국 영속하는 현실태는 그 완결을 위해 유동을 필요로 하고, 생멸하는 현실태는 그 이상을 위해 영속하는 현실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면서 역설하는 신과 세계의 상호 의존성이다. 고립된 존재는 신화이다. 신이든 세계이든 인간이든.
-출처 : 『철학과 현실』 200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