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2011-0327) 주일 설교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
<시편 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할렐루야!
오늘 같이 나누려고 하는 말씀은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1.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로 되어 있습니다. 첫머리가 복 있는 사람에 관한 화두입니다.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은 복이 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묵상하는도다.”(시1:2) 여러분 이 시편 1편 2절의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서의 말씀입니다.여호수아 1장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다.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모세는 걸출한 지도자여서 출애굽의 대서사시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입성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가나안에 들어가겠다는 간구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라고 하십니다. 모세만이 아니고 모세를 따르던 사람들도 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출애굽의 주인공이었던 모세가 가나안 입성에 있어서도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지도자는 자신의 지도력이 아주 막강할 때에는 후계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세에게도 가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하시며 여호수아를 가나안 입성의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다른 사람도 놀랐겠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여호수아 자신입니다. 자신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한 것과 같이 너와 함께할 것이라.”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묵상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너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 사람이 볼 때에는 모세만이 위대한 지도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는 가나안 입성은 모세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몫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모세가 다 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람이 생각지 못했던 여호수아가 이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순종했고,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러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역을 멋지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고백할 때에, “너희는 너희가 좋아하는 신들에게로 가라.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수 24:15)고 일관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2. 시간을 불문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와 비교할 때, 그의 능력은 조족지혈에 불과한 듯 보입니다. 그런 모세도 가나안 입성을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가 하지 못했던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관성이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면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반석을 더 많이 치기도 하고, 십계명의 돌판을 집어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일관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예언은 엘리야를 통하여, 모든 왕권은 다윗을 통하여, 모든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어디에도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한 가지는 가나안 입성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완수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가 비록 가나안 입성에 있어서 유약하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존재였지만, 가나안 입성의 완성에서 돌이켜보니 그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신뢰, 일관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가나안 입성의 완성을 이루게 하였을까요. 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믿음을 지키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데서 가능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주야로 묵상했다고 하는 것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자신도 가나안 입성을 이끌어갈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맡기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모세와 견주어서 도저히 가나안 입성에 지도력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운 것을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강한 것 보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택하셔서 가나안 입성의 위대한 일을 맡기실 때에, 자신도 감당이 안되고 자신의 선배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여호수아를 보며 모세에게서 보던 위엄을 느낄 수 없었지만, 하나님 한 분은 여호수아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세처럼 홍해를 가르는 대단한 능력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한번도 변하지 않는 일관성을 가지고 가나안 입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이 배신하고 떠나가고 자신이 어렵게 되었을 때에도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것입니다. 시간에 관계없이 묵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다는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다윗이 지금 시편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맘모니즘적인, 기복적인 복을 추구합니다. 이 것이 싫은 사람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기복신앙을 배격하는 태도를 갖기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이 고백하고 있는 이 복이 있는 사람은 맘모니즘적인, 세속적인, 기복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덕과 윤리적인 자아도취적인 신앙관도 아닙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 그저 그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흐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도 있습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저는 설교하기 위한 재료로 바라보았던 성경구절이 제 마음에 강하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바로 성경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 굉장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잘 알아서 정확하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의 사건이 두 번이냐 한번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사실이 제게 큰 깨달음과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성경구절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사람을 바꾸어 놓기 시작합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감옥속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성경구절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깊은 해석이 필요하거나 정교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결구절 자체만 가지고도 그 말씀을 낮이나 밤이나 늘 묵상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고 우리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고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도 성경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인격을 수양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이 되기 때문에, 더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나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다음 창세기에 보면, 창세기 24장 63절에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보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삭의 묵상은 바로 들에서의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의 묵상이 시간을 넘어서는 언제나의 묵상이었다면, 바로 이삭의 묵상은 장소를 넘어서는 묵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집에서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들에서도 묵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자신의 일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요란법석을 피우면서 일터에서 찬송 부르고 하루 종일 말씀을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일터에서도 묵상하라는 뜻입니다.
묵상은 여호수아의 묵상처럼 주야로, 이삭의 묵상처럼 들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주야로 묵상하고 집에서도 들에서도 묵상하시고 사시게 되면 여러분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구절 자체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 자체가 하나님의 기록으로 쓰여진 것이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 성경구절이 들어가는 순간, 우리들의 영을 새롭게 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들에게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4.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의 힘을 얻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눌 말씀은 묵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잠잠할 묵(默)자에, 생각할 상(想)자를 썼으니 ‘잠잠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묵상이라는 말과 명상이라는 말이 라틴어에서는 비슷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메디타찌오(meditatio) 라는 말은 명상이라는 말에서 영어의 meditation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라틴어의 메디타찌오(meditatio)라는 말이 나온 본래의 어원은 메디켈로스(medikelos)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메디캘로스(medikelos)는 영어의 약(medicine)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갖습니다.
결국 그들은 ‘명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약을 먹어서 약이 온 몸에 퍼지는 것과 같이 명상하는 것이 약을 먹듯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먹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우리의 몸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하고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시 19:14)
히브리어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묵상은 ‘하가’라는 말로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의성어입니다. 그것은 바로 숨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나는 소리가 바로 ‘하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숨소리로부터 나온 이 ‘하가’라는 말은 시편 77편 12절에 보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이 묵상이라는 말이 숨소리에서 나왔는데, 이 숨소리는 숨을 내쉴 때 나는 소리처럼 모든 생각과 호흡까지도 정지하고 입으로 마음으로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되뇌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되새김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읖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지’, 그러면, 요단강 앞에서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병을 고치셨지’, 병든 자들이 그 말을 듣고 힘을 얻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기드온의 300용사를 가지고도 승리하셨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 앞에 거대한 세력이 둘러 진을 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물맷돌 하나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워 이기게 하셨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어’하고 힘을 얻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여호수아 1장에 나와 있는 묵상이라는 ‘하가’라는 말은 시편 77편에서도 그대로 쓰여지는데, 한글로 표현할 때에 77편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되뇌인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묵상은 그렇게 의성어인 숨소리인데 무언가 숨이 터질 때에 나오는 소리 속에 작은 소리로 낮은 소리로 읊조리면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멈추어서 숨이 터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힘을 얻고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 그곳에서 자신의 영혼을 겸손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숨이 멎도록 생각하는 것입니다. 숨이 터져 나오면서 나오는 일성(一聲)은 원망과 비탄과 절망과 한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앞에 놓인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평탄한 길을 걷게 될 것이고, 형통해질 것이고,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마지막, 여러분이 묵상을 하시게 될 때에, 이런 것들을 생각하시라는 메시지를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가 숨소리가 터져나오는 작은 소리가 들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했기에 이제는 원망과 불평과 절망과 탄식은 사라져 버리고 감사의 소리가 나오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다시금 되뇌어 지면서 여러분의 나아갈 앞길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받은 영적인 통찰력은 무엇일까? 내가 따라가야 할 내 삶의 롤 모델은 무엇일까? 내가 이 말씀대로 살려면 피해야 할 실수와 오류는 무엇일까? 내가 회개해야할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맘에 들지 않을지라도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 묵상을 하실 때에 이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시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읊조리며 사시다보면 우리는 복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