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使役)/동대문교회 역사문화원

동대문교회 복원 운동과 감리교 선교의 가치(이상윤 목사)

우순(愚巡) 2022. 3. 10. 15:35

동대문교회 복원 운동과 감리교 선교의 본질 (정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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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교회 복원 운동과 감리교 선교의 가치

 

 

 

 

이상윤 목사(감리교미래정책연구원 원장/ 전 동대문교회 부목사)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 속에서 수도 서울의 동쪽 끝을 차지하고 있던 동대문 지역 일대는 미쳐 한성에 들어오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이 답십리 전농동 일대에 흩어져 농사짓고 노동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조선왕조의 중심은 역시 북악산과 더불어 남쪽의 목멱산이 도심의 한복판을 꽉채우고 있었고 조산인 삼각산과 어울리는 백악산은 왕조의 번성을 보장하고 서쪽으로는 인왕산을 동쪽으로는 낙산을 품고 있었다. 거대 도시 서울은 개발붐에 편승하고 70년대 영동개발의 폭탄이 터지면서 구도심 개발은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동대문은 청계천 복개로 확보된 평화시장과 연계되어 한국 현대산업의 상징처럼되었던 보세산업이 발달하고 고용효과를 높이던 청계천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두산그룹의 본사로 유명한 동대문운동장 앞 지역의 번성한 모습과 유명 어퍼럴 메이커들을 다모은듯한 동대문 시장과 동평화시장과 동대문 일대를 디자인하는 동대문 운동장과 시온교회 일대의 디자인센터는 말할 것도 없다. 을지로 56가의 훈련도감 공원자리와 한때는 미군의 공병대가 와 있던 방산시장 건너편도 있지만 국민생명을 책임지는 국립의료원이 있어 인간 삶의 질을 높이려는 서울의 위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은 동숭동 언덕 이화동에서 시작하여 동대문을 거쳐 쌍림동 일대에는 러시아거리가 번창하면서 이주민들의 집단거주기 되어버린 동쪽 서울의 한축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대 환경위기를 타개하는 상징으로서 등장한 청계천 복원은 결국 한양 성곽복원이라는 서울시의 중점사업으로 번져나갔고 여파에 쓰러진 것이 동대문교회였다. 동대문은 지난 130년 동안 근대적 의료기관인이대부속병원과 감리교 동부연회의 모교회로서 동대문교회가 크게 자리하고 있이다.그러나 청계천의 복개시설을 한숨에 부수어버린 서울시는 친환경 관광자원확보라는데 꽂히면서 성과곡원에 매달렸던 것이다.

 

흥인지문의 모체가 되는 낙산은 당시만 해도 대중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가 있다는 이화동을 비롯하여 동숭동 대학로는 잘 알고 있었다. 1976년 국립 서울대학교는 관악산으로 옮겨 갔지만 청년 문화의 대명사인 동숭동 대학로는 서울대병원과 함께 문화 예술과 이주민 거주지로 각광 받으면서 낙산은 더욱 번창하고 있었다. 비록 125미터 높이의 산자락이었지만 성북동 골짜기에 경신학교와 함께 성균관대학교를 거치면서 발달 된 낙산의 기운은 혜화동의 동성학교와 한국 가톨릭의 영적 본산지인 혜화동의 소신학교 대신학교를 품에 안고 남쪽 끝자락에는 동대문감리교회당과 중앙성결교회를 존재 하게 만들었다.

 

낙산은 인왕산과 함께 좌청룡 우백호라 불리우는 곳으로 산으로서는 작지만 지세로서는 좌청룡 소릴 들을 수 있는 산지였다. 물론 훗날 서대문 현저동 구치소가 안양 청계산 밑으로 물러나면서 서대문의 안산이 무악재를 거느리고 북부 서울의 관문이 되었지만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울 4대문 가운데 적들의 내습을 기피하고 후공에 유리한 옹성을 가지고 있는 문으로 남아 있었다. 낮은 연약지반임에도 불구하고 동대문은 시장이 번창하고 노동인구가 밀집하는 지역이었다. 개발의 열풍이 불어오고 있던 시절부터 동대문 하면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바로미터였고 엄청난 크기의 시장과 노동력을 수용하는 피복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화일반에 대한 크기가 남달랐던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 역사문화박물관은 현대 서울을 이해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번영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2014년이 되어서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동대문교회가 철거당하고 동대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 하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

성장의 그늘에 가린 창신동 시다 골목을 안고 동대문성곽 오른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던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도심개발과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토목공사에 밀려서 이대병원이 그러한 것처럼 백년의 보금자리인 동대문 언덕을 박차고 사라졌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우리는 여기에서 동대문교회의 존재 이유와 함께 미래한국의 청사진에 선교 한국의 사명을 절박하게 선포하는 동대문교회의 복음의 능력을 점검하고 선교전략과 함께 비장의 무기인 성령 사역의 장래를 구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1960년대 동대문 지역이 마포에 종점이 있듯이 그저 동대문 종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종점이 아니고 구리 성남으로 열려 있는 오늘의 동대문 지역의 발전과 동묘 일대의 재개발 붐을 보지 않더라도 지금도 왕성하게 한국 섬유산업의 재가공 메카인 동대문 시장과 디자인센터가 자리하고 있는 구 동대문운동장과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과 마주하고 있는 장춘단 공원까지 이어져 있는 동대문 선교지역은 70년대 엄혹한 시절의 피복노조 설립을 위하여 분신한 감리교 갈릴리교회의 영원한 청년 전태일의 꿈이 흐르는 청계천 평화시장이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청계천 변 수로를 바라보면서 선교 동대문의 내일을 꿈꾸어 보자는 것이다. 개발의 뒷골목에서 뒤늦은 차례를 기다리는 창신동 숭인동 일대의 현실은 동대문교회의 민낯이기도 한데 문제는 겉으로는 화려한 듯 부유하지만 뒷 골목 어두운 거리에는 하청업자들의 중노동과 가난한 노동자들의 주름진 얼굴이 교차하는 동대문은 석재만 파먹고 가버린 창신동 언덕처럼 그렇게 방치되어 버림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동대문은 동묘의 길거리와 신설동의 방만함을 거느리고 있는 낯선 어디인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숭인동은 역시 낙후되어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있을 때에도 빈곤 지역인 흥인문 일대는 서대문 쪽 방면인 아현 고개(애오개)와 함께 감리교 선교부는 정동의 이화학당 옆에 운영중이던 시병원을 모체로 삼아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아현교회를 삼각축으로 보구여관 시약소를 운영하고 있어서 특히 해당 지역들에는 가난한 서민들과 부녀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살리려는 선교부의 노력으로 근대적 의료기관들이 들어와서 의료활동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가난하였고 양극화에 대책없던 이들을 복음으로 보듬고 역사하던 감리교 선교부는 헐벗고 굶주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살리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동대문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선교적 소명일터 문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는 가난한 이웃으로 삶의 질을 높여야만 영혼 구원의 안식을 이뤄야 하는 흥인문 일대의 동대문교회가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그것이 있어 가능한 선교의 목표 선교의 비전인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편히 쉬게 하는 사역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 였던 것이다. 동대문 교회 복원사업의 궁극적 과제는 이처럼 성서적 소명인 가난한 이들을 조직하고 프로그램에 이끌고 교회는 기도하고 후원하는 복음 사역을 말하자는 것 아닌가. 지금 서울연회와 종로지방이 추구하고 동대문교회가 견인하는 복음 선포의 결정적 힘은 바로 여기 동대문교회 선교와 목회 현장에 필요하는 것이다.

 

 

3.1운동 103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연회는 13개 지방회 전체가 참여하는 3.1절기념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동안 추진해 왔던 동대문 교회복원사업을 활성화 시키자는 취지와 목적으로 역사적 동대문교회 복원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 물론 장소는 흥인지문 공원이다. 서울연회 13개 지방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이번 집회는 3.1운동 기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연회적인 과제요 전체 감리교단의 과업인 동대문교회의 정상화 복원을 위한 행동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동대문교회 문제는 감리교로서는 만시지탄 아쉬움만 가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점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서울연회가 하나되는 가운데 공개 행사를 치루고 연회 전체의 의지와 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여서 선교와 정치적인 결단을 행동으로 보이자는 다짐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를 반드시 기필코 복원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새 역사를 쓰려는 결심이 돋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라는 것은 수식어가 아니고 동대문교회가 수도 서울의 동부 연회 모 교회이고 미 선교부의 전략적인 선교지역이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업이요 목표라는 것이다.

 

사실이지 그동안 동대문교회는 서울시 성곽복원사업에 연루되면서 벌어진 동대문교회 이전신축 문제는 교회 내부의 분란과 함께 증폭되어서 교단은 교단대로 속수무책이고 연회는 연회대로 치리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로 존재해왔다. 다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사적인 동대문교회 구역과 당회는 토지보상금을 놓고 교단과 재판을 벌였고 행정 치리로는 담임자 출교라는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로 나가면서 성곽복원과 교회 건물 철거를 단행하면서 교단과 보상금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분당으로 이전한 동대문교회는 보상금의 일부 만을 가지고 중앙연회 분당지방 새론교회와 합동하여 이전하였고 표면적으로는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동대문교회 주류들과 생각이 다르고 신앙의 스타일이 다른 흥인문교회와 남은자교회는 흥인지문 공원 언덕에서 십수년을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왔던것이다. 그리고 이제 서울연회가 결심한 대로 두 교회 그룹은 행정적으로 신앙적으로 합동하는데 도달하고 역사적인 동대문교회 명칭을 회복하면서 새로운 담임자를 모시게 된 것이다.

 

옛말에 아무리 바뻐도 바늘허리는 매어 못쓴다는 속담을 상기시킬 뿐이다. 동대문교회 보상 문제는 여명의 동산에서도 드러났듯이 동대문교회 주류들이 쥐고 있는 동대문 교회 당회의 권한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작지 않은 보상금 규모도 그렇게 정서적으로도 합의처리 할 사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속담처럼 동대문교회는 심하게 말해서 강건너 불구경이나 진배없었다.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수의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었지만 모두 무료봉사에 그친 것이다. 동대문교회 남은자들과 흥은문 교회로서는 유감스럽겠지만 사실이 그러니 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특히나 상대가 서울시이고 친환경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는 지자체 사업인 성격상 성곽복원사업에 협상안에는 100년이 지니고 있는 무게보다는 실질적인 교회 대지 크기인 786평에 대한 지자체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였다. 다만 혼란스러움이 극치였던 이유는 복원사업을 전후하여 취임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서 터진 담임자의 사생활 문제가 교단의 정서와 여론을 거슬리면서 충돌하였고 여기에 동대문교회 전임자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음해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면서 사건의 핵심은 빠지고 유언비어만 횡행하면서 표류하고 말았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는 말이다.

 

동대문교회의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정도로 악화된 데에는 후임 목사가 비 감신이라는 측면도 무시 못한다. 감신 출신이면 그렇게까지 되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누구에게나 있다. 여기에 지금 추진하는 동대문교회 복원사업의 숨겨진 이면이 도사리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고 추진하면 반드시 벽에 부딛친다. 그것이 이글을 쓰는 이의 요점과 핵심인 것이다. 훗날에는 진실이 밝혀지지만 지금 당장은 수습 불가능하니 뒤소 미루는 어리석은 부류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진실을 진실되이 말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공개된 복음 사역에서의 인간의 응답은 정의롭고 솔직하게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걸 잘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들은 점잖은 자리인 리더가 될 수 없다. 결국은 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결국 담임자는 법정에 나가서 재판받고 법정구속을 당하고 수감생활을 거치면서 교회는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러나 종로5가 백주년 기념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던 동대문교회는 우여곡절 끝에 분단 새론교회와 합동하여 이전하였고 담임목사 은퇴가 기정사실화 되는 멀지 않는 시기에 가면 광림교회가 인사 문제를 처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면 분당 동대문교회는 또 한번의 출애급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앞으로 숭인동에 세워진 흥인문교회와 합동한 남은자 교회는 앞으로 어떤 방향에서 선교와 목양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 문제가 이 논문의 주요핵심이다. 연전에 결성되어 정세균 의원과 서울시 삼자 간에 논의되었던 문화센터 건축 건은 삼자 간의 합의 속에 동대문교회의 당회가 합법적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울연회의 치리안에서 해소되지 못한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당회의 권한이 부여되지 못한 프로젝트는 재원 염출과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동대문교회의 복원문제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실현 불가능한 사업을 왜 집착하고 키우려 했을까 그것은 감리교 의사결정 구조상 연회는 총회의 하위에 존재하는 의회 기구인 만큼 총회 안건을 집행하는 감리교 본부 유지재단이 상위이고 동대문교회의 당회는 실질적인 재산권 집행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대부속병원은 풍부한 이화여대 역사연구 활동과 의료기관의 특성상 감리교 세계선교부로 미감리교여자해외선교부의 동의하에 재산권을 부여받아 교단과 별개로 움직이는 재단으로서 독립 단위로 서울시와 협상하고 단 시간 내에 이전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때문에 동대문교회는 앞길도 장담하지 못하는 내부 분란속에서 리더쉽이 휘말리면서 이전 문제를 속전 속결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례로 보자면 동대문교회 창립날짜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나친 면이 금방 드러난다. 감신대와 인천내리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미성숙한 창립기반을 두고 시작한 프로그램의 연원을 소급하여 창립날짜를 상향 조정하면서 고집을 부린 것인데 이러한 행태가 결국은 만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몸짓이 되어 독선이 되고 아집이된 경우이다. 창립 날자를 1890년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보자면 동대문 보구여관 시절의 병원 채플인데 굳이 교회로 보고 창립날짜를 정하려 한 것이다. 날짜 시비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이해는 무리수를 두어서 결국은 상식에 대비되는 주장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다른 보고에는 1892년 창립설도 있었으니까. 선교도 인간이 하는 것이고 성숙한 조건에서 비로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개시되는 것이 상식일진대 날짜를 고치고 손을 댄다는 것은 그만큼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닌가. 속절없는 연구자들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이 편집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았다. 지성도 의심받고 양식도 없어 보이는 그래서 결국은 재수 없는 경우가 되기 십상이 아닌가. 교단 연회록의 공식적인 날짜를 중심으로 기산하고 공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평정심이 아주 긴요하다.

 

그렇지만 명백한 사실은 동대문의 보구여관을 운영하던 미 선교부는 스크랜턴이 초대 목사라든지 벙커나 헐버트가 목사였다는 것이나 훗날 동대문교회의 역사성을 높이려는 나머지 김상옥 열사가 감리교인라 주장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동대문교회의 순박하고 성실한 삶의 내용을 무시하는듯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행정 당국자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말았다. 행정당국자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신중하고 속이 깊은 배려와 양보하는 자세를 높이 사지 그렇지 못하고 과장되고 허수로 나열하는 서류들은 그대로 용납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결국은 동대문교회는 행정소송에서 패소하였고 교회재판에 불복하여 사회법에서 목회권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불신임은 역사적인 동대문교회의 보전성을 현격 하게 떨여 뜨리고 안팍의 시련을 피하지 못하였다. 사실 벙커나 헐버트는 당시 연소한 미국 선교사들로 독립협회 운동의 깊이 간여하였는데 배재학당의 이승만과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왕권제를 거부하고 공화정으로 넘어가려는 성급한 시도로 말미암아 수구세력의 공격을 당했고 이 와중에 청년 이승만은 국법질서를 어긴 죄로 사형수가 되어 6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다행이도 수감중인 이승만은 벙커의 도움으로 감옥학교를 운영하면서 서소문의 감옥소에서 44명이나 되는 국사범들과 죄수들을 전도하여 감리교 선교의 첨병으로서 크게 성공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는 정치신학적 접근으로 민족문제에 깊히 개입하여 민중신학을 펼쳤고 선구적인 위치에서 일제침략을 좌시하지 않았다. 1907년 헐버트 선교사는 강제로 추방당하여 1948년 이승만이 정권을 수립하던 시기에 겨우 들어와서 건국훈장을 받았던 친한파요 선구자였다.

 

그러므로 동대문교회 서민목회는 이경직 전도사가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일이 있을 만큼 선교사들과 밀착된 교인들이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동대문교회는 동대문 보구여관을 통해서 구축된 의료용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인병원의 채플이 동대문교회 출발점이 된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의료인들보다는 현지 주민들이 개종하여 동대문교회를 형성하면서 1909년 동대문 병원건축이 완공될 때 정동제일교회 모양을 본딴 신식건물을 동대문 예배당으로 삼아서 흥인문과 나란히 서 있는 동대문지역 안에 감리교 선교 콤파운드를 구축하게 되었다. 병원과 매일학교(둥구여자상업학교)학교와 함께하는 교회가 세워지면서 동대문 일대의 현지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삼는 새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 동대문교회인데 대략 1909년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당연히 동대문교회는 병원 종사자들의 참석자가 많았지만 궁극적으로 동대문교회는 지역교회로서의 위상이 확립되는 시기인 1920년대에 와서 사대문 안의 감리교회는 정동제일을 필두로 종교와 상동 중앙(종로교회)과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며 그 교회들마다 각기 다른 지역적 특성을 안고서 부흥하여 오늘날의 감리교회 대표적인 교회로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1930년 조선감리회가 탄생하고 나서 급성장하던 조선감리회는 1936년 중부연회 서부연회에 이은 3번째 연회로서 동부연회를 설치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동대문교회는 경동지방을 깔고 앉아 동부연회의 모교회가 된다. 그때 동대문 흥인문 밖 전답들이 즐비한 지방에는 동대문교회가 개척한 화양리 용두동교회 청량리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그것들이 모여 전농동 답십리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경동지방회가 되고 동부연회가 묶인 것이다.

 

1888년 이화학당에 설치된 여성 전문의료기관인 보구여관이 서대문 신촌 방향에 애오개 시약소를 설치하고 동대문에도 보구여관 시약소를 설치하여 여성전용 부인과 병원을 특성화시키게 된다. 이때부터 동대문은 1957년 이화대학 부속병원으로 동대문부인병원을 승격시키고 동대문 일대의 전문의료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병원의 토지는 36백평이나 되고 웅장한 건축물을 가진 병원이 되었고 동대문교회 역시 흥인지문 성곽위에 위치한 동대문교회는 대지 786평에 건물이 들어 서 있고 벙커홀이 세워져 있었다. 2014년 교회 측은 서울시의 권유대로 1978년 봉헌하였던 동대문교회와 교육관을 허물로 철거되었으며 보상금은 교단이 대부분을 가지게 되었고 동대문교회는 자체 구입한 사회교육관과 부목사 사택 등을 매각하여 분당으로 이전하고 말았다. 이제 동대문교회 문제는 분당에서 중앙연회 경계 안에서 치리하게 되었고 오로지 남은 것은 서울연회 안에서 목회 치리가 되는 동대문교회의 선교적 정책적인 조율이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동대문교회의 내부사정에 밝은 이들의 분석으로는 동대문교회는 1960년 연회에서 파송된 오경린 감독은 사모님 손계옥 여사와 함께 된장 고추장을 퍼주면서 쌀도 팔아 주면서 키운 서민목회와 오경린 목사의 경건주의에 힘입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당시 1973년 신축한 동대문 교회당에서는 700명이 모였고 19804월에 평동교회에서 동대문 30대 담임자가 된 장기천 감독은 1000명이 넘는 집회를 자랑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의 주특기는 역시 웅변인 설교에 힘이 있었다. 중도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을 가지고 정의로운 복음주의 목회를 선보인 그는 현대 도시속의 목회는 공동체 목회가 맞다고 보고 교회 문을 개방하고 엽 합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취임 6년 만에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감독회장에 당선된 장기천목사는 대북사업에도 열심히 있어서 도문에 소학교를 짓고 평양지역을 방문하는 등 대북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여러 후임자들이 나섰지만 결국 감신 출신이 아닌 미국 테내시 미 연합감리교 목사인 서기종 목사가 선임되면서 동대문의 정체성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오경린 목사의 동네 목회에 장기천 목사의 공동체 목회구조가 안고 있는 상호충돌이 동대문교회의 신앙 노선과 내분 갈등의 신호탄이 되어 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 감리교 판은 예민한 경건주의 신앙 의식과 함께 강한 정치 의식화로 무장한 교회인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갈등은 뿌리가 깊었고 신비신앙의 소유자로 들어선 서기종 목사의 영성목회는 일대 혼란을 일으켜 놓았다. 영성적인 신앙이력을 가진 미연합감리교 목사는 동대문교회 기도방 식구들과 엘리트들이 연대하여 에큐메니칼 신앙에 반대하고 동대문교회 신앙 정신에 분열의 불을 붙였다.

 

여기에 우연치 않게 터진 담임목사의 사생활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것도 간단하게 인사 조치를 했으면 다음 목회자가 나타나서 문제를 조기 진압도 가능했었는데 교회의 주도층이 고집을 피우는 사이 교회의 공신력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신앙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하면서 내홍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리고 만다. 결국 동대문교회 문제는 내부불신의 심리상태가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들면서 이것이 감독회장을 배출했던 큰 교회라는 특성을 망각하면서 교단 내의 소장 목사들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면서 비판 세력은 세력을 확대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 내에서는 볼맨소리로 비감신 목사에 대한 질투라고 하는데 사실은 기시감이 만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질투심보다는 정의감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 맞을 것이다.

 

동대문교회는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크고 막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순히 교단 여론의 선동으로 동대문교회가 주저앉지는 않는다. 다만 목사를 여론의 꼭지점에 올려놓고 흔든 것은 사실이다. 지방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해당 목사들은 대법원에 가서 무죄가 된 것을 보면 알수 있듯이 여론전쟁이 동대문교회를 수렁에 빠지게 하한 것은 사실이다. 내적으로는 동대문교회의 주류 측이 분열의 갑으로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과민한 반응과 옹졸한 대적 의식도 빼 놓을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악화 일로를 걷게 만들었다. 교단의 감독회장을 배출한 동대문교회나 광림교회나 금란교회들이 하나같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도 다 이러한 흐름에 이탈한 교회였던 것이다. 교회는 박해받는 가운데 법정으로 자리를 옮긴 재판은 동대문교회는 이 문제로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도시 외관을 바꾸던 정책이 도심지개발과 한양도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친환경적인 도시개발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동대문 성곽지대는 재개발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 눈에 띠게 발전한 동대문 지역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서 흥인지문의 웅성을 개수하고 이어서 동대문 언덕의 건물들을 철거하는 쪽으로 나갔다. 서울 한양도성의 중심부를 장악한 백악산(북악산)의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좌 낙산 우 인왕산 남산(목멱) 등에 걸맞는 성곽복원 사업은 이러한 도도한 역사의 흐름으로 밀려 들어왔다. 결국 동대문 교회당은 신앙의 지성소를 털린채 철거당하는 수모를 피하지 못하였다. 서울시의 강압적인 개발 공세는 최초로 긍정적으로 받은 동대문교회의 담임자로 인하여 급물살을 탔고 이것이 내내 작용하는 가운데 교단도 연회도 손써볼 틈도 없이 기정 사실화하고 말았다. 두 번째 낭패를 본 이유이다. 이전이 아니면 존속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동대문교회와 교단 입장은 2014년 철거를 수용하고 협상하여 보상금을 수령하는데 이르렀다. 물론 반대 여론에 부딪친 동대문교회 자체는 철거를 위한 결단을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법원에 제소도 하였고 사생활 문제로 출교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교단 멤버쉽 의식이 약했던 동대문교회는 그때마다 사회법으로 가지고 가서 교회법 판결을 뒤집고 살아 돌아왔다. 강대강 대결로 나간 동대문 교회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토지보상금 문제같지만 내용적으로는 교단 정치권의 비주류였던 동대문교회는 유지재단과 법정 다툼도 불사하면서 대처해나갔고 결국은 재판에서 패소하여 786평 보상금 중 일부를 받은 채 소유하고 있던 부속건물들만 매각하고 이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개체교회 재산과 강단권을 지켜내야 할 교단본부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연회감독의 정치력은 을 중에 을이었다. 물론 갑은 분명 본부 유지재단이었고 동대문교회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간혹 본부가 협상을 하려 하였고 동대문교회는 그 협상에 기대를 걸지도 하였지만 행정치리는 관행에 준하였고 중재나 협상은 1도 들어가지 않는 벼랑끝 전술로 일관하였다. 특이한 상황이었다. 법 이전의 행정치리와 정책적 판단은 일체 고려되지 않았다. 직면한 문제들은 절박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권한이 있는 본부는 강경하고 대척점에 선 동대문교회는 그런 여지를 포기하면서 나갔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그렇게 하여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유지재단의 지체에서 떨어져 나갔고 교단의 연대주의를 거부한 채 갈길을 제촉 하였다.

 

여기에 동대문교회를 한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민중교회에 기반을 둔 동대문교회는 기층민중인 동대문 밖 서민 대중의 삶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현대사 최고의 분수령이었던 전태일 분신 사건의 현장이었던 창신동에서 가난한 이들의 연대하는 신앙공동체로서 동대문교회를 사람들은 잊고 있었다. 동대문교회가는 야간실업학교를 운영하면서 꿈많은 직업청소년들을 키웠고 교사들은 모두 헌신하면서 창신동 숭인동의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동대문교회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급변하는 대한민국 정치지형에서 인권과 민주화 바람도 동대문교회를 비껴지나가지 않았다. 청계천변을 바라보면서 우뚝 서 있던 동대문교회에 1991년 어느날 조용히 침묵하며 살던 김학순 성도가 일제 막바지에 여자정신대로 끌려가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고 커밍 아웃을 하면서 동대문교회는 신앙 정신에 또 하나의 연륜을 새겨 넣었고 이러한 동대문교회의 궤적은 현실변혁에 몸부림치던 동대문교회의 청년 학생들을 격동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시작된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목양 노선과 방향은 서기종 목사의 복음주의 경건주의 신비 신앙의 영향력 안에 다시 한번 주목하면서 그동안 교회를 주도하던 엘리트 교회 안에 억눌려 있던 기도꾼들이 일어나 오순절 신앙 대망론에 걸맞는 복음적 설교에 매료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내부적으로 신앙의 삼중구조를 이루고 있던 동대문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외부인의 눈에는 잘 파악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 신앙 노선의 갈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성경적 복음 신앙에 신비 신앙이 가미된 새로운 스타일의 설교와 목양은 단층 구조로 만족하던 동대문교회에 복음주의적 보수성으로 용해되었고 엘리트들의 패거리에 대항하는 보수성으로 자리를 굳혀나갔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하루 아침에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오경린 목사의 노선과 스타일이 장기천 목사의 스타일과 특성에 치여오던 관행을 깨고 동대문교회 신앙의 내면 상태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보수적 경건주의 신앙과 진보적 에큐메니칼 신앙 간의 갈등 구조가 이제 2000년대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신앙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면서 동대문교회를 뒤집어 놓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금이 간 사건이 터지고 그의 목양적 지위와 관련한 저항 세력이 장기천 목사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진행되었다고 믿는 주류교인들은 서기종 목사의 지도력을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들의 도전과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 이전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역사적인 동대문교회가 붕괴되는 것은 이런 저런 요소들이 충돌하고 갈라지면서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성곽복원과 교회 이전 문제와 맞물려가면서 모든 비판 세력들을 향한 공세적 입장에 선 동대문교회의 특이한 반응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유지재단의 재산권에 도전하여 소송을 걸었고 스크랜튼의 병원 땅과 동대문교회의 유지재단 소속의 갈림길이 서면서 동대문교회는 보상금 마져도 속시원히 받아내지 못한 채 밀려 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보면 감신대 출신목회자가 아니기에 드러나는 소극적 대응방식이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서 장로들의 대외협력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공세에 시달리고 말았다. 이 문제로 인하여 제기된 것이 바로 동대문교회 문제에서 등장하는 감리교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 문제인 것이다. 감리교 교단의 목사들은 특이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감신대 출신들의 일사 분란한 통솔력도 그중의 하나이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영향으로 지도력은 세속화되어 있다. 그것은 순진한 비감신 출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예봉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동대문교회 목회의 위기였던 셈이다.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결국 감리교 신앙의 정체성과 신학적인 과제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교단의 선교정책도 여기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특히 중랑천의 줄기를 따라 배출되는 감리교 감독회장들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동부연회 특유의 보수성이 배어 있으나 언제나 조직문화 안에서 용해되고 협력 창구를 개설하는 의지를 동대문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2000년대 동대문교회의 분쟁이 내부분열보다는 교단 여론의 향배에 따라서 강하고 약하게 반응한 배경인 것이다. 동대문교회는 다른 4대 문안의 교회들보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이고 신학적으로 경건주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동대문교회가 창신동 숭인동 주민 체질에 동화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함께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늦게 반응하는 낙후성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민중적으로 읽히지만 예언자적 비판의식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는 가족주의적 소극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대문교회의 역대 목사들을 한번 바라보면 이것을 쉽게 파악할 수있다. 1960년대 감독을 지낸 동대문교회 변홍규 목사의 구약신학 해석의 문자주의적 보수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고 재건파 감독으로 동대문교회를 담임하였던 해방 직후의 장석영 목사 역시 동대문교회 신앙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물론 1960년까지는 지적인 면이 강한 송정률 목사도 동대문교회에서 목회를하였다. 이러한 교역자 동향이 동대문교회 엘리트의식을 심어준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1974년 겨울 호헌신파의 독주에 제동을걸고 나온 감리교 갱신측 총회장 마경일 목사의 동대문 목회는 역시 감리교 자유주의 전통 안에 용해된 중도적 복음주의 신앙도 무시 못 할 요소였다. 더군다나 교계의 대표적인 신학자이고 설교자였던 청암 홍현설 학장도 동대문교회에 출석 하였는가하면 박봉배 교수와 한때는 차풍로 변선환 교수도 동대문교회 출석자였다. 이러한 감리교 신학자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안고 있었던 동대문교회의 평신도 반열에는 홍현설 학장의 수양딸 홍정수 장로와 연대 법대 교수인 박경원 장로의 수양아들 박길준 장로 가족도 있었다.

 

동대문교회의 신앙에는 이러한 엘리트 출신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기에 오순절 순복음 교회의 깊은 영향 안에 형성된 서기종 목사의 영적 이력 사항은 동대문교회의 내향적 성격을 복음적 신비 신앙안에 융합되어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공개적인 논쟁까지는 갈 일이 아니었겠지만 2000년에 취임한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를 둘러싼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노선에 대한 정체성 문제는 감리교의 신 앙정체성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고 동대문교회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분당 동대문 교회의 존재는 감리교의 통전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감리교 자유주의적 특성상 신학적 이견에 제기되고 진정 동대문교회가 취할 신앙적 스탠스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게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상황은 동대문교회의 신앙기류가 도발적이고 감독회장을 지낸 전임 목사들을 따르는 교인 간의 긴장 관계가 상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대문교회 분쟁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정도 분석에서 드러난 것만 보아도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흐름은 동대문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고 중대했으며 나가서는 동대문교회의 정체성이 감리교 안에서 용해되기에는 상당힌 시일이 걸리는 장애물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제 2014년 이후 동대문교회는 강흥복 목사의 흥인문교회와 최애도 김기종 한휘언 장로의 남은자교회로 대별 되었는데 이들은 지난 10년 세월을 흥인지문공원의 야외예배로 버티어낸 시간이었다. 끝도 모를 교회의 분열을 광야 생활하듯 고난 당한 이들은 결국은 당회를 합동해야만 교회가 살길을 찾기 때문에 두 교회는 대국적 측면에서 교회 살리기를 결단하고 역사적인 동대문 교회로 재탄생한 것이다. 축하하고 경하할 일이다. 우선은 정상적인 공교회 예배를 집전하고 맡겨진 목양에 최선을 기울여 나눔과 봉사의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동대문교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숭인동 동양빌딩 3층의 작은 교회가 속해있는 종로지방과 서울연회가 복원을 선도하는 일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감리교 교리 장정상 당회를 구성하고 선교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동대문교회 복원 내지는 재건을 위한 정책적 고려를 부탁하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본부의 정책적 행정적 지원을 받기 위한 연회의 결단을 이끌어 낸 지난 시간의 소중한 기억들이 참고가 되어야 한다. 동대문교회는 성곽복원 사업에 따라 철거되면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갈 바를 정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문제의 핵심은 지도력의 합법성이 결여한 것을 안고서 교회건축과 이전사업을 했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항하는 교인들의 정세관이 서로 달라 일관성을 결여한 채로 사태에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갈길을 정하고 다 계획이 있는 용의주도함이 결여된 동대문교회 사태는 오늘의 비대해진 감리교가 갖가지 비리와 부패무능으로 무너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교단 내의 학연으로 이어지는 주류 비주류 간의 갈등은 동대문교회를 갈갈이 찢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동대문 구역 동대문 당회의 문제에는 이러한 반대 여론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맹목적인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이다. 여명의 동산 개발 건도 그중에 하나이듯이 보상권을 너무 높이 놓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 본부 유지재단과 서울연회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고 표류하고 말았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은 허리를 매어 쓰는 것이 아니다. 적법절차에 의하여 교단의 발전과 개교회의 부흥을 기대해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지만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그러한 엉뚱한 기시감이 자리하고 있음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아무 자리라도 다 사유가 있고 내력이 깃들면서 성사되는 법인데 보상금 활용처만 구상하고 정상배들이 기웃거리는 동대문교회 복원사업은 허공에 팔을 쳐드는 꼴을 면하기 어렵지 않다.

 

이제 공방전은 끝났고 교단의 최고지도자가 결정하는 대로 동대문교회 복원과 서울연회의 선교 방향과 사업구상에 따라 동대문교회는 살아나게 되어 있다. 또한 분당 새론교회 역시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가 은퇴하는 시점이 오면 분당 광림교회로 인사권이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분당 동대문교회는 다시 한번 교회 방향에 적신호가 켜질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금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교단 차원에서 대국적으로 정세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역사적인 동대문교회를 조속히 복원하고 선고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교회 문제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이 분쟁의 원인은 고사하고 주도권을 쥐면 내놓지 않고 고집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제세를 떨기 때문에 교회 분쟁과 개싸움은 물을 뿌려도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정확하게 도는 법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는 먼저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를 헤아려가면서 사랑과 생존의 원칙에 최선을 다하여 임하다 보면 문제가 풀리고 재산 문제도 순리대로 풀어나가면 사명을 완수하는 때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때인 것이다. 시간 곧 하나님의 때가 다가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동대문교회는 복원될 것이고 글로벌 미래 시대를 대비하는 복음 전도와 사회변혁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대문교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동대문교회 문제에서 법적 정통성 문제는 차치하고 오로지 선교하는 새교회를 만들어 동대문교회의 선교 2라운드를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시기이다. 다만 동대문 언덕의 교회 재산과 영유권은 분당 동대문교회가 가져갔고 해당 연회인 중앙연회는 이를 법대로 치라하면 될 일이듯이 남은 동대문교회는 서울연회 종로지방에서 동대문교회라는 역사적인 교회를 복원하고 선교하는 교회를 건설하고 활성화하여 진짜 부흥하는 감리교회의 내일을 창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보자면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숭인동이든 창신동이든 동대문 선교영역의 장소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가 되고 인간 심령을 울리고 구원하는 성령충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동대문교회 복원 운동이 되는 것이다. 지난 2000년대 눈물과 땀과 희생으로 얽혀있던 동대문교회는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 동대문교회의 새역사를 영도하는 사명만이 남아 있다. 앞으로 기대하기는 감리교 유지재단의 본부와 서울연회간의 합력을 든든히 세우고 동대문교회 선교의 거버넌스를 회복하면 동대문교회는 역사성을 간직한 공동체 교회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지역사회를 섬기고 받드는 동대문교회가 될 것이다.

 

지금 동대문 일대는 인구가 밀집하고 있으며 삶의 질이 향상되는 개발의 열기가 가득하게 채워지고 있다. 우리는 바라기는 동대문교회의 부흥성장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발휘하면서 생명 살리는 비전과 한 영혼도 놓치지 않는 뜨거운 복음 전도의 열정이 폭발하고 역사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복음 선포는 능력받은 증인들과 성령충만한 남녀 일꾼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무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주의 이름으로 제자 삼고 역사하는 동대문교회가 되면 오늘날 기독교 대한 감리회가 직면한 침체국면을 되돌이키고 새롭게 성장 부흥하는 선교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서울연회 감독의 강고한 리더쉽과 서처목사의 리더쉽이 결합하면 다음 세대 육성과 세계선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선고정책과 전략을 마음껏 구사하면서 더욱 커질 것을 기대한다. 이제 5월이 되면 동대문교회는 복원의 발걸음을 더하면서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리더인 서철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예배가 정상화되고 선교 프로그램이 공급될 것이며 연회와 총회를 잇는 정책연대가 움직이면서 동대문교회 복원의 최종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지역사회 변혁의 복음으로 헌신 봉사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상윤 목사(감리교미래정책연구원 원장/ 전 동대문교회 부목사)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 속에서 수도 서울의 동쪽 끝을 차지하고 있던 동대문 지역 일대는 미쳐 한성에 들어오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이 답십리 전농동 일대에 흩어져 농사짓고 노동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조선왕조의 중심은 역시 북악산과 더불어 남쪽의 목멱산이 도심의 한복판을 꽉채우고 있었고 조산인 삼각산과 어울리는 백악산은 왕조의 번성을 보장하고 서쪽으로는 인왕산을 동쪽으로는 낙산을 품고 있었다. 거대 도시 서울은 개발붐에 편승하고 70년대 영동개발의 폭탄이 터지면서 구도심 개발은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동대문은 청계천 복개로 확보된 평화시장과 연계되어 한국 현대산업의 상징처럼되었던 보세산업이 발달하고 고용효과를 높이던 청계천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두산그룹의 본사로 유명한 동대문운동장 앞 지역의 번성한 모습과 유명 어퍼럴 메이커들을 다모은듯한 동대문 시장과 동평화시장과 동대문 일대를 디자인하는 동대문 운동장과 시온교회 일대의 디자인센터는 말할 것도 없다. 을지로 56가의 훈련도감 공원자리와 한때는 미군의 공병대가 와 있던 방산시장 건너편도 있지만 국민생명을 책임지는 국립의료원이 있어 인간 삶의 질을 높이려는 서울의 위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은 동숭동 언덕 이화동에서 시작하여 동대문을 거쳐 쌍림동 일대에는 러시아거리가 번창하면서 이주민들의 집단거주기 되어버린 동쪽 서울의 한축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대 환경위기를 타개하는 상징으로서 등장한 청계천 복원은 결국 한양 성곽복원이라는 서울시의 중점사업으로 번져나갔고 여파에 쓰러진 것이 동대문교회였다. 동대문은 지난 130년 동안 근대적 의료기관인이대부속병원과 감리교 동부연회의 모교회로서 동대문교회가 크게 자리하고 있이다.그러나 청계천의 복개시설을 한숨에 부수어버린 서울시는 친환경 관광자원확보라는데 꽂히면서 성과곡원에 매달렸던 것이다.

 

흥인지문의 모체가 되는 낙산은 당시만 해도 대중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가 있다는 이화동을 비롯하여 동숭동 대학로는 잘 알고 있었다. 1976년 국립 서울대학교는 관악산으로 옮겨 갔지만 청년 문화의 대명사인 동숭동 대학로는 서울대병원과 함께 문화 예술과 이주민 거주지로 각광 받으면서 낙산은 더욱 번창하고 있었다. 비록 125미터 높이의 산자락이었지만 성북동 골짜기에 경신학교와 함께 성균관대학교를 거치면서 발달 된 낙산의 기운은 혜화동의 동성학교와 한국 가톨릭의 영적 본산지인 혜화동의 소신학교 대신학교를 품에 안고 남쪽 끝자락에는 동대문감리교회당과 중앙성결교회를 존재 하게 만들었다.

 

낙산은 인왕산과 함께 좌청룡 우백호라 불리우는 곳으로 산으로서는 작지만 지세로서는 좌청룡 소릴 들을 수 있는 산지였다. 물론 훗날 서대문 현저동 구치소가 안양 청계산 밑으로 물러나면서 서대문의 안산이 무악재를 거느리고 북부 서울의 관문이 되었지만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울 4대문 가운데 적들의 내습을 기피하고 후공에 유리한 옹성을 가지고 있는 문으로 남아 있었다. 낮은 연약지반임에도 불구하고 동대문은 시장이 번창하고 노동인구가 밀집하는 지역이었다. 개발의 열풍이 불어오고 있던 시절부터 동대문 하면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바로미터였고 엄청난 크기의 시장과 노동력을 수용하는 피복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화일반에 대한 크기가 남달랐던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 역사문화박물관은 현대 서울을 이해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번영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2014년이 되어서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동대문교회가 철거당하고 동대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 하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

성장의 그늘에 가린 창신동 시다 골목을 안고 동대문성곽 오른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던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도심개발과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토목공사에 밀려서 이대병원이 그러한 것처럼 백년의 보금자리인 동대문 언덕을 박차고 사라졌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우리는 여기에서 동대문교회의 존재 이유와 함께 미래한국의 청사진에 선교 한국의 사명을 절박하게 선포하는 동대문교회의 복음의 능력을 점검하고 선교전략과 함께 비장의 무기인 성령 사역의 장래를 구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1960년대 동대문 지역이 마포에 종점이 있듯이 그저 동대문 종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종점이 아니고 구리 성남으로 열려 있는 오늘의 동대문 지역의 발전과 동묘 일대의 재개발 붐을 보지 않더라도 지금도 왕성하게 한국 섬유산업의 재가공 메카인 동대문 시장과 디자인센터가 자리하고 있는 구 동대문운동장과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과 마주하고 있는 장춘단 공원까지 이어져 있는 동대문 선교지역은 70년대 엄혹한 시절의 피복노조 설립을 위하여 분신한 감리교 갈릴리교회의 영원한 청년 전태일의 꿈이 흐르는 청계천 평화시장이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청계천 변 수로를 바라보면서 선교 동대문의 내일을 꿈꾸어 보자는 것이다. 개발의 뒷골목에서 뒤늦은 차례를 기다리는 창신동 숭인동 일대의 현실은 동대문교회의 민낯이기도 한데 문제는 겉으로는 화려한 듯 부유하지만 뒷 골목 어두운 거리에는 하청업자들의 중노동과 가난한 노동자들의 주름진 얼굴이 교차하는 동대문은 석재만 파먹고 가버린 창신동 언덕처럼 그렇게 방치되어 버림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동대문은 동묘의 길거리와 신설동의 방만함을 거느리고 있는 낯선 어디인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숭인동은 역시 낙후되어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있을 때에도 빈곤 지역인 흥인문 일대는 서대문 쪽 방면인 아현 고개(애오개)와 함께 감리교 선교부는 정동의 이화학당 옆에 운영중이던 시병원을 모체로 삼아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아현교회를 삼각축으로 보구여관 시약소를 운영하고 있어서 특히 해당 지역들에는 가난한 서민들과 부녀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살리려는 선교부의 노력으로 근대적 의료기관들이 들어와서 의료활동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가난하였고 양극화에 대책없던 이들을 복음으로 보듬고 역사하던 감리교 선교부는 헐벗고 굶주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살리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동대문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선교적 소명일터 문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는 가난한 이웃으로 삶의 질을 높여야만 영혼 구원의 안식을 이뤄야 하는 흥인문 일대의 동대문교회가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그것이 있어 가능한 선교의 목표 선교의 비전인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무슨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편히 쉬게 하는 사역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 였던 것이다. 동대문 교회 복원사업의 궁극적 과제는 이처럼 성서적 소명인 가난한 이들을 조직하고 프로그램에 이끌고 교회는 기도하고 후원하는 복음 사역을 말하자는 것 아닌가. 지금 서울연회와 종로지방이 추구하고 동대문교회가 견인하는 복음 선포의 결정적 힘은 바로 여기 동대문교회 선교와 목회 현장에 필요하는 것이다.

 

 

3.1운동 103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연회는 13개 지방회 전체가 참여하는 3.1절기념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동안 추진해 왔던 동대문 교회복원사업을 활성화 시키자는 취지와 목적으로 역사적 동대문교회 복원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 물론 장소는 흥인지문 공원이다. 서울연회 13개 지방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이번 집회는 3.1운동 기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연회적인 과제요 전체 감리교단의 과업인 동대문교회의 정상화 복원을 위한 행동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동대문교회 문제는 감리교로서는 만시지탄 아쉬움만 가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점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서울연회가 하나되는 가운데 공개 행사를 치루고 연회 전체의 의지와 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여서 선교와 정치적인 결단을 행동으로 보이자는 다짐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를 반드시 기필코 복원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새 역사를 쓰려는 결심이 돋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라는 것은 수식어가 아니고 동대문교회가 수도 서울의 동부 연회 모 교회이고 미 선교부의 전략적인 선교지역이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업이요 목표라는 것이다.

 

사실이지 그동안 동대문교회는 서울시 성곽복원사업에 연루되면서 벌어진 동대문교회 이전신축 문제는 교회 내부의 분란과 함께 증폭되어서 교단은 교단대로 속수무책이고 연회는 연회대로 치리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로 존재해왔다. 다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사적인 동대문교회 구역과 당회는 토지보상금을 놓고 교단과 재판을 벌였고 행정 치리로는 담임자 출교라는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로 나가면서 성곽복원과 교회 건물 철거를 단행하면서 교단과 보상금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분당으로 이전한 동대문교회는 보상금의 일부 만을 가지고 중앙연회 분당지방 새론교회와 합동하여 이전하였고 표면적으로는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동대문교회 주류들과 생각이 다르고 신앙의 스타일이 다른 흥인문교회와 남은자교회는 흥인지문 공원 언덕에서 십수년을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왔던것이다. 그리고 이제 서울연회가 결심한 대로 두 교회 그룹은 행정적으로 신앙적으로 합동하는데 도달하고 역사적인 동대문교회 명칭을 회복하면서 새로운 담임자를 모시게 된 것이다.

 

옛말에 아무리 바뻐도 바늘허리는 매어 못쓴다는 속담을 상기시킬 뿐이다. 동대문교회 보상 문제는 여명의 동산에서도 드러났듯이 동대문교회 주류들이 쥐고 있는 동대문 교회 당회의 권한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작지 않은 보상금 규모도 그렇게 정서적으로도 합의처리 할 사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속담처럼 동대문교회는 심하게 말해서 강건너 불구경이나 진배없었다.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수의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었지만 모두 무료봉사에 그친 것이다. 동대문교회 남은자들과 흥은문 교회로서는 유감스럽겠지만 사실이 그러니 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특히나 상대가 서울시이고 친환경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는 지자체 사업인 성격상 성곽복원사업에 협상안에는 100년이 지니고 있는 무게보다는 실질적인 교회 대지 크기인 786평에 대한 지자체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였다. 다만 혼란스러움이 극치였던 이유는 복원사업을 전후하여 취임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서 터진 담임자의 사생활 문제가 교단의 정서와 여론을 거슬리면서 충돌하였고 여기에 동대문교회 전임자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음해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면서 사건의 핵심은 빠지고 유언비어만 횡행하면서 표류하고 말았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는 말이다.

 

동대문교회의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정도로 악화된 데에는 후임 목사가 비 감신이라는 측면도 무시 못한다. 감신 출신이면 그렇게까지 되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누구에게나 있다. 여기에 지금 추진하는 동대문교회 복원사업의 숨겨진 이면이 도사리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고 추진하면 반드시 벽에 부딛친다. 그것이 이글을 쓰는 이의 요점과 핵심인 것이다. 훗날에는 진실이 밝혀지지만 지금 당장은 수습 불가능하니 뒤소 미루는 어리석은 부류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진실을 진실되이 말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공개된 복음 사역에서의 인간의 응답은 정의롭고 솔직하게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걸 잘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들은 점잖은 자리인 리더가 될 수 없다. 결국은 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결국 담임자는 법정에 나가서 재판받고 법정구속을 당하고 수감생활을 거치면서 교회는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러나 종로5가 백주년 기념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던 동대문교회는 우여곡절 끝에 분단 새론교회와 합동하여 이전하였고 담임목사 은퇴가 기정사실화 되는 멀지 않는 시기에 가면 광림교회가 인사 문제를 처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면 분당 동대문교회는 또 한번의 출애급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앞으로 숭인동에 세워진 흥인문교회와 합동한 남은자 교회는 앞으로 어떤 방향에서 선교와 목양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 문제가 이 논문의 주요핵심이다. 연전에 결성되어 정세균 의원과 서울시 삼자 간에 논의되었던 문화센터 건축 건은 삼자 간의 합의 속에 동대문교회의 당회가 합법적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울연회의 치리안에서 해소되지 못한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당회의 권한이 부여되지 못한 프로젝트는 재원 염출과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동대문교회의 복원문제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실현 불가능한 사업을 왜 집착하고 키우려 했을까 그것은 감리교 의사결정 구조상 연회는 총회의 하위에 존재하는 의회 기구인 만큼 총회 안건을 집행하는 감리교 본부 유지재단이 상위이고 동대문교회의 당회는 실질적인 재산권 집행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대부속병원은 풍부한 이화여대 역사연구 활동과 의료기관의 특성상 감리교 세계선교부로 미감리교여자해외선교부의 동의하에 재산권을 부여받아 교단과 별개로 움직이는 재단으로서 독립 단위로 서울시와 협상하고 단 시간 내에 이전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때문에 동대문교회는 앞길도 장담하지 못하는 내부 분란속에서 리더쉽이 휘말리면서 이전 문제를 속전 속결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례로 보자면 동대문교회 창립날짜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나친 면이 금방 드러난다. 감신대와 인천내리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미성숙한 창립기반을 두고 시작한 프로그램의 연원을 소급하여 창립날짜를 상향 조정하면서 고집을 부린 것인데 이러한 행태가 결국은 만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몸짓이 되어 독선이 되고 아집이된 경우이다. 창립 날자를 1890년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보자면 동대문 보구여관 시절의 병원 채플인데 굳이 교회로 보고 창립날짜를 정하려 한 것이다. 날짜 시비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이해는 무리수를 두어서 결국은 상식에 대비되는 주장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다른 보고에는 1892년 창립설도 있었으니까. 선교도 인간이 하는 것이고 성숙한 조건에서 비로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개시되는 것이 상식일진대 날짜를 고치고 손을 댄다는 것은 그만큼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닌가. 속절없는 연구자들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이 편집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았다. 지성도 의심받고 양식도 없어 보이는 그래서 결국은 재수 없는 경우가 되기 십상이 아닌가. 교단 연회록의 공식적인 날짜를 중심으로 기산하고 공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평정심이 아주 긴요하다.

 

그렇지만 명백한 사실은 동대문의 보구여관을 운영하던 미 선교부는 스크랜턴이 초대 목사라든지 벙커나 헐버트가 목사였다는 것이나 훗날 동대문교회의 역사성을 높이려는 나머지 김상옥 열사가 감리교인라 주장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동대문교회의 순박하고 성실한 삶의 내용을 무시하는듯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행정 당국자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말았다. 행정당국자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신중하고 속이 깊은 배려와 양보하는 자세를 높이 사지 그렇지 못하고 과장되고 허수로 나열하는 서류들은 그대로 용납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결국은 동대문교회는 행정소송에서 패소하였고 교회재판에 불복하여 사회법에서 목회권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불신임은 역사적인 동대문교회의 보전성을 현격 하게 떨여 뜨리고 안팍의 시련을 피하지 못하였다. 사실 벙커나 헐버트는 당시 연소한 미국 선교사들로 독립협회 운동의 깊이 간여하였는데 배재학당의 이승만과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왕권제를 거부하고 공화정으로 넘어가려는 성급한 시도로 말미암아 수구세력의 공격을 당했고 이 와중에 청년 이승만은 국법질서를 어긴 죄로 사형수가 되어 6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다행이도 수감중인 이승만은 벙커의 도움으로 감옥학교를 운영하면서 서소문의 감옥소에서 44명이나 되는 국사범들과 죄수들을 전도하여 감리교 선교의 첨병으로서 크게 성공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는 정치신학적 접근으로 민족문제에 깊히 개입하여 민중신학을 펼쳤고 선구적인 위치에서 일제침략을 좌시하지 않았다. 1907년 헐버트 선교사는 강제로 추방당하여 1948년 이승만이 정권을 수립하던 시기에 겨우 들어와서 건국훈장을 받았던 친한파요 선구자였다.

 

그러므로 동대문교회 서민목회는 이경직 전도사가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일이 있을 만큼 선교사들과 밀착된 교인들이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동대문교회는 동대문 보구여관을 통해서 구축된 의료용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인병원의 채플이 동대문교회 출발점이 된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의료인들보다는 현지 주민들이 개종하여 동대문교회를 형성하면서 1909년 동대문 병원건축이 완공될 때 정동제일교회 모양을 본딴 신식건물을 동대문 예배당으로 삼아서 흥인문과 나란히 서 있는 동대문지역 안에 감리교 선교 콤파운드를 구축하게 되었다. 병원과 매일학교(둥구여자상업학교)학교와 함께하는 교회가 세워지면서 동대문 일대의 현지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삼는 새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 동대문교회인데 대략 1909년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당연히 동대문교회는 병원 종사자들의 참석자가 많았지만 궁극적으로 동대문교회는 지역교회로서의 위상이 확립되는 시기인 1920년대에 와서 사대문 안의 감리교회는 정동제일을 필두로 종교와 상동 중앙(종로교회)과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며 그 교회들마다 각기 다른 지역적 특성을 안고서 부흥하여 오늘날의 감리교회 대표적인 교회로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1930년 조선감리회가 탄생하고 나서 급성장하던 조선감리회는 1936년 중부연회 서부연회에 이은 3번째 연회로서 동부연회를 설치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동대문교회는 경동지방을 깔고 앉아 동부연회의 모교회가 된다. 그때 동대문 흥인문 밖 전답들이 즐비한 지방에는 동대문교회가 개척한 화양리 용두동교회 청량리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그것들이 모여 전농동 답십리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경동지방회가 되고 동부연회가 묶인 것이다.

 

1888년 이화학당에 설치된 여성 전문의료기관인 보구여관이 서대문 신촌 방향에 애오개 시약소를 설치하고 동대문에도 보구여관 시약소를 설치하여 여성전용 부인과 병원을 특성화시키게 된다. 이때부터 동대문은 1957년 이화대학 부속병원으로 동대문부인병원을 승격시키고 동대문 일대의 전문의료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병원의 토지는 36백평이나 되고 웅장한 건축물을 가진 병원이 되었고 동대문교회 역시 흥인지문 성곽위에 위치한 동대문교회는 대지 786평에 건물이 들어 서 있고 벙커홀이 세워져 있었다. 2014년 교회 측은 서울시의 권유대로 1978년 봉헌하였던 동대문교회와 교육관을 허물로 철거되었으며 보상금은 교단이 대부분을 가지게 되었고 동대문교회는 자체 구입한 사회교육관과 부목사 사택 등을 매각하여 분당으로 이전하고 말았다. 이제 동대문교회 문제는 분당에서 중앙연회 경계 안에서 치리하게 되었고 오로지 남은 것은 서울연회 안에서 목회 치리가 되는 동대문교회의 선교적 정책적인 조율이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동대문교회의 내부사정에 밝은 이들의 분석으로는 동대문교회는 1960년 연회에서 파송된 오경린 감독은 사모님 손계옥 여사와 함께 된장 고추장을 퍼주면서 쌀도 팔아 주면서 키운 서민목회와 오경린 목사의 경건주의에 힘입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당시 1973년 신축한 동대문 교회당에서는 700명이 모였고 19804월에 평동교회에서 동대문 30대 담임자가 된 장기천 감독은 1000명이 넘는 집회를 자랑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의 주특기는 역시 웅변인 설교에 힘이 있었다. 중도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을 가지고 정의로운 복음주의 목회를 선보인 그는 현대 도시속의 목회는 공동체 목회가 맞다고 보고 교회 문을 개방하고 엽 합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취임 6년 만에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감독회장에 당선된 장기천목사는 대북사업에도 열심히 있어서 도문에 소학교를 짓고 평양지역을 방문하는 등 대북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여러 후임자들이 나섰지만 결국 감신 출신이 아닌 미국 테내시 미 연합감리교 목사인 서기종 목사가 선임되면서 동대문의 정체성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오경린 목사의 동네 목회에 장기천 목사의 공동체 목회구조가 안고 있는 상호충돌이 동대문교회의 신앙 노선과 내분 갈등의 신호탄이 되어 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 감리교 판은 예민한 경건주의 신앙 의식과 함께 강한 정치 의식화로 무장한 교회인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갈등은 뿌리가 깊었고 신비신앙의 소유자로 들어선 서기종 목사의 영성목회는 일대 혼란을 일으켜 놓았다. 영성적인 신앙이력을 가진 미연합감리교 목사는 동대문교회 기도방 식구들과 엘리트들이 연대하여 에큐메니칼 신앙에 반대하고 동대문교회 신앙 정신에 분열의 불을 붙였다.

 

여기에 우연치 않게 터진 담임목사의 사생활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것도 간단하게 인사 조치를 했으면 다음 목회자가 나타나서 문제를 조기 진압도 가능했었는데 교회의 주도층이 고집을 피우는 사이 교회의 공신력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신앙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하면서 내홍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리고 만다. 결국 동대문교회 문제는 내부불신의 심리상태가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들면서 이것이 감독회장을 배출했던 큰 교회라는 특성을 망각하면서 교단 내의 소장 목사들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면서 비판 세력은 세력을 확대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 내에서는 볼맨소리로 비감신 목사에 대한 질투라고 하는데 사실은 기시감이 만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질투심보다는 정의감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 맞을 것이다.

 

동대문교회는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크고 막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순히 교단 여론의 선동으로 동대문교회가 주저앉지는 않는다. 다만 목사를 여론의 꼭지점에 올려놓고 흔든 것은 사실이다. 지방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해당 목사들은 대법원에 가서 무죄가 된 것을 보면 알수 있듯이 여론전쟁이 동대문교회를 수렁에 빠지게 하한 것은 사실이다. 내적으로는 동대문교회의 주류 측이 분열의 갑으로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과민한 반응과 옹졸한 대적 의식도 빼 놓을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악화 일로를 걷게 만들었다. 교단의 감독회장을 배출한 동대문교회나 광림교회나 금란교회들이 하나같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도 다 이러한 흐름에 이탈한 교회였던 것이다. 교회는 박해받는 가운데 법정으로 자리를 옮긴 재판은 동대문교회는 이 문제로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도시 외관을 바꾸던 정책이 도심지개발과 한양도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친환경적인 도시개발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동대문 성곽지대는 재개발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 눈에 띠게 발전한 동대문 지역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서 흥인지문의 웅성을 개수하고 이어서 동대문 언덕의 건물들을 철거하는 쪽으로 나갔다. 서울 한양도성의 중심부를 장악한 백악산(북악산)의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좌 낙산 우 인왕산 남산(목멱) 등에 걸맞는 성곽복원 사업은 이러한 도도한 역사의 흐름으로 밀려 들어왔다. 결국 동대문 교회당은 신앙의 지성소를 털린채 철거당하는 수모를 피하지 못하였다. 서울시의 강압적인 개발 공세는 최초로 긍정적으로 받은 동대문교회의 담임자로 인하여 급물살을 탔고 이것이 내내 작용하는 가운데 교단도 연회도 손써볼 틈도 없이 기정 사실화하고 말았다. 두 번째 낭패를 본 이유이다. 이전이 아니면 존속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동대문교회와 교단 입장은 2014년 철거를 수용하고 협상하여 보상금을 수령하는데 이르렀다. 물론 반대 여론에 부딪친 동대문교회 자체는 철거를 위한 결단을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법원에 제소도 하였고 사생활 문제로 출교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교단 멤버쉽 의식이 약했던 동대문교회는 그때마다 사회법으로 가지고 가서 교회법 판결을 뒤집고 살아 돌아왔다. 강대강 대결로 나간 동대문 교회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토지보상금 문제같지만 내용적으로는 교단 정치권의 비주류였던 동대문교회는 유지재단과 법정 다툼도 불사하면서 대처해나갔고 결국은 재판에서 패소하여 786평 보상금 중 일부를 받은 채 소유하고 있던 부속건물들만 매각하고 이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개체교회 재산과 강단권을 지켜내야 할 교단본부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연회감독의 정치력은 을 중에 을이었다. 물론 갑은 분명 본부 유지재단이었고 동대문교회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간혹 본부가 협상을 하려 하였고 동대문교회는 그 협상에 기대를 걸지도 하였지만 행정치리는 관행에 준하였고 중재나 협상은 1도 들어가지 않는 벼랑끝 전술로 일관하였다. 특이한 상황이었다. 법 이전의 행정치리와 정책적 판단은 일체 고려되지 않았다. 직면한 문제들은 절박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권한이 있는 본부는 강경하고 대척점에 선 동대문교회는 그런 여지를 포기하면서 나갔다.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그렇게 하여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유지재단의 지체에서 떨어져 나갔고 교단의 연대주의를 거부한 채 갈길을 제촉 하였다.

 

여기에 동대문교회를 한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민중교회에 기반을 둔 동대문교회는 기층민중인 동대문 밖 서민 대중의 삶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현대사 최고의 분수령이었던 전태일 분신 사건의 현장이었던 창신동에서 가난한 이들의 연대하는 신앙공동체로서 동대문교회를 사람들은 잊고 있었다. 동대문교회가는 야간실업학교를 운영하면서 꿈많은 직업청소년들을 키웠고 교사들은 모두 헌신하면서 창신동 숭인동의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동대문교회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급변하는 대한민국 정치지형에서 인권과 민주화 바람도 동대문교회를 비껴지나가지 않았다. 청계천변을 바라보면서 우뚝 서 있던 동대문교회에 1991년 어느날 조용히 침묵하며 살던 김학순 성도가 일제 막바지에 여자정신대로 끌려가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고 커밍 아웃을 하면서 동대문교회는 신앙 정신에 또 하나의 연륜을 새겨 넣었고 이러한 동대문교회의 궤적은 현실변혁에 몸부림치던 동대문교회의 청년 학생들을 격동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시작된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목양 노선과 방향은 서기종 목사의 복음주의 경건주의 신비 신앙의 영향력 안에 다시 한번 주목하면서 그동안 교회를 주도하던 엘리트 교회 안에 억눌려 있던 기도꾼들이 일어나 오순절 신앙 대망론에 걸맞는 복음적 설교에 매료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내부적으로 신앙의 삼중구조를 이루고 있던 동대문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외부인의 눈에는 잘 파악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 신앙 노선의 갈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성경적 복음 신앙에 신비 신앙이 가미된 새로운 스타일의 설교와 목양은 단층 구조로 만족하던 동대문교회에 복음주의적 보수성으로 용해되었고 엘리트들의 패거리에 대항하는 보수성으로 자리를 굳혀나갔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하루 아침에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오경린 목사의 노선과 스타일이 장기천 목사의 스타일과 특성에 치여오던 관행을 깨고 동대문교회 신앙의 내면 상태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보수적 경건주의 신앙과 진보적 에큐메니칼 신앙 간의 갈등 구조가 이제 2000년대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신앙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면서 동대문교회를 뒤집어 놓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금이 간 사건이 터지고 그의 목양적 지위와 관련한 저항 세력이 장기천 목사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진행되었다고 믿는 주류교인들은 서기종 목사의 지도력을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들의 도전과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 이전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역사적인 동대문교회가 붕괴되는 것은 이런 저런 요소들이 충돌하고 갈라지면서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성곽복원과 교회 이전 문제와 맞물려가면서 모든 비판 세력들을 향한 공세적 입장에 선 동대문교회의 특이한 반응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유지재단의 재산권에 도전하여 소송을 걸었고 스크랜튼의 병원 땅과 동대문교회의 유지재단 소속의 갈림길이 서면서 동대문교회는 보상금 마져도 속시원히 받아내지 못한 채 밀려 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보면 감신대 출신목회자가 아니기에 드러나는 소극적 대응방식이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서 장로들의 대외협력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공세에 시달리고 말았다. 이 문제로 인하여 제기된 것이 바로 동대문교회 문제에서 등장하는 감리교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 문제인 것이다. 감리교 교단의 목사들은 특이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감신대 출신들의 일사 분란한 통솔력도 그중의 하나이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영향으로 지도력은 세속화되어 있다. 그것은 순진한 비감신 출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예봉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동대문교회 목회의 위기였던 셈이다.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결국 감리교 신앙의 정체성과 신학적인 과제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교단의 선교정책도 여기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특히 중랑천의 줄기를 따라 배출되는 감리교 감독회장들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동부연회 특유의 보수성이 배어 있으나 언제나 조직문화 안에서 용해되고 협력 창구를 개설하는 의지를 동대문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2000년대 동대문교회의 분쟁이 내부분열보다는 교단 여론의 향배에 따라서 강하고 약하게 반응한 배경인 것이다. 동대문교회는 다른 4대 문안의 교회들보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이고 신학적으로 경건주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동대문교회가 창신동 숭인동 주민 체질에 동화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함께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늦게 반응하는 낙후성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민중적으로 읽히지만 예언자적 비판의식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는 가족주의적 소극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대문교회의 역대 목사들을 한번 바라보면 이것을 쉽게 파악할 수있다. 1960년대 감독을 지낸 동대문교회 변홍규 목사의 구약신학 해석의 문자주의적 보수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고 재건파 감독으로 동대문교회를 담임하였던 해방 직후의 장석영 목사 역시 동대문교회 신앙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물론 1960년까지는 지적인 면이 강한 송정률 목사도 동대문교회에서 목회를하였다. 이러한 교역자 동향이 동대문교회 엘리트의식을 심어준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1974년 겨울 호헌신파의 독주에 제동을걸고 나온 감리교 갱신측 총회장 마경일 목사의 동대문 목회는 역시 감리교 자유주의 전통 안에 용해된 중도적 복음주의 신앙도 무시 못 할 요소였다. 더군다나 교계의 대표적인 신학자이고 설교자였던 청암 홍현설 학장도 동대문교회에 출석 하였는가하면 박봉배 교수와 한때는 차풍로 변선환 교수도 동대문교회 출석자였다. 이러한 감리교 신학자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안고 있었던 동대문교회의 평신도 반열에는 홍현설 학장의 수양딸 홍정수 장로와 연대 법대 교수인 박경원 장로의 수양아들 박길준 장로 가족도 있었다.

 

동대문교회의 신앙에는 이러한 엘리트 출신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기에 오순절 순복음 교회의 깊은 영향 안에 형성된 서기종 목사의 영적 이력 사항은 동대문교회의 내향적 성격을 복음적 신비 신앙안에 융합되어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공개적인 논쟁까지는 갈 일이 아니었겠지만 2000년에 취임한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를 둘러싼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노선에 대한 정체성 문제는 감리교의 신 앙정체성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고 동대문교회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분당 동대문 교회의 존재는 감리교의 통전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감리교 자유주의적 특성상 신학적 이견에 제기되고 진정 동대문교회가 취할 신앙적 스탠스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게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상황은 동대문교회의 신앙기류가 도발적이고 감독회장을 지낸 전임 목사들을 따르는 교인 간의 긴장 관계가 상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대문교회 분쟁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정도 분석에서 드러난 것만 보아도 동대문교회의 신앙적 흐름은 동대문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고 중대했으며 나가서는 동대문교회의 정체성이 감리교 안에서 용해되기에는 상당힌 시일이 걸리는 장애물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제 2014년 이후 동대문교회는 강흥복 목사의 흥인문교회와 최애도 김기종 한휘언 장로의 남은자교회로 대별 되었는데 이들은 지난 10년 세월을 흥인지문공원의 야외예배로 버티어낸 시간이었다. 끝도 모를 교회의 분열을 광야 생활하듯 고난 당한 이들은 결국은 당회를 합동해야만 교회가 살길을 찾기 때문에 두 교회는 대국적 측면에서 교회 살리기를 결단하고 역사적인 동대문 교회로 재탄생한 것이다. 축하하고 경하할 일이다. 우선은 정상적인 공교회 예배를 집전하고 맡겨진 목양에 최선을 기울여 나눔과 봉사의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동대문교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숭인동 동양빌딩 3층의 작은 교회가 속해있는 종로지방과 서울연회가 복원을 선도하는 일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감리교 교리 장정상 당회를 구성하고 선교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동대문교회 복원 내지는 재건을 위한 정책적 고려를 부탁하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본부의 정책적 행정적 지원을 받기 위한 연회의 결단을 이끌어 낸 지난 시간의 소중한 기억들이 참고가 되어야 한다. 동대문교회는 성곽복원 사업에 따라 철거되면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갈 바를 정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문제의 핵심은 지도력의 합법성이 결여한 것을 안고서 교회건축과 이전사업을 했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항하는 교인들의 정세관이 서로 달라 일관성을 결여한 채로 사태에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갈길을 정하고 다 계획이 있는 용의주도함이 결여된 동대문교회 사태는 오늘의 비대해진 감리교가 갖가지 비리와 부패무능으로 무너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교단 내의 학연으로 이어지는 주류 비주류 간의 갈등은 동대문교회를 갈갈이 찢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동대문 구역 동대문 당회의 문제에는 이러한 반대 여론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맹목적인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이다. 여명의 동산 개발 건도 그중에 하나이듯이 보상권을 너무 높이 놓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 본부 유지재단과 서울연회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고 표류하고 말았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은 허리를 매어 쓰는 것이 아니다. 적법절차에 의하여 교단의 발전과 개교회의 부흥을 기대해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지만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그러한 엉뚱한 기시감이 자리하고 있음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아무 자리라도 다 사유가 있고 내력이 깃들면서 성사되는 법인데 보상금 활용처만 구상하고 정상배들이 기웃거리는 동대문교회 복원사업은 허공에 팔을 쳐드는 꼴을 면하기 어렵지 않다.

 

이제 공방전은 끝났고 교단의 최고지도자가 결정하는 대로 동대문교회 복원과 서울연회의 선교 방향과 사업구상에 따라 동대문교회는 살아나게 되어 있다. 또한 분당 새론교회 역시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가 은퇴하는 시점이 오면 분당 광림교회로 인사권이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분당 동대문교회는 다시 한번 교회 방향에 적신호가 켜질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금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교단 차원에서 대국적으로 정세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역사적인 동대문교회를 조속히 복원하고 선고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교회 문제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이 분쟁의 원인은 고사하고 주도권을 쥐면 내놓지 않고 고집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제세를 떨기 때문에 교회 분쟁과 개싸움은 물을 뿌려도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정확하게 도는 법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는 먼저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를 헤아려가면서 사랑과 생존의 원칙에 최선을 다하여 임하다 보면 문제가 풀리고 재산 문제도 순리대로 풀어나가면 사명을 완수하는 때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때인 것이다. 시간 곧 하나님의 때가 다가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동대문교회는 복원될 것이고 글로벌 미래 시대를 대비하는 복음 전도와 사회변혁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대문교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동대문교회 문제에서 법적 정통성 문제는 차치하고 오로지 선교하는 새교회를 만들어 동대문교회의 선교 2라운드를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시기이다. 다만 동대문 언덕의 교회 재산과 영유권은 분당 동대문교회가 가져갔고 해당 연회인 중앙연회는 이를 법대로 치라하면 될 일이듯이 남은 동대문교회는 서울연회 종로지방에서 동대문교회라는 역사적인 교회를 복원하고 선교하는 교회를 건설하고 활성화하여 진짜 부흥하는 감리교회의 내일을 창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보자면 역사적 동대문교회는 숭인동이든 창신동이든 동대문 선교영역의 장소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가 되고 인간 심령을 울리고 구원하는 성령충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동대문교회 복원 운동이 되는 것이다. 지난 2000년대 눈물과 땀과 희생으로 얽혀있던 동대문교회는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기독교 대한 감리회 동대문교회의 새역사를 영도하는 사명만이 남아 있다. 앞으로 기대하기는 감리교 유지재단의 본부와 서울연회간의 합력을 든든히 세우고 동대문교회 선교의 거버넌스를 회복하면 동대문교회는 역사성을 간직한 공동체 교회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지역사회를 섬기고 받드는 동대문교회가 될 것이다.

 

지금 동대문 일대는 인구가 밀집하고 있으며 삶의 질이 향상되는 개발의 열기가 가득하게 채워지고 있다. 우리는 바라기는 동대문교회의 부흥성장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에서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발휘하면서 생명 살리는 비전과 한 영혼도 놓치지 않는 뜨거운 복음 전도의 열정이 폭발하고 역사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복음 선포는 능력받은 증인들과 성령충만한 남녀 일꾼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무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주의 이름으로 제자 삼고 역사하는 동대문교회가 되면 오늘날 기독교 대한 감리회가 직면한 침체국면을 되돌이키고 새롭게 성장 부흥하는 선교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서울연회 감독의 강고한 리더쉽과 서처목사의 리더쉽이 결합하면 다음 세대 육성과 세계선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선고정책과 전략을 마음껏 구사하면서 더욱 커질 것을 기대한다. 이제 5월이 되면 동대문교회는 복원의 발걸음을 더하면서 동대문교회의 새로운 리더인 서철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예배가 정상화되고 선교 프로그램이 공급될 것이며 연회와 총회를 잇는 정책연대가 움직이면서 동대문교회 복원의 최종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지역사회 변혁의 복음으로 헌신 봉사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