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둥 <2008-10-05 설교> 왕상7:15-22, 갈2:9-10
<창립120주년기념 설교>
날 짜 : 2008년 10월 5일 설 교 자 : 서 철 담임목사
제 목 : 교회의 기둥 본문말씀 : 왕상 7:15-22, 갈 2:9-10
할렐루야 오늘은 창립120주년입니다. 120이라고 하는 숫자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을 수 는 없겠지만, 그러나 120년 동안 교회가 지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큰 가치가 있습니다. 또 이 12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 상동교회는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믿음으로 잘 이기고 “생기를 불어넣는 민족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였음은 아주 큰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 식민통치 기간에는 환난과 수난이 많았지만 거기에 비례하여 사명도 크게 감당하여 한국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습니다. 이처럼 큰 시련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견뎌 냈다고 하는 것은 영적 내성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지속되는 세월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더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리라 믿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고난과 연단을 받은 후에 정금같이 나오는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11:36-37) 칼로 또는 톱으로 또는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죽어갈 때에도 교회가 믿음을 지켜왔기에 오늘 기독교는 세계를 움직여가고 있는 중심축이고, 하나의 동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기둥’과 ‘교회의 기둥’>
저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써왔던 언어 가운데 ‘기둥’이라고 하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성경에는 ‘야긴’과 ‘보아스’라고 하는 기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긴’이라고 하는 뜻은 ‘저가 세우리라’ 이고, ‘보아스’라고 하는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역대하 3:15-17) 성전의 기둥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성전의 기둥은 하나님께 능력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 튼튼한 기둥이 세워집니다. 사람이 세우면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기둥’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교회의 기둥’으로 발전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주께서 기둥 같이 쓰시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있었습니다.(갈2:9). 성전이 신약 시대에 와서 교회로 변천되면서 교회는 기둥이라고 하는 의미를 사람에게 두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보았더니 주께서 기둥과 같이 쓰시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둥은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선포했는데, 교회의 기둥은 사람에게 그 기둥이라고 하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과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계3:12)고 선포합니다. 이는 영적 승리자에게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는 종말론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된다고 하는 종말론적인 선포는 헬레니즘적 문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신전을 세울 때에 그 앞에 큰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이름을 기록하여 그 이름을 기록한 사람이 주인이라고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승리자에게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고 우리들의 이름을 기록한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 교회의 기둥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기둥들이 있어 왔습니다. 전덕기 목사님 시대에, 홍순탁 목사님 시대에, 박설봉 감독님 시대에, 이동학 목사님 시대에, 그 때 그 때 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기둥 같은 사역자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상동교회가 120년 동안 숭례문 일대에서 주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120년이 아니라 앞으로의 120년도 교회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우리 상동교회를 굳건히 지키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할 기둥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계3:12)
기둥은 하나님의 세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의 의미처럼, 우리 상동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께 능력이 있음을 선포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더더욱 하나님의 세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능력을 가지고 행하셨다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둥으로 쓰시기 위해 거룩한 사람을 세우신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드나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통해서 120년 동안 복음을 이곳에 전해왔습니다. 그것은 120년 동안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서 이 교회를 이끌어 가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120년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제는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우리 교회에 등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둥과 같이 쓰시는 사람들은 주님의 교회를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둥 같은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이사야6:8)”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사무엘상3:10-11) 예수님도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5)”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8:28-30)”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교회의 기둥>
“교회의 기둥”들은 주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 오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여러분이 상동교회의 기둥이 되기를 원하시고, 기둥과 같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신다면,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포하고 평화를 선포하고 늘 은혜를 선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빠진 축복, 십자가가 빠진 평화, 십자가가 빠진 은혜는 참 복음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복음이나 설교는 교인들의 영성을 약화시키고 헌신의 힘을 약화시켜 영적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교회의 기둥이 된다는 말은 자기를 잘 드러내고, 사회적인 성공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면면히 지켜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헌신을 말합니다. 자기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가 교회의 기둥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주님의 평안이 넘쳐납니다. 또 승리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과 세상을 넉넉하게 이긴 믿음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을 지켜가는 도중에,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결단을 요청받기도 합니다. 그 위기를 만나고 결단을 요청받는 순간마다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봐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사단의 세력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먹을 것을 찾아서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또한 틈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배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합니다.(에배소서4:27) 틈이라는 것은 대단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틈은 큰 제방 둑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작은 쥐구멍이 둑을 무너뜨립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면 우리의 믿음이 무너집니다. 우리의 영성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영적으로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여 믿음을 지켜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우리 모두 자신들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돌기둥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는 사람 기둥이 있습니다.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상동교회에는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기둥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 기둥입니까? 저는 오늘 창립주일 기념 찬양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영혼이 울리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은 묵상을 통해 나오는 숨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상동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며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성취하는 기둥들이 �이 세움 받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간절히 소망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선교사역과 전덕기 목사님의 민족교회가 웨슬리 복음주의 영성 안에서 상호 상승작용을 통해 승화되면서 선교센타의 비전을 성취하길 간구합니다.
교회에는 기둥과 같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탱하는 기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둥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기둥이라고 하는 말을 쓸 때에 자기가 교회를 떠받치는 중심인물이라는 것이 너무 강해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독선과 편견과 아집에 빠지게 되면 그는 친교의 악수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둥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교우들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너무 잘 섬겨서 독선과 편견과 아집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과 착각 속에 빠져서 자기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내놓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교회의 기둥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친교의 악수를 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서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거룩한 길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말 교회의 기둥같이 쓰임 받는 믿음의 명문가를 일으키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셔서 하나님 성전에 기둥같이 쓰임 받는 요한계시록의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