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거룩한 소명(딤후1:9) 2012-0819 주일

우순(愚巡) 2012. 8. 20. 23:02

거룩한 소명

 

<디모데후서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 행복한 주일

 

 

사랑합니다. 이 자리에 예배하러 오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안에서 행복한 주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번 한 주도 오늘 주일 예배를 시작으로, 생기가 충만한 한 주, 행복한 한 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의 신앙을 갖고 삽니다. 그래도 믿고, 그래도 기도하고, 그래도 사랑합니다.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고, 그래도 예배가 축복입니다. 그래도 말씀이 생기고 그래도 기도가 능력입니다.

 

 

세상이 만만치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이 참 많습니다. 나름대로 견해가 다양하고 평범함 사람들이 갖지 못한 예리한 시각을 갖기도 합니다. 축구선수 박주영은 기도한다고 악플이 달리고, 양궁 금메달리스트 기보배 선수는 얼굴은 에쁜데 건방지다고 악플이 달립니다. 체조선수 손연재 선수도 비난을 받습니다. 나라별로 쿼터제가 있어서 그렇지 손연재의 5위 입상은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은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말했다가 이런 저런 말에 시달렸습니다. 다른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말들도 많고 악플도 많습니다. 어떻게 그리도 악플을 잘 다는 지 깜짝 깜짝 놀랍니다.

 

 

그래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슴 벅찬 환희의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메달의 색깔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젠 성숙한 국민들은 금메달에만 연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감동을 받은 것은 메달 때문이 아닙니다. 메달보다도 오히려 메달을 따기까지 흘렸던 그 혹독한 훈련과정들 때문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몇 분 그 몇 초 동안의 시합과 연기를 위하여 흘렸던 4년간의 과정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축구선수 김기희 선수는 4분 출전에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그 선수도 그 4분을 위하여 엄청난 훈련을 했고 예선전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전선수들이 안심하고 시합을 할 수 있도록 벤치를 잘 지켜주어 우리나라 축구 사상 처음으로 3위 입상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기는 사람들은 악플에 시달리고 비난에 시달려도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면서 감동을 줍니다.

 

 

올림픽은 우리들에게 승리의 감격과 승리하기까지 훈련이 주는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많이 한 선수들일 수록, 비바람의 장애도 오심논란도 일방적인 응원도 이겨내었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메달 획득 여부와 관계없이 한 나라를 대표하여 선수로 선발되기까지 그들 모두는 엄청난 악조건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열악한 인프라, 비인기 종목의 설움, 극도의 스트레스, 안티들의 악플비난 등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승리의 열매는 훈련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고, 승리의 시작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시작합니다.

 

 

 

2. 넉넉한 승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함으로 한 주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말 예배자가 아니라 주초 예배자입니다. 주일은 주말이 아니라 주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함으로 안식을 누리고 참 평안을 얻고 새 힘을 얻어서 새로운 한 주를 생기충만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주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곧 불신앙과 절망과 싸우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넉넉히 세상을 이깁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롬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은 인간의 실상을 “곤고한 존재”라고 표현하며 탄식을 하였습니다.

 

<롬7:24~25>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믿음의 간증을 고백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

 

<롬8: 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넉넉히 이깁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넉넉히 이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고, 그래도 예배가 축복인 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저런 일도 있고 시험을 주는 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도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깁니다.

 

바울은 아주 강한 확신을 선포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롬8: 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런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저는 지난 주 수요일 서울 역 광장에서도 믿음의 힘을 보았습니다. 지난 8월 15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형제들과 함께 하는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울역 노숙인들을 섬기는 신생교회, 해돋는 마을, 한일기독의원연맹, 서부제일교회, 천안중부교회, 청파동교회,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그리고 국제사랑재단 등과 함께 특별한 광복절 예배를 섬겼습니다. 그 날 우리 교회는 성도님들의 도움을 얻어 노숙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찬조해주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서울 역 광장에 한 500여명이 모였습니다.

 

그 날 비가 엄청나게 왔습니다. 이미 한반도의 기후가 변한 것을 아시지요? 열대성 스콜과 같은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습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저는 비에 온 몸이 젖었습니다. 설교를 맡았던 저는 난감했습니다. 설교원고는 비에 젖어 잘 보이지 않는데 그나마도 바람에 날라갔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기도하며 잠시 묵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제 마음에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광복이 좋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통일이 좋다!

 

저는 강단에 올라가 이렇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미 비에 젖기도 했지만 날라가 버린 설교 원고가 없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 “ 비가 와도 광복이 좋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광복이 좋습니다. 홍수가 나도 광복이 좋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고 어려워도 일제강점기 보다는 좋습니다. 우리 선열들은 이런 비바람보다 더 혹독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총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으면서도 광복을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감사합시다. 아무리 비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비가 와도 광복이 좋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광복이 좋습니다. 비가 와도 통일이 좋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통일이 좋습니다.

 

광복이, 이 땅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자유와 해방이었듯이, 북녘 땅에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진정한 광복 곧 통일이 오도록 기도합시다. 광복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곧 자유와 해방의 사회를 이루는 예선이고 통일은 결선입니다. 마지막 결선에서 승리해야 금메달을 땁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광복에서 통일로 가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복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지가 실현된 나라가 진정한 광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잠언 31장 8절로 9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잠언 31: 8~9>“8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말 못하는 자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어야 합니다. 사법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법부의 바른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라! 그리고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는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정한 광복은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지 못하게 하는 모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이루는 것입니다. 통일이 그것입니다. 복지가 그것입니다. 약자를 대변해주는 사회, 약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광복을 이루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광복이 남쪽에서만이 아니라 북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통일입니다. 복지는 그 광복과 통일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나라가 광복의 나라요 통일의 나라입니다. ]

 

그 날 저는 그 폭우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의 마음에서 깊은 신앙심을 보았습니다. 시민들의 애국심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가 광복절 행사가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시간이 아니라면, 그 폭우에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심과 애국심이 한 데 어우러진 감동의 자리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감동을 만들어 냅니다. 일부러 만드는 쇼맨십이 아니고 깊은 신앙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역사는 비바람이 불어도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봄에는 104년의 가뭄이라며 그리도 애타게 비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그 비는 단비였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오면서 퍼부은 열대 스콜식의 국지성 호우는 이젠 그치기를 바라는 궂은비입니다. 그리도 기다리던 단비가 이제는 지긋지긋한 궂은비가 됐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변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은 단비든 궂은비든 개의치 않고 삽니다. 세상 살다보면 단비가 궂은비가 되기도 합니다. 궂은비가 단비가 되기도 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바람이 불어도 환란과 역경이 다가와도 묵묵히 미래를 향하여 전진해 갑니다. 그게 감동입니다. 하물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다시 묵상하십시다.

 

<롬8: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감동을 주시는 한 주를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참 안 좋은 일도 있고, 우울한 이야기도 많지만, 감동을 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심히 아름답다고 감탄하셨습니다.

 

<창 1: 27~31>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중략....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사람이 있어 세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워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제게 중국 사람이 써준 글을 들려주셨습니다. “60대는 해마다 달라 연연이 다르고, 70대는 달마다 달라 월월이 다르고, 80대는 때마다 달라 시시가 다르다.” 세월이 빠르다는 거겠지요. 어디 어른들 뿐이겠습니까? 젊은 사람들도 어 하는 사이에 자신의 시간을 다 날려 보냅니다. 정말 어 하는 사이에 부질없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다 뺏긴 채 자신의 시간을 날려 보냅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가치한 5%의 일에 95%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95%의 일에는 단지 5%의 열정과 에너지만을 쏟아 붓는답니다. 다 그렇겠습니까? 또 심리학자의 분석이 꼭 맞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가치 있는 95%의 인생을 위하여서는 5%의 열정과 에너지만 쏟아 붓고, 무가치한 5%의 일을 위하여서는 95%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면 이는 분명 잘 못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은, 분명 가치 있는 95%의 일에 자신의 100%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동행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알았습니다. 서울 가정법원 김귀옥 판사의 이야기입니다. 김귀옥 판사는 지난 4월초에 법정에 선 한 소녀에게 명 판결을 내렸습니다. 법률적 용어로는 ‘불처분 판결’인데, 김귀옥 부장판사는 소녀에게 “일어나서 힘차게 외쳐라!”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일어나서 힘차게 외친 말의 핵심은 동행선언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말에 열 네 번이나 절도 및 폭행을 일삼은 소녀가 눈물을 쏟았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법정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제가 좀 더 자세하게 그 날의 재판 과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4월 초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법정에서,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양(16)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무거운 보호 처분을 예상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나자 김 부장판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자, 날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김 부장판사는 "내 말을 크게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큰 목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 어머니도 함께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 실무관· 법정 경위들의 눈시울도 빨개졌습니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不)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A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습니다. A양은 당시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습니다. 피해자임에도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에서 겉돌았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습니까?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눈시울이 붉어진 김 부장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 자신이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法臺)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

이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지만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화제가 되면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펑펑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법정 관계자들의 눈시울도 빨개졌습니다. 법정에서 울음을 터뜨린 소녀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보호 감호라는 법적인 처분보다 자존감을 살려주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일어나서 힘차게 외쳐라!" 정말 아름다운 명판결입니다.

 

A 양에게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들의 자존감을 수도 없이 무너뜨립니다. 우리들의 참 모습을 파괴해버립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왜곡시키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때론 처절하게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외롭게 만들고, 우리들을 고독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자존감을 신앙 안에서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함으로 자존감을 회복시켜줍니다.

 

A양을 울린 말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 어머니도 함께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 실무관· 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빨개졌습니다. 재판을 맡았던 김귀옥 부장판사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법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법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법을 넘어선 인간의 사랑입니다. 외로운 사람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동행이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동행! 함께 해주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왜 생명을 누립니까? 바로 이 동행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람의 동행이나 사람의 위로도 사람을 살리는 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롬8: 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감리교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의 가장 위대한 고백은 바로 이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웨슬리는 죽으면서 “내 생에 가장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 것이 가장 행복했다! 성도 여러분! 한 주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4. 거룩한 소명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늘 동행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거룩한 소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십니다. 교회란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 밖으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소명을 위하여 불러내신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읽어 봅니다.

 

<디모데후서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최종작품이나 완성으로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위하여 선택하시는 중간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맡기신 것입니다. 구원도, 소명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15:16>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는 열매를 맺게 하고, 또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예수님의 선택에도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선택에 우리의 자존감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어 거룩한 소명을 이루게 하심에 우리의 자존감이 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사 열매를 맺게 하심에 우리의 자존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다니고,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소명이란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목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자존감을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 나는 너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 너는 네 자신을 존귀히 여겨라!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2)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3)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소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의 취미나 기호가 우선입니다.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은 생계나 사회의 억압 때문에 억지로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따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거룩한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거룩한 소명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사명,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 목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장로 권사의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너무 계급화 된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소명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다양한 직업을 통하여, 다양한 사람을 통하여, 다양한 일거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직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5.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은혜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은혜대로 부르셨습니다.

 

<디모데후서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근거가 못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 때문에 자기부정에 천착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만한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할 만한 행위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은혜대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소명을 가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해도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 선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일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는 야구팀의 김경문 감독이 끝까지 이승엽 선수를 믿고 기용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다 정하신 일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불렀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대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반대로 너무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여 괴로울 때도 ,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여 자기를 버리고 싶을 때에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서 외쳐야 합니다. “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주도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자존감을 회복하십시오! 우리가 가난합니까? 우리가 배우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시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은혜대로 부르시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 곳곳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